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포항출장길에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 짐을 지고 있던 장기면을 방문하였습니다.
포항에서 7번국도를 타고 해안을 따라 가다보면 장기천이란 이정표가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장기입니다
정조가 1800년 49세로 급서하자 다산은 자신의 정치생명도 끝났음을 직감하고 고향 마재로 내려와 여유당與猶堂이란 당호를 짓고 은인자중하며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정적들의 음모는 피해갈 수 없어 1801년2월10일 새벽 의금부 도사 한낙유에게 체포된 다산은 국문을 받게 됩니다.
“ 여러 대신들이 모두가 무죄로 풀어줄 것을 의논했으나 유독 서용보만이 고집을 부려 안 된다고 해서, 나는 장기현으로 유배당하고 형님 약전은 신지도로 유배형을 받았다”(자찬묘지명 중)
1801년2월28일 서울을 출발한 다산은 충주에서 탄금대를 지나 문경새재을 넘어 3월9일 유배지인 장기현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 곳에서 약 7개월의 유배생활을 하던 중 9월29일 제천의 배론 땅굴에 숨어 있던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이른바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고,
10월20일 들이닥친 금부도사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면서 장기의 유배생활은 끝이 나게 됩니다.
장기천을 따라 장기면으로 진임하는 길에 다산이 유배생활을 한 마현마을 표석이 보입니다. 다산은 경기도 광주군 마현리에서 태어났는데 유배지 마을의 명칭도 마현마을이니 기막힌 우연이라 할 만합니다
장기초등학교를 방문하였습니다. 장기초등학교는 1912년 설립된 유서깊은 학교인데 이 근처가 바로 다산이 유배생활을 한 마현방 성선봉의 집이 있던 곳이랍니다.
현재는 성선봉이란 분의 유족이나 기록은 알려진 것이 없어 아쉽습니다.
장기초등학교의 운동장 한편에 우암 송시열 선생 사적비와 다산 정약용 선생 사적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2001년 세워진 다산 정약용선생 사적비.
현대식의 세련된 디자인이 눈길을 끕니다.
사적비 뒷면에는 다산의 장기유배에 관한 글과 다산의 시 한수가(장기농가 십장) 씌여져 있습니다.
이곳에서 다산은 그의 18년 유배생활중 가장 힘겨운 나날을 보낸 듯 한데 다산의 시 “ 장기의 귀양살이에서 본 풍속”에 그 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 습한 데서 봄을 나니 마비증세가 일어나고
북녘에서 길들인 입맛 남녘 음식 맞지 않네.
비방인 창출술이나 담그려는데
아이 머슴 괭이 메고 가며 고향이 어디냐고 묻더라.”
그럼에도 무서운 집념의 소유자 다산은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저술작업을 하는데 자찬묘지명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장기에 도착하여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정신을 깨끗이 가다듬고 나서 ‘삼창고훈三倉詁訓’이라는 자학字學책을 고찰했다. ‘이아술爾雅述’이라는 책 6권을 저술하고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이라는 예설禮說을 지었으나 겨울의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옥에 갇혔을 때 분실하고 말았다.”
그외에도 장기에서 보낸 7개월의 기간동안 다산은 ‘장기농가’10수, ‘장기의 귀양살이에서 본 풍속’ 27수 등 약 130여수의 시를 짓고, ‘촌병혹치村病或治’라는 의서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암 송시열 선생 사적비.
다산보다 120여년 전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셨던 우암의 사적비는 전통양식으로 건립되어 있습니다.
장기발전연구회 운영국장님이신 금낙두 옹.
선생님께서는 이 일천한
후학에게 발품을 아끼지 않으시고 사적비를 소개해 주시고 다산의 유배생활자료, 장기숲 복원계획 등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감사한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장기초등학교의 교정에 있는 이 은행나무는 우암이 심은 것이라고 합니다
장기읍성
고려 헌종2년(1011년) 당시에는 흙으로 성을 쌓았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돌로 다시 쌓았다고 합니다.
읍성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유적으로 최근 복원되었습니다
금낙두 선생님에 의하면 최근 유홍준 문화재청장님께서 방문하셨었는데
복원이 정교하게 되지 못하고 오류가 있다는 지적을 하셨다고 합니다
장기읍성 안에 장기향교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장기현의 관아가 있던 자리였습니다. 장기현에 도착한 다산이 제일 먼저 불려간 곳이 관아였을 것이니 이곳에서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기면 읍내리에 있는 척화비입니다
아시다시피 척화비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더욱 강력히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서울 및 전국 중요도로변에 세운 비석입니다
"서양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장기해변
다산은 유배기간 중 외출을 별로 하지 않은 듯 한데 그의 시에 의하면 오직 장기 바다를 산책하며 해녀를 구경하거나 바다에서 뛰는 솔피를 구경했던 것이 전부 인듯 합니다.
마치며..
이번 답사는 그동안 다산선생님을 사숙하면서 꼭 가보아야 했음에도 미쳐 시간을 못냈던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제겐 너무나도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금낙두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전해지는 자료가 너무나 빈한하여 다산 선생님의 진면목을 확인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첫댓글 좋은것을 보게되거 이렇게 존것을 올려준용강재사랑한테 감사를 전하겠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