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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1 <예썰의 전당> [29회] 무엇이 마음을 흔드는가, 알폰스 무하. 2022년 12월 04일 방송 다시보기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 '자화상(Self Portrait), 1899년, 21x32cm, 프라하 무하박물관 소장
✵ 예썰의 전당 스물아홉 번째 주제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민족의 마음을 흔들었던 화가 알폰스 무하. 그의 그림은 어떻게 세상을 매혹시켰던 걸까? 무하의 삶과 그림에 얽힌 예썰을 풀어보자.
사람들을, 시대를 유혹한 예술 - 톱스타의 마음을 사로잡은 체코의 국민 화가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 예썰 하나, 무명 화가 알폰스 무하, 포스터 한 장으로 톱스타의 마음을 흔들다! 1894년 크리스마스 연휴, 인쇄소에 홀로 남아있던 만년 서브 아티스트 알폰스 무하에게 우연한 기회가 찾아온다. 연극 지스몽다(Gismonda)의 주연 배우이자 당대 파리의 탑스타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의 포스터 주문을 받게 된 것! “여태껏 보지 못한, 색다른 연극 포스터”를 주문한 사라 베르나르는 기존의 틀을 깬 무하의 포스터에 한눈에 반하고, 6년 전속 계약까지 제안한다. 그렇게 무하의 포스터는 파리 시내 곳곳에 붙었고, 이는 대중의 마음까지 흔든다. 거리에 붙은 지스몽다를 시민들이 하룻밤만에 몽땅 떼어갈 정도였다고. 무하의 포스터 속 어떤 매력이 사람들을 이토록 매혹시켰던 걸까.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1860-1939), 〈지스몽다(Gismonda)〉 공연 포스터, 1894년
당시 유행한 툴루즈 로트레크(Toulouse-Lautrec)의
'아리스티드 브뤼앙(Aristide Bruant), 카바레에서', 1893년 광고
사진작가 펠릭스 나다르(Félix Nadar, 1820~1910)가 찍은 배우 '사라 베르나르( Sarah Bernhardt , 1844-1923)'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1860-1939), 〈황도십이궁(Zodiac Wheel)〉. 1896년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1860-1939), 〈카멜리아의 여인(La Dame aux camelias)〉 공연 포스터
무하는 이 시기에 사라를 위한 작업 외에도 다양한 회화, 포스터, 삽화를 그렸으며, 보석이나 카펫, 벽지 디자인을 했다. 그의 스타일은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양식으로 추앙받으며 화가로서의 명망까지 얻게 해 주었다.
달력으로 만들어져 판매된 〈파리스의 심판(Judgement of Paris)〉과 〈황도십이궁(Zodiac Wheel)〉은 주문량이 인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으며, 〈사계(The Four Seasons, 1896)〉 연작 장식 패널 역시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4개의 예술〉, 〈하루 4번의 시간〉, 〈4개의 보석〉 등 소재를 달리하여 계속 제작되었다. 또한 다양한 잡지와 단행본 삽화를 제작했으며, 빈 분리파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1860-1939), 〈파리스의 심판(Judgement of Paris)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1860-1939), 〈사계(The Four Seasons)〉는 아르누보(Art Nouveau) 대표작 중 하나
아르누보(Art Nouveau)는 '새로운 예술'이란 뜻으로 19세기 말 유행, 주로 자연과 여성에서 모티브를 가져옮
알폰스 무하, '네 가지 보석', 1900년경, Richard Fuxa Foundation
알폰스 무하, '한스 마카르트', Charlotte Wolter as Messalina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가 설계·건축한 성당 사그라다 파밀리아
(Temple Expiatori de la Sagrada Família: 성 가족 성당)는 산과 자연에서 모티프를 삼음
새로운 무하의 스타일에 열광한 파리 시민들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 1819-1880)의 ‘지옥의 오르페우스’ 중,
1858년. 캉캉춤으로 유명한 음악이 유행하고...
벨 에포크(Belle Époque)는 유럽사의 시대 구분 중 하나로,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시절'이란 뜻을 지닌 단어이다. 보통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전 유럽이 평화를 누리며 경제, 문화가 급속하게 발전한 태평성대를 뜻한다.
✵ 예썰 둘, 독보적 화풍으로 파리지앵을 유혹한 무하의 광고, 벨 에포크(La Belle Époque)를 물들이다! 무하가 활동하던 당시 파리는 아름다운 시절, ‘벨 에포크’를 지나고 있었다. 신기술이 쏟아지고, 중산층이 대거 등장하며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번영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생산도 소비도 활발해지던 당시의 흐름은 자연스레 마케팅이 중시되는 ‘광고의 시대’를 불러왔다. 이때 광고주들은 포스터 한 장으로 대중을 사로잡은 알폰스 무하에게 앞다퉈 작업을 의뢰했고, 유혹적이고 우아한 무하의 그림은 파리지앵들을 매혹시켰다. 포스터뿐 아니라 제품 일러스트, 액세서리, 실내 장식까지 벨 에포크의 파리 곳곳에는 무하의 작품이 있었다는데. 무하는 어떻게 한 시대의 마음을 흔든 것일까.
* 벨 에포크(La Belle Époque) : 프랑스에서, 19세기 말부터 제일 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기간을 이르는 말. 문화와 예술, 과학 기술 등 여러 방면에서 평화와 번영을 누린 시기이며, 프랑스어로 ‘좋은 시대’를 뜻한다.
장 베로, '카퓌신 대로' - 거리에 광고가 많이 눈에 띈다
대중의 마음을 유혹하는 광고의 시대, 시선을 사로잡는 거리의광고
'비스킷 광고포스터', 1899년
'담배 종이 회사 광고 포스터', 1896년
감은 눈과 옅은 미소, 황홀한 표정의 여성
시대의 분위기를 광고에 녹여 여성 소비자를 공략
남녀 모두를 사로잡은 무하의 광고
담배= 경제적, 사회적 해방의 상징, 당당한 신여성의 이미지
"대중의감각을 자극하고
그들을 깨우기 위해서
예술가는
유혹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1860-1939)
✺ 알폰스 무하의 광고 포스터들
알폰스 무하는 1894년의 어느 연말의 밤에 급하게 그린 사라 베르나르의 연극 지스몽다 포스터 하나로, 파리 최고의 일러스트 계의 스타로 등극하게 된다. 그가 일하는 인쇄소와 그에게 갑자기 일거리가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는 르페브르-유틸사의 비스켓 광고, 조브사의 담배마는 종이 광고, 랑스사의 향수 광고, 네슬레의 유아식 광고, 뤼나르 샴페인, 이디알 초콜렛, 뮤스 맥주, 모에샹동 샴페인, 트라페스틴 브랜디, 페르펙타 자전가 등의 포장지 일러스트와 광고 포스터들을 수주해내고 이들을 그려낸다.
모두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과 아라베스크나 기하학 무늬가 가득한 아르누보 스타일의 일러스트였다. 그는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해 파리의 초대형 인쇄소인 샹파누아 Champenois로 인쇄소를 옮겨 작업하기 시작한다. 그의 디자인은 워낙 인기가 좋았던 모양이다. 사실 그의 아르누보 스타일 그림은 지금도 상품 모장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나머지 그림은 그냥 보시면 될 것 같지만, 재미있는 것 두 가지만 지적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맨 먼저 이야기할 것은 아래 있는 PLM 철도회사를 위해 제작된 모나코와 몬테카를로 광고 포스터이다. 철도를 타고, 모나코와 몬테 카를로 (몬테 카를로는 007 영화로 유명한 카지노가 있는 모나코의 일부이다. 모나코 자체가 면적이 2평방킬로미터 밖에 안되는 바티칸 시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번째로 작은 나라이기에, 구역 구분이 의미가 있나 싶기는 하지만)로 놀러오라는 관광지 광고 포스터이지만, 이 포스터에는 보통 관광지 광고의 주인공이 되는 경치가 보이질 않는다. 포스터에는 모나코 가기를 동경하는 듯한 예쁜 아가씨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꽃과 나뭇잎, 새 모양으로 장식된 리스가 배경을 이루고 있다. 모나코의 해변이 아가씨의 모습과 리스에 가려 잘 보이지 않게 배경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 광고 포스터는 알폰스 무하 일러스트의 인기에 편승한 광고인 셈이다.
맨 아래에서 두번째 그림도 재미있다. 120년전에 만들어진 유명 연예인을 이용한 광고이다. 알폰스 무하를 유명하게 해준 사라 베르나르가 루앙텡이라는 나라의 공주로 분장하여 출연한다. 루앙텡 Lointaine이라는 나라는 실제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다. 슈렉에 나오는 피오나 공주의 나라인 겁나먼 왕국 Kingdom of Far far away처럼 그냥 겁나먼 왕국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녀는 두손을 턱밑에 모으는 이제는 유명해진 순진무구한 표정과 포즈를 취하고 말한다. "르페브르-유틸 과자 하나보다 좋은 것은 르페브르-유틸 과자 두개 뿐이에요"라는 대사를 한단다.
〈르페브르-유틸 회사의 샴페인비스켓 광고 포스터(Poster for 'Biscuits Champagne Lefevre-Utile')〉,
1896-1890년대, 석판화, 35x52cm, 무하박물관 프라하 아르누보./
〈랑스 회사 로도 향수 광고 포스터 디자인(Poster for 'Lance Parfum Rodo‘)〉,
1896년, 32x45cm, 석판화, 프라하 무하박물관.
〈조브 회사의 담배말이 종이 광고 포스터(Poster for 'Job' cigarette paper)〉,
왼쪽은 1896년, 오른쪽은 1898년 작품, 모두 석판화, 무하박물관 소장.
〈PLM 철도회사의 모나코-몬테카를로 철도 광고(Poster for 'Monaco Monte-Carlo' PLM railway services)〉,
1897년, 77x111cm, 석판화, 무하박물관 소장./
〈네슬레 회사의 유아식 광고(Poster for 'Nestle's Food for Infants')〉,
1897년, 35x72cm, 석판화, 프라하 무하박물관.
〈모에 샹동 회사의 샴페인 광고(Poster for 'Moet et Chandon')〉,
1899년, 양쪽 모두 20x60cm, 석판화, 무하박물관.
〈르페브르-유틸 회사 광고를 위해 겁나 먼 왕국의 공주로 분한 사라 베르나르
(Sarah Bernhardt as Princesse Lointaine for Lefevre-Utile〉, 1903년, 53x72cm, 석판화, 프라하 무하박물관.
〈첼로연주자 즈덴카 체르니의 유럽순회공연 포스터 디자인과 포스터
(European Tour of the Cellist Zdenka Cerny)〉, 1913년, 석판화, 무하박물관.
1900년 만국박람회, 프랑스 파리에서 1900년 4월-11월까지의 화려한 축제 속에서 깨어난 민족주의
✵ 예썰 셋, 성공을 뒤로하고 생애 끝까지 그려낸 20점의 연작, 민족의 마음을 흔들다! 파리에서 상업화가로 성공을 누리던 알폰스 무하. 뜻밖에도 무하는 파리에서의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으로 향하는데. 이젠 자신의 마음을 흔드는, 고국 체코와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그리고자 결정한 것이다. 미국에서 만난 후원자의 지원으로 무하는 고향 체코로 돌아가 20여 년 동안 슬라브 민족의 천 년 역사를 담은 20개의 연작을 그려낸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슬라브 서사시. 이 작품은 방대한 역사를 담은만큼 웅장한 크기를 자랑하는데. 연작을 모두 이으면 가로길이가 무려 120m에 이른다고 한다. 이토록 거대한 슬라브 서사시는 지배당하고 억압당한 역사를 지나온 슬라브 민족의 마음에 어떤 울림을 남겼을까.
예술가로서 가슴속에 담아왔던 꿈
“체코와 민족을 위한 그림”
뜨거운 민족애를 안고 새로운 예술 인생을 위해 1904년 미국행을 선택한 알폰스 무하
알폰스 무하의 마음을 흔든 스메타나(Bedřich Smetana)의 교향시 〈나의 조국(Symphonic Poem Ma Vlast)〉
찰스 리처드 크레인(Portrait of Charles Richard Crane, 1858-1939)
1909년에는 사업가 찰스 리처드 크레인(Portrait of Charles Richard Crane)을 만났다. 그는 후일 체코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토머스 마사리크(Tomas G. Masaryk, 1850~1937)와 절친한 사이로, 슬라브 민족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크레인은 고향에 정착하여 슬라브 색채를 띤 예술 작품에 전념하고 싶다는 무하의 의지를 이해하고 그를 후원하기로 한다.
모라브스키 크룸로프 성(Moravský Krumlov Chateau)
남부 모라비아(South Moravia)에 위치한 모라브스키 크룸로프 성(Moravský Krumlov Chateau)은 중세의 성이다. 16세기 리파(Lipá) 영주의 통치 기간에 르네상스 성으로 변신했다. 성의 중앙에는 안뜰을 가진 형태로 3층에는 아름다운 아케이드가 있는 사각형의 건물이다. 전쟁 기간 동안 스웨덴 군대가 성의 많은 부분을 파괴했기 때문에 성은 여러 차례 수리와 공사를 진행했다.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성을 현재의 바로크 양식으로 성을 재건했다. 알폰스 무하(Alfons Mucha)가 1910년부터 중부 보헤미아의 즈비로흐 성(Zbiroh château)에서 슬라브 서사시를 그리는데 18년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하는 이듬해 가족과 함께 체코로 돌아와 작업실을 마련했다. 그리고 체코의 역사와 민족애를 담은 〈슬라브 서사시(Slav Epic)〉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슬라브 역사의 대변혁기를 단계별로 묘사한 것으로, 총 20점, 제작 기간 20여 년에 달하는 기념비적인 대작이다. 〈슬라브 민족의 원고향〉, 〈니콜라 즈린스키의 시게트 방위〉, 〈스반토비트 축체〉, 〈그룬발트 전쟁이 끝난 후〉, 〈얀 야모스 코멘스키의 마지막 날〉, 〈성 아토스 산〉 등이 대표적으로, 10작품은 체코의 역사에서, 나머지 10작품은 다른 슬라브 국가의 역사에서 제재를 선택했다. 그는 범게르만주의의 폭력적인 억압에 대한 저항 의식을 담아 슬라브 민족이 여기에서 벗어나 화합을 이루기를 소망했다. 그러는 와중 체코어를 가르치는 사설학교 설립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브르노의 남서 모라비아를 위한 국민연합 복권〉, 〈위협〉을 제작하기도 했다.
〈브르노에서 개최 된 슬라브 서사시 전시회 포스터(Slav Epic poster-Alfons Mucha)〉, 1930년.
1919년, 〈슬라브 서사시(Slav Epic)〉 11점이 프라하에서 공개되었으며, 이듬해 미 전역에서 열린 무하의 회고전에도 전시되었다. 총 관람객 60만 명에 달하는 전무후무한 전시회였다. 무하는 1926년에야 〈슬라브 서사시〉를 모두 완성했다.
No 1.The Slavs in Their Original HomeLand,1912년, Tempera on canvas, 610 X810cm, 체코프라하 무하 미술관.
1. 고향 슬라브-투란 채찍과 고트족의 칼 사이에서 - ‘투르크 채찍과 고트식 검’은 슬라브족들의 평화로운 마을을 무력으로 헤집는 이방의 침입자를 상징한다.
별이 총총한 검푸른 밤에 유목민 집단이 약탈한 고대 슬라브 마을이 불타고 있다. 유목민들은 나이 들고 힘없는 마을 주민들에게 무력을 행사하며 이들을 한꺼번에 몰아내고 있고, 젊은 사람들을 흑해 북쪽의 항구 오데사(odessa)에 서는 노예 시장으로 데려가려고 옷을 벗기고 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남녀 한 쌍이 앞에서 웅크리고 있다. 이 잔혹한 밤에 유일하게 붙잡히지 않고 목숨을 건졌지만 그들의 눈동자 속에는 공포와 전율이 가득하다.
두 사람을 땅에 바싹 엎드리게 만든 두려움 속으로 증오와 복수심 그리고 평온히 살고픈 바람이 뒤섞여 스며들고 있다. 이들의 간절함은 침략으로 고통 받는 종족에게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도록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고대 민간신앙 속 사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제의 오른팔을 부축하고 있는 붉은 옷의 전사는 전쟁을 상징하며, 나뭇잎관을 머리에 쓰고 흰옷을 입은 처자는 평화를 상징한다.
No 2. The Celebration of Svantovit in Rugen, 1912년, 캠버스에 템페라, 610 X 810cm, 체코프라하 무하 미술관
2. 루야나 섬의 스 반트 바토 축제, 신들이 싸울 때 구원은 예술의 - 그림의 신전에서 특사들과 화관을 쓴 대사제가 나오고 있다. 제물로 바쳐질 힘의 상징인 황소를 몰고 가는 모습도 보인다. 그림 중앙 상단에는 슬라브의 마지막 전사가 숨이 다해 가며 신성한 백마 위에서 스반토빗 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앉아 있다.
오른쪽 상단에는 게르만 민족을 상징하는 떡갈나무가 있지만, 스반토빗 신의 손에는 심장 모양의 잎이 달린 보리수나무 가지가 새롭게 자라나고 있다. 보리수나무는 슬라브 민족을 상징한다.
해변에 면한 가파른 벼랑 밑에서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에 모든 사람들이 흥에 겨워 노래하며 춤추고 있다. 그림 중앙 아랫부분에 아이를 안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여인의 표정은 그녀의 종족에게 얼마나 애달픈 미래가 닥쳐올지 예감하고 있는 듯 음울해 보인다.
무하가 오늘날 독일 영토에 속하는 루야나 섬에서의 스반토빗 숭배를 작품으로 그려 낸 것은 슬라브족이 누렸던 과거의 영광과 초민족적인 영향력을 되살리고자 하는 자긍심의 발현이다.
No 3 Introduction of the Slavonic Liturgy in Great Morvia,1912년, Tempera on canvas, 610 X 810cm, 체코프라하 무하 미술관.
3. 큰 보헤미아의 슬라브인 전래의 도입, 하나님을 찬양하다라는 뜻이다.(대모라비아 왕국에서의 슬라브 예배의식 도입) - 이 그림은 대모라비아 왕국의 수도 벨리그라트를 배경으로, 모국어 예배의 시작을 기리는 작품이다.
정면 안마당의 높은 자리에 측근들로 에워싸인 스바토플록 왕(svatopluk, ?-894)이 앉아 있고 그 앞에 주교와 귀족들이 있다.
스바토플록은 로스티슬라프 왕의 아들이다. 부사제는 교황이 메토디우스를 대주교로 임명하고 스라브어 미사 집전을 허용하는 교서(Industriac Tuac), '그대의 열망‘이라는 뜻을 읽고 있다. 상단의 가장 왼편에 있는 사람들은 프랑크족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의무적으로 확산됨을 상징한다.
그 아래 모자가 달린 흰옷을 입고 머리 주변에 후광을 두른 사람은 형 메토디우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천상에서 대모라비아 왕국을 수호하는 찌릴콘스탄틴이다.
원형 건물인 로툰다 맞은 편에 있는 제자 행렬의 선두에는 메토디우스가 존경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부축하는 부사제들을 양 옆에 두고 서 있다.
공중에 비잔틴미술의 이콘처럼 묘사된 네 사람은 9세기 중엽에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제1차 불가리아제국(681-1018)의 보리스 1세 부부와 9세기에 키예프 러시아를 세운 이고르1세 왕 부부이다.
작은 배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중앙 상단의 두 인물은 988년 키예프 공국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성 블라지미르의 아들 글렙과 보리스로, 이들은 선원들의 수호신이자 상인들의 보호자로서 슬라브 민족 사이에 그리스도교가 닻을 내리게 됨을 상징한다.
앞에서 오른손에 원을 들고 왼 주먹을 불끈 쥐고 서 있는 젊은이는 슬라브 민족이 바라 마지 않는 힘과 화합의 상징이다.
NO 4. Tsar SimeonⅠof Blgaria, 1923년, Tempera on canvas, 405 X 480cm, 체코 프라하 무하 미술관.
4. 불가리아 황제 시메온, 슬라브 문학의 샛별(불가리아제국의 황제 시메온) - 이 작품을 통해 무하는 시메온 황제의 계몽적 통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배경은 발칸 반도 북부에 있는 시메온 황제의 도시 벨키 프레스라프이다. 이 그림은 비잔틴 양식으로 장식된 황궁의 모습을 훌륭히 재현했다.
황실의 서기들은 비잔틴 문헌들의 주옥같은 사상을 모아서 기록하거나 연장자들의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과거로부터 전해 오는 삶의 지혜를 받아 적고 있고 수도사들은 문학작품을 손수 베껴 쓴다.
시메온 황제는 학자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이들의 의제를 주관하며 조언을 건넨다. 스승과 책을 찾아 도래하는 다른 나라의 특사들도 맞이하고 있다.
No 5. King Premisl OtakarⅡof Bohemia, 1924년, Tempera on canvas, 405 X 480cm,체코 프라하 무하 미술관.
5. 보헤미와 왕 뿌세미스르·오타카르 2세(슬라브 왕조의 통일) - 프레미슬 오타카르Ⅱ는 1253년 부터 1278년까지 보헤미라를 통치했다. 그는 또한 군사적으로 철의 왕으로 알려졌고 쿠트나 호라(Kutna Hora)의 은광에 재산을 축적해 '황금왕'으로 불린다.
그는 보헤미안 후손들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으로 13세기 슬라브 군주들 사이에 긴밀한 연계를 구축할 책임을 맡았다. 브란덴부르크의 조카 쿤 후타가 항가리의 벨라 4세의 아들과 결혼한 것을 계기로 오타카르 Ⅰ는 참석자 전원과 지속적인 동맹 맺기 위하여 슬라브 통치자들을 초대하였다.
이 작품은 13세기 보헤미아 왕국의 가장 강력한 통치자가 모라바 강(체코,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를 걸쳐 흐른다) 과 다뉴브 강(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헝가리를 걸쳐 흐른다)이 합류하는 곳에 세워진 도시에 나와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 속 채플은 프르제미슬 왕가에 귀속되는 곳으로, 벽면에는 왕가의 문장, 즉 날개를 펼친 독수리가 그려져 있다. 프르제미슬 오타카르 2세는 그림 한가운데에 결혼식이 거행되는 휘장 안에서 하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주변에는 귀족들이 서 있다. 헝가리의 벨라 4세도 가족과 함께 참석했다.
No 6. The Coronation of the Serbian Tsar Stefan Uros Dusan as East Roman Emperor,1926년, Tempera on canvas, 405 X 480cm, 체코 프라하 무하 미술관.
6. 세르비아 왕 슈테판 두샨과 그의 대관식(슬라브 법전) - 슈테판 두샨은 1346년 부활절에 오늘날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스코페에서 세르비아 황제로 즉위하는 대관식을 치렀고, 이로써 고대 로마를 계승하고 있음을 선포했다. 이 작품은 대관식 직후의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투구, 허리띠 그리고 검을 받쳐 든 유력자들이 행렬의 선두에 서고 행정관은 국새를 들고 있다. 호화로운 대관식 가운을 입은 황제는 손에 권력의 징표인 곤봉 모양의 비잔틱식 권표(權標)를 들고 있다. 황제와 황후가 가는 길에 꽃잎이 달린 잔가지를 손에 든 처자들이 꽃을 뿌린다. 황제의 아들이 그 뒤를 따르고 바로 뒤에는 대관식을 거행한 세르비아 정교회 장로가 따르고 있다. 성직자, 유럽 황실의 특사들, 귀족과 하객들이 행렬 후미에 있다. 호화롭게 차려 입은 귀부인들이 높은 연단에서 새로운 황제를 환영한다. 성당 앞쪽에 나란히 선 기사들도 황제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 행렬 속에는 보헤미아 왕국의 통치자 카렐 4세의 특사도 있다. 카렐 4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했고 슈테판 두샨은 동로마제국을 계승한 황제였다. 무하는 신성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의 영광이 슬라브인들의 손에 있었던 시대를 이 작품에서 넌지시 내비치고 있다.
No 7. Milic of Kromeriz, 1916년, Tempera on canvas, 620 X 405cm, 체코 프라하 미술관.
7. 크로믄네르지즈 출신의 얀 밀리츠(수녀원에서 태어난 창녀) - 크르모지치의 밀리치는 촬스 4세의 교회와 궁정에서 책임있는 위치를 찾이하고 있는 학식있는 신학자였다. 면죄부와 성직자의 부도덕에을 혐오하고 도시의 빈민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 교회의 위반에 대하여 설교하고자 사임하였다.
이 작품은 매음굴의 흔적과 거리에서 구경하는 군중들을 묘사하고 있다. 안식처가 들어서는 공사현장의 발판 앞부분에서 얀밀리츠가 거리의 여자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다. 여자들은 그의 말에 감화를 받아 몸에서 장신구를 떼고 참회한다. 천으로 입을 막고 앉아 있는 여자는 참회와 남모르게 베푸는 선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공생하는 삶 속에서 고통 받는 타인을 돕는 인간의 미덕을 표사했다. <슬라브 서사시>속에서 기린 얀 밀리츠의 명예는 사회적 지위가 아닌 그의 인간애로부터 왔다.
No 8. After THe Battle of Grunewald,192년3, Tempera on canvas, 405 X 620cm,체코 프라하 무하 미술관.
8. 그룬발트 전투 이후(북부 슬라브의 통일. 1924년) - 피비린내 나는 격전 이튿날 동이 틀 무렵을 묘사하고 있다. 교황과 프로이센 황제의 지지를 등에 업고 광대한 영토까지 소유하고 있던 독일기사단의 대병력은 결국 참패했고 폴란드 왕 브와디스와프 2세는 격전지의 승리를 직접 두 눈으로 보기 위해 행차했다.
그는 이 엄청난 광경에 말을 잃은 채 얼어붙은 듯 언덕위에 서 있다. 언덕 밑에는 독일기사단의 총지휘관 융긴겐이 가슴에 십자가를 올려놓은 채 숨이 끊어져 있고, 그 주변으로 시신들이 수없이 널려 있다.
검은 십자가가 표시된 흰옷의 독일기 사단은 초토화되었지만,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른 연합군 병사들의 시신도 브와디스와프 2세의 눈에 들어아 슬픔이 차오른다. 흰 두건을 쓴 성직자는 전투의 선봉에 섰던 병사들을 비롯해 모든 전사자들에게 축복을 내린다.
폴란드와 발트 해 연안의 리투아니아는 이렇게 독일기사단의 세력을 저지시켜 슬라브의 영토을 확보했다. 이 작품은 슬라브 연합군의 승전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자성이자 평화적 공생에 대한 무하의 절절한 호소이다.
No 9. Master Jan Hus Preaching at the Bethlehem Chapel : Truth Prevails, 1916년, Tempera on canvas, 610 X 810cm, 체코 프라하 무하 미술관.
9. 얀 후스의 베들레헴 예배당 설교(진실은 승리한다) - 무하는 이 작품에서 후스가 일반 대중이 알아듣기 쉽도록 모국어인 체코어로 설교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이곳으로 스며든 빛은 체코 민족을 위한 희망과 진리처럼 예배당을 환하게 비춰 주고 있다. 당시 프라하의 베들레헴 예배당은 백성에게 체코어로 설교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다양한 계층 사람들이 후스의 설교를 들으러 왔다. 연단 밑에서는 학생들이 경청하며 필기를 하고 있다. 왼쪽 예배당 벽 근처에 모자를 쓰고 흰 옷을 입은 사람은 후스주의 전쟁에서 수훈을 세운 얀 지슈카 장군이다. 천개(天蓋) 밑에서 조피에 왕비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후스는 왕비의 고해를 들어 주는 성직자였고, 그녀는 후스를 대신해 남편 바쯜라프 4세에게 의견을 피력해 주었다. 바쯜라프 4세는 후스의 사상을 초기에는 지지했지만,1412년에 면죄부를 공식적으로 옹호하면서 후스와는 사이가 멀어졌다. 오른쪽 성수반 곁에서 두건을 쓰고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는 인물은 후스의 설교 내용을 파악하려는 가톨릭 교단의 밀사이다.
No 10. The Meeting at Krizky , 1916년, Tempera on canvas, 620 X 405cm, 체코 프라하 무하 미술관.
10. 크르지슈키에서의 집회(개신교 신앙) - 후스주의 전쟁 초기를 모티프로 하는 이 작품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후스의 영향을 받은 이종배찬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이종배찬을 지지하던 설교자 바쯜라프 코란다(Vaclav Koranda,?-1453)가 후스가 죽은 후 보헤미아 왕국 내 종교개혁가들의 선봉에 섰다.
그림 오른쪽에 보이는 코란다는 오두막집 위에 임시로 만든 발판을 딛고 서 있다. 실지로 1419년 9월 30일에 북보헤미아의 크르지슈키(Krizky) 마을에서 열렸던 집회에서 그가 후스주의자들에게 설교했던 장면이 표사되어 있다. 그는 후스주의 신앙을 지키려면 무장도 필요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킨다. 게다가 당시 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무장을 하고 왔다.
No 11. After The Battle of Vitkov, 1916년, Tempera on canvas, 405 X480cm, 체코 프라하 무하 미술관.
11. 비트코프에서의 전투 이후(하나님은 권력이 아니라 진리를 전하였다) - 이 작품은 지슈카 장군이 혁혁한 승리를 거둔 후에 자신의 병사들과 함께 비트코프에서 내려온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야외 제단 옆에 후스주의 성직자가 미사용 빵을 들고 있고 다른 성직자들은 신실한 복종과 감사의 기도를 하며 땅에 엎드려 있다.
승전을 거둔 이들은 함께 신에게 감사기도를 올린다. 제단 뒤에 한 남자가 앉아서 기도하는 이들을 위해 오르간으로 성가를 연주하고 있다. 왼쪽 아래의 젊은 전사는 다리에 난 상처를 동여 매고 있고, 강인해 보이는 아낙이 새로운 세대의 상징인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
왼쪽 뒤편으로는 햇살이 비치는 포르지츠 성문이 성곽과 함께 보이고, 오른쪽 뒤에는 비트코프 언덕의 윤곽이 드러나 있다 붉은색 망토를 걸친 지슈카 장군 발 밑에는 전리품들이 놓여 있다. 신의 가호를 받은 전사들이 거둔 이 기적적인 승리에 감격해 지슈카 장군은 큰 고마움을 표한다.
비트코프는 지슈카 장군의 이름을 따서 1877년에 지슈코프(Zizkovfh) 명칭이 바뀌었고, 오늘날 이 언덕에는 얀 지슈카 장군의 기마상이 서 있다.
No 12. Petr of Chelcice, 1918년,Tempera on canvas, 405 X 620cm, 체코 프라하 무하 미술관.
12. 보드나치니의 페트르 헬치기(약을 약으로 대응하지 말라) - 초토화되어 불타오르는 도시에 두터운 연기 기둥이 피어 오른다. 이곳 사람들은 우선 가까운 곳으로 피신하여 죽은 자들과 부상자들을 연못가에 내려놓는다. 그림 중앙 뒤편에 도피 행렬이 보이고, 그림 왼편 아래쪽에는 바구니에 접시 몇 개만 챙겨 가까스로 들고 나온 소녀가 울고 있으며, 옆의 여자는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에 통곡하고 있다.
오른쪽의 어린아이는 오싹했던 광경에 힘들어하며 혈육의 품에 매달려 있다. 불타는 삶의 터전을 망연자실해서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속에는 복수하겠다는 생각이 싹튼다. 이 그림의 중앙에 헬치쯔키의 모숩이 있다. 울분에 차서 주먹을 쥔 채 으름장을 놓는 사내를 붙들고 헬치쯔키는 용서의 힘에 대해 말한다.
“분노에 휘둘리지 마시게나. 악을 악으로 되갚아서는 아니 되네. 마음에서 악을 내려놓으면 악은 스스로 사라진다네.”
No 13. The Hussite King Jiri z Podebrad, 1923년, Tempera on canvas, 405 X 480cm,체코 프라하 무하 미술관.
13. 후도스 국왕 보제부라디의이지(조약은 존중 할 것) - 그림에서 보이듯 교황의 서신에 대한 이르지 왕의 반응은 매우 즉각적이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의자가 넘어져 나뒹군다. 이르지 왕은 후스주의를 단념하거나 백성의 뜻을 어기면서까지 교황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왕이 의자를 권하지도 않아 교황의 특사들은 서 있다.
지난번 보헤미아 왕국의 특사들도 로마에서 자리에 앉으라는 권유도 못 받고 교황 앞에 서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교황의 특사들은 이르지 왕의 서슬 퍼런 답변에 새파랗게 질렸던 반면, 보헤미아 왕국의 귀족들은 의기양양하다. 그림 오른쪽 아래에 모자를 쓴 청년은 '로마ROMA'라는 제목의 책을 덮어 버렸는데, 이로써 교황과 이르지 왕 사이의 모든 논의는 끝났음을 상징한다.
No 14. The Depence of Sziget by Nikola Zrinski, 1914년, Tempera on canvas,
610 X 810cm,체코프라하 무하 미술관.
14. 미쿨라슈 즈린스키가 투르크 병사들에 항전한 시게트 요새 방어(기독교 세계의 방패) - 그림은 투르크 병사들이 이미 함락시킨 도시 시게트 요새 방어의 마지막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즈린스키는 잔존한 병사들에게 열화와 같은 고함을 쏟아내며 사기를 돋운다.병사들이 최후의 반격을 준비하고 있는 성은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있다. 사력을 다하고 있는 병사들은 조금이나마 수월하게 움직이도록 모든 무거운 장비들은 아예 내려놓았다. 성문 건너편 연기 자욱한 탑 안에 있는 대포는 파죽지세의 투르크 병사들을 지옥의 화력으로 맞이한다.
적군에게 이 도시를 결코 내어 줄 수 없기에 병사들은 죽음을 불사하며 방어하고 있고, 부녀자들까지 전투에 뛰어든 가운데 즈린스키의 아내가 불 붙인 송진 주머니를 화약고로 힘껏 던져 넣는다. 다른 여자들도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그녀에게 합세한다.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항전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신앙과 영토 수호에 목숨을 바친 슬라브 민족의 기백을 되새긴 장면이다.
요새 폭발을 표현하며 그림을 세로로 나누고 있는 검은 연기 기둥은 자유를 향한 불굴의 의지를 지닌 인간 생명이 치르는 고귀한 희생을 상징한다.
No 15. The Printing of The Baible of Krilice in Ivancice, 1914년, Tempera on canvas,
610 X 810cm, 1914년, 체코프라하 무하 미술관.
15. 이반치체에서의 성경 인쇄(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 이 작품에서 무하는 도시 성곽과 성당 탑이 있는 자신의 고향 이반치쩨를 유럽 종교사의 한 장으로 묘사한다.
이 그림은 형제파 교단 학교의 야외수업에 학교의 설립자가 방문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그는 오른쪽 차양 밑에 앉아 새로운 성서 인쇄본을 훑어보고 있다. 왼쪽에는 재미있게도 젊은 시절 무하의 얼굴을 쏙 빼닮은 청년이 앞 못 보는 사람에게 성서를 읽어 주고 있다. 해가 비치는 가을의 정경은 중세 가톨릭의 부패에 저항하고 종교개혁을 부르짖던 ‘후스주의 전쟁(1419-1434)’이라는 격동의 세월이후에 도래한 신앙적 결실의 시간이다. 교회 탑 주변을 선회하고 있는 새 떼는 앞으로도 기나긴 여정이 형제파 신도들에게 남겨져 있음을 상징한다.
No 16. Jan Amos Komensky, 1918년, Tempera on canvas, 405 X 620cm, 체코프라하 무하 미술관.
16. 얀 아모스 코멘스키(희망의 등불) - 무하는 <슬라브 서사시>를 통해 코멘스키가 망향의 회한에 젖은 모습을 그렸다. 그림 속 노년의 코멘스키는 더 나이 들고 병이 깊어지기 전에 저녁마다 해변에 나가 멀리 떨어진 고국을 추억했다. 그림 왼편에는 병약해져 가는 코멘스키를 향한 루이스드 기어의 절망의 제스처, 그리고 코멘스키의 아내 야나의 회한 섞인 비통함이 보인다.
귀향의 꿈은 모래사장 위의 등불처럼 사그라든다. 코멘스키 스스로도 고국의 상황은 자유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암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오랜 기간 투병생활을 하다가 가족과 주치의가 지켜보는 가운데 167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림 속 저 멀리에는 코멘스키가 영면하고 있는 나르덴(Naarden) 실루엣이 어슴푸레 보인다. 코멘스키의 망향의 애환은 바다 너머 어딘가의 이상향을 애타게 그렸던 것일까?
No 17. The Hony Mount Athos, 1926년. Tempera on canvas. 체코 프라하 무하 미술관.
17. 성산 아토스(오소독스 교회 바티칸) - 이 그림은 아토스 산 성모 마리아 사원의 내부이다. 수많은 촛불이 밝혀진 사원 속으로 햇살의 광채가 스며든다.
성화 벽 앞에 선 정교회 성직자가 성스러운 유품들에 경의를 표하는 순례자들을 지켜보고 있다. 그림 왼쪽 하단에는 한 젊은이가 노쇠한 순례자를 부축해 나서고 있다.
둥근 천장에는 스라브 수호성인의 모자이크가 보인다. 성모 마리아 모자이크 아래에는 숭고한 지혜를 지녔다는 지품천사들이 스라브 정교회 수도원들의 모형을 들고 빛의 광채 속에 떠 있다. 중앙에 보이는 두 수호성인은 순결과 신앙을 상징한다. 스라브 문화와 신앙에 빛이 되어 왔던 비잔틴의 성지 아토스 산을 묘사한 이 작품 속에서 무하는 슬라브 민족들 간의 공통분모를 엄숙하게 구현해 냈다.
No 18. The Oath of Omlandina under The Slavic Linden Tree,1926~1928년, Tempera on canvas,
405 X 480cm, 체코 프라하 무하 미술관.
18. 슬라브 보리수나무 아래서 서약하는 젊은이들(슬라브 민족의 각성) - 이 작품에서 무하는 체코 민족의 자유와 슬라브 민족들의 결속을 다지는 의지를 표현한다.
그림에는 거대하고 신성한 슬라브 보리수나무가 등장하는데, 과거로부터 보헤미아·모라비아·실레지아 사람들은 결혼식이나 기념할 일이 있을 때 보리수나무를 심는 풍습이 있었다. 보리수나무 아래서 설교를 하거나 마을회의를 열기도 했다.
보리수나무가 체코 민족의 국목國木이 된 것은 1848년 6월에 슬라브 민족 사절단들이 프라하에 모여 개최했던 전 슬라브 회의에서였다. 독일을 상징하는 떡갈나무에 대응되는 보리수나무는 슬라브 민족의 상징이다.
No 19. The Abolition of Serfdom in Russia, 1914~1915년. Tempera on canvas,
610 X 810cm, 체코 프라하 무하 미술관.
19. 1861년 러시아 농노해방(자유로운 노동은 국가의 기반이다) - 이 작품에는 또 다른 운명의 굴레를 쓴 이들을 향한 무하의 애잔한 휴머니즘이 표현되어 있다.
이 그림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성 바실리 사원 앞 2월의 싸늘한 오전을 포착해 그리 것이다. 크렘린 궁의 우뚝 솟은 탑과 둥근 연단이 보인다. 이곳에서 러시아 차르의 특별 공표인 농노해방을 전달한 후 차르의 관료들과 귀족들이 떠난다. 광장에서는 시골사람과 도시사람이 함께하며 새로이 주어진 자유와 만난다. 그들은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새로운 가능성에 기뻐하고 다른 이들은 이제 어떡해야 할지 모르고 있기도 하다. 자유를 상징하는 오전의 첫 햇살이 성 바실리 사원(Kremlin and Red Square, Moscow)의 탑들 위에 무겁게 내려앉은 안개를 서서히 뚫고 나온다.
No 20. The Apotheosis of the Slavs, Slavs Humanity, Tempera on canvas,
1926-1928년, 480 X 405cm, 체코 프라하 무하 미술관.
20. 슬라브 민족의 역사 찬미(인류를 위한 슬라브 민족) - 이 그림은 <슬라브 서사시> 연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여기에서 무하는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요약한 초시간적 연합을 네 가지 상징적인 색으로 표현했다.
먼저 푸른색은 신비로운 고대를 표현하고 본향의 스라브인들을 연상시킨다. 검은색은 억압의 시대이다. 프랑크족과 투르크족의 공격, 빌라 호라 전투 패배 이후 거의 300년에 달하도록 지속된 암흑의 시대를 나타낸다. 붉은색은 보헤미아 왕국위 프르제미슬 왕조와 황제 카렐 4세의 영광, 얀 후스의 종교개혁사상, 포뎨브라디 출신의 왕 이르지의 외교적 결단력, 오스트리아-형가리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한다. 그림의 중앙은 기쁨과 자유를 상징하는 황색이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붕괴 이후 여러 슬라브 민족이 자유를 얻었다.
전쟁에서 귀환하는 체코슬로바키아 의용군,이탈리아,프랑스,영국,세르비아 병사들을 사람들이 보리수 나뭇가지를 흔들며 환영한다. 다채로운 슬라브 의상을 입은 여자들이 화환을 엮고 독립을 기념하는 커다란 깃발을 준비하고 있다. 드디어 자유를 맞이하게 된 감격에 벅차 하늘을 향해 고마움을 표하는 노인의 모습도 보인다. 뒤에는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의 국기가 휘날리고 여러 슬라브 민족의 대표자들이 서 잇다. 가장 크게 표현된 것은 승리와 화합의 화환을 손에 들고 있는 슬라브 젊은이의 모습이다. 무지개 아래에서는 그리스도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다.
인생 말년에 들어서 무하는 유행에 뒤쳐진 낡은 양식과 지나치게 민족주의적 색채를 지녔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반전사상, 범게르만주의에 대한 저항 의식을 담은 작품들로 고초를 겪었다. 1939년에 나치가 프라하를 점령하자 무하는 체포당해 구금되었으며,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다. 결국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을 마감했다. 나치는 그의 장례식에 가족만 참석할 것을 명했으나, 10만 명의 인파가 장례식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나는 대중을 위한 예술가가 되기를 원합니다."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1860-1939)
✺ 예술을 일상으로 끌어들인 아르누보의 대가,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201family | 예술을 일상으로 끌어들인 아르누보의 대가,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 Daum 카페
알폰스 무하가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 체코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KBS1 <예썰의 전당> [29회] 무엇이 마음을 흔드는가, 알폰스 무하/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김영은, 청아출판사)/ Daum·Naver 지식백과/ 글과 사진: 이영일 ∙ 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