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정신,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문화
속세에 푹 젖어 살아온 필자에게 시공을 초월하여 다가오는 퇴계 선생의 놀랍고도 존경스러운 삶의 향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사람이면 어느 때 누구나 영위하는 일상적 삶에서의 차이였다.
그때까지 필자는 선생을 조선시대 학식 높고 근엄한 대유학자로만 알았다. 그런데 선생이 평생토록 자신을 낮추고, 특히 자신보다 지위나 신분이 낮은 사람을 공감하고 배려하며 사셨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넘어 신선한 충격이었다.
필자는 선진국 문턱에서 헤매는 한국이 겪는 온갖 정치, 경제, 사회 난맥상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으로 퇴계 선생을 비롯한 선현들이 가르친 '선비정신'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 '머리말' 중에서 '선비정신'을 계승하자
저자 김병일은 194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서 서울대 사학과와 행정대학원에서 학업을 마치고 1971년 행정고시를 거쳐 30년 넘도록 경제관료로 봉직하며 국가재정경제정책 추진에 참여하였다.
통계청장, 조달청장, 기획예산처 차관, 금융통화위원, 기획예산처 장관 등을 두루 거쳤다. 2005년 퇴직 후
경북 안동으로 내려와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과 한국국학진흥원장을 맡으면서 선비정신의 확산과 국학의 진흥을 위해 힘써왔다.
지금은 도산서원 원장을 비롯해 21세기 인문가치포럼 조직위원장, 영남대 석좌교수 등을 맡으며 바쁜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안동 퇴계 종택 뒤 산기슭에 위치한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에 머무르며 섬김의 리더십, 바른 인성 등 선비정신을 전파하며 착한 사람이 많은 사회를 만들고자 힘을 보태는 중이다.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최근 안동을 찾는 발길이 부쩍 늘었다. 안동에 자리 잡은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을 찾는 수련생 때문이다.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은 강의와 체험을 통해 선비정신을 바르게 이해하고 현대 사회에서 필요한 선비정신을 배워 선비처럼 실천의 삶을 살아갈 기회를 마련하는 곳이다.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은 2002년 문을 열어 수련생을 맞아들였다. 첫해 2백여 명의 수련생을 시작으로 다음 해에도 2백여 명 정도가 다녀갔다.
다음 해부터 꾸준히 두 배씩 증가하기 시작했으나 2009년 전까지는 한 해 1만여 명에 못 미쳤다.
그런데 2009년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2014년 한 해만 무려 5만5천여 명이 다녀갔으며 올해는 7만여 명을 목표로 한다. 특히, 별다른 홍보의 노력 없이도 많은 이가 제발로 선비문화수련원을 찾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식을 접한 사람은 아마도 이를 의심할 것이다.
'왜 그곳에 갈까?'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말이다. 이는 선비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 이를테면 부정적인 유교문화, 고리타분함, 무능과 부패 등과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는 한국인이 모르는 대한민국 중 하나로 선비정신을 꼽았을까? 그렇다. 우리는 선비와 선비정신을 잘 알지 못한다.
이 책은 우리가 몰랐던 선비와 선비정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선비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왜곡되기 시작했다.
일제는 식민 지배를 위해 선비와 우리 고유의 정신문화인 선비정신을 왜곡했다. 이로 인해 선비와 선비정신은 공리공론(空理空論)의 온상으로 치부되며 기억 너머로 사라졌다.
이어진 해방. 해방 후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굶주림을 면하는 것이었다. 하루 세끼 따뜻한 밥 한번 먹기 위해 탄광이든 전쟁터든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최대의 이슈는 '잘 살아 보세'였다.
그 결과 세계인이 놀라는 '한강의 기적'을 일궈내며 단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이어
찾아온 풍요의 시대. 고생 끝에 찾아온 풍요를 즐기느라 나머지는 뒷전이었다.
물질적 풍요를 이뤄냈으니 정신적 풍요를 일궈야만 했던 시대였다. 전통 속에 간직했던 윤리의식은 전통과 함께 급격히 퇴조했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지 못했다.
이 때문에 개인은 불행해지고 사회는 위험에 직면했다. 사회의 위험은 다시 개인의 위험을 초래하며 개인은 점점 더 불행해지는 악순환에 빠졌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불행의 근본이다. 우리만의 방법으로
놀라운 경제 기적을 달성했듯이 오늘날의 불행 또한 마찬가지이다. 무엇을 이뤄내야 할지는 자명하다. 바로 새로운 가치관을 찾아 정신문화의 풍요로움을 이뤄내는 것이다. 우리 정신문화의 새로운 가치관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어느 외국인 교수가 지적했던 것처럼 바로 선비정신이다. ●인성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다
최근 갖가지 사건 사고와 사회적인 문제로 우리들은 몸살을 앓는다. 흉흉한 사건 사고에 대한 근본대책으로 배려와 섬김이 자주 거론된다.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성의 부족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결국 2015년 7월 21일부터 <인성교육진흥법>이 시행되었다.
즉 인성의 수양을 법으로 강제할 만큼 인성의 중요성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인성은 법에서 규정한 바와 같이 스스로 내면을 바르게 간직하는 것, 다시 말해서 남이 보든 보지 않든 언제나 간직해야 하는 인간다운 품성을 말한다.
과거 선비들도 신독(愼獨), 즉 스스로 홀로 있을 때 행동을 삼가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이처럼 인성이란 외부의 평가보다 내면의 간직을 더 중요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어른이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처럼, 어릴 적 가정에서 부모와 윗사람의 행동을 보며 익힌 습성에 따라 평생을 살아간다. <공자가어(孔子家語)>의 한 구절에도 '부지기자(不知其子) 시기부(視其父)'란 말이 있다. 이는 '그 자식을 알지 못하겠거든 그 아비를 보라'는 뜻이다.
"미래의 이상적인 가족사회는 한국에 있다. 3대가 모여 살면서 선대의 지식과 사랑을 후손에게 가르쳐주는 한국의 가족제도야말로 인류가 지향해야 할 미래사회의 모습이다" - 아놀드 토인비, 역사학자
이처럼 이방인조차도 부러워했던 한국의 가족이 와해되고 효사상(孝思想)이 소멸되는 것은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먹고 싶은 음식 안 먹고, 입고 싶은 옷도 사 입지 않으며 자식들을 어렵게 양육했더니 늙고 병든 부모를 외딴 곳에 버리거나 학대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니 얼마나 가슴 메이는 일인가 말이다.
또 이런 자식이 어떻게 자기 자식을 제대로 교육시키겠는가?
조선시대를 살았던 우리들의 선현은 가난햇지만 오순도순 화목했으며 집안마다 고을마다 어른을 존경하는 풍습이 있엇고 존경받는 어르신이 계셨다.
그들은 항상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그것은 차마 사람으로서 할 짓이 못 된다' 등의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그랬기에 비록 강성하진 못했지만 5백여 년 동안 조선왕조가 유지될 수 있었다.
고사성어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너무나 유명해서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인물 뒤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었다.
어릴 때 가정에서 보고 배운 어머니의 행동이 그 사람의 한평생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어머니도 다른 나라의 어머니에 결코 못지 않다.
5만원원짜리 고액지폐에 얼굴을 알리는 신사임당은 모든 어머니의 롤모델이다. ◆다시 생각하는 가족과 효(孝)
2012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인구가 5천만을 넘었다. 그런데, 최근 15년 사이에 인구는 20%가 증가했는데, 가구 수는 무려 81%나 급증했다고 한다. 왜 그럴까? 1인 가구, 그중에서도 독거(獨居) 노인가구가 빠르게 증가한 탓이다. 이는 가족공동체의 해체를 의미하기에 매우 충격적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도 이상 징후를 보여주는 지표들이 여럿이다. 우리 국민의 38%는 부모를 양로원에 모셔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23%만이 친조부모를 가족으로 인식하고,
청소년의 58%는 오히려 애완동물을 가족이라고 느낀다고 한다. 한 침대에서 애완동물을 끼고 사니 이런 생각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바야흐로 '자식'만 있고, '부모'는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금수(禽獸)는 다 자라면 새끼를 낳아 온 정성을 다해 새끼를 돌보지만 자신을 낳은 어미는 돌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지 않는 자식을 '금수 같은 놈'이라고 비난을 했다. 즉 금수도 하는 자식 챙김보다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무모 봉양이 훨씬 더 근본적인 가치이자 올바른 삶이라고 여겼다.
농암 이현보(1467~1555년)는 고향 안동에 계시는 나이 든 부모를 모시려고 정자 한 채를 짓고, '애일당(愛日堂)'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는 하루하루 부모가 늙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하루를 아껴 효도를 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셈이다. 1512년, 그는 안동부사로 부임해 부모와 마을 어르신을 위해 양로잔치를 베풀면서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고 전한다. 우리 국민 모두의 마음에 상처를 준 사건사고를 떠올려본다. 세월호 참사, 대한항공 부사장의 어이없는 '땅콩회항', 어린이집 육아교사의 폭행사건, 군부대 내에서의 성폭행 및 구타사건 등 무수히 많은 최근의 사고사건은 우리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또 불법 정치자금 리스트는 우리들을 깜작 놀라게 한다. 이처럼 한두 건도 아니고 왜 이런 일들이 연달아 발생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저자는 배려와 섬김 정신이 없는 이기적인 인간관계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즉 자기만을 생각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삶에 익숙해짐에 따라 자신의 욕심 채우기에 급급하다. 이는 자기자신과 가장 가까운 가정 속에도 파고든다.
젊은 부모가 어린 자식을 때리더니 이도 부족해 내버리거나, 젊은 자식은 늙은 부모를 요양병원에 가두다시피 하고, 남편은 보험금을 노리고 아내를 죽음으로 내몬다.
◆다시 선비를 생각하며
물론 선비와 선비정신은 다양한 모습을 지녔기에 그 가운데 부정적인 면도 존재한다.
저자는 부정적인 면은 버리고 긍정적인 면을 계승하자고 말한다.
더불어 우리의 오랜 전통을 무조건적으로 계승하기 보다는 현대감각에 맞게 수용하자고 말이다. 그러면서 선비정신의 본고장인 안동으로 내려가 몸소 선비가 되어 현대인의 아픔을 치유해줄 선비정신을 찾는 중이다.
중세시대 백년전쟁 당시 영국은 프랑스의 칼레 시를 점령한 후 항복의 대가로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고 도시를 대표해서 죽임을 당할 6명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칼레 시 최고의 부자가 죽음을 자청했다. 이에 뒤따라 시장, 상인, 법률가 등 지도자들도 처형에 동참했다. 영국 왕은 이들의 희생정신에 감명받아 이들을 모두 사면했다.
이 사건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역사적 기원이다.
서양에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있다면 한국에는 '선비정신'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여름휴가 때 읽은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 책의 저자는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한국명 이만열) 경희대학교 교수인데, 그도 책에서 한국적 정체성에 가장 부합하는 상징적 개념으로 '선비정신'을 제시했다.
선비는 개인보다는 공공체를, 이익보다는 가치(義)를 추구하는 지도자이다. 이들은 이런 목표를 실현코자 자신을 수양하고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수기치인수기치인'의 태도를 지킨다.
같은 시대의 중국과 일본 지도자들은 고루거각(高樓巨閣)에서 산해진미를 먹으며 군림했지만, 조선의 선비는 검소한 살림살이에 스스로의 인성을 닦으며 솔선수범 자세로 백성들의 모범이 되었다.
2011년은 도산서당이 창건(1561년)된 지 450주면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는 학술강연회와 기념전 등이 경북 안동과 서울에서 잇달아 열렸다.
도산서당은 퇴계 선생 말년에 고향에 은거하면서 학문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고자 손수 설계하여 지은 공간이다. 정면 3칸 반. 측면 1칸 규모로 방과 부엌 각 하나에 1칸 반짜리 마루를 곁들인 소박한 구조이다. 퇴계 선생은 인생의 마지막 10년을 이 공간에서 보냈다. 선비정신, 현대인의 아픔을 달래줄 해법이다
이 책은 도산서원 원장인 저자가 그동안 썼던 글과 강연을 정리해서 묶었다고 한다.
선비정신이란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며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하게 대하는 것'이다. 최근까지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을 다녀간 누적 방문객의 수가 계속 늘어나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저자는 선비정신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제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참된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인간의 본성인 '착함'을 되찾을 때 비로소 한국 사회는 충효가 충만한 반듯한 세상이 될 것이다.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정신문화의 빈곤이라는 절뚝발이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마치 새로운 가치관을 부여하는 듯하다. 모든 독자들에게 필독을 권한다 by/오대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