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신부님과 자원봉사자들이 일군 암갈랑 -------
김 민종
내가 9살 때 아빠가 몽골로 봉사활동을 가자고 했다.
다른 나라 간다는 기대감 반,
왠지 모를 두려움 반으로 꼭 2년만 살고 오겠다는 약속을 받고
가족 모두가 몽골로 떠났다.
처음 도착한 몽골땅은 퍽 낯설었다.
손발이 얼 듯한 추위, 무언가 허술해 보이는 공항,
우람한 어깨에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장사 같은 모습의 몽골사람들.
이 모든 것이 나에게 다가온 몽골의 첫인상이었다.
그 때가 3월 중순이었는데도 바람이 몹시 차서
아빠의 손을 꼭 움켜쥐어야만 했던 기억이 난다.
아빠가 몽골에서 살기로 한 이유는 돈보스코 청소년 센터
이호열신부님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집에서 쫓겨난 아이부터 어려운 집안형편으로 제대로 못 배운
대신 술과 담배부터 배운 아이,
갈 곳이 없어 도시 지하 온수관에 기대 매서운 겨울추위를 견디며
힘겹게 살아가는 아이까지 당장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 아이들과
청소년을 모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가 돈보스코 센타였다.
그곳에 이호열 신부님이 계셨다.
아무 것도 없던 불모지에(6월에도 땅을 파면 얼음이 튀어나왔다) 전기불을 밝힌 학교와 집, 식당이 들어섰다.
이 모든 일이 ‘거지’신부님과 가난한 자원봉사자들,
몽골 아이들 손으로 이뤄졌다.
난 주말이나 방학때 아빠랑 함께 지내며 조금 일을 거들었을 뿐이다.
감자를 심고, 양배추 모종을 내고 비닐하우스에서 오이며 당근, 참외며 고추 같은 갖가지 채소를 위해 물을 주는 일이 내 몫이었다.
그러면서 눈 너머로 기적이 하나하나 이뤄져가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호열 신부님은 스스로 국제거지라고 하신다.
몽골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한국과 미국 같은 여러 나라를 돌면서
온갖 것을 다 모아오셨다.
해마다 3월에 한국에서 컨테이너가 들어오면 나도 짐을 푸는 일을 거들었는데
별별 것이 다 있었다.
운동화, 치약, 양말, 낚싯대는 물론이고 심지어 뽑기 만드는 판과 튀밥 튀는 기계까지 무슨 만물상을 통째로 옮겨온 듯했다.
그런데 신부님은 그 모든 것을 오로지 몽골 아이들만을 위해 쓰셨을 뿐이다. 다 해진 스웨터, 구멍난 양말, 무릎이 다 드러난 바지....
나중에는 몽골 아이들도 신부님 패션(?)을 따라 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돕기 위해 팔걷고 나선 아빠 같은 자원봉사자들도 나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중학생에서부터 선생님, 주부, 은퇴한 의사선생님, 목수, 탈렌트 아줌마까지. 한국 사람뿐 아니라 어떻게 알고 오는지 프랑스와 러시아, 베트남, 미국 등 세계 여러 나라 봉사자들이 암갈랑에 몇 달씩 둥지를 틀었다.
그 분들은 모두 몽골 아이들과 같이 살았다. 가끔 다투더라도 같이 먹고 일하고 놀고 노래했다. 서로 이해하고 더 많이 배려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어린 내 눈에도 다 보였다.
언젠가 코이카 형들에게 들은 얘기다.
몽골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보다 한국 사람들을 더 좋아한다고 했다.
일본이 한국보다 먼저 몽골에 진출하고 고속도로 같이 중요한 시설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그래도 한국 사람들이 더 좋다는 것이다.
이유를 들어보니 어깨가 우쭐해졌다. 한국 사람들은 몽골 사람들과 마치 형제처럼 같이 일하고 같이 먹고 같이 놀면서 진심으로 이해하고 위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맞다. 내가 암갈랑에서 본 신부님과 자원봉사자들이 꼭 그랬다. 아빠는 농사 경험이 없었지만 3년 동안(아빠가 우겨서 1년을 더 살았다) 농사를 지었고 집도 지었다.
왕초보 봉사자 형과 누나들도 40도가 넘는 뙤약볕에 돌담을 쌓고 벽돌을 찍고 나무를 심었다.
나는 그 때 한솥밥을 먹으며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나누는 일이 진짜 봉사란 것을 저절로 배웠다.
끔찍한 사고도 많았다. 여름내 몽골 아이들과 한국 봉사자들이 다 지어 논 통나무집이 그만 불에 타버렸다.
그날 밤 늦게 집에 돌아오신 아빠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다들 부둥켜안고 밤새 울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집은 늦가을 찬바람이 불어 닥치기 전에 다시 다 지어졌다. 봉사자들이 떠난 자리를 몽골 아이들이 꿰차고 기어이 다 지어낸 것이었다.
또 한 번은 아이들의 따뜻한 잠자리를 위해 불을 피우다가 보일러가 터지는 바람에 신부님이 얼굴에 큰 화상을 입은 일도 있었다.
보기에도 흉한 그런 얼굴을 하시고도 신부님은 오히려 ‘화상 박피수술’을 잘 받아서 피부가 뽀해졌다고 너스레를 떨곤 하시었다.
그런 마음이 통하였나 보다. 무뚝뚝하고 자신을 감추기만 하던 아이들이 마음을 열고 태도를 달리하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공부를 하고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꿈을 갖고 대학에 진학하는 형들이 하나둘 생겨났고 기술을 배워 취업도 했다.
형들은 동생들을 잘 이끌어주고 서로 돕고 함께 힘을 모으는 모습이었다.
떠나는 봉사자들에게는 맑은 웃음과 따뜻한 인사로 행복을 한 아름 안겨 주었다.
나 역시 신부님과 자원봉사자들을 보면서 내 미래를 그려보게 되었다.
외교관이 되는 꿈 말이다.
나는 신부님처럼 인생을 다 바쳐 헌신할 자신은 아직 없다.
난 꿈에 비해 의지가 좀 약하다는 얘기를 듣곤 하는데 신부님을 보며
진정한 도전정신이 바로 이런 거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또 남을 돕는 일은 동정보다는 함께 사는 마음으로
서로 나누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같이 사는 것이 돕는 일이고 배우는 길이다’고 하신
신부님 말씀이 머리에 오래 남는다. ♣
첫댓글 제 2의 이 태석 신부님이십니다. 많이 기도 해 주세요
기도하겠습니다...
정말 훌륭하신 신부님,함께 기도 하겠습니다.
아울러 항상 말로만 행복과 사랑을 부르짓는 교만한 제사장들에게 크나큰 귀감이 되길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