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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잔티움과 이슬람의 史 원문보기 글쓴이: 퀼라비아노스
요안네스 1세(Ioannes I)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로마노스 2세 황제(Romanos II)의 두 어린 아들들이 대권 후보가 될 것은 명백했다. 한 명은 18세의 바실레이오스(Basileios)였고 다른 한 명은 그보다 2세 아래인 콘스탄티노스(Konstantinos)였다. 이 두 형제는 서로가 달라도 그렇게 다를 수가 없었다. 콘스탄티노스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반면, 바실레이오스는 빠른 두뇌 회전과 지칠 줄 모르는 체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는 현군으로 유명한 레온 6세(Leon VI) 황제처럼 지적인 황제와는 거리가 멀었고 학문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또한 레온 6세 황제는 화려한 옷과 웅장한 의식으로 권력의 위엄을 강조했으나, 바실레이오스는 국가 행사를 최소한으로 축소시키고 황제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옷을 입고 다녔다. 외모상으로도 그는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거의 닮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승마 실력을 지녔으므로 일단 말에 올라 타면 자신의 본 모습을 보였다. 바실레이오스가 부친과 달랐던 또 한 가지는 로마노스 2세는 여색을 밝혔지만 바실레이오스는 특이할 만큼 금욕적으로 살았다는 점이다. 먹는 것은 물론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제국의 역대 황제들 가운데 그가 유일하게 결혼하지 않은 황제였다.
제위에 오른 순간부터 그는 단순히 황제로 군림하는 것만이 아니라 직접 제국을 통치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마침 동생은 황제의 책무에서 벗어난 것을 고마워 할 따름이었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의 행보에는 2가지 장애물들이 있었다.
첫째는 그의 외종조부이자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시종장 바실레이오스였다(여기서 복잡한 촌수를 쉽게 요약해 보자. 시종장 바실레이오스는 로마노스 1세 황제의 서자이자 콘스탄티노스 7세 황제의 처남이다. 또 콘스탄티노스 7세는 로마노스 2세 황제의 부친이고 로마노스 2세는 현 황제 바실레이오스 2세 황제의 아버지다. 따라서 황제 바실레이오스 2세에게 시종장 바실레이오스는 할아버지의 처남이자 아버지의 외삼촌이므로 한국식 항렬로 치면 작은 외조부가 된다. 로마노스 1세에 의해 어릴 때 거세당했던 시종장은 콘스탄티노스 7세가 집권한 이후에 레카페노스 가문이 숙청되는 가운데서도 살아 남았고, 환관 브링가스를 물리쳐 니케포로스 포카스가 제위에 오르는 것도 도왔으며, 요안네스 치미스케스의 쿠데타에도 협조하면서 여러 대에 걸쳐 용케 살아 남은 인물이다. 역시 최고 권력자보다는 2인자의 수명이 더 길다고 해야 할까?). 이 레카페노스의 서자는 황제에 이어 제국의 2인자라는 높은 자리에 오른 지 벌써 30년이 지났으니 어린 황제에게 고분고분 자신의 권력을 내 줄 리는 없었다.
둘째 장애물은 제위의 성격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고대 로마 황제들은 군대의 추대에 의해 제위에 올랐으므로 비록 제위의 세습은 일반적으로 인정됐으나 그래도 법적인 승인을 받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60년에 걸쳐 3명의 장군들이 연달아 제위를 차지했으니(로마노스 1세, 니케포로스 2세, 요안네스 1세) 아무래도 제위의 세습에 관한 관념이 희박해질 수 밖에 없다. 특히 아나톨리아의 군인 귀족들이 보기에는 더 그랬다. 그들에게 황제관이란 전쟁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장군의 몫이 되는 게 당연하지, 그저 황실의 혈통만 타고났다고 해서 차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치세 초반기인 9년 동안 바실레이오스 2세 황제는 무늬만 황제였을 뿐, 실은 막강한 시종장에게 권력을 상당 부분 내 줘야 했으며, 제위에 오른 지 13년째 되는 시기까지도 제위를 찬탈하려는 2명의 장군들과 계속해서 싸워야만 했다. 그 장군들이란 바로 동부군의 총사령관 바르다스 스클레로스(Bardas Skleros), 그리고 니케포로스 1세 황제의 조카로서 이미 1차례의 반란에 실패한 뒤(971년 요안네스 1세에게 반기를 들어 키오스 섬에 유배) 또 다시 반란을 꿈꾸고 있는 바르다스 포카스(Bardas Phocas)였다.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은 바르다스 스클레로스였다. 처남인 치미스케스가 죽은 뒤 채 한두 달도 지나지 않아 그는 자기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됐다. 이어 977년 가을, 그는 2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남부 함대의 지지를 확보하게 됐다. 몇 달 뒤 그는 니카이아를 점령하고 이윽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륙 양면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바다에서의 전투는 아주 간단하게 끝났다. 황제에 충성하는 함대는 반란군 함대를 손쉽게 제압했던 것이다. 하지만 뭍에서의 상황은 심각했다. 만약 시종장이 군대 지휘권을 바르다스 포카스에게 위임하는 깜짝 조치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내전은 한참 더 지속되었을 지도 모른다. 사실 포카스는 충성심에서 스클레로스와 다를 바 없었을 뿐더러 키오스 섬으로 추방되어 있는 몸이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간직한 대권을 꿈을 이루려면 그는 먼저 라이벌인 스클레로스를 상대해야 했다.
그에 따라 바르다스 포카스는 수도복을 벗어 던지고 황제에게 충성의 서약를 한 다음 동부군 도메스티코스로 임명되어 자신의 근거지였던 카파도키아로 가서 어렵지 않게 포카스 가의 친척과 친구를 대상으로 군사를 불러 모았다. 내전은 거의 3년 동안이나 지속됐다. 979년 봄, 마지막 전투에서 바르다스 포카스는 전세가 불리해짐을 깨닫고 스클레로스에게 단독으로 붙자고 제안했다. 스클레로스는 용감하게도 그 제안에 응했다. 이렇게 해서 마치 <일리아드>의 한 장면처럼 1 대 1 전투가 시작됐다. 얼마 되지 않아 스클레로스가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병사 몇 명이 의식을 잃은 그를 가까운 시냇가로 데려 가 상처를 씻어 주는 동안 나머지 병사들은 달아나 버렸다.
그렇게 전쟁이 끝나 일단은 고비를 넘겼지만 아직도 황제의 권력은 불안정했다. 2명의 라이벌들이 여전히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클레로스는 부상에서 회복된 뒤 바그다드의 사라센 측으로 가서 몸을 의탁했고, 입김이 더욱 세어진 포카스는 다시 제위를 노리는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황제는 절실히 필요로 했던 휴식 기간을 얻었으므로 그 기간 동안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계획할 수 있게 됐다. 가장 급선무는 육군, 해군, 교회, 기타 제국의 각 부문들이 돌아가는 원리를 직접 체득하는 일이었다. 이윽고 985년에 그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이제 걸림돌은 외종조부인 시종장 뿐이었다. 사실 처음에 시종장은 황제를 충심으로 대했다. 다만 그의 잘못은 황제를 너무 어린이 취급했다는 것이었다. 낙심한 황제는 결국 그를 제거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고, 다행히 그럴 조건은 충분히 성숙해 있었다. 시종장은 부정부패로 이미 악명이 높았던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그가 바르다스 포카스와 은밀히 내통했다는 사실도 발각됐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제국 최고의 권력자가 체포되어 추방당했으며 그의 전 재산이 몰수당했다는 소식이 제국 전역을 뒤흔들었다. 마침내 황제는 자기 집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1년도 채 못 가서 그의 제국은 다시 새로운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불가리아 제국의 황제라고 자칭하는 사무엘(Samuel)이 테살리아를 침공한 것이다. 그의 출신에 관해서는 지금까지도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부친인 니콜라오스는 키예프 공작 스뱌토슬라프가 침입해 왔을 무렵, 불가리아 서부 총독을 지냈던 인물로 추정되는데, 그가 죽은 뒤에 그 직함만 빼고 그의 세력은 네 아들들에게 넘어 갔다. 요한 1세 황제가 서거한 뒤 곧 그들은 자연스럽게 봉기를 일으켰으며, 그 봉기는 전면적인 독립 전쟁으로 발전했다. 그 소식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전해졌을 즈음 불가리아 국왕 보리스가 동맹 로마노스와 함께 도망쳐 반란군에 합류하려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보리스는 국경 부근에서 부하의 손에 의해 피살됐다. 로마노스는 환관이었으므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따라서 반란군의 지휘권은 니콜라오스의 아들들에게 그대로 있었는데, 형제들 중에서도 막내이자 가장 유능했던 사무엘이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스클레로스의 반란을 틈타 사무엘은 손 쉽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얼마 뒤 그는 스스로 황제라 자칭하면서 불가리아를 막강한 국가로 재탄생시켰다. 그는 오흐리드를 중심지로 삼아 차츰 자신의 왕홀 아래에 테살로니카를 제외한 마케도니아 전역, 도나우 강과 발칸 산맥 사이의 옛 불가리아 영토인 테살리아, 에피로스를 장악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 디라키온을 포함하는 알바니아 일부와 라스키아 및 디오클레이아까지 다스리게 됐다. 비잔티움 제국이 오래 전에 폐지시킨 불가리아 총대주교좌는 사무엘의 보호 아래에서 부활을 자축했다. 총대주교좌는 불가리아의 수도 오흐리드에 자리잡았다. 새로운 제국은 국가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시메온, 페타르 제국의 후계자였다. 그러나 실제로 살펴 볼 때 그의 마케도니아 제국은 예전의 불가리아 제국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었고, 구성과 성격상 새로 설립된 고유한 구성체였다. 이 새로운 제국의 무게 중심은 서쪽과 남쪽으로 이동했으며, 옛 불가리아 주변 지역인 마케도니아가 나라의 중심을 이루었다.
사무엘의 팽창 충동은 처음에는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980년부터 매년 여름, 불가리아는 테살리아를 한두 차례씩 침공하더니 986년에는 드디어 테살리아의 주요 도시인 라리사를 점령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실레이오스 2세 황제는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사르디카로 향했다. 그는 목적지를 바로 눈 앞에 두고 후위 부대를 기다렸는데, 이것은 큰 실수였다. 그 기회를 이용하여 사무엘은 주변 산악 지대를 모조리 장악했던 것이다. 9월 17일 화요일, '트라야누스의 문'이라고 불리는 협곡을 통과하던 제국군은 사무엘이 준비해 둔 매복에 된통 걸려 들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현장에서 죽임을 당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황제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던 바실레이오스 2세는 크나큰 수치와 더불어 분노를 느꼈다. 황도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불가리아인 모두에게 복수를 하겠노라고 엄숙하게 맹세했다. 나중에 보겠지만 그는 그 맹세를 지나칠 정도로 아주 철저히 지키게 된다.
패전 소식을 들른 바그다드의 바르다스는 제국이 마침내 자기 손에 들어 왔다고 좋아했다. 그는 칼리프에게서 병력과 보급품을 얻고 소아시아로 돌아 와 다시금 황제를 사칭했다. 그렇잖아도 아나톨리아의 귀족들은 이따금씩 반란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제국군의 골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들이 지휘하지 않은 제국군이 트라야누스의 문에서 패한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들 중에서 황제가 나왔어야 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황제가 누구여야 할까? 스클레로스는 귀족들이 자신보다는 바르다스 포카스를 황제 후보로 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분위기에 힘 입어 987년 8월 15일, 포카스도 자신이 황제라고 공식 선언하고 나섰다. 2명의 자칭 황제들이 나온 것이다. 포카스는 자기 세력이 스클레로스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렇다고 감히 스클레로스를 뒷전에 앉히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제국을 둘러 나누어 자신이 유럽 지역을 맡고 스클레로스가 마르마라 해에서 동부 변방까지 아나톨리아 전역을 맡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스클레로스는 그 제안을 받아 들였는데, 알고 보니 그 제안은 함정이었다. 그는 곧 체포되어 16년 전, 자신이 포카스를 가두었던 바로 그 요새에 2년 간 감금된 것이다. 그러는 동안 그의 라이벌은 최종 목표인 제위에 도전했다. 마르마라 해에 이르렀을 때 그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절반을 서쪽 헬레스폰토스의 아비도스로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크리소폴리스에 주둔시켰다. 그 두 방면에서 황도를 공략할 계획이었다.
황제는 냉정을 잃지 않았다. 그는 결사적으로 외세의 도움을 구했는데, 그에 응한 것은 단 한 사람, 바로 스뱌토슬라프 대공의 아들인 현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 1세(Vladimir I)였다. 포카스가 오기 전에 대사들은 이미 출발해 있었다. 대사들이 돌아 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자기 아버지와 요한 1세 황제가 서로 약속한 것을 실천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6000면의 중무장한 바랑인 부대를 최대한 빨리 보내는 대신 황제의 누이인 포르피로게니타(Porphyrogenita; 태어나면서부터 황녀라는 뜻) 안나 공주(Anna)를 자신의 아내로 달라고 요구했다.
키예프 대공의 요구가 비잔티움 궁정에 가져 온 충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황녀인 여인이 야만인(외국인)에게 시집 간 전례는 전혀 없었던 데다가 키예프 대공은 단순한 야만인이 아니라 이교도(heathen)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공은 자기 동생을 살해한 자였고 최소한 4명의 아내들과 800명의 후궁들을 거느리고 있는 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가는 곳마다 현지의 처녀나 유부녀를 건드리고 다니는 호색한이었다. 그나마 단 한 가지 장점이 있다면, 그는 자기 자신과 백성들을 위해 괜찮은 종교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미 이슬람교, 유대교, 로마 가톨릭교 등을 두루 검토해 봤지만 그 중 어느 것에서도 깊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당시 키예프 대공은 다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아마 이슬람교, 유대교처럼 엄격한 유일신 종교는 싫었을 것이다. 같은 유일신 종교라 해도 그리스도교는 그것들에 비해 나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남은 카드는 로마 가톨릭교와 동방 정교인데, 여기서 어느 것을 택할 지는 뻔하다. 비록 그 자신은 바이킹의 후예였지만, 아직도 러시아에는 슬라브족이 다수였다. 따라서 동방 정교가 그에게 한층 안정적인 집권을 보장해 줄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물론 그 선택에는 예식과 의식이 더 엄격하고 화려한 동방 교회가 자신의 위광을 더해 주리라는 믿음도 있었겠지만).
그러던 차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온 키예프 대공국의 대사들은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그들을 영접하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의식에 매료되어 자신들의 주군에게 여기가 이승인지 천국인지 모르겠더라고 보고한 것이다. 그러므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선 키예프 대공이 곧 자신의 이교 신들을 버리고 좋지 못한 행실을 고칠 지도 모른다고 추측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키예프 대공이 정교회 신앙을 받아 들인다면 그 결혼을 허락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응답을 기다렸다. 불가리아 국왕 페타르는 레카페노스 가 여성으로 만족해야 했고, 독일의 오토 2세는 찬탈자인 치미스케스의 친척으로 만족해야 했었다. 그런데 이제 신생국인 키예프 대공에게 처음으로 정통 황실 공주와 혼인하는 유례 없는 영예가 베풀어 졌다. 그러한 결합은 제국의 전통 및 자의식에 너무나도 어긋나는 것이어서 제국인들은 위험이 극복되자, 약속을 철회하고 싶어 했을 정도였다.
꼬박 1년 동안 기다리면서 제국의 해군은 바르다스 포카스가 유럽 쪽으로 넘어 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끊임 없이 감시했다. 마침내 988년 12월 하순, 흑해의 순시선은 북쪽 수평선에서 바이킹의 대함대가 다가 오는 것을 발견했다. 989년 초, 함대 전체가 골든 혼에 무사히 도착하고 6천 명의 건장한 병사들이 배에서 내렸다. 몆 주일 뒤 황제는 그 노르만(스칸디나비아인) 병사들을 이끌고 어둠을 틈타 해협을 건너서 반란군 진영에서 불과 수백 m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동이 트자마자 그들은 공격에 들어갔으며, 때를 같이 하여 해군은 해안 지대에 헬라스의 불을 뿜어 댔다. 갑작스런 기습으로 얼떨결에 잠에서 깨어난 포카스의 병사들은 무기력했다. 공격 측은 검과 도끼를 가차없이 휘둘러 사방을 온통 피로 물들였다. 생존자들은 거의 없었다. 황제의 손에 넘겨 진 바르다스 휘하 3명의 지휘관들은 각각 목이 매달리고, 말뚝에 박히고, 십자가형을 당했다.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예비 병력과 함께 있던 바르다스 포카스는 재빨리 아비도스 외곽의 나머지 부대와 합류해서 곧바로 도시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아비도스는 결사적으로 항전했고, 해협에 있는 제국 해군 때문에 완전 봉쇄도 불가능해서 반란군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 동안 황제는 구원군을 편성하여 989년 3월에 발진시켰는데, 예상 외로 그 지휘관은 그의 동생이자 공동 황제인 콘스탄티노스였다. 덕분에 생애 처음으로 그는 야전군을 지휘하게 됐다. 바실레이오스 2세 자신은 며칠 뒤에 출발하여 람프사코스 부근에 상륙한 다음 거구의 바이킹 병사들을 거느리고 곧장 아비도스로 향했다.
이튿날 아침, 양 측은 아비도스 부근의 탁 트인 평원에서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4월 13일 토요일 새벽, 황제는 공격 명령을 내렸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대열이 흐트러지면서 많은 수가 현장에서 죽고 상당 수는 달아 났다. 포카스는 천신만고 끝에 살아 남은 병사들을 다시 규합할 수 있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때 그는 평원 맞은편에서 말을 타고 노르만 병사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바실레이오스 2세와 콘스탄티노스를 봤다고 한다. 그 순간 그는 지난 번 바르다스 스클레로스와 싸웠을 때 어떻게 패배를 승리로 역전시켰던가를 생각했다.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말을 내달리더니 양 측 군이 말 없이 지켜 보든 가운데 황제군의 진영으로 가서 검을 들고 곧장 황제에게 갔다. 황제는 오른손으로 검을 움켜 쥐고 왼손에는 기적을 일으켜 주리라고 믿는 성모 이콘을 든 채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 오던 포카스는 잠시 멈칫거리는 듯 했다. 그리고는 현기증을 느끼는 듯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고 천천히 말에서 내려 땅바닥에 눕더니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황제가 군사들을 대동하고 다가가 보니 포카스는 이미 갑작스런 졸도로 죽은 뒤였다. 겁에 질린 그의 군사들을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으나, 노르만 병사들이 추격하여 아이들이 장난하듯이 모두 죽여 버렸다.
이제 비잔티움의 제위를 노리는 자는 바르다스 스클레로스 혼자만 남게 됐다. 그가 2년 간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간수를 맡은 것은 다름아닌 포카스의 아내였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 곧 그를 풀어 주어 새로 군사를 모으게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스클레로스는 너무 늙었고 이젠 시력마저 나빠지고 있었으며, 게다가 바실레이오스 2세는 믿기 어려울 만큼 그에게 관대한 조건을 제의했다. 스클레로스는 당연히 그것을 받아 들였다. 이리하여 비티니아의 황제의 별궁에서 젊은 황제와 늙은 장군은 13년 만에 처음으로 얼굴을 대면하게 되었다. 황제는 장군의 자문을 구하면서 대화의 문을 열었다. 앞으로 '힘이 센 자'의 반란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좋겠느냐는 것이 그가 던진 질문이었다. 스클레로스는 늘 그들을 엄히 다루고, 세금을 최대한 올리고, 재정적으로 탄압하고, 심지어 일부러 부당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렇게 하면 서로들 제 앞가림만 하느라 정신이 없어져 개인적 야망을 품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바실레이오스 2세는 그 충고를 평생동안 명심했다.
2년 간 중요한 사건들이 잇달아 터졌던 탓에 황제는 키예프 대공에게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천천히 고려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것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 989년, 블라디미르 1세 대공은 갑자기 흑해 연안에 남은 제국 최후의 거점인 케르손을 점령하고, 황제가 계속 약속을 잊는다면 콘스탄티노폴리스마저 같은 운명이 될 것이라고 통보했다. 스클레로스가 여전히 건재하고 사무엘이 불가리아를 공고히 다지고 있는 상황에서 황제는 키예프 대공국의 지원을 마다하는 위험을 자초하고 싶지는 않았다. 6000명의 바랑인 병사들은 아직 황도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군주에게서 명령 한 마디만 떨어지면 즉각 태도를 바꾸어 적대적으로 나올 터였다. 따라서 약속을 지키는 것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안나 공주는 눈물을 흘리며 마지못해 배를 타고 키예프 대공이 기다리고 있는 케르손으로 갔다. 그 곳에서 그녀와 대공은 결혼식을 올렸고, 신랑이 선물을 준다는 전통으로 케르손은 다시 그녀의 오빠에게 반환되었다.
결혼식 직전에 키예프 대공은 현지 주교에게서 세례를 받았는데, 그것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종교 의식이었다. 성 블라디미르 1세의 개종은 그리스도교, 특히 동방 정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후 키예프 대공국은 13세기에 몽골 제국에 의해 정복당하는 것을 계기로 쇠락하기 시작하고, 몽골이 물러가고 나서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러시아 지역의 패자로 부상하게 된다. 그런데 이미 키예프가 정교회권이 되어 있었기에 모스크바가 자연스레 정교회를 받아 들일 수 있었다. 15세기에 제국이 이교도들에 의해 멸망하자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가 제국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면서 모스크바 교회도 비잔티움 정교회의 뒤를 이어 러시아 정교회가 되었다. 이로써 러시아 정교회는 동방 정교회의 최고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이 때부터 러시아인들은 모스크바를 '제 3의 로마'라는 영예로운 별명으로 부르게 된다.
블라디미르 1세의 개종은 러시아가 그리스도교권으로 편입되는 계기를 이루었다. 결혼식을 올린 뒤 부부는 케르손의 성직자를 대동하고 키예프로 가서 곧바로 백성들을 대량 개종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새로 생긴 러시아 교회는 처음부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 소속이 되었다. 한편 가엾은 안나는 그래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새로운 생활에 그럭저럭 잘 적응했던 듯 하다. 정교회 신자가 된 뒤 그녀의 남편은 사람이 달라졌다. 그 때부터 그는 애인들을 멀리 하고 개종 사업을 직접 관장했으며, 세례에서 대부로 나서는가 하면 가는 곳마다 교회와 수도원을 지었다. 유부남 성인들은 대개 좋은 남편이 되지 못했다는 점은 감안하면 성 블라디미르 1세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괴물과의 동침을 예상하고 있었던 안나로서는 필경 큰 안도감을 느꼈으리라.
989년, 바실레이오스 2세 황제는 재위 29년째를 맞고 있었다(정식 황제가 된 해는 976년이지만 황실의 관례에 따라 2세 때인 960년에 아버지로부터 동생과 함께 공동 황제로 임명됐기 때문이다. 어린 아들들을 공동 황제로 삼는 것은 아시아로 치면 황태자 책봉에 해당되는데, 아시아의 황태자는 치세로 치지 않지만 비잔티움에는 황태자라는 게 없고 공동 황제였으므로 치세에 포함시킨다).
그 기간 중 16년 동안은 실권이 없었고 9년 동안은 꼭두각시로 지냈으며, 마지막 4년 동안에는 재앙만 거듭되다가 결국에는 키예프 공국과 굴욕적인 정략 결혼까지 맺기에 이르렀다. 989년 한 해만 해도 불운은 끊이지 않았다. 포카스와 스클레로스의 반란이 있었고, 케르손도 잃었으며, 안티오케이아에서도 대규모 폭동이 터졌다. 게다가 10월 25일에는 지진이 일어나 황도에서만도 40여 개의 성당들이 피해를 입었다.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도 돔 지붕이 갈라지고 측면의 반원형 건물이 내려 앉았다. 그러나 그 해 말에는 976년, 요한 1세가 죽은 이래 처음으로 제국 전역에 평화가 찾아 왔다. 마침내 번영의 문턱에 들어서게 된 황제는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칠 작업에 몰두했다. 그것은 바로 불가리아 말살이었다.
991년 초 봄, 그는 테살로니키로 떠났다. 이후 4년 동안 그는 한 번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황제 자신이 직접 조련한 새 군대는 1월의 눈 밫에도 8월의 폭염에도 아랑곳 없이 황제와 함께 수많은 도시들을 수복했다. 몇몇 도시들에는 군대를 주둔시켰으나 불태워 진 불운한 도시들도 있었다. 대규모 전투도 없었고 큰 승리도 없었다. 황제는 완벽한 조직력만이 성공을 가져 올 수 있다고 믿고, 군대를 마치 한 사람의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지휘했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그는 1명도 대오를 흩뜨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영웅적인 행위는 오히려 현장에서 징계를 받았다. 병사들은 황제의 끊임 없는 감독에 불평했지만, 그가 승리를 확신하지 않는 작전은 전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황제를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사태는 나아질 게 틀림 없었으나 그 속도는 느렸다. 그랬으니 995년 초, 황제가 시리아로 병력을 급파하고서도 얻은 성과가 별로 없었던 것은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사무엘도 역시 신중하게 처신했다. 그는 홈 그라운드라는 커다란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조만간 황제는 돌아갈 테고 그 다음에는 사무엘의 차례가 될 터였다. 그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때를 기다렸다.
하지만 황제는 천천히 움직이다가도 놀라운 스피드를 보이곤 했다. 995년, 폭풍처럼 몰아친 시리아 원정이 그러했다. 그 원정은 비잔티움 보호령으로 되어 있는 알레포의 이슬람 총독이 요청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가 관할하고 있는 안티오키아가 파티마 왕조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전갈이었다. 바실레이오스 2세는 그런 비상 시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 믿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급히 황도로 돌아 온 그는 예비군까지 포함하여 가능한 한 최대한 병력을 모아 약 4만 명의 군대를 편성했다. 하지만 그 병력을 시리아까지 수송하는 데는 어려움이 컸고, 결국 그들이 도착했을 무렵엔 안티오케이아와 알레포는 모두 적의 손에 넘어 갔다. 이 사태에 대한 황제의 해결책은 제국 역사상 유례없는 것이었다. 전 군을 기병으로 만든 것이다. 그는 모든 병사들에게 노새를 2마리씩 지급하여 1마리는 타고 다른 1마리에는 보급품을 싣게 했다. 995년 4월 말, 그는 알레포 성벽 바로 밑에 1만 7000명의 부대를 집결시켰는데 걸린 기간은 불과 16일이었다. 당시 알레포는 이미 적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었다. 1주일만 더 늦었더라도 함락당했을 테고, 뒤이어 시리아 북부도 마찬가지 운명이 될 터였다. 바실레이오스 2세는 알레포를 그 위기에서 구해 냈다. 불시에 기습을 받은 데다 수적으로도 모자랐던 파티마군은 다마스쿠스로 달아 났다.
며칠 뒤 황제는 남쪽으로 말 머리를 돌려 에메사를 유린하고 멀리 트리폴리까지 진출한 다음 황도로 돌아 갔다. 귀환 길에 그는 길 주변의 농촌들을 살펴 볼 여유도 생겼다. 어릴 때 이후 아시아에 와 보기는 처음이었던 그는 법적으로 제국령이거나 현지 촌락 사회의 소유여야 할 토지를 일명 '힘 센 자들'이 몽땅 차지하고 있는 것에 크게 놀랐다. 그런 판에 그 귀족들 중 일부가 황제를 정중히 맞이한답시고 온갖 사치를 과시하자 황제는 그만 진노하고 말았다. 결국 996년 1월 1일에 모든 영토 소유 관계를 60여 년 전인 로마노스 1세 시대로 소급한다는 칙령이 떨어졌다. 그 이후에 취득한 토지는 즉각 이전 소유주에게 완전 무상으로 반환해야만 했다. 황실령 -그 중에는 황제가 직접 승인한 것도 있었다- 까지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시종장 바실레이오스가 승인한 토지 거래의 경우, 황제가 특별히 추인한 것 이외에는 모두 자동적으로 무효가 됐다. 아나톨리아의 귀족들에게 그 조치는 치명타였다. 포카스 가문은 사실상 모든 영지들을 잃었고, 상당 수의 명망 있는 가문들이 졸지에 알거지가 되거나 주변의 농민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몰락했다. 그러나 농민들과 토착 소지주들 -이들은 수백 년 간 제국군의 중추를 이뤄 왔다- 에게는 이제 조상들의 토지를 되찾을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
황제는 곧장 불가리아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아나톨리아에서 심각한 불만이 터져 나올 것이므로 콘스탄티노플에 머물러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가 황도에 4개월째 머물고 있을 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3세가 대사를 보내 왔다. 그는 비잔티움 출신의 신부감을 원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바실레이오스 2세의 세 조카 딸들인 에우도키아, 조에, 테오도라 중 아무나 한 명을 보내 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일찍이 오토 2세 황제와 결혼한 테오파노 공주도 서방에 비잔티움 문화를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오토 2세는 신부의 지참금조로 이탈리아의 비잔티움 영토를 요구하는 바람에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981년, 아풀리아에 진출한 그는 그 곳을 점령하고 있던 사라센인들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렸는데, 사라센군은 비잔티움 제국 측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신성 로마 제국군을 칼라브리아의 스틸로 인근까지 밀어 붙였다. 오토 2세는 이 수치를 평생 잊지 못하고 이듬 해 로마에서 28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그와 테오파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오토 3세는 아버지에게서는 야망을, 어머니에게서는 낭만적 신비주의를 물려 받았다. 그 결합의 결과로 그는 게르만의 모든 민족들과 헬라스, 이탈리아, 슬라브까지 아우르는 비잔티움식 신정(神政)을 꿈꾸었으며, 신을 정점으로 하고 자신과 교황의 서열로 신의 대리인을 맡아 지배하는 국가를 이상으로 생각했다.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토대로 두 황제들 간의 결혼 동맹보다 더 나은 게 어디 있을까? 이 미묘한 사명을 위해 오토 3세는 피아첸차 대주교인 요한 필라가투스를 대사로 임명했다. 그는 칼라브리아 출신의 헬라스인인 데다 어머니의 친구이자 시종이었었다.
한편 바실레이오스 2세로서도 이탈리아 남부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혼맥을 구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수단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필라가투스 대주교가 로마로 돌아갈 때 비잔티움 사절단을 동행시켜 오토 3세와 세부적인 협상을 진행시키도록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들이 도착했을 무렵 오토 3세는 이미 로마를 떠나 있었다. 그 결과는 그들에게도 불행하고 불쾌했지만 피아첸차 대주교에게는 거의 재난이었다. 이 사태는 너무 복잡해서 상세히 설명하기 어렵다. 여기서는 오토 3세가 부재 중에 로마 최대 가문 출신의 귀족장인 크레센티우스가 바실레이오스 2세의 사절단을 사로잡아 감옥에 집어 넣었다는 사실만 알고 넘어가자. 그의 목적은 오토 3세의 정략 결혼을 망쳐 버리는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 오토 3세의 사촌으로 그가 직접 임명한 새 교황 그레고리오 5세는 파비아로 달아났으며, 크레센티우스는 그 자리에 바로 다름아닌 피아첸차 대주교를 임명한다.
황제의 가장 믿을 만한 측근인 그가 왜 그런 협잡에 넘어 갔는 지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그는 비록 대립 교황(대립 교황의 역사는 교황이 탄생하던 무렵부터 있었다. 교황은 당연히 이 세상에서 오직 단 1명 뿐이지만, 아무래도 현실 정치 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2명이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정통 교황 이외의 교황을 대립 교황이라 부른다)이라 해도 교황좌에 오를 수 있다는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게 된다. 그 해 말에 오토 3세는 2번째로 이탈리아 반도로 진군하여 파비아에 있는 교황 그레고리오 5세를 데리고 로마까지 왔다. 크레센티오스는 피신해 있던 성천사 성에서 공개 참수형을 당했다. 또 요한 필라가투스를 체포한 병사들은 그의 귀, 코, 손을 자른 다음 눈알을 뽑고 혀를 잘랐다. 그 후 열린 재판에서 그는 처형을 면하고 1013년까지 목숨을 부지했다. 바실레이오스 2세에게 이런 사태의 전개는 당연히 환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헬라스인이 교황좌에 앉는 것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조카로 거느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절단은 거의 2년이나 감금된 뒤에야 겨우 풀려 났으나, 이제 친 헬라스적 선향이 시들어 버린 오토 3세는 그들을 만나 주지 않았다.
바실레이오스 2세에게는 새로운 걱정 거리가 생겼다. 지난 3년 간 불가리아의 세력이 엄청나게 팽창한 것이다. 불가리아는 아드리아 해의 중요 항구인 디라키온을 점령한 뒤 달마티아의 오지를 관통하여 보스니아까지 이르는 기나 긴 행군을 시작했다. 그에 따라 아드리아 해에 면한 비잔티움의 영토는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면 그 곳은 시리아보다 가까운 거리지만 산악 지대인 데다 길도 낯설고 주민들도 우호적이 아니었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한 가지 해결책 밖에 없었다. 베네치아가 비잔티움 주권 하에 보호령으로 있으면서 달마티아 해안 지대 전체를 관장하면 어떨까? 마침 베네치아 총독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에게 그 지역은 귀중한 곡물 공급지이자 선박 건조용 목재 공급처였다. 게다가 그 곳을 차지하면 베네치아 상인들을 괴롭히는 크로아티아 해적들을 상대하기도 훨씬 편할 터였다. 1000년, 그리스도 승천 축일에 베네치아 총독은 새로 달마티아 공작이라는 작위까지 받고 대함대를 출동, 새로운 신민들의 충성 서약을 받으러 갔다. 불가리아는 보스니아의 요새들을 계속 장악하고 있겠지만 이제 해안의 헬라스어권 도시들은 안전해질 것이었다.
1001년, 오토 3세는 다시 결심을 굳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신부감을 보내 달라는 2번째 사절단을 보냈다. 책임자는 밀라노 대주교 아르눌프였는데, 그는 서방 세계 최고의 멋쟁이 성직자로 유명한 자답게 호사스러운 주교복에다 발굽을 금, 은으로 장식한 말을 타고 황도에 들어섰다. 황제는 까다롭게 굴지 않았다. 결혼이 빨리 매듭지어지면 질수록 그 만큼 빨리 불가리아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 조카 딸들 중 2명은 외모가 별로였으나 둘째인 조에는 23세의 아리따운 여자였다. 대주교도 만족한 기색을 보였고 그녀 역시 마다하지 않았으므로 1002년 1월, 포르피로게니타이자 황후에 어울리는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조에는 새 보금자리를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일은 순조롭지 않았다. 바리 시에 도착했을 때 비극적인 소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약혼자가 갑자기 열병으로 쓰러져 1월 24일, 22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것이다.
1000년부터 1004년까지 바실레이오스 2세는 다시 원정을 계속하기 위해 다시 발칸 지역에 나타났을 때, 비로소 불가리아에 대한 비잔티움의 대반격이 시작했다. 처음에 제국은 사르디카 지역을 침공해 인근 요새들을 점령했다. 이로써 사무엘은 도나우 강변의 옛 불가리아 국가들과 단절됐다. 그 다음 제국은 마케도니아로 향하여 베로이아를 굴복시키고, 세르비아(나라명이 아닌 마케도니아의 도시명)를 공략했다. 이로써 제국은 헬라스 북부로 가는 통로를 획득했다. 빠른 속도로 테살리아에 비잔티움의 지배가 수립됐고, 다시 격전 끝에 강력한 방어 도시인 보데나를 점령했다. 그런 다음 도나우 강변의 중요한 요새인 비단을 8달 동안 포위 공격을 강행한 끝에 점령하였다. 그런 다음, 제국군은 비단에서 빠른 행군으로 남쪽으로 진격했다. 스코피예에서 멀지 않은 바르다르 강변에서 비잔티움군은 불가리아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서 스코피예가 황제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비잔티움이 한편으로는 스코피예를, 다른 한편으로는 보데나를 점령함으로써 불가리아의 핵심 지역은 집게에 물린 꼴이 됐다. 4년 동안 두 나라 간에 쉴 새 없이 전투가 이어졌고, 비잔티움은 승리에 승리를 거듭했다. 그러는 사이에 불가리아는 영토의 절반을 상실해 사실상 비잔티움이 발칸 반도 동부 전역을 수복했다. 이제 불가리아는 거친 황야를 그 자신만큼이나 빠르게 진군할 수 있는 적을 맞게 되었으므로 매복이나 기습 공격도 사용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 적은 강풍이 몰아치는 궂은 날씨에도 끄덕하지 않았다.
그 후 10년 동안 제국군은 계속 전진했으나 안타깝게도 그 과정에 관해서는 전해 지는 기록이 거의 없다. 1014년에서야 비로소 안개가 걷히면서 이 전쟁의 결과를 추측 이상으로 비교적 확실히 알 수 있게 해 주는 전투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전투의 무대는 세라에에서 스트루마 강 상류까지 뻗어 있는 킴발롱구스 협곡이다. 기습에 놀란 불가리아군이 당황해 달아나는 것으로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사로잡힌 포로들의 수는 약 1만 5천 명이었다. 바실레이오스 2세가 후대에 길이 남을 잔인한 처벌을 가한 것도 이 때다. 포로 100명당 99명의 눈을 실명시킨 것이다. 나머지 1명에게는 1개의 눈만 남겨 놓아 동료들을 데리고 그들의 왕에게 갈 수 있도록 했다. 10월 초에 그 무시무시한 행렬이 프레스파에 있는 사무엘의 궁전으로 향했다. 당시 중병이었던 사무엘은 한때 웅장했던 대군이 이렇게 끔찍하게 전락한 것을 보고 심한 발작을 일으켜 이틀 뒤에 죽고 만다.
불가리아는 사무엘의 사후 그보다 몇년 밖에 더 연명하지 못했다. 내부 혼란이 정복자를 도와 주었다. 사무엘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가브리엘 라도미르(Gabriel Radomir)는 사촌인 요안 블라디슬라프에게 살해됐다. 사무엘의 아내 뿐만 아니라 매부인 디오클레이아의 요안 블라디미르도 가브리엘과 운명을 함께 했다. 불가리아의 국토는 1018년 2월, 디라키온 전투에서 요안 블라디슬라프가 전사함으로써 투쟁에 종지부가 찍힐 때까지 체계적으로 굴복해 갔다. 바실레이오스 2세는 위풍당당히 불가리아의 수도 오흐리드에 공식 입성해 불가리아 군주의 미망인을 비롯하여 불가리아 왕족들에게서 충성의 맹세를 받아 냈다. 황제는 32년에 걸쳐 마침내 자신의 과업을 이루어 낸 것이다. 슬라브인이 남하한 이래 처음으로 발칸 반도 전역이 비잔티움 제국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된 순간이었다. 바실레이오스 2세는 자신에게 굴복한 땅을 횡당하며 도처에 자신의 지배를 수립한 후, 아테네를 방문했다. 승리에 빛나는 황제는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바뀐 파르테논 신전에서 경건한 감사 예배를 드렸는데, 이는 위대한 승리를 맞아 분출된 고양된 감정이 인상적으로 표현되는 장면이었다. 천 년의 전통을 딛고 서 있는 비잔티움 제국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했다. 불가리아는 대담무쌍했지만 비잔티움의 전술, 즉 제국의 군대 조직과 기술적인 수단에는 맞설 수가 없었다.
전쟁에서 바실레이오스 2세는 무자비한 악마였으나 -그는 불가록토노스(Bulgaroctonos), 즉 불가리아인 학살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평화가 찾아 오면서부터는 온건하고 사려 깊은 황제가 되었다. 불가리아인들도 이제 그의 신민들이었으므로 그 만한 배려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우선 세금을 낮춰 주고 금이 아닌 다른 것으로 내는 것도 허용했다(세금 제도에서도 서양식 제국과 동양식 제국은 차이가 크다. 고대 페니키아 상인들이 지중해를 누비던 때부터 화폐를 사용한 서양에선 돈, 즉 금으로 납부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동양의 경우엔 주나라 시대부터 화폐가 있었으니 연혁에서는 서양에 뒤지 않지만, 실제 사용도에선 큰 차이가 있었다. 그 이유는 물론 체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무역과 국제적 거래가 성행했던 서양의 경우엔 자연히 화폐 중심의 경제가 발달하게 된 반면, 강력한 중앙 집권적 제국 체제에다가 농업 국가였던 동양의 경우엔 화폐보다는 농작물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게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동양에서 세금을 화폐로 내게 된 것은 15세기 중반 명나라가 관리들의 봉급을 은으로 주면서부터다. 이렇게 해서 은납제가 시행됐으나 당시엔 농민들에게 이중적 부담을 안겼다. 농민들은 오히려 곡식을 팔아 은을 구해서 세금을 내야 했던 것이다). 불가리아 총대주교구는 대주교구로 격하됐으나 불가리아 정교회는 황제가 대주교를 임명하게 된 것만 빼고는 자율성을 유지했다. 서부의 일부 지역들 -특히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은 제국의 종구권 하에서 계속 토착 군주들이 지배할 수 있게 되었고, 불가리아 귀족들은 제국의 사회적 위계 속으로 통합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고위 공직도 맡았으며, 그렇지 못한 나머지 귀족들도 별다른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한편 동부에서는 1023년, 황제의 마지막 원정에 있은 뒤 최소한 8군데의 새 테마들이 건설되어 안티오키아로부터 북동쪽으로 거대한 부채꼴 수비망을 이루었다. 황제는 이제 아드리아 해에서 아제르바이잔까지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는 권력자가 되었다. 그의 힘은 아직도 넘쳐 흘렀다. 그러던 그가 시칠리아 침공을 준비하던 중 1025년, 크리스마스를 열흘 앞두고 갑자기 서거하고 만다.
바실레이오스 2세는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는 손쉽게 국가와 교회를 장악한 데다 총사령관으로서의 전략적 구도와 훈련 조교로서의 세심함이 결합된 특유의 능력으로 제국 역사상 위대한 장군의 반열에도 올랐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황제로서 당연히 받기 마련인 주변의 관심을 제외하면 그는 거의 매력을 발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전투에서조차 번개같은 기습이나 천둥같은 위력이 없었다. 그가 이끄는 제국군은 용암처럼 서서히 흘러 태산처럼 밀어 붙이는 식이었다. 과거에 트라야누스의 문에서 겪은 치욕 -이 패전을 결코 잊지 못했던 그는 불가리아 전쟁 자체를 그 복수전으로 삼았다 - 이후로 그는 거의 모험을 하려 들지 않았으며 병력 손실도 거의 겪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병사들의 신뢰는 받았어도 사랑은 받지 못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대 비잔티움 황제들 중 그처럼 고독한 황제는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위대한 제국을 자기 손으로 건설하는 것 뿐이었다. 그의 치세에 제국이 전성기를 맞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는 한 가지 면에서 실패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식을 낳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록 그가 이성을 대하는 태도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진정으로 그가 제국을 사랑했더라면 제국을 위해서 억지로라도 결혼해 자식을 낳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후사 없이 서거함으로써 사실상 제국의 쇠퇴를 부른 셈이 되었다.
그는 12월 15일에 서거하였다. 그리고 그 이튿날인 16일부터 제국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13세기의 한 저술가는 제국의 가장 중요한 황제들로서 헤라클레이오스와 바실레이오스 2세를 꼽았다. 이 두 사람의 이름들은 실제로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이름들로, 제국의 영웅 시대를 재현했다. 한 명은 그 시대를 열었고, 또 한 명은 그 시대를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