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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드디어 내일이 수술입니다.
어젯밤 일본 누나가 도착해 병원 어딘가에 입원해 있습니다. 하지만 누나를 만나지 못했어요.
누나는 내일 아침 나에게 골수를 나눠주고 하루 더 입원해 있다가 일본으로 돌아갈 겁니다.
원래 골수를 주는 사람을 만나는 법이 아니래요.
이유를 물었지만 의사 선생님은 대답해주지 않았어요. 그런 엉터리 법이 어디 있나요.
내 병을 낫게 해주려는 고마운 사람인데 왜 만나지도 못하죠?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오네상.
아빠한테 배운 일본말입니다. 누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거든요.
그것도 누나가 직접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요.
지난번에도 누나를 만나게 해달라고 계속 졸랐죠.
하지만 고집불통 아빠는 끝끝내 고개를 흔들다가 말했어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성경에 있지?
남을 진짜로 도우려면 그 사람이 모르게 도와야 한다는 뜻이란다. 일본 누나도 그러고 싶은 거야."
남이 알아주길 바라면서, 잘난 척하면서 돕는 것은 가짜래요.
누나에 대한 고마움을 영원히 잊지 않는 것이 내가 할일이라나요.
그리고 어서 튼튼해져서 누나처럼 다른 사람을 진짜로 돕는 다움이가 되래요.
유리문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립니다. 난 얼른 고개를 돌립니다.
아빠, 하고 맘속으로 소리치면서요.
그러나 간호사 누나가 슬쩍 나를 쳐다보고는 그냥 지나갑니다.
사흘 전에 무균실로 옮겨왔습니다.
몇 개의 문을 지나자 유리로 된 방이 나타났어요. 유리방 가운데 침대가 있고,
침대 주위는 비닐 커튼으로 빙 둘러싸여져 있지요.
커다란 비닐봉투 속에 친대가 들어 있는것과 비슷해요.
무균실은요, 비밀 요새라고 할 수 있어요.
나같이 골수 이식을 받는 환자를 위해서 특별하게 만들어진 방이죠.
백혈구 수치가 거의 빵입니다. 원래 내 핏속에는 좋은 백혈구와 나쁜 백혈구가 있어요.
날 괴롭히는 건 바로 나쁜 백혈구죠. 나쁜 백혈구를 죽이기 위해 항암제라는 폭탄을 던졌는데,
좋은 백혈구들까지 덩달아 죽은 거랍니다.
좋은 백혈구는 병균들과 싸우는 군인이에요. 군인이 없다면 항복하거나 달아날 수밖에 없잖아요.
난 지금 작전상 비밀 요새로 후퇴를 한 겁니다. 지독한 병균들이라도 여기까지는 침투해 들어올 수 없거든요.
비밀 요새라고 다 좋은 건 아니죠. 아니, 좋은 점은 하나고, 나쁜 점은 백 가지 천 가집니다.
아주 갑갑한 곳이에요. 새장에 갇힌 새처럼요. 뚱뚱한 아줌마가 커다란 궁뎅이로 깔고 앉은 찐빵처럼요.
덥긴 왜 이렇게 더운지 모르겠어요. 다움이를 계란 프라이로 만들 셈인가봐요.
또 하루 종일 천장만 쳐다봐야 된답니다. 어느 땐 혼자 중얼거립니다.
천장에 바퀴벌레라도 한 마리 지나가면 덜 심심할 거야.
내 생각 주머니 속에는 어서 빨리 여기를 나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그때가 언제냐고 의사 선생님한테 물어봤어요.
"핏속에는 적혈구, 혈소판, 그리고 다움이도 잘 아는 백혈구가 있지.
이런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골수란다. 다움이는 골수가 고장이 나서
이상한 백혈구가 생겼어. 일본 누나의 골수가 다움이 몸으로 들어가서 다움이의 것이 된다면,
좋은 백혈구를 만들어낼 수 있지. 그때까지 있어야 한단다."
의사 선생님은 그러면서 삼주일은 걸린다고 했어요.
삼주일. 21일. 504시간.
수술은 겁먹을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힘들지도 않고 오래 걸리지도 않구요,
주사 맞는 것보다 간단하대요.
내 가슴에 뻥 뚫어놓은 히크만 도관으로 골수를 한 방울씩 흘러보내면 끝난다나요.
문제는 수술 다음부터겠죠. 무지무지 아프고 힘들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아빠도 의사 선생님도 바로 그게 걱정이랍니다.
하지만 난요, 잘해낼 자신이 있어요. 아빠는 매일매일 말하고 있답니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갖느냐가 제일 중요하다구요. 결심하고 결심하고 또 결심했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이번에는 꼭 이기고 말 거라구요. 아빠를 다시는 슬프게 만들지 않겠어요.
건강해져서 퇴원할 날만 생각하기로 했어요. 다른 생각을 하면 괜히 골치만 더 아프죠.
아빠 손 잡고 사락골에 가는 날, 흰 눈이 펑펑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눈을 밟아본 적이 언제인지 가물가물해요. 사락골에는 눈이 오면 지붕까지 쌓인대요.
문제없어요. 아빠랑 눈을 치우고 그 눈으로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면 될 테니까요.
사락골도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괜찮은 곳이에요. 은미를 못 봐서 탈이지만요.
간호사 누나가 유리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비닐 커튼 중간에 있는 둥그런 지퍼를 열고 체온을 잽니다.
한 시간쯤 전에 쟀을 때 38.4도였어요. 이번에도 38도를 넘으면 의사 선생님이 당장 달려올 겁니다.
난 주사 한방 각오해야겠구요.
간호사 누나가 엄지손가락을 쳐들며 말합니다.
"삼십칠 점 팔. 잘했어."
잘했으면 상을 줘야 될 텐데 누나는 날 혼자 내버려두고 나갑니다.
난 또 별수없이 천장한테 말을 시켜봐야겠죠.
무균실에선 아빠랑 하루에 삼십 분밖에 이야기를 할 수 없어요. 속이 상하지만 그래도 다행이에요.
중환자실에서처럼 아예 떨어져 있는 건 아니니까요. 아빠는 언제든 유리문 밖에서 날 볼 수 있고,
나도 비닐 커튼과 유리문 너머로 아빠를 볼 수 있지요.
무균실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선 안돼요. 아빠가 날 보러 오기 전에는 아빠를 볼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당연히 아빠가 날 보러 와야 될 텐데, 아빠는 나타나지 않고 있어요. 어제부터요.
오늘 아침에도 간호사 누나한테 아빠를 불러달라고 부탁했어요.
무균실에서 문 몇 개를 지나면 보호자 휴게실이 있고, 아빠는 항상 거기에 있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이상한 일입니다. 내가 밥 먹을 때면 어느샌가 와서 유리문에 얼굴을 대고 있던 아빠랍니다.
밥 많이 먹고 힘내라고, 그렇게 날 마구마구 응원하기 위해서죠.
무균실에서는 멸균식이라는 이름의 밥을 먹어야 됩니다. 세상에 그렇게 맛없는 밥이 또 있을까요?
그냥 맛없는 정도면 참겠어요. 물 대신 소독약을 붓고 끓였는지 지독한 냄새가 나는 밥을
하루에 여섯 끼씩이나 먹고 있답니다. 조금씩 자주 먹어야 하는 게 무균실의 규칙이거든요.
벌써부터 입 안이 걸레를 물고 있는 것처럼 너덜너덜 헐어 있어요. 구역질은 쉬지 않고 나구요.
멸균식 한 숟갈 먹고 한 번 토하고, 눈물 한 방울 흘리고 아빠 한 번 쳐다보고, 또 한 숟가락...
먹지 않으면 병을 이길 수 없으니까 억지로라도 끝가지 먹어치웠죠.
하지만 어제 오늘은 반도 먹지 못했어요. 응원해줄 아빠가 없는 탓입니다.
어디로 간 거예요, 아빠. 지난번 말했던 중요한 일로 지방을 간 걸까요?
짧으면 나흘, 길면 닷새. 안돼요. 그렇게 오랫동안 날 내버려두면요,
백혈병을 이기겠다는 결심이 날아갈지도 몰라요.
아빠가 없으면 난 바보 멍청이가 되잖아요.
저녁때가 다 돼서야 아빠가 왔답니다.
소독 가운과 모자와 마스크를 뒤집어쓴, 달나라 여행을 떠나는 우주인 모습으로요.
누구든지 나를 만나기 위해선 우주인이 되어야 한답니다. 혹시라도 병균을 묻혀 들어오면 큰일이거든요.
처음엔 헷갈렸어요. 마스크와 모자 대문에 겨우 눈만 보이는데, 그 한쪽 눈마저 붕대로 가려져 있었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아빠를 못 알아보겠어요? 반갑고 화딱지도 났지만, 무척 놀랐습니다.
그래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어요.
"아빠, 눈이 왜 그래요?"
"으응, 별거 아니다. 아빠가 급한 일 때문에 밖에 나가 있었단다. 미안해... 어제 오늘 잘 지냈니?"
아빠가 단청을 부리고 싶어한다는 걸 당장 알아차렸어요. 난 다시 물었죠.
"
다쳤어요?"
"다치긴?"
"눈병이 났나요?"
"눈병은 나쁜 병균 때문에 생기는 거니까 다움이한테 올 수 없지.
한쪽 눈이 피곤해서 좀 쉬라고 붕대로 가려놓은 거란다... 그 동안 밥은 잘 먹었니?"
"금방 괜찮아지는 거예요?"
"그럼, 그렇고 말고."
안심이 됐어요. 하지만 한쪽 눈만 보이니까 반쯤만 아빠 같았죠.
아빠를 진짜 아빠답게 만드는 건 바로 눈이었구나...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난 지금 아빠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아빠가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웃으며 묻습니다.
"아빠 얼굴이 이상하니?"
아빠한테는 미안하지만, 성호의 해적선 레고에 있는 애꾸눈 선장이 자꾸만 생각나요.
아빠의 얼굴에 콧수염을 그려놓는다면... 히히히, 그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을 참을 수 없어요.
"애꾸눈 선장 같아요."
아빠는 일부러 목소리를 굵게 만들어 대답합니다.
"그으래? 좋은 편이냐 나쁜 편이냐?"
"당연히 나쁜 편이죠. 애꾸눈 선장은 어차피 해적이거든요."
아빠는 또 한쪽 눈으로 웃고는, 비닐 커튼의 지퍼를 열고 손을 내밉니다. 따듯해요.
아빠의 손은 언제나 따듯하지만 오늘 특히 더한 것 같아요.
"일본 누나 온 거 알아요, 아빠?"
"안다."
"만나봤어요?"
"만났지. 다움이 사진을 보여줬더니 아주 잘생겼다고 하더라."
"누나는 어떻게 생겼어요?"
"아주 예뻐. 하지만 마음이 더 예쁜 것 같더라."
예쁜 건 상관없어요. 그렇지만 이왕이면 마음씨 착한 누나의 골수가 내 몸에 들어오길 바랐죠.
착하지 않은 사람이 남한테 골수를 줄 리 없긴 하지만요.
누나를 만나고 싶어요. 아빠는 여전히 안된대요.
하지만 누나가 사진을 갖고 있으면 구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게 어디예요?
앞으로는 누나의 사진을 보면서 누나를 위해 기도해야겠어요.
솔직히 누나의 얼굴을 모르니까 기도가 잘 되지 않았거든요.
아빠가 자꾸만 붕대로 가려진 왼쪽 눈 주위를 만집니다. 그때마다 오른쪽 눈을 찡그리고 있어요.
아빠 말대로 피곤해서, 사람도 피곤하면 자야 하는 것처럼, 푹 쉬라는 뜻으로 가려놓은 걸까요?
난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눈 말예요, 정말 괜찮아요?"
"조금 거북하구나. 애꾸눈 선장도 처음에는 아빠처럼 이랬을 거야."
아빠는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이고는 윗입술까지 흘러내린 내 마스크를 코 밑으로 올려줍니다.
쓸데없는 걱정일랑 하지 말라는 뜻일 거예요.
"다움아!"
불러놓고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다가 아빠가 말합니다.
"내일 수술 자신있지?"
"... 예."
"큰 소리로 말해봐."
아빠는 정말 애꾸눈 선장처럼 굴고 싶은가봐요. 난 씩씩한 부하 해적의 목소리로 소리칩니다.
"자신있습니다."
"고맙다... 고맙다, 다움아."
첫댓글 내가 요즘 가시고기를 읽으면서 아빠공부 하고 있습니다.... 왠지 가슴 아파요..짠하게..
그넘의 돈때문에 드디어 눈에 칼을 댔군요..너무 안타까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