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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예프 러시아와 비잔티움 제국의 관계사 학부: 인문학부 학과: 러시아과 학번: 018704 이름: 황인천 1. 서론 2. 본론 - 끼예프 러시아와 비잔티움 제국의 관계사 1) 비잔티움 문명 - 구세계 2) 초기 러시아 - 신세계 3) 끼예프 러시아와 비잔티움 제국 3. 결론 부록) 참고도서 및 사이트 1. 서론 러시아의 존재가 20세기 세계 변동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졌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하여 러시아의 동향 여하는 한국에서의 남북관계의 상황에도 커다란 관계를 가졌던 것이다. 우리가 러시아를 주시하는 의의는 우선 이러한 면과 관련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러시아에 대하여 가지는 흥미는 이로써 다하는 것이 아니다. 국제사회가 세계화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국제무대에서 이제 각 국가들은 보다 더 심도높은 차원의 접근을 통하여 상대국을 이해하여야만 하는 시점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이같은 필요성은 상술하였던 한로 관계의 현실적인 상태로써 더욱 강하게 요구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러시아를 폭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러시아의 이해를 위하여 우리는 그 근원이자 토대로써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러시아의 역사적 상황 역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러시아의 역사적 상황을 규명함이 없이는 러시아의 이해가 난감한 것이며, 따라서 러시아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러한 현실적인 관계수립 역시 난감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러시아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단순한 학술적인 문제일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도 된다. 즉 우리가 관계하는 러시아의 문화가 어떠한 상황에 배경을 두고 있으며, 또 그들이 기반으로 하고 있는 문화의 성격은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점에서 흥미의 초점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흔히 서방세계의 열강으로 인식되고 있는 러시아가 미국이나 영국, 불란서 등 대다수 서방의 국가와는 상당한 이질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주목을 끌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는 서방세계에서 유일한 동구 슬라브권 열강으로 여타 서방세계의 구성원인 서구와는 달리 그 지리적, 자연적 조건으로 인하여 서구에서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희랍, 로마적 요소나 게르만, 켈트적 요소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며 오히려 아시아적(Asiatic)인 속성을 상당히 보유하고 있었다. 비록 18세기 뾰뜨르 대제의 개혁 등 서구화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지만 말이다. 이는 근접한 아시아평원에서 도래하는 아바르, 뻬체네크, 뽈로베츠 등의 유목민과 접촉이 잦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주문명을 받아들이기 불리한 조건 하에서도 러시아는 그 문물을 받아들여 마침내는 ‘동양세계의 왼쪽 날개보다는 유럽세계의 오른쪽 날개’가 되는 길을 택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동구권의 유일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는데 그 문물의 도입지는 서구가 아닌 바로 동부 지중해권이었던 비잔티움 제국(Byzantium Empire: 395~1453)이었던 것이다. 고대 로마제국을 계승하였으며 희랍어가 공용어로, 정교(正敎)가 국교였던 이 중세 로마제국은 전 중세를 통하여 동구의 맹주로 군림하였었으며 비단 러시아뿐만 아니라 슬라브계 여러 국가에게 있어 정치, 종교, 사회, 문화 등 그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었고 자연적, 지리적 조건으로 고대 지중해권 문명에 접하기 어려웠던 동구권에 문물을 전하였으며 아울러 서구권과 회교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중에서도 비잔티움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나라가 바로 러시아였으며 본고는 이 장에서 비잔티움 문명과 끼예프 러시아를 소략하게 살펴보며 그리고 그 끼예프 러시아와 비잔티움의 관계와 이로 인하여 받은 영향을 다뤘다. 이 장으로써 러시아가 역사적 경험을 통해 가지게 된 요체가 무엇인지 규명되리라고 믿는다. 2. 본론 - 끼예프 러시아와 비잔티움 제국의 관계사 1) 비잔티움 문명 - 구세계 이른바 중세 비잔티움의 문명은 고대 로마제국의 국가제도와 기독교 교회의 종교, 그리고 비잔티움의 주요 본거지인 희랍의 문화가 혼합되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세가지 요소가 종합하여 비잔티움 발전의 주요 원천이 된 것이다. 고대 고전 문명의 결정판이었던 로마제국은 동서 제국의 분립과 민족대이동의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종교 여러 면에서 몰라볼 정도로 변질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과 희랍 지방으로의 천도로 건설된 콘스탄티노플은 이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며 옛 제국과 크게 다른 새로운 제국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바로 이 동방 로마제국의 제도가 점점 더 기독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희랍의 문화와 혼합됨으로써 중세 비잔티움 문명이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이 장에서는 비잔티움 문명에 관하여 간략하게나마 서술하고자 한다. 이미 고대 로마제국 때부터 라틴적 성향의 서방과 희랍적 성향의 동방의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 차이는 존재하였으며 동서 제국의 분립 이후로 그 이질화는 결정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 가운데 서방제국은 민족대이동의 물결 속에서 몰락으로 나아갔으나 동방제국은 경제적, 사회적인 생존력과 지리적인 행운성으로 인하여 존속하게 된다. 그러나 비록 제국이 나뉘어졌다고는 하지만 동방제국, 즉 비잔티움은 그 스스로가 로마제국의 연속이며 후계자라고 인지하고 있었으며 한때는 유스티니아누스 당시에 게르만족들이 장악하고 있는 서방제국 탈환을 도모하여 단기간이나마 그 상당 부분을 회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비잔티움은 고대 로마제국처럼 세계제국 실현의 야망을 이루지는 못하고 결국은 전혀 다른 역사적인 노선을 밞게 된다. 뒤이어 7세기에 벌어진 내부의 혼란과 외부의 침입으로 인하여 비잔티움은 회교세력과 남슬라브족에게 동방지역과 북아대륙의 지중해 동부와 남부 지역, 그리고 발칸반도 대부분의 지방을 탈취당하고 수도 콘스탄티노플 근방과 소아시아로 영역이 축소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궁극적으로 문화가 희랍화, 동방화됨으로써 비잔티움만의 특별한 성격을 이루게 될 여러 가지 뚜렷한 특징을 보이고 있었다. 정치, 종교적인 면에서는 절대권력을 지닌 황제가 복잡한 관료조직의 조력을 받아 제국을 통치하였다. 비잔티움의 황제는 절대적인 권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비잔티움 문명이 기본적으로 종교적 성향의 문명이었던 관계로 황제는 대체로 교회까지 지배하고 있었고 종교적인 사항에 대하여 감독권을 행사하는 황제교황주의였다. 그러나 교회조직의 힘도 상당하였고 비잔티움의 정교는 희랍철학의 영향을 받아 사변적인 경향이 강력하였으며 이러한 신앙은 혹 분열의 원인이 될 수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국가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구심점의 역할로 작용하였다. 비잔티움은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하여 수많은 도시들이 산업과 교역의 중심지로써 활동하고 있었고 여타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고대 희랍과 로마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비잔티움 문명은 정치, 법률, 문화 등의 여러 면에서 고대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한편으로 그 전통은 기독교와 동방의 영향을 받아 독창적으로 발전해 나아갔고 그 정신적, 정치적 전통들은 계속해서 크기는 다르지만 동구 및 서구 내내 영향력을 미쳤으며 그들에게 희랍, 로마의 고대 문화를 전수하고 비기독교 문명에게서 기독교 문명을 수호하는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역사적으로 중세 문명의 성장에 끼친 비잔티움의 영향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2) 초기 러시아 - 신세계 고대 희랍, 로마 지중해권 문명의 직계였던 비잔티움 제국에서 끼예프 공국 형성 이전의 초기 러시아로 옮겨가 보면 두 세계는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초기 러시아는 구주대륙의 극동에 위치한 자연적 환경로 인하여 그 형성이 늦어졌으며 고전 고대 지중해권 문명에 거의 접하지 못하였던 의미로써 말그대로 ‘신세계’였다. 크림반도 및 남부 러시아 해안 지대 약간만이 고대세계의 변경으로써만 머물러 있었으며 그 밖에 우랄산맥에서 동유럽평원까지 초기 러시아 역사의 무대가 되었던 대부분의 지역들, 특히 유사 이래로 아시아의 입구이자 유럽의 출구 역할을 하였던 남부 러시아 초원 지대는 그 지정학적 조건 상 끊임없이 도래하였던 광포한 유목세력의 영향권 하에 놓여있었다. 이들 유목세력은 킴메르(Cimmerian: 기원전 1000~700), 스키타이(Scythian: 기원전 700~300), 사르마티아(Sarmataian: 기원전 300~기원후 300), 고트(Goth: 200~370), 훈(Hun: 370~453), 아바르(Avar:558~7세기) 등으로 유목민족들은 제각각 이곳에 밀려들어 침입하여 정복하고 뒤이어 다른 유목민족에게 정복되어 밀려나는 역사적 진행을 반복하곤 하였으며 유동적이고 정치적으로 미성숙하고 문화적으로 불안정하여 급속하게 흔적도 없이 붕괴 소멸되는 운명 또한 공통적이었다. 이같은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러시아는 이미 헤로도투스(Herodotus)의 저서인 역사(Historiai)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시아적’ 성향이 두드러졌으나 서구 지중해권 문명의 영향력도 적으나마 유입되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부정할 수는 없다. 스키타이-사르마티아 시대에 희랍-이란 문화가 발전하였으며 상술한 크림반도 부근에서 발견되는 희랍 식민지들은 로마, 그리고 비잔티움 시대까지도 그 영향권 하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서구문명의 영향력이 점진적으로 누적되면서 유목세력이 팽배했던 당시 러시아 지역에 드디어 하자르(Khazar: 7세기~10세기)와 같은 반유목국가가 형성되기도 하였으며 또한 씨족사회 단게에 있었던 슬라브 농경 목축민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고 끼예프 러시아가 등장할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고 보인다. 러시아 역사의 본격적인 전개는 러시아사의 주역인 슬라브족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겠다. 슬라브족은 인도-유럽 어족의 한 지파로 이미 기원전 1000여년부터 러시아 지역에 자리잡아 상술한 유목세력들과 서구문명의 영향력을 받으면서 삼림과 늪지대에서 농업과 목축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이후 확산과 이동을 거듭하면서 서부로 이동하여 천주교를 도입, 서구권에 통합된 서슬라브족(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남서부로 이동하여 발칸반도에 정착한 남슬라브족(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불가리아), 그리고 동부로 이동하여 러시아에 정착한 동슬라브족(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으로 분화하였다. 슬라브족. 특히 러시아에 자리잡은 동슬라브족은 기원후 최초 몇세기 동안 농경사회의 가부장적인 전통 속에서 공동체를 형성한 씨족사회였으며 귀족, 자유민, 노예의 계급분화가 되어 있었고 종교적으로는 자연숭배적인 다신교를 믿고 있었다. 9세기 경에는 점차 경제, 사회,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하는 한편, 그 중심지에는 다수의 소도시들이 형성되었는데 여기서 노브고로드, 스몰렌스끄, 끼예프 등의 유명한 도시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 무렵 러시아 북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만인이 9세기 제 2차 민족대이동으로 인하여 시칠리아, 노르망디 등 구주대륙 전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마침내 862년에 노르만의 수장인 류릭(Рюрик)이 노브고로드를, 882년에는 올레그(Олег)가 끼예프를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 끼예프 루시가 일반적으로는 러시아 국가의 시작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노르만의 도래가 러시아 국가수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기보다는 이미 그 당시에도 슬라브인이 국가를 수립할 수 있었을만큼 사회가 발달하고 있었으며 노르만인은 이를 촉진시켰다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을 알아둬야 한다. 어쨌거나 그 성립과정이 내부적 전개를 통해서든 외부적 개입을 통해서든 혹은 그 양자의 어떤 특이한 결합을 통해서든, 국가확립의 주체가 노르만인이든 슬라브인이든을 막론하고 9세기 말 경 러시아 지역에는 드디어 최초로 고대 러시아의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으며 러시아와 비잔티움 두 국가 모두는 발전형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병존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러시아와 비잔티움의 관계사가 시작된다. 3) 끼예프 러시아와 비잔티움 제국 이제까지 우리는 러시아와 비잔티움 제국의 관계사에서 각각 한 축을 이루었던 9세기 끼예프 공국 이전의 초기 러시아와 비잔티움 문명에 대하여 알아 보았으며 지금부터는 비잔티움과 초기 러시아의 접촉 상황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끼예프 공국이 성립됨으로써 러시아와 비잔티움이 병존하게 되었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러시아와 비잔티움은 접촉을 시작하고 있었다. 860년 러시아인이 내습하여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그 주변을 초토화시킨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기부터 비잔티움과 바야흐로 성립되고 있는 러시아 국가와의 최초 관계가 시작되었다. 러시아인의 급습이 폭풍우로 인하여 패배하고 퇴각하자 비잔티움은 하자르 국가에 사신을 보내고 러시아 지방에 선교활동을 개시하는 것으로써 대응하였는데 비잔티움은 이 예기치 못한 위협을 예방하기 위해 러시아와 그 주변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비잔티움의 영향권으로 유입하는 것이 위협이 되는 요소를 제거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임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또한 비잔티움은 모라비아의 요청에 따라 끼릴과 메또디 형제들을 파견하여 제국 외곽 슬라브인들의 기독교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다. 끼릴과 메또디 형제들은 슬라브인에 대한 전도를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하여 슬라브문자, 그리고 끼릴문자를 만들었으며 이로 인하여 동구권에는 기독교의 전파가 촉진되고 러시아를 비롯한 동슬라브인과 남슬라브인이 문자를 소유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이 선교사업은 러시아에서는 제한적이었으며 사실상 별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907년 끼예프의 군주 올레그가 콘스탄티노플에 함대를 몰고 등장하여 러시아에게 조공을 바칠 것과 유리한 교역협정을 비잔티움에 강요했던 것이다. 과장된 감이 있겠지만 러시아 역사서인 원초연대기에서는 콘스탄티노플에 내걸은 올레그의 방패로 러시아의 승리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원초연대기에는 이교도였던 러시아인들에 반해 올레그를 선지자라고 불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그 역시 어느 정도 비잔티움의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때를 시발점으로 공식적으로 러시아와 비잔티움 간의 교역이 시작되었으며 러시아는 모피, 밀랍, 꿀 등을 수출하고 비잔티움에게서 포도주, 비단, 장식품 등을 수입하는 등 러시아와 비잔티움 간에 전쟁과 평화가 단속적으로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교역활동이 전개되기에 이른다. 비잔티움에 대한 러시아의 공세는 이고리(Игорь) 때에도 계속되었으나 941년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했던 러시아 함대가 비잔티움의 해군에게 패배하자 그 기세는 한풀 꺾였다. 러시아와 비잔티움의 관계가 잠시 소강상태에 머무르자 러시아는 비잔티움으로부터 점차 종교적으로 영향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고르가 일찍 죽고 그의 미망인이자 섭정인 올가(Ольга)가 954년 혹은 955년 정교로 개종한 것과 957년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즈음에서 러시아는 사회의 발달로 인하여 토착종교인 다신교보다는 정교하고 통합력을 부여할 수 있는 종교였던 기독교를 도입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또한 정교로 대표되는 비잔티움의 영향이 스며들기 시작했으니 올가의 개종은 바로 그 점을 잘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러시아에는 기독교 도입의 필요성이 그리 절실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 반동으로 반기독교적 분위기가 성장하게 되었으며 이윽고 러시아와 비잔티움은 동구권의 쟁패를 둘러싸고 결전을 벌이게 된다. 968년 하자르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킨 끼예프 공후 스뱌또슬라프(Святослав)는 비잔티움의 청부로 인하여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정복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물산의 집결지인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제국을 수립하려는 야망을 품게 되었고 마침내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비잔티움과 싸워 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비잔티움에 대한 러시아의 공세는 깨졌으며 동시에 반기독교적 분위기도 크게 꺾히고 말았다. 블라지미르(Ярополк) 시대에 러시아는 드디어 기독교를 수용하기 시작한다. 원초연대기에서는 블라지미르가 각국 사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각국에 사신을 보내어 회교, 유대교, 천주교 등 종교를 물색하였음과 여기서 채택된 것이 비잔티움의 정교였음을 언급한다. 상술하였듯이 러시아는 크게 팽창되고 발달한 사회를 지탱해줄 지지대로써 정교하고 통합적인 기독교가 필요하였고 이 필요성은 당시 동구와 북구 국가들의 기독교 수용에 인해서 촉진되었다. 그리고 그 기독교의 주체는 바로 비잔티움 제국의 정교였던 것이다. 이로써 러시아는 비잔티움의 정신적인 영향권 하에 놓였으며 문확, 예술, 법률, 풍속, 관습 등 많은 면에서 중대한 비잔티움의 영향을 체험하였다. 러시아의 비잔티움 정교도입은 국가와 민족의 이념적 통일과 더불어 비잔티움과 기독교 세계에 유대감을 심어주었으며 민족문화 발전에 강력한 자극을 주었다. 아울러 정교의 황제교황주의 속성상 속권이 교권보다 우위에 놓이는 현상 또한 받아들여졌다. 그 반면에 비잔티움과의 강력한 유대감으로 인하여 동방 비잔티움적인 요소가 가미되었던 관계로 정치문화에서는 비잔티움의 황제전제정치가 받아들여졌으며 동서 교회의 분열이 심화됨에 따라 러시아가 서방문명에게서 고립되는 결과 역시 초래하였다. 블라지미르와 야로슬라프(Владимир) 치하에서 끼예프 러시아는 전성기를 누렸으나 이 시점에서부터 끼예프 러시아와 비잔티움 간의 관계는 적어지기 시작한다. 러시아에 비잔티움 문물이 강력히 도입될 수 있었던 원인은 물론 그 주체인 끼예프 러시아를 언급할 수 있지만 끼예프 러시아가 그 문물의 영향력을 받았던 이유는 도입 당시의 비잔티움 세력 역시 전성기여서 활발한 문물전파가 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잔티움 세력은 야로슬라프 시대를 고비로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또한 끼예프 러시아 역시 쇠퇴하기 시작했다. 끼예프 러시아와 비잔티움 사이의 마지막 전쟁은 1043년에 벌어졌다. 내분과 점차 활발해진 뻬체네크, 뽈로베츠 등 유목민족의 침입으로 끼예프 러시아는 혼란상태에 빠졌으며 비잔티움 제국도 역시 내분과 상기한 유목민족들 및 노르만, 투르크의 공격으로 영역을 잃고 쇠퇴를 거듭하였다. 그 와중에서 지중해 무역이 번성하여 쌍방 간의 접촉과 교역은 감소되고 마침내 1204년 비잔티움 제국은 제 4차 십자군 원정으로 인하여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면서 거의 해체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로써 끼예프 러시아도 교역로의 단절로 엄청난 타격을 입고 역시 주변 공국들의 독립으로 해체상태에 빠졌으며 1240년 몽골 따따르의 침공로써 붕괴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끼예프 러시아는 멸망하였다. 그러나 끼예프 러시아로 인하여 러시아는 공통의 종교와 언어, 법률, 문화를 소유할 수 있었으며 여기에 비잔티움 역시 한몫을 하였던 것이다. 이후 모스끄바 러시아는 중세 말기 동구권 비잔티움과 슬라브 국가들이 회교세력에게 몰락해 버린 상황에서 따따르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정교 신앙을 지키는 유일한 독립적 세력으로써 정교세계의 자연스러운 중심이 되었으며 1453년 멸망한 비잔티움 제국이 지녔던 동구에서의 맹주권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모스크바는 로마, 콘스탄티노플에 이어 “제 3의 로마”가 되었다. 비잔티움의 정신적인 유산, 그것의 신앙과 정치적 이념과 정신적 이상을 품에 안고 근대 러시아 제국이 출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진) 9세기~1240년의 끼예프 러시아 4. 결론 이상에서 필자는 러시아와 비잔티움 제국의 관계와 이로 인하여 받은 영향을 다뤘다. 그러한 속에서 러시아는 그 지리적, 자연적 위치 조건으로 인해 그 관계가 폭력적이나 평화적이나를 막론하고 비잔티움 제국과 긴밀히 접촉하게 되어 황제교황주의의 정교, 희랍적 성향, 문자, 전제주의, 서구와의 단절성 등등을 위시한 비잔티움 제국의 여러 면을 충실하게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제 3의 로마”를 천명하고 제국의 동구권적 맹주 역할도 계승하여 동구권의 중심지로써 자리잡게 되어 서방열강의 하나로써 세계국가로 나아갈 발판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러시아에게 미친 비잔티움의 영향은 긍정적인 것이 있기도 하였던 반면에 부정적인 것이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결과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 제국이 초기 러시아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는 없으며 또한 러시아가 비잔티움의 역사적 상속자였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이 정도에 그친 것이기는 하지만 이상과 같은 주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믿는다. 무엇보다도 이 작업은 이 장에서 다뤘던 고대 끼예프 러시아뿐만이 아니라 분할공국시대, 모스끄바 왕국, 제정 러시아에서 심지어는 공산소련과 현대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와 문화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지적한 것만으로써도 한국의 러시아 이해에 미력하나마 조력이 되었다고 믿는다. 결국, 피상적이며 조리가 서 있지 않은 것이기는 하지만 비잔티움 문명이야말로 초기의 러시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모식도 중의 하나라는 것은 재확인된 셈이다. 그리고 러시아와 비잔티움 간의 관계와 그 영향력을 더 심도깊게 검토하는 작업은 러시아를 더 깊이 이해하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새삼 생각하는 바이다. 부록) 참고도서 및 참고사이트들 원초연대기 러시아의 역사 러시아사 러시아사 100장면 이야기 러시아사 역사 속의 러시아 문화 천년의 울림 러시아 문화사 러시아 문학사 러시아 고대문학 선집 2 슬라브 문자의 창제자 성 끼릴과 함께 떠나는 중세 여행 로마제국 쇠망사 비잔티움 제국사 비잔틴 제국의 역사 종횡무진 동로마사 서양중세사 서양사개론 야후 지식검색대 엠파스 지식검색대 네이버 지식검색대 세계사사전 http://www.koreaag.net/r_history.html http://www.imr.co.kr/graceboard/ftp/1222.hwp http://web.skku.edu/~russian//guest3/wwwboard-3.0.1/data/chuchun2/%c1%df%be%d3%b4%eb%20%b7%af%bd%c3%be%c6%20%bf%aa%bb%e7%20%bc%d2%b0%b3.htmhttp://bread4u.org/cgi-bin/shalom//read.cgi?board=data&y_number=27&nnew=1 http://www.chosun.ac.kr/~shebkim/class/class1/class1-7.htm http://blog.hanafos.com/blogview.asp?blogerid=tana0809&cateno=747&serialno=4 http://www.kyungnam.ac.kr/russia/dong1.htm http://jjulim.com/jjulim/tamgu/tam7.htm http://segero.hufs.ac.kr/scripts/article_view.asp?JNAME=IANR&ISSUEID=124&SECID - http://artworldcup.com/2002/cul_worldcup/russia/art_russia_con5.htm http://www.dongiee.net/kg/kg_1/05ost/Fr0417.htm http://www.manmin.or.kr/mmzine/html3/2003_3_11.htmhttp://www.duokorea.com/duokorea/duo-tourrussia/ru99/ru99-978.htm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201&no=704 http://www.paichai.ac.kr/%7Erussia/intro_rus/history.htm#1-1.%20키예 프%20공국(882∼1240) http://russianeye.com/culture/life/data/russian-ortho.htm http://bh.kyungpook.ac.kr/~leor/ma/matop05.htm |
첫댓글 아니요 저는 단지 망한 카페에서 펌질 한거 밖에 없는데요 뭘
제가 다니는 카페에는 네스토르의 관한 자료는 없는거 같네요
헐 11세기 12세기면 정말 늦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