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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고통스러운 절규는
그의 예술에 신비롭고 정의 하기 힘든 시를 선사한다."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
"그는 모든 인생을 피아노에 바쳤고,
피아니스트들은 그를 피아노의 절대신이라고 생각한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Arthur Rubinstein, 1887-1982)
✺ KBS1 <예썰의 전당> [26회] 피아노의 시인 - 쇼팽. 2022년 11월 13일 방송 다시보기
https://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22-0078&program_id=PS-2022164258-01-000&broadcast_complete_yn=&local_station_code=00§ion_code=05
✵ '예썰의 전당' 스물여섯 번째 주제는 반평생 이방인으로 살아간 ‘피아노의 시인’ 쇼팽. 아름답고 섬세한 선율로 사랑받아온 음악가 쇼팽. 그의 선율 속엔 우리가 몰랐던 쇼팽의 결핍이 담겨있다는데. 지금, 이방인 쇼팽의 삶과 음악을 만나보자.
● 쇼팽(Chopin)의 에튀드(Étude: 이별의 노래)
쇼팽(Chopin, 1810-1849)은 총 27곡의 에튀드(Étude)를 작곡했다. 쇼팽 에튀드는 피아노의 교과서로 불리는 곡들로, 피아노를 전공하는 학생, 전공자, 피아니스트들에게 필수적인 코스다. 즉 피아노 전공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쇼팽이 작곡한 에튀드는 모두 3개의 묶음으로 나뉜다. Op.10의 12곡, Op.25의 12곡, 3개의 작은 에튀드로 총 27개의 곡이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이별의 곡(別れの曲)', 유럽에서는 '슬픔' (Tristesse)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곡. 이 연습곡은 중음 레가토를 위한 연습곡이다. 다성부의 곡을 어떻게 아티큘레이션하고 각 성부를 어떻게 레가토 처리하는 지에 대해 배우게 되는 곡이다.
◇ 쇼팽 에튀드 Op. 10 No.3(1832년, 연주자: 발렌티나 이고쉬나)
https://youtu.be/C_ruE-VIHjo
✵ 예썰 하나, 제자의 연주를 듣던 쇼팽이 “오, 조국이여”라고 탄식한 사연은? 스무 살, 쇼팽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펼치고자 고국 폴란드를 떠나 19세기 문화·예술의 중심지 파리로 향했다. 그리고 서른아홉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는 폴란드로 돌아가지 못했다. 쇼팽의 곡 ‘이별의 노래’엔 쇼팽이 폴란드를 떠나올 때의 애틋한 심정이 담겨 있다는데. 제자가 연주하는 ‘이별의 노래’를 듣던 쇼팽이 “오, 조국이여”라고 탄식했다는 ‘썰’도 전해 온다. 쇼팽은 왜 그리운 조국 폴란드로 돌아가지 못한 채 반평생 이방인으로 살아간 걸까?
모차르트 / 오페라 <돈 조반니> 중 ‘우리 손을 맞잡고(La Ci Darem La Mano)’
● https://youtu.be/bIsMUYnFz_k
✵ 예썰 둘, 파리에서의 성공으로도 채워지지 않던 쇼팽의 결핍은? 쇼팽의 파리행은 성공적이었다. 쇼팽은 사교계의 중심, 로스차일드 가문의 피아노 교사가 되어 안정된 생활을 했으며, 피아니스트로서도 사랑과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파리에서의 성공도 쇼팽의 결핍을 채우지 못했다는데. 쇼팽의 가장 쓰라린 결핍은 고국의 비극에서 비롯되었다. 쇼팽이 활동하던 19세기 초, 폴란드는 주변 강대국들에게 주권을 빼앗긴 상황이었다. 고향에 돌아가지도, 고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지도 못한 쇼팽은 “나의 존재가 대체 무슨 쓸모가 있지?”라며 좌절 섞인 일기를 남기기도 했다는데. 쇼팽은 어떻게 낙담을 넘어, 분노와 절망을 음악으로 승화시켰을까?
멘델스존은 쇼팽을 평소에 고독한 척하며 지니치게 낭만적이라고 비판했지만 "현재 활동하는 피아니스트 중 최고는 쇼팽"이라고 극찬을 하며 인정했다고 한다.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던 피아노는
쇼팽의 등장으로
다채로운 화음을 만들어 냈다”
-헝가리 출신의 리스트가 쇼팽 사후, 쇼팽의 전기 中에
"그의 음악은 그의 꿈을 보듯
그의 울음을 듣듯,
그가 정감과 우수를 담아 부르는
노래를 듣듯 들어야 한다.
지극하고 애틋한 감정을 표현하는
피아니스트 중의 피아니스트이다."
-1841년 뮤지컬 잡지 〈라 프랑스 뮤지컬〉에 실린 쇼팽의 연주평
“교회기 파괴되고 불탔다.
친구들도 전장의 참호속에
죽었을지도 몰라...
하느님, 존재하시나요?“
당신은 거기 계시면서도 벌을 주지 않으시는 군요.
얼마나 더 많은 러시아인들이 죄를 짓기 원하시나요?
아니면
당신도 러시아인인가요?
“때때로 난 겨우 신음하고
고통받고 내 절망을
피아노에 쏟아부를 뿐이야
나의 존재가
대체 무슨 쓸모가 있지?“
-쇼팽의 일기 中
✵ 예썰 셋, 나라 잃은 폴란드 국민들에게 쇼팽은 곧 자긍심 이었다! 쇼팽은 자신의 무력함에 괴로워했던 이방인이었지만, 세계무대에서 인정받는 그의 존재는 당시 폴란드 국민들에게 있어 자긍심 그 자체였다. 19세기 폴란드 국민들이 쇼팽을 보는 심정은 마치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국민들이 금메달을 목에 건 손기정 선수를 보는 심정과도 같았다는데. 마냥 ‘다정하고 따뜻한’ 곡을 만든 음악가가 아닌, 음악으로 폴란드의 역사와 함께 호흡했던 이방인 쇼팽을 만나보자.
● 쇼팽은 총 27곡의 에튀드(Etude)를 작곡했다. 쇼팽 에튀드는 피아노의 교과서로 불리는 곡들로, 피아노를 전공하는 학생, 전공자, 피아니스트들에게 필수적인 코스다. 즉 피아노 전공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쇼팽이 작곡한 에튀드는 모두 3개의 묶음으로 나뉜다. Op.10의 12곡, Op.25의 12곡, 3개의 작은 에튀드로 총 27개의 곡이다.
쇼팽은 자신의 에튀드(Etude)에 부제를 붙인 적이 없다. 오늘날 서양권에서 전해지는 별명들(Waterfall, Chromatique, Tristesse, Torrent, Black Keys, Winter Wind 등)이나 한국에서 2000년대 이후 출처는 알 수 없으나 일반인들에게 널리 통용되는 부제들(승리, 발레리나, 이별의 곡, 추격, 마법사, 햇빛, 꿀벌, 나비, 대양 등)은 모두 쇼팽 본인이 지은 것이 아니라, 대부분 평론가 혹은 호사가들에 의해 '이러이러한 느낌이 든다'라고 평가된 데에서 기인한 것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 중 Op.10 No.12의 별명 혁명(Revolutionary) 같은 경우 오래 전부터 보편적으로 쓰여온 별명이고, 별명들 중에서도 매우 자주 사용되는 편이나 역시 쇼팽이 직접 붙이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그 곡을 작곡한 시기에 폴란드 혁명에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했을 뿐, 사실상 아무런 근거도 없는건 다른 별명들과 다를 것이 없다. 이렇듯 높은 대중적 인지도에 비해 당위성이 심히 낮은 별명이라서, 쇼팽 에튀드 각 곡을 부제로 부르는 쪽을 클래식 저관여층, 오푸스 넘버로 부르는 쪽을 고관여층이라고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 폴로네이즈(Polonaise In A Flat Major, Op.53 (영웅)는 '폴란드의'라는 뜻을 가진 폴로네이즈는 4분의 3박자의 폴란드 민속 춤곡이다. 이는 일정하게 등장하는 리드미컬한 박자 위에서 단순한 선율을 노래하는 것이 특징인 장르로, 쇼팽은 고국인 폴란드의 안타까운 운명에 대한 슬픔과 애국심을 담아 폴로네이즈를 예술 작품의 영역으로 크게 발전시켰다. 리스트는 쇼팽의 폴로네즈에 대해 "쇼팽의 폴로네즈를 들으면 운명이 가져다주는 온갖 부정한 것에 용감하고 대담하게 대항하는 확고한 발자국 소리를 듣는 것 같다"라며 극찬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쇼팽 콩쿨 우승자 조성진의 Polonaise In A Flat Major, Op.53 (영웅)
https://youtu.be/d3IKMiv8AHw
●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1849)의 마주르카 Op.68(Mazurka Op.68), 1855년, 피아노 곡은 네 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처음 세 곡은 쇼팽이 17~20세 무렵(1827~1830년)의 작품으로 생각되면, 네 번째 곡은 1849년 타계 직전에 쓰여진 것이다.
● 녹턴(Nocturn: 夜想曲), 작곡: 프레데릭 프랑수아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1849)은 전 생애를 통해 op.9(1~3),15(4~6),27(7~8),32(9~10),37(11~12),48(13~14),55(15~16),62(17~18)과 작품번호가 없는 세 곡으로 총 21곡이다. 18번까지는 생전에 출판이 완료된 곡이고 19번부터 21번까지는 쇼팽 사후에 출판되었다.쇼팽의 녹턴은 다양성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내용면에서 열정을 내포하고 있다.
쇼팽의 녹턴 중 ‘op.9 no.2’는 대중들에게 흔히 알려진 곡 중 하나로 가장 유명한 곡이다. A-A-B-A-B-A-C형식으로 이루어져있다. 가볍고 부드러운 1주제와 2주제가 교차되며 음악이 진행된다. 후반부로 진행될수록 감정이 약간 격해진다. 이후 마치 트릴같은 꾸밈음을 통해 코다가 시작되고 고요하게 마무리된다.
◦ op.9 no.2 in E-flat major
https://youtu.be/QR10Od1cLaM
❁ 프레데리크 쇼팽(Frédéric Chopin, 1810-1849)
쇼팽은 그의 모든 인생을 피아노에 바쳤고, 우리 피아니스트들은 그를 피아노의 절대, 절대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 어떤, 그 어느 작곡가보다도 훨씬 더 피아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쇼팽은 가장 위대하다. 피아노 하나만으로도 그는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 클로드 드뷔시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폴란드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독립운동가.[9] 쇼팽은 낭만주의 피아노 역사상 프란츠 리스트와 함께 최고의 업적을 이룩한 작곡가이다. 폴란드인이 자부심을 갖고 존경하는 폴란드 최고의 위인 중 한 명이기도 하다. 폴란드의 관문 바르샤바의 공항 이름도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이다.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1927년 만들어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도 피아노 분야 최고 위상의 콩쿠르로 명망을 떨치고 있다.
◦ 생애 초기 활동
프레데리크 쇼팽은 1810년 3월 1일에 프랑스인 아버지 니콜라 쇼팽(Nicolas Chopin)과 폴란드 귀족의 딸이었던 어머니 테클라 유스티나 크시자노프스카(Tekla Justyna Krzyżanowska) 사이에서 1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누나 루드비카(Ludwika)가 있었고, 아래로는 두 여동생 이자벨라(Izabela)와 에밀리아(Emilia)가 있었다. 막내 에밀리아는 14살 때 결핵으로 요절했다.
쇼팽은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으며, 7살 때는 폴로네이즈 두 곡을 작곡했을 정도였다. 어린 쇼팽의 재능은 바르샤바의 귀족들에게까지 알려져 그들 앞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쇼팽이 얼마나 연주를 잘 했는지, 당시 폴란드 언론이 "천재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만 태어나는 줄 알았지만 우리나라에도 드디어 천재가 태어났다."라고 극찬했을 정도였다.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1816년으로, 체코계 폴란드인이었던 보이치에흐 지브니(Wojciech Adalbert Żywny)라는 피아니스트에게 배우게 됐다. 지브니는 엄청난 골초에 보드카에 빠져 살았지만, 쇼팽의 연주를 듣자마자 그를 의욕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훗날 쇼팽이 말하기를, "지브니 선생님 앞이라면 노새도 천재가 될 겁니다."라고 했을 정도. 1818년에 아달베르트 기로베츠(Adalbert Gyrowetz)의 협주곡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쇼팽을 보고, 지브니는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면서 쇼팽이 자유롭게 성장하도록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이후 1822년에 바르샤바 음악원의 창설자인 유제프 엘스네르(Józef Antoni Franciszek Elsner)를 통해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우게 됐고, 1825년 중학생 때는 러시아 황제 앞에서 연주할 기회를 얻게 됐다. 이후 피아니스트 바츨라프 빌렘 뷔르펠(Václav Vilém Würfel)을 사사하며 바르샤바 음악원을 다녔다. 바르샤바 음악원을 졸업한 후, 1828~29년에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면서 음악의 중심지인 빈으로 가서 피아니스트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 해외 진출
1830년 다시 한 번 빈에 갔다. 이때 그를 위한 고별 연주회에 그가 연모했던 콘스탄치아 그와트코프스카(Konstancja Gładkowska)가 찬조 출연했는데, 사실 그가 빈에 유학을 간 이유는 그녀에게 고백하지 못하자 고민 끝에 그녀가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였다는 카더라가 있다. 그의 곡 중 에튀드 3번 '이별의 곡'과 협주곡 1, 2번은 사실 그녀를 위해 작곡한 곡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
빈에 다시 한 번 가서 카를 체르니, 요한 네포무크 훔멜 등과 교류했지만, 빈의 청중들은 쇼팽에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동갑내기인 로베르트 슈만은 비평에서 그에게 "모두 모자를 벗어라. 천재가 등장했다."라는 표현을 써가며 쇼팽을 극찬했다. 정작 쇼팽은 "슈만은 나를 천치로 만들고 있다."라고 말하며 마뜩잖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폴란드에서 러시아에 대항해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됐고, 빈을 떠나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했을 때 러시아군의 잔혹한 진압으로 혁명이 실패로 끝났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때 겪은 분노와 조국과 집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 등이 뒤엉켜서 쓴 곡이 에튀드 '혁명'으로 알려져 있다. 쇼팽의 집도 당시 러시아군의 약탈로 사라져 있었고, 러시아군은 그의 집에 있던 피아노까지 도끼로 작살내 땔감으로 썼다. 이를 보고 쇼팽은 자신의 일기에 "하느님, 당신은 러시아인이십니까?"라고 적으며 울분을 토로했다. 같은 시기에는 술집에서 러시아인들이 하던 "하느님의 최대 실수는 바로 폴란드인을 창조한 거야."라는 말을 듣는 수모도 겪었다.
이후 쇼팽은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그러나 파리에서도 신통치 않은 결과만을 얻었고,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불리던 프리드리히 칼크브레너(Friedrich Wilhelm Michael Kalkbrenner)에게 피아노를 더 배울까 생각했지만 칼크브레너의 피상적인 연주 스타일 때문에 쇼팽이 개성을 상실할까 우려한 친구 프란츠 리스트와 펠릭스 멘델스존, 힐러 등이 만류했고, 3년이나 배워야 한다는 말에 그만두게 됐다. 멘델스존: 피아노는 쇼팽이 더 잘 쳐!
파리에서도 별 소득이 없자 쇼팽은 미국으로 건너갈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다가 파리 길거리에서 고향 귀족을 만나게 되어 귀족들과 당대 유명인사들이 드나드는 살롱에 소개됐고, 살롱에서의 연주회로 호평을 받아 쇼팽은 파리에 정착하기로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후대에 널리 알려진 많은 피아노 곡을 작곡하게 됐다. 쇼팽은 꽤나 베스트 드레서였다고 하며 이따금씩 건반에 피아노 헝겊을 덮고 연주를 하는 묘기도 보여주었다. 다만 본인은 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1836년, 드레스덴을 여행하던 중 바르샤바에서 사귀었던 친구의 여동생 마리아 보진스카와 다시 만나게 된 쇼팽은 보진스카와 비밀리에 약혼했지만, 쇼팽의 건강이 나쁜 것을 눈치챈 보진스카 주변 사람들의 반대로 결국 파혼하고 말았다.
◦ 필생의 여인 상드(George Sand)
이후 마리아 다구 백작부인이 주최한 파티에서 당대 화제의 인물이었던 소설가 조르주 상드(George Sand, 1804~1876)를 만나 사랑에 빠져 수 년 간 사귀게 된다. 상드는 당대에 성공한 소설가로서 문학계에서 상당히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여성 인권 옹호자였고, 남장을 하고 살롱에 출입하며, 남편 외에도 많은 남자들과 염문을 벌인 여러 가지 일로 화제가 되던 인물이었는데, 보수적인 성향이 있던 쇼팽은 그런 상드를 보고 처음에는 싫어했지만, 점점 마음을 열게 됐다. 병으로 인해 성적인 능력은 상실한 쇼팽이었지만, 상드의 헌신적인 돌봄 덕분에 10여 년 동안 연인 관계를 지속했다.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달리 두 사람의 관계는 상드의 일방적인 헌신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작곡, 연주와 레슨으로 얻는 수익의 대부분이 상드와 자식들에게 돌아갔다. 반대로 정열적인 팜므파탈 상드가 순진한 쇼팽을 갖고 놀다 찬 듯한 이미지도 널리 퍼져 있는데, 사실 상드도 쇼팽을 많이 사랑했다. 몸이 약한 쇼팽이 죽을 뻔했을 때 헌신적으로 간호해 살려놨으며 마요르카 섬에서는 피아노를 들여오고 보금자리를 마련하며 생필품을 구입하는 등 생활 일체를 지휘했고 수줍음을 타는 쇼팽이 큰 연주회를 앞두고 긴장할 때도 격려해주기도 했다. 실제로 상드를 몇 년 동안 제대로 본 적도 없던 쇼팽의 가족들마저 상드에게 쇼팽을 부탁할 정도였다.
쇼팽의 건강이 좋지 않자, 쇼팽과 상드는 요양차 1838년 지중해의 마요르카 섬으로 가게 됐다. 그들은 버려진 발데모사 수도원 근처의 오두막집에서 지냈는데, 하필 그때 유례없는 추위가 몰려온 탓에 쇼팽의 건강이 악화되고 말았다. 이뿐만 아니라 오두막의 환경이 지하실 내지 다락을 방불케 했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심지어 사육제에 코스튬을 한 사람들을 보고 진짜 괴물로 착각했을 정도. 그런 중에도 쇼팽은 파리에서 마요르카까지 피아노를 옮겨와 수도원에서 피아노를 치며 작곡을 했다. 결국 더 못 버티고 이듬해인 1839년 그들은 마르세유를 거쳐 상드의 고향인 프랑스의 노앙으로 옮겼다. 상드는 한 달만 더 있었으면 스페인에서 죽었을 거라고 온갖 욕이란 욕은 다 했다.
노앙으로 옮긴 둘은 그제서야 안정을 찾았으며, 파리와 노앙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러나 상드와의 관계는 점점 악화됐다. 자유분방한 상드는 쇼팽과의 연애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타인들의 시선을 무시했으나, 쇼팽은 그러지 못했다. 더군다나 점점 몸이 약해져가는 쇼팽은 갈수록 신경질적으로 변하는데, 10년 중 자그마치 7년 간의 섹스리스와 지루한 병구완에 상드는 점점 지치게 된다. 둘 사이의 관계가 점점 안 좋아지던 시기에 상드는 쇼팽과의 결혼생활을 다룬 소설을 집필했고, 그걸 쇼팽과 지인들에게 낭독했다. 당시 지인들은 쇼팽을 겨냥한 글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정작 쇼팽 자신은 몰랐다. 그런 와중에 쇼팽의 건강은 꾸준히 악화됐고, 상드의 딸의 결혼생활 문제로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게 된다.
상드의 딸 솔랑주는 조각가인 장바티스트 오귀스트 클레쟁제르(Jean-Baptiste Auguste Clésinger, 1814-1883)와 결혼했는데 이 부부는 신혼초부터 흥청망청 돈을 써대면서 갖고 있던 돈을 탕진하고 빚까지 지게 된다. 솔랑주 부부는 뻔뻔하게 상드에게 아첨을 떨면서 돈을 요구했는데 상드가 이를 거절하자 부부와 상드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솔랑주 부부는 상드에게 돈을 달라고 노앙의 별장까지 찾아왔고 결국 큰 다툼이 벌어졌는데, 솔랑주는 상드가 수양딸로 삼았던 여성보다 친딸인 자신에게 더 지참금을 적게 줬다고 난리를 피우면서 결국 집기를 집어던지고 폭력까지 행사했다.
결국 솔랑주와 그녀의 남편은 노앙 별장에서 내쫓겼는데, 솔랑주는 당시 임신중이었기 때문에 흔들림이 심한 일반 마차로 파리까지 가기는 어려웠다. 솔랑주 부부는 저택 근처의 여관에 머무르면서 노앙 저택에 있는 쇼팽의 고급마차를 빌려달라고 했지만 상드는 거절해 버렸다. 솔랑주 부부는 절박한 심정으로 쇼팽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런 정황을 전혀 몰랐던 쇼팽은 편지를 받고 마차의 사용을 허락했으며 상드에게 따로 마차를 빌려주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이게 상드를 제대로 화나게 한다. 상드는 쇼팽이 솔랑주 부부의 편에 섰다고 생각해서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고, 쇼팽을 비난하는 장문의 편지를 써 보냈다. 이 편지를 끝으로 상드는 쇼팽을 떠났고,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쇼팽은 죽기 직전까지 상드와 주고받은 편지를 상드의 머리카락과 함께 보관했지만 상드는 쇼팽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심지어 상드는 쇼팽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파리에서의 쇼팽의 입지도 많이 좁아져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사정이 좋지 않아 쇼팽은 제자 제인 스털링의 초청을 받아 영국과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가게 됐다. 그러나 영국에서도 쇼팽은 큰 굴욕을 당해야 했다. 영국 왕과 귀족, 명사들이 참석한 파티에서 연주를 하게 됐지만, 쇼팽 혼자 어두운 옆방에서 연주해야 했고, 왕과 귀족들은 쇼팽의 연주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쇼팽 정도의 음악가가 한 마디로 배경 음악 취급을 받은 굴욕을 당한 셈이다.[43] 더욱이 영국의 기후는 쇼팽에겐 치명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팽은 런던에서 어렵게 사는 폴란드인들을 위해 열린 자선 연주회에 참가하기도 했는데, 이는 쇼팽이 대중 앞에서 한 마지막 연주회였다.
◦ 투병과 사망
파리로 돌아온 쇼팽은 개인교습 말고는 일절 다른 연주 활동도 못할 만큼 중병에 걸려 있었다. 침대에서 화장실까지 가는 것도 힘들었고, 누군가 업어주지 않으면 2층으로 올라가지도 못했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면도와 옷매무새만큼은 단정히 했다고 한다.
쇼팽은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죽기 직전에 자신의 첼로 소나타 도입부를 연주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를 채 다 듣기도 전에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연주를 중단시켰다. 이후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두려워하던 것과 똑같이 살아 있는 채로 묻히는 것을 막아달라는 육필 메모를 남겼으며, 자정 즈음 몸이 어떠냐는 의사의 질문에 "이제는 안 아파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어머니...나의 어머니..."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쇼팽의 소망대로 지인들은 쇼팽의 장례식 때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연주하려 했지만, 쇼팽의 장례식이 치러질 예정이었던 성 마들렌 성당에서 여가수가 성당 안에서 연주할 수 없다고 반대하는 바람에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됐다. 다행히 쇼팽의 간절한 마지막 소원이라는 지인들의 적극적인 설득 끝에 2주만에 성당 측이 이를 양보했고, 그렇게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되는 가운데 쇼팽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쇼팽의 묘에는 그가 폴란드를 떠나기 전 은잔에 담아온 폴란드의 흙이 뿌려졌고[47], 후에 쇼팽의 심장은 유언에 따라 그의 누이에게 인도되어 나중에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됐다. 이 부분은 2014년 11월 3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세월이 지나 2차 세계 대전 당시 바르샤바 봉기 당시 이 성당은 폐허가 될 정도로 포격을 받았으나, 이전에 심장은 무사하게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 어처구니없게도 쇼팽의 심장을 안전한 곳으로 정중히 옮기도록 한 장본인은 봉기 진압과 학살을 주도한 나치 친위대의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였다. 사실은 보관되어 있던 쇼팽의 심장을 약탈한 후 바르샤바 시민들의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다시 반환한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쇼팽의 심장은 다시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됐다.
앙리 루소, ‘사육제의 정경’, 1886년-밤의 정취를 따뜻한 색채로 표현한 이 그림처럼 녹턴은 음악으로 밤을 노래한다.-/앙리 루소(Henri Rousseau), 열대 우림 속의 호랑이(Surprised!), 1891년, 801x642cm.=폭풍우 치는 열대 우림 속에서 겁에 질린 호랑이를 묘사한 유쾌하고도 상징적인 그림. 이 그림을 그린 루소는 실제로 열대에 가 본 적이 없으며 그림 속의 열대 식물들은 식물원에서 관찰해 그린 것이라고 한다.
앙리 루소, 톨게이트, 1890년경, 캔버스에 유채, 40.6×32.75cm
앙리 루소, 잠자는 집시(The Sleeping Gypsy), 1897년, 640x417cm
앙리 루소, 굶주린 사자(The Hungry Lion), 1905년, 640x424cm/
앙리 루소, 루소(Henri Rousseau)의 자화상, 560x737cm
앙리 루소, 아폴리네르와 로랑생, 524x800cm
앙리 루소, 풋볼을 하는 사람들, 630x800cm,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앙리 루소, 열대 폭풍우 속의 호랑이, 960x767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앙리 루소, 쥐니에 영감네 이륜 마차(La Carriole du père Junier), 43x397cm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KBS1 <예썰의 전당> [26회] 피아노의 시인 - 쇼팽, Daum·Naver 지식백과/ 글과 사진: 이영일 ∙ 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