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아침에 몰락한 조광조는 지금의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174번지, 당시 관노(官奴)였던 문후종의 집으로 유배를 갑니다. 설명을 들으니 능주에서 그 집은 북쪽으로, 당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북쪽에 살았다고 하지요. 집은 초가로 세 칸짜리였습니다.
조광조 선생의 유허가 잘 보존돼있다.
유배온 지 한 달 여만인 1519년 12월20일 조광조는 중종이 내린 사약(賜藥)을 마시고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조광조는 죽기 전 시 한 수를 남깁니다. 훗날 세상은 그것을 절명시(絶命詩)라고 합니다. 숨지기 전 자신의 소회를 밝히는, 최후 변론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정암 조광조 선생이 귀양살이하다 사약을 받은 능주의 유허다. 조광조는 이 초가집에서 머물렀다.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이 하였고 愛君如愛父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이 하였네 憂國如憂家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天日臨下土 일편단심 내 충심을 더욱 밝게 비추네 昭昭照丹衷’ 이렇게 조광조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한 것은 한국 정원의 대표격인 소쇄원(瀟灑園)에 얽힌 사연을 쓰기 위함입니다. 소쇄원을 알려면 양(梁)씨 가문이 등장할 차례입니다. 조광조가 유배왔을 때 모두가 그를 피했지만 단 한명은 예외였습니다. 바로 양팽손(梁彭孫ㆍ1488~1545)이었습니다. 조광조보다 한해 늦은 1516년 식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정언-수찬-교리 등의 관직을 지낸 양팽손은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낙향의 길을 택했습니다. 고향에 오자마자 그는 조광조의 거처를 찾았지요.
조광조선생의 유허에 있는 애우당 현판.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자신의 거처에 양팽손이 나타나자 조광조는 “어떻게 해서 여길 오셨느냐”고 물었습니다. 양팽손은 조광조를 위로한 뒤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교유하며 조광조를 위한 상소문도 썼습니다. 양팽손의 정성은 이후까지도 계속됐습니다. 조광조의 시신을 염한 후 큰아들 양응기를 시켜 중조산(中條山)에 묻도록 하고 그 이래 작은 띠 집을 지어 문인과 제자들이 제를 올리도록 했지요. 그런데 양팽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광조선생이 근심을 사랑한다는 뜻에서 이 건물에는 애우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소쇄(瀟灑)라는 호를 쓰는 양산보(梁山甫ㆍ1503~1557)는 열다섯 때 한양으로 올라가 조광조의 제자가 됐습니다. 1년 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그는 속세에서 성공하겠다는 뜻을 접고 고향 담양으로 내려와 소쇄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1678년의 기록이 있습니다.
조광조 선생의 유허가 잘 보존돼있다.
“그때 선생의 나이가 겨우 열일곱에 불과한 때인데 이러한 일(기묘사화)를 당하고 보니 그 원통함과 울분을 참을 수 없어서 세상 모든 것을 잊고 산에 들어가서 살아야겠구나! 결심하고 산수 좋고 경치 좋은 무등산 아래에 자그마한 집을 짓고 소쇄원이라 이름하고 두문불출하여 한가로이 살 것을 결심하였다. 스스로 호도 소쇄옹이라 하였다….”
양산보와 교유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전남 유생들의 간판급이었습니다. 예컨대 하서(河西) 김인후(金仁厚),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守),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 같은 이들이었지요. 퇴계 이황선생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무엇인가를 놓고 수준 높은 논쟁을 벌였던 존재(存齋) 기대승(奇大升ㆍ1527~1572)은 양산보를 이렇게 평했습니다. “소쇄옹은 겉으로는 여간 부드러운 것 같으나 내심은 강직한 사람이며 만사를 낙관하는 군자였다.” 훗날 의병장으로 이름 떨친 태헌 고경명(高敬命ㆍ1533~1592)은 “어릴 때 소쇄옹을 알았는데 그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가 얼마나 못생겼는가 알게 됐다”고 했고 송강 정철(鄭澈ㆍ1536~ 1593)은 “그분을 볼 때마다 마음이 사뭇 상쾌했다”고 했습니다.
소쇄원의 전경이다. 자연과 어우러진 한국정원의 백미다.
소쇄원을 만드는 일은 양산보 대에서 시작돼 아들 고암(鼓巖) 양자징(梁子澂ㆍ1523~1593)에 이르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겨우 피했지만 정유재란 때 왜적 침입으로 소실되자 손자인 영주(瀛州) 양천운(梁千運ㆍ1568~1637)이 중건하기에 이릅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첫 번째, 양산보는 무슨 돈이 있었기에 소쇄원 건립에 나선 것일까? 앞서 말한 대로 그는 관리에 등용되지도 않았으며 낙향했을 때 나이는 채 스물이 되지 않았기에 궁금증은 더욱 커집니다. 비밀은 처가와 외가 쪽에서 풀립니다. 양산보의 장인 김윤제는 15개 고을의 수령을 역임한 인물로 막강한 재력을 자랑했지요. 얼마나 재산이 많았으면 다리를 황금으로 만들어놓고 버선발로 다녔다는 유언비어에 시달릴 정도였습니다. 외가 쪽에는 면앙정 송순(宋純)이 있었습니다. 즉 송순의 할아버지 송복천이 소쇄공 양산보의 아버지 양사원의 장인이었으니 송순과 양산보는 ‘열살 많은 외종형’관계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소쇄원을 지을 때 송순은 전라도 관찰사로 있었기에 지원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소쇄원을 입구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두 번째 의문, 소쇄원이 3대에 걸쳐 지어졌다는데 대체 그 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점입니다. 양산보의 친구 김인후가 1528년 소쇄정에 올라 그곳 풍광을 찬양하는 글을 지었으니 이미 1528년 무렵에는 소쇄원이 이미 지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1년 전인 1527년에는 양산보의 부인 광산 김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소쇄원은 그 이전에 지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지요. 이제 1519년 양산보가 낙향해 결혼한 이후부터 1521년 장남 자홍이 태어난 시점부터 1526년으로 범위는 좁혀집니다. 그렇다면 대체 소쇄원은 어떤 곳이기에 3대(代)에 걸쳐 70년간 건설된 것일까요? 먼저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지금 우리가 보는 전남 담양의 소쇄원은 원래 크기의 9분의 1 정도로 축소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거기엔 놀라운 사연이 숨어 있지요.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뒤 온갖 못된 짓을 다 저질렀습니다. 그 중 하나가 가끔 뉴스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 산천(山川)에 커다란 쇠못을 박는 것이었습니다. 이 땅의 인걸(人傑)이 나올만한 혈맥(穴脈)을 절단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사실 양산보 가문은 일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철천지원수 관계입니다. 먼저 소쇄원은 정유재란 때 파괴됐으며 아들 양자징의 장남 가족, 첫째 딸 부부, 둘째 딸의 사위가 왜군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또 그의 장남 양천경의 3남1녀 가운데 차남 몽린, 3남 몽기, 장녀가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것입니다. 그때 양천경의 가족을 끌고 간 일본 장수가 바로 와키자카 야스하루입니다. 이 장수가 기억나십니까? 작년에 1700만명의 관객을 모은 영화 ‘명량’에서 조진웅이 배역을 맡은, 비겁하고 눈치 보는 일본 장수로 그려진 사람이 바로 와키자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