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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기 안성 칠현산 칠장사(七賢山 七長寺)를 찾아서 ②
- 원통전, 명부전 등 각종 당우와 칠장사의 여러 이야기들 -
나한전에서 기도한 후, 혜소국사비를 살피고 삼성각을 찾아 배례드린 다음 내려와 원 통전으로 향합니다. 이제부터는 전각을 돌며 참배할 차례입니다.
원통전으로 내려갑니다.
아름다운 이 은행나무로 가을 단풍을 만끽합니다.
묘법님과 청파님, 그 뒤에 화광님 그리고 비니초님
목에 건 저 카메라로 묘법님은 무슨 장면을 담으셨을까?
다소곳이 선 석원님. ㅎㅎㅎ ^^
국사전(國師殿)
최근에 신축된 국사전은 원통전(圓通殿) 오른편에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안에는 개산조(開山祖) 자장율사(慈藏律師), 중창조(重創祖) 혜소국사(慧炤國師), 선조대왕의 계비(繼妃)인 인목왕후(仁穆王后. 仁穆大妃),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부원군(府 院君) 김제남(金悌男), 대비의 어머니인 광산부부인(光山府夫人) 노씨(盧氏), 그리고 아들 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한쪽에는 죽암당(竹庵堂) 정락대율사 (正樂大律師)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누구의 위패일까?
영단을 중심으로 영단 중앙에 개산조 신라대국통 자장대율사 각령(開山祖 新羅大國統 慈藏大律師 覺靈) 좌측에 중창조 고려 혜소국사 정현대화상 각령(重創祖 高麗 慧炤國師 鼎賢大和尙 覺靈) 우측에 선망 조선국 선조대왕비 인목왕후 영가(先亡 朝鮮國 宣祖大王妃 仁穆王后 靈駕)
이 위패는?
중앙에 광산부부인 노씨 영가(光山府夫人 盧氏 靈駕) 좌측에 선망 연안후인 부원군 김제남 영가(先亡 延安后人 府院君 金悌男 靈駕) 우측에 선망 조선 선조대왕세자 영창대군 영가(先亡 朝鮮 宣祖大王世子 永昌大君 靈駕)
칠장사는 선덕여왕 5년(636)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으며, 고려 현종 5년인 1014년에 혜소국사(慧炤國師 972~1054)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습니다. 그래서 국사전 에 모시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왜 인목대비 일가의 위패를 국사전에 모셨을까?
혜소국사에 의해 중창된 칠장사는 공양왕 1년(1389)에 왜구의 침입으로 전소되어 폐허 로 내려오다가 조선시대 중종 1년(1506년)에 흥정대사(興淨大師)가 중건했다고 합니다. 이후 인조 1년(1623년)에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원찰로 삼아 사세를 크게 중창했다고 합니다.
인목대비에 관계된 유물로 친필족자 1점과 《백지묵서금광명최승왕경》1질이 전한다고 합니다. 친필족자는 인목대비가 광해군에 의해 서궁에 유폐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복위 된 해인 1623년에 칠장사를 중수하면서 《금광명최승왕경》과 함께 이곳에 내렸다고 합 니다.
이런 연유로 칠장사 국사전에 위패를 모시고 기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죽암당 정락 대율사 각령(竹庵堂 正樂 大律師 覺靈)
「정락(正樂) 스님은 1939년 전남 장성에서 출생했으며, 재적본사는 용주사, 은사 전강 스님이다. 1959년 흥복사에서 전강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수지하고, 1963년 범어사에 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보살계 수지했으며, 1963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 족계 수지했다. 지난 2009년 종사 법계를 수지했다.
1981년 11월부터 1984년 5월까지 화광사 주지, 1983년 7월부터 1995년 7월까지 만의 사 주지, 1996년 5월부터 2006년 3월까지 제2교구 본사 용주사 주지, 2006년 8월부터 2010년 1월까지 용화사 주지를 지냈다. 2011년 2월 17일 오후 5시 23분 경기도 화성 만의사에서 원적에 드니 법랍 53년요, 세수 73세였다.
총무원 호법부장, 기획실장을 역임했고, 제5대, 제7대 중앙종회의원을 지냈다. 1994년부터 1995년까지 포교원장을 역임했다. 1993년 4월 11일 공로상 수상했고, 저서로 『나는 이렇게 살고 싶었다』가 있다.」
원통전(圓通殿)
원통전(圓通殿)은 국사전(國師殿)과 대웅전 사이에 있습니다. 대웅전 오른편이지요.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맺배지붕 주심포 건물입니다.
영조 원년(1725년) 선진, 두한 스님이 건물을 지었으며, 이듬해 윤영, 처휘 스님이 관음보살상을 조성하였습니다
원통전은 흔히 관음전(觀音殿)이라 합니다. 또는 대비전(大悲殿), 보타전(寶陀殿)이라 하기도 합니다. 원통전이란 관세음보살님을 원통대사(圓通大師)라 부르기에 붙여진 이 름입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일찍이 관세음여래(觀世音如來) 회상(會上)에서 이근원통법(耳根圓通法)을 닦아 삼매를 이루었기에 원통대사(圓通大士)라고도 합니다. 또 관세음보살은 일찍이 성불하시어 정법명왕여래(正法明王如來)란 불호(佛號)를 가지 고 계십니다.
寶陀山上琉璃界 보타산상유리계 보타산 위 맑은 세계 유리계에 계시는 正法明王觀世音 정법명왕관세음 정법명왕 여래이신 관세음 보살님 影入三途利有情 영입삼도이유정 그림자는 삼도에 가 모든 유정 보살피고 形分六道曾無息 형분육도증무식 모습은 육도 나퉈 일찍이 쉼 없다네.
관음전 불단모습
우보처 해상용왕(海上龍王) 본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좌보처 남순동자(南巡童子)
신중탱화(神衆幀畵)
화기(畵記)에 '숭정기원후오무자삼월이십육일(崇禎紀元後五戊子三月二十六日)'이란 글이 보입니다. 숭정(崇禎) 5년은 인조 10년(1632)으로 이때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왕도(十王圖)
이 시왕도도 신중탱화와 같은 시기에 조성된 그림입니다. 숭정(崇禎) 5년, 즉 인조 10년 (1632)에 조성되었습니다.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앞의 마당 남쪽에 있는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측면 3칸 중 양 옆은 협칸입니다. 이 명부전은 영조 2년(1726)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 뒤 철종 7년(1857)에 기와 중수가 한 번 있었다고 합니다.
地藏大聖威神力 지장대성위신력 지장보살 큰 성현의 위대하신 위신력은 恒河沙劫說難盡 항하사겁설난진 항하사 겁 연설해도 다 말하기 어려워라 見聞瞻禮一念間 견문첨례일념간 잠깐 사이 보고 듣고 한순간만 생각해도 利益人天無量事 이익인천무량사 인간 천상 이익된 일 한량없이 많습니다.
우보처 무독귀왕(無毒鬼王) 본존 지장보살(地藏菩薩) 좌보처 도명존자(道明尊者)
지장보살님 왼쪽의 시왕 다섯 분과 판관과 사자, 신장 등이 도열해 있습니다.
지장보살님 오른쪽에도 시왕 다섯 분과 판관과 사자, 신장 등이 도열해 있습니다.
명부전 뒷모습
명부전 벽화는 특이합니다. 외벽에는 혜소국사, 궁예와 임꺽정에 대한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나옹송과 나한전 벽화
이 벽화가 언제 그려졌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습니다. 나옹송과 나한전에 대한 벽화입니다. 경내에 9층석탑이 웅장하게 서 있음은 이 절의 사세가 컸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낙락장송이 드리워진 옆에 전각이 하나 있는데 '라한전'이란 한글 현판을 달고 있네요. 한글 현판으로 보아 이 벽화가 오래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 다.
낙낙장송은 나옹송(懶翁松)입니다. 고려 말의 나옹선사께서 심었다고 전해집니다. 나옹선사는 고려말의 왕사(王師)로서 본명은 원혜(元惠), 법명(法名)은 혜근(惠勤), 법호(法號)는 나옹(懶翁)이며, 당호는 강월헌(江月軒)이며 속성은 아(牙)로 영해(寧海) 사람입니다.
문경 묘적암에서 요연(了然) 스님께 출가하였고, 그후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양주 회암 사에서 좌선 수행하여 깨달은 바 있었습니다. 선사는 다시 선지식을 찾아 중국 원나라 로 가셨는데 그곳 북경에서 지공화상(指空和尙)을 만나 깨달은 바 있었습니다. 다시 남쪽으로 가 평산처림(平山處林)으로부터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받았으며, 계속 편력수행을 하시다가 다시 지공의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받고 귀국하여 법을 설하 다 오대산으로 들어갔는데, 공민왕의 부름으로 왕사가 되었으며, 후에 양주 회암사를 크게 중건하였고, 우왕의 명을 받아 밀양의 영원사로 가던 도중 여주의 신륵사에서 입적하셨습니다. 지공(指空)ㆍ무학(無學)대사와 더불어 3대화상으로 불립니다.
나한전에는 혜소국사께서 교화시킨 도적들이 나한이 된 일곱 아라한이 모셔져 있어 상 서로움이 넘쳐 학이 모여드는 것 같습니다.
혜소국사(慧炤國師)와 7인의 도적
「혜소국사의 속명은 이정현(李鼎賢)으로 광종 23년(972)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하여 10세 때 광교사(光敎寺) 충회(忠會)에게서 구법하고, 죽산 칠장사(七長寺) 융철(融哲)에 게 배우고, 17세에 영통사(靈通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성종 15년(997) 미륵사의 5교대선(五敎大選)에 뽑혔으며, 목종 2년(999) 대사(大師)가 되었으며, 현종 3년(1012) 수좌(首座)가 되었다. 덕종 2년(1033) 덕종이 법천사(法泉寺) 로 옮겨 거주하게 했다가 다시 승통(僧統)으로 삼아 현화사(玄化寺)의 주지로 삼았다. 1045년 삼각산 사현사관(沙現寺館)을 개창했다.
이곳은 원래 산짐승이 많고 산적들이 들끓던 지역이었는데, 사현사관을 지어 묵어가도 록 하여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게 한 것이다. 1046년 문종이 즉위하자 내전에서 <금고 경(金鼔經)>을 강했으며, 1048년에는 문덕전(文德殿)에서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 설하여 비가 내리도록 빌었다. 1049년 왕이 봉은사에 거동하여 왕사(王師)로 삼았다. 1054년 다시 국사(國師)로 봉하여 대부경 김양(金陽)과 승정 도원(道元)으로 하여금 칠 장사까지 모시고 가게 했다. 산에 돌아와서부터는 승상(繩床)에 앉아 옷 1벌만을 해 입고, 모든 인연을 끊고 있다가 오래지 않아 입적했다. 문종 8년(1054) 세수 83세였다. 시호는 혜소(慧昭)이다.」 -칠장사 홈피에서-
「혜소국사가 칠장사에 머무를 때 7도적과의 전설같은 이야기가 내려온다.
일곱 도적이 절에 와서 못된 짓을 일삼고 있던 어느 날 도적 한 명이 절 약수터에서 물을 먹던 중 물바가지가 황금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몰래 품에 감추어 소굴에 돌아왔는데, 와서 보니 평범한 표주박으로 변하는 일을 당한다.
다음 날에는 다른 도적이 또한 이와 같은 일을 겪고, 다음 날은 다른 도적이 또한 같은 일을 겪는 수수께기 같은 일이 계속 벌어진다. 일곱 도적 모두가 이 같은 경험을 다 겪 고 나서야 "이 일은 분명 혜소국사님이 도력으로 우리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라 하여 바로 혜소국사에게 찾아가 잘못을 뉘우치고 제자로 받아 줄 것을 간청한다. 이에 혜소 국사가 흔쾌히 허락하자 일곱 도적은 열심히 수행하고 공부하여 모두 훌륭한 아라한의 경지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설화다. 」 -칠장사 홈피에서-
궁예 5세 시의 활연습도
칠장사에는 후고구려 태봉(泰封)의 왕 궁예(弓裔 ?~918. 재위 901~918)가 10세까지 활쏘기를 하며 유년기를 보냈다는 활터가 남아 있습니다.
궁예의 성은 김씨로 아버지는 신라 47대 헌안왕(憲安王), 어머니는 헌안왕의 빈(嬪)으로 이름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혹은 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이라고도 합니다. 5월 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이때의 이적(異蹟) 때문에 국가에 해로울 것이라는 일관(日 官)의 말에 따라 왕이 죽일 것을 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자(使者)가 그 집에 가서 강 보에 싸인 아이를 빼앗아 루(樓) 밑으로 던졌는데, 이때 유모(乳母)가 아이를 받았으나 잘못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건드려 애꾸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뒤 유모의 손에 키워졌 으며, 세달사(世達寺)에서 출가하여 선종(善宗)이라고 하였습니다.
궁예기마도(弓裔騎馬圖)
당시 신라 왕실이 극도로 쇠약해져 지방에서 초적(草賊)들이 대두하는 등 사회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궁예는 진성여왕(眞聖女王) 5년(891) 초적의 우두머리인 기훤(箕萱)에 의지하였다가 이윽고 원주에 있는 양길(梁吉)의 부하로 들어갔습니다. 이 후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 강원도 전역과 경상도ㆍ경기도 일부를 점령하고는 양길과 결별한 후 다시 경기도 일대를 점령하여 왕건(王建) 부자의 투항을 받았습니다.
궁예와 동자승
효공왕(孝恭王) 5년(901) 스스로 왕(王)이라 칭하고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으며,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였습니다. 905년 수도를 철원 에 정한 궁예는 연호를 '성책(聖冊)'으로 고치고, 나아가 신라를 병합하려는 뜻을 품어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게 하였습니다. 911년 연호를 다시 '수덕만세(水德萬歲)'라 고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으며, 신덕왕(神德王) 2년(913)에는 연호를 다시 '정개(政開)'라고 고쳤습니다. 하지만 이후 왕건과 대립하여 왕건을 추대한 신하들에 의 하여 918년 왕위에서 축출되어 부양(斧壤)에서 백성에게 피살되었다고 합니다.
궁예참선도(弓裔參禪圖)
궁예에 대한 평가는 승자의 입장에서 기술되었기에 부정적인 측면이 많다고 합니다. 불교적 측면에서 보아도 매우 미신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미륵불(彌勒佛) 이 라고 하고 머리에는 금책(金幘)을 쓰고 가사인 방포(方袍)를 입었으며, 두 아들을 청 광보살(靑光菩薩),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밖에 나갈 때는 항상 백 마를 타고 말머리와 꼬리를 비단으로 장식했으며, 어린 소년과 소녀들에게 깃발과 천 개, 향과 꽃을 들려 앞에서 인도하게 하며, 비구 200여 명이 범패를 부르고 염불하면서 뒤를 따르게 했다고 합니다. 한편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지었는데 현전하는 것은 없 다고 합니다.
궁예가 자신을 미륵불이라고 한 것은 미신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혼탁한 사회를 개혁하 려는 의지의 표현이며, 두 아들을 각각 청광보살, 신광보살이라고 한 것은 곧 관음보살 (觀音菩薩)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을 가리킨 것입니다. 신라 법상종(法相宗)에서는 미륵 과 아미타불을 중시하는 교단과 미륵과 지장보살을 중시하는 교단이 있었는데 미륵과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상종파는 관음보살을 중시했다고 합니다. 궁예는 세달사에 출가 하여 선종(善宗)이란 법명을 받았으며 법상종의 법통(法統)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궁예의 이와 같은 불교관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 뒤 왕건의 불교정책에 직ㆍ간접적으 로 영향을 주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임꺽정 힘겨루기
임꺽정의 칠장마
의적 임꺽정(林巪正)의 이야기는 소설이나 드라마로 많이 등장하여 많이 잘 알고 있지 요. 그런데 임꺽정과 칠장사는 인연이 꽤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예로부터 안성은 안 성맞춤이란 유기로 유명한 곳이지만 가죽신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중종 명종 연간에 가죽신을 깁는 유명한 갖바치가 있었습니다. 그는 천문 지리와 음양 의 이치를 깨닫고 학문에 두루 통하여 당대의 명망이 높은 사대부인 조광조 등과 교유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분이 만년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는데 이 분을 일러 병해 대사(갖바치스님)라 부렀다 합니다. 양주고을 백정 출신인 임꺽정은 칠장사에 생불(生 佛)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병해대사를 찾아갔고 병해대사를 만난 그는 깊은 감화를 받 고 평생의 스승으로 삼았으며 이봉학 박유복 등과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그 후 임꺽정은 그의 수하와 함께 황해도와 경기도, 강원도를 누비며 부자들의 재물을 빼앗아 빈민에게 나누어 주어 의적으로 통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삼대의적으로는 홍길 동, 임꺽정, 장길산을 들고 있는 바는 다 아는 사실입니다.
칠장사는 임꺽정이 난을 일으켰을 때, 관군을 피해 머물기도 했다고 합니다.
칠장사에는 임꺽정과 관계된 「꺽정불」이야기가 있습니다. 「꺽정불」은 극락전에 모셔져 있습니다.
극락전(極樂殿)
예전에는 홍제관(弘濟館)이라는 편액을 걸고 있었는데 지금은 극락전(極樂殿)이란 편액 을 바꿔 달고 있더군요. 여기에는 일명 「꺽정불」이라 알려진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극락전 불단모습
우보처 대세지보살 본존 아미타불 좌보처 관세음보살
그런데 본존 아미타불 좌우에 여섯 분의 보살입상(菩薩立像)이 있어 어리둥절하게 쳐다 보았습니다. 전하는 말로 가운데의 아미타불을 「꺽정불」이라 부른답니다. 그런데 민초들은 병해대사를 생불로 받들었고 임꺽정이 이 불상을 봉안했다고 하니 이 아미타 불은 민초들의 부처 병해대사이자 민초들의 우상인 임꺽정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여섯 분은 임꺽정을 따라 의적활동을 한 이봉학, 박유복, 배돌석, 길막봉, 곽 오주 황천왕동이 아닐까? ^^
「길막봉을 구하기 위해 안성에 왔던 임꺽정과 6명의 심복은 병해대사와 상봉하려 칠 장사에 들른다. 그러나 스님은 달포 전에 이미 열반하신 뒤였다.
7인의 사내들은 스님의 영전 앞에서 각자의 팔뚝을 긋고 피를 내 형제의 의를 맺고 스 님이 스스로 조성하려 했던 미완의 목불을 완성하고 스승을 기렸다. 칠장사 "꺽정불" 이다.
꺽정불은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하고 있는 일반적인 아미타여래불상의 형태이다. 다만 몸집이 좀더 큰 듯이 보여 임꺽정을 모델로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 다.
열살 배기 허수아비 임금인 명종은 경기, 강원, 함경, 평안 등 4개 도에서 군사를 일으 켜 대대적으로 토벌 작적을 벌여야 한다는 훈척들의 강경진압론을 군말없이 따랐다. 토포사 남치근은 역당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구금하고 재산을 약탈했다.
임꺽정을 참수한 뒤에도 그의 아들, 손자, 서너 살된 어린아이들까지 남김없이 죽였다. 임꺽정을 능가하는 도둑의 맹활약에 힘입어 황해도 전역이 초토화 되었다. 30년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때 이 지역에서 의병활동이 부진했던 건 당연지사였다.
제 손으로 원인을 제공했으면서도 국가는 종묘사직을 구하는데 힘쓰지 않았다는 이유 로 이후 황해도 출신들을 벼슬길에서 차별하였다.」 -옮긴 글-
꺽정불이라 불리는 아미타불
「임꺽정이 봉안한 것으로 전해져 <꺽정불>로 불리고 있는 안성 칠장사 소장 목조불상 이 충북대 연구팀의 연대측정결과 1540여 년인 조선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벽초 홍명희의 대하소설에서 <임꺽정>과 <병해대사> 이야기가 널리 알려진 가운데 임 꺽정이 스승 병해대사를 위해 조성했다는 꺽정불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지만, 그 동안 불상의 진위를 놓고 의견이 엇갈려 왔다.
그러나 충북대 연구팀이 꺽정불 밑 부분에 '봉안 임꺽정(奉安 林巨正)'이라고 쓰여 진 삼베 조각 등을 연대측정 한 결과 "1540년을 중간연대로 ±100년의 방사선 연대측정" 이라는 결론을 내려 실제 임꺽정(?~1562)이 불상을 봉안했을 것으로 확실시 된다.」 -칠장사 홈피에서-
「꺽정불」은 예전부터 전란과 수많은 화마를 피해 내려온 칠장사의 귀중한 유물로서 문화재지정을 앞두고 있다고 합니다.
안성봉업사(安城奉業寺) 석불입상(石佛立像) 보물 제983호
대웅전 좌측 옆에 모셔진 석불입상, 안내문에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있습니다.
「이 석불입상은 원래 죽산의 봉업사지에 있던 것을 죽산중학교로 옮겼다가 1980년경 칠장사로 옮겨온 것이다. 불상과 광배(光背)가 같은 돌로 만들어졌으며, 불상 높이는 166.5cm이고 총 높이는 206cm이다. 불상의 뒷면에는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 하는 광배가 있는데 주위에 불꽃무늬의 화불(化佛)을 새기고 있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이 지방 불상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 료로 높이 평가 된다.」
과거에 왔을 때는 불상과 보살상의 대좌 기단석이 하나로 되어 있었는데, 이제 보니 각각 분리되어 모셔져 있음을 봅니다.
안성봉업사(安城奉業寺) 석불입상(石佛立像) 보물 제983호
불의(佛衣)는 통견(通肩)으로 배 부근까지 여러 겹의 둥근 선을 그리며 흘러내리고 있으 며 그 아래 무릎 밑에는 군의(裙衣)도 보입니다. 오른손은 가슴부분까지 들어서 손바닥 을 가만히 가슴에 대고 있고, 왼손은 자연스럽게 내려 옷자락을 잡은 모양입니다. 마치 우리가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는 자세입니다. ^^
광배(光背)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있는 거신광(擧身光)으로서 그 둘레를 불꽃 영기 문으로 둘렀고, 두광 부분에 세 분의 화불(化佛)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런 구절이 생각 나네요.
무량광중화불다(無量光中化佛多) 앙첨개시아미타(仰瞻皆是阿彌陀)... 무량한 빛 가운데서 화신불 무수한데, 우러러 바라보니 모두가 아미타불...
그런데 이 석불입상의 명호는 어떤 부처님이신지 정보가 없습니다.
석보살좌상(石菩薩坐像)
이 보살상에 대한 정보는 전무하여 어떤 보살상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석불입상 옆의 칠장사 거북바위
신비스러운 거북바위
이 거북바위는 대웅전 좌우 석축을 재정비하는 가운데 드러났다고 합니다. 이 거북바위 는 대웅전쪽을 향해 엎드려 있는 형상입니다. 칠장사의 소소한 명물이 아닐까 생각됩니 다.
지현이가 신기한듯 다가가 어루만지네요.
이 거북이 한 번 만지면 무병장수하고... 그런 이야기가 있을 듯합니다. ^^
"이모부, 이 거북바위 신기해요."
대웅전 옆의 지현이
사진을 담는 동안 법우님들은 다 어디로 가셨을까? 사진을 자세히 담으려다 보면 법우 님들은 금새 쌩하고 내려가 버리시니 법우님들 모습을 잘 담을 수가 없네요. ㅎㅎㅎ
순례를 하면서 각종 전각과 그 사찰 속에 서려 있는 이야기 등을 함께 이야기 하고 싶고 혹 궁금한 사항에 대하여서는 설명도 하고 싶은데 그런 궁금증이 없는 모양입니다. ^^ 그래서 저 홀로 궁금하여 설명을 붙여 보고 있으니 양해 바랍니다. _()_
다음은 칠장사 마지막편 3부를 올려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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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백우님의 정성이 가득 담겼군요. 감사합니다. 백우님의 순례기는 마치 다큐멘터리 같습니다.
자세하고도 풍부하고 극적인 묘사와 재미까지.....어쩌면 이렇게 글을 잘 쓰시는지요... 감탄할 뿐입니다.
다시한번 감사를 전합니다()()()
칠장사에는 이야기가 많이 담겨서 이야기도 길었습니다. _()_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감사한 마음입니다.
사찰순례를 하다보면 자세히 둘러본것 같아도 빠뜨리는 부분이 꽤 있습니다._()_
순례기를 보면서 하나 하나 되짚어 봅니다.
사전 공부를 하고 갔는데도 미처 담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_()_
여러 사람들이 순례기를 올리면 그 다양성이 많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형부 최~~~~고^^
지현이도 봤나요 감사합니다. _()_
잘보고갑니다 ()
다음엔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감사합니다. _()_
잘봤습니다
각현님, 순례길에 함께해서거웠습니다. 먼 길을 돌아돌아 동참하신 열정에 감사드립니다. _()_
순례기의 상세한 설명 덕분에 편안하게 즐감 했습니다.
지현이도 많이 컸네요. 지현아 반가워.()()()
이야기거리가 많은 사찰입니다. 5세의 궁예가 활쏘기 한 곳은 다음 3부에 있는 부도탑이 있는 곳이랍니다. 감사합니다. _()_
지현이가 안고 있는 저 인형 내년엔 아마 내려놓을 겁니다.
순례 전 둘러볼 사찰에 대해 세세히 알아보고 때론 사전 답사까지 마다하지 않으시는 _()_
백우님의 사찰순례기, 스님들도 쉽게 지나치는 바른 주련해설, 인문과 역사 천문지리를
아우르는 천자문 해설 등은 기회가 되면 책으로 남겨야 할 소중한 자산입니다.
순례 전에 누군가의 질문을 대비해서 예습을 하고 갑니다만 질문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 그래서 순례기에 담아 보는 것입니다.거웠습니다. _()_
무문자설(無問自說)을 하려고 해도...
다만 정파님께서 주련에 관심이 많으시고 주련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이
주련은 언젠가 한번 책으로 엮어 봤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천자문을 쉰 지 꽤 오래 되어 다음 주는 꼭 올리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두달이 지난 지금 에서야 컴 앞에, 다시 보고 즐감 속에서 행복 찿고 갑니다....나무묘법연화경()()()
앞으로는 자주 오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_()_ _(())_
冥府殿에 있는 주련 중에
見聞瞻禮一念間
끝 글자가 '覺'으로 써 있는 듯 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