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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에서 본분사(本分事)로써 사람들을 대한다. 만약 나로 하여금 근기(根機) 따라 사람을 대하게 하면 삼승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가 있게 되느니라』고 조주스님이 말씀하셨읍니다.
근기에는 상근기도 있고 중근기도 있고 하근기도 있으니 근기를 따라서 설법한다면 자연히 삼승십이분교가 벌어지므로 ‘나는 본분사로써 사람들을 대할 뿐이요, 근기를 따라서 설법을 하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이 조주스님의 생명선이고 선가(禪家)의 생명선입니다.
불교의 근본·을 이론과 언설을 가지고 삼승십이분교 식으로 이렇게도 설명하고 저렇게도 설명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니, 이 법문이 선문의 골수가 아닌 줄 알고 들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부터 선가의 본분을 버리고 이론과 언설로써 불교의 근본 뜻을 말해 보고자 합니다.
불교란 무엇인가?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닙니다.
불교는 팔만대장경이라는 방대한 경전이 있어서 이 경(經)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저 경을 보면 저렇게 말씀하는 등, 누가 어떤 것이 불교냐고 물으면 이것이 불교라고 한 마디로 대답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예수교나 유교나 회교같은 다른 종교들은 근본이 되는 경전이 간단하여 예수교는 성경, 유교는 사서삼경(四書三經), 회교는 코란이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통칭 팔만대장경이라 하여 누가 들어도 엄두가 나지 않읍니다.
그렇게 많으니 무슨 말씀인지 알기 힘들고, 설사 좀 안다고 하여도 간단하게 어떤 것이 불교라고 말하기는 어렵읍니다.
또 전체를 하나하나 얘기하려면 끝이 없으니 간단히 무엇을 불교라 해야 하겠읍니까?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佛)란 인도말로 불다(Buddha)라고 하는데,「깨친 사람」이란 뜻입니다.
불교란 일체 만법의 본원(本源) 자체를 바로 깨친 사람의 가르침으로 결국 깨달음에 그 근본 뜻이 있읍니다.
만약 불교를 논의함에 있어서 깨친다(覺)는 데에서 한발짝이라도 떠나서 불교를 말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의 근본이 깨치는데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그 깨친다는 내용은 일체 만법의 본원 그 자체를 바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일체 만법을 총괄적으로 표현하여 법성(法性)이라 하고, 각각 개별적으로 말할 때는 자성(自性)이라고 하는데, 그 근본에서는 법성이 즉 자성이고 자성이 즉 법성이니 자성이라 하든 법성이라 하든, 이것의 본원 그 자체를 바로 깨친 사람을 부처라 합니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법성이나 자성을 바로 깨치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 그 근본입니다.
2500여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새벽에 명성(明星)을 보시고 정각(正寬)을 이루셨으니 이것이 불교의 근본 출발점 입니다.
유교는 공자님이 옛날의 삼경이든 육경이든 이것을 읽고 외우고 하여 문자에 의지해서 거기서 얻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세웠고, 기독교는 예수가 절대신의 계시에 의해서 성경을 말씀하여 세워졌으니 곧 절대신의 계시가 기독교의 출발점이 되고 있읍니다.
반면에 불교는 문자에 의지해서 많은 지식을 얻음에 의하거나, 혹은 절대신의 계시를 받음에 의해서 부처가 된 것이 아니라, 보리수 아래에서 자기 스스로가 자기의 힘으로써 선정(禪定)을 닦아 자기의 자성을, 일체 만법의 법성을 바로 깨쳐서 부처님이 되있다는 데서 출발하고 있읍니다.
이것이 불교가 딴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절대신을 전제로 하여 존재하고 있지만, 불교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절대신을 전제로 하지 않고 오직 일체 만법의 법성인 자기의 자성을 바로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니 불교 이외의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이와같은 이론은 하나도 없읍니다.
이것이 불교가 세계적으로 가장 수준 높고 가장 깊은 진리로서 천고만고에 변할 수 없는 독특한 특색입니다.
그러므로 일체 만법의 법성 즉 자기 자성을 바로 깨치는 이것이 불교의 근본 특색으로 되어 있느니 만큼 만약 이 노선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된다면 자기 스스로 자기 생명을 끊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들과 역대의 모든 조사(租師)스님들이 자기 자성, 자기 마음을 깨쳐서 부처를 이루었이지 절대신이나 언어문자에 의지해서 부처를 이룬(成佛) 사람은 한사람도 없읍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 생명선이며, 영원한 철칙이며 만세의 표준입니다.
불교는 성불(成佛), 즉 부처를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언설과 이론만 가지고는 성불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큰 학자라도 언설과 이론만 가지고서 성불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읍니다.
그럼 우리가 무엇하려고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놓았는가?
금강산이 천하에 유명하고 좋기는 하나 그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는 안내문이 필요합니다.
금강산을 잘 소개하면 「아! 이렇게 경치 좋은 금강산이 있었이구나. 우리도 한번 금강산 구경을 가야겠구나」 생각하고 드디어 금강산을 실제로 찾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내문이 없으면 금강산이 그렇게 좋은 곳인 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가 있겠읍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이 언어문자로 이루어진 언설과 이론인 팔만대장경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일종의 노정기(路程記)입니다.
팔만대장경에서 불교란 이런 것이다, 부처란 무엇이다 라고 설명하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다 그것을 보고 부처님이 귀하고 높으며 불교가 좋은 줄 알아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언어문자로 된 안내문이 없있다면 부처님의 훌륭하고 좋은 법을 몇 사람이나 알고 있겠읍니까?
이러한 언어문자의 기록이 남겨져 있기 때문에 불교를 알게 되고 마침내는 부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팔만대장경이라는 노정기에 의지하여 실제로 길을 가서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서울을 가려고 하면서 서울 안내판이나 소개문을 아무리 들여다 보고 있어 보았자 서울을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 걸음을 걷든지 두 걸음을 걷든지 남대문으로 쑥 들어서야지 그러기 전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언어문자인 팔만대장경이 성불하는 노정기인 줄 분명히 알면 그것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선가(禪家)에서는 언어문자를 무시하고 배격하며 교가(敎家)에서는 언어문자를 숭상한다고 흔히 생각하고 있는데, 만일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교는 꿈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교도 부처님의 가르침이지 딴 외도(外道) 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가에서도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지, 안내문만 읽으면서 평생을 지내라고는 하지 않았읍니다.
교가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제일 높은 교가 화엄종(華嚴宗) 입니다.
특히 당(唐)나라 현수(賢首)스님이 그때까지의 화엄종 교리를 집대성하여 종조(宗組)가 되있으니, 교가에 있어서 현수스님 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을 수 없을 만큼 교가의 대표적인 스님인데, 다음은 그 스님의 말씀입니다.
『이 큰 화엄연기법은 일체 만법이 구족하니 반드시 마음 가운데서 그것을 깨칠 것이요,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말로써 해석한다면 연기법을 보지 못할 것이요, 반드시 해석을 끊고 실제로 마음을 닦아야 정견(正見)에 이르는 것이다.
만약 마음으로 해석하여 얻으려고 한다면 평생을 헛일만 하는 것이다. 입으로 말하지 않으면 들어갈 것이요, 만약 입으로는 말하나 마음에 깨침이 없는 사람은 곧 미친 사람과 같은 것이다』
교가의 권위자인 현수스님이 이 화엄연기법은 언어로써는 알 수 없고 오직 마음 가운데 이것을 깨쳐야 바로 알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미친 사람이라고 말한 이유는, 불법(佛法)이란 오직 자성을 깨치는 데 있는 것이지 언어문자를 이해하는데 있지않기 때문입니다.
화엄종의 화엄연기법도 부처님 법이니 만큼 깨친다는 원칙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될 수 없읍니다.
그래서 만약 누구든지 언어문자만을 따라가고 마음 속에 깨치지 못한 사람은 미친 사람이며 평생에 헛일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화엄경 80권 가운데서는 진정한 연기법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고, 오직 내 마음 속에서 깨쳐야만 그 화엄연기법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데려다 어떤 사람과 꼭 같은 모습을 그려놓고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대답을 하겠읍니까?
천번 만번 불러 보아도 대답이 없읍니다.
아무리 잘 그려 놓아도 그림 속의 사람은 대답을 할 수 없으니 실제의 사람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읍니다.
언어문자는 노정기나 소개문은 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실제 금강산이나 서울인 줄 알아서는 영원토록 금강산도 서울도 못보고, 평생 헛일한 미친 사람이 되고 맙니다.
현수스님 뿐만 아니라 교가의 모든 큰스님들도 다 그렇게 말씀합니다.
이제 불교를 바로 알려면 반드시 현수스님 말씀 럼 마음 가운데서 깨쳐야지 여기서 한발짝이라도 벗어나면 불교가 아닙니다.
선이나 교나 자성을 깨치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라는 것이 명확하니 공연히 평생을 헛일한 미친 사람이야 될 수 없지 않습니까?
신라의 화엄종조로서 유명한 의상(義湘)스님은 남아있는 저술이 별로 없으나, 그 대표적인 저술 법성게(法性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양 없으니 모든 법이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고요하네. 이름 없고 모양 없어 일체가 끊어지니 깨친 지혜로써 알 바요, 다른 경계에서는 알 수 없네.』
불법이란 바로 깨쳐야 하는 것이니 일체 만법의 법성, 자성을 깨쳐야 하는데 그것은 언어문자의 이해로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법성·자성은 일체 언설과 이론을 떠나 있으므로 언어문자로써 표현할 수 없고 말로써 형용할 수 없는데 어떻게 언어문자에 의지해서 알 수 있겠읍니까?
이 자성·법성이라는 것은 이름이 없고 모양이 없어 일체가 끊어졌기 때문에 증지(證智), 즉 깨친 지혜로써만 알 수 있고 다른 것으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이 깨친 법성은 참으로 깊고 미묘해서(深深微妙) 일체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言語道斷) 사량분별이 멸한 것이라, 오직 깨쳐야만 알지 언어문자로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계속적으로 우리가 하루 빨리 깨쳐야 된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우리의 인간에게 어떤 능력이 잠재되어 있기에 자성(自性)을 깨치라 하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 아닐 수 없읍니다.
우리에게 일체 만법의 근본을 깨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읍니다.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처음 정각(正寬)을 이루시고 일체 만유를 다 둘러보시고 감탄하시며 이르시기를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와 같은 지혜덕상이 있건마는 분별 망상으로 깨닫지 못하는구나」라고 하셨읍니다.
菩提樹 下에 初成正寬하시고 歎曰 奇哉奇哉라 一切衆生이 皆有如來智慧德相이언마는 以分別妄想而 不能證得이로다.
부처님의 이 말씀이 우리 불교의 근본 시작이면서 끝인데 부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이 한 말씀은 인류사상 최대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읍니다.
부처님이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는 사람이 꼭 절대자가 될 수 있나 없나 하는데 대해서 많이들 논의해 왔지만 부처님 같이 명백하게 인간이면 누구든지 절대적인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공공연히 선포한 사람은 별로 없었읍니다.
인도에서 범아일여(凡我→如) 같은 사상이 있기는 하지만 불교와는 틀립니다.
이 말씀을 정리해 보면 부처님이 스스로 바로 깨쳐서 우주 만법의 근본을 바로 알고 보니 모든 중생이 모두 부처님과 똑같은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능력만 발휘하면 스스로가 절대자이고 부처이지 절대자가 따로 있고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인간 속에 무한한 근본 능력이 있음을 부처님이 처음으로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중생들이 무한하고 절대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늘 중생 노릇만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읍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별 망상에 가려서 깨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비로소 우리가 성불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가 깨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땅밑에 금이 많이 있는 줄 알고 땅을 파면 금이 나오지만 금이 없다면 아무리 땅 밑을 파도 금이 나오지 않는 것이니 금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서 어느 누가 금을 찾겠다고 땅을 파는 헛일을 하겠읍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에게 부처님과 똑같은 그런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깨치는 공부를 해보아도 헛일입니다. 광맥이 없는 곳을 파는 헛일을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에는 우리 중생에게는 무진장의 대광맥이 사람 사람 가슴속에 다 있다 했으니 이것을 개발하고 이것을 소개한 것이 불교의 생명선인 것입니다.
세계의 학자들도 부처님이 인간성에 대한 절대적인 능력을 인정한 것은 인류 역사상 대발견이라고 인정하고 칭송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나도 내 개인적인 얘기를 좀 할까 합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좀 엉뚱한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너무 이상주의자였다고나 할까요 사람이 걸어 다니지 말고 하늘로 훨훨 날아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거나, 사람이 죽는데 죽지않고 영원토록 살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들이 조그마할 때부터 머릿속을 왔다갔다 했읍니다.
이런 생각들만하고 사니 남이 볼 때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우습게 보이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이런 책 저런 책 여러가지 철학책 등을 꽤나 광범위하게 보았지만 내가 볼 때는 영원하고 자유한 길을 제시한 책은 하나도 없었읍니다.
그런데 어느 날 「채근담강의」라는 책이 있어 그것을 펼쳐 보다가 한 군데 눈이 딱 멈추었읍니다.
「나에게 한 권의 책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펼쳐 여니 한자 글자는 없으나 항상 큰 광명을 비친다」
我有一卷經하니 不因紙墨成이라
展開無一字호대 常放大光明이니라
이 글귀를 읽으니 참 호기심이 많이 났읍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종이에다 먹으로 언어 문자로 설명해 놓은 것 가지고 안될 것이다.
종이와 먹을 떠난 참 내 마음 가운데 항상 큰 광명을 비치는 경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글자 한 자도 없는 이 경을 읽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그 후 이런 길을 많이 모색해 보았지만 다른 방법은 없고 참선을 좀 익혀 보았읍니다.
그뒤로 대광명을 비치는 문자 없는 경이 있는 것 같아서 그것을 좀 찾아본다고 중이 된지 벌써 삼십 년이 지녔읍니다만 그래 세월만 허송하고 말았읍니다.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덕상을 가졌다」는 이 글자 없는 경(經), 말하자면 자아경(自我經), 자기 마음 가운데 있는 경을 분명히 읽을 줄 알아야 하는데 언어문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할까 합니다.
장자(莊子)에 있는 얘기를 들어 보겠읍니다.
어떤 사람이 왕궁에 가서 일을 하는데 임금이 늘 책을 보고 있어서 그 사람이 임금에게 물었읍니다.
「임금이시여, 무슨 책을 보십니까?」
「옛날 현인들이 말씀한 좋은 책이니라」
「그럼 지금 현인과 철인들이 살아 있읍니까?」
「아니 죽고 없느니라」
「죽고 없으면 그 책은 무엇하는 것입니까?」
「그 현인들이 말해놓은 것을 기록한 것이니라」
「그럼 그 책이 말 그대로는 아니겠지요?」
「그야 기록만 한 것이지」
「임금이시여, 사람이 술을 마시려면 술을 먹어야지 술찌꺼기는 소용없읍니다.
현인은 죽고 없는데 기록해 둔 말은 술찌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임금이 그 말을 듣고 문득 깨달은 바 있어 마음을 돌려 문자라는 것이 옛 사람의 찌꺼기이지 진리의 묘를 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우화입니다.
보통 기술도 그렇습니다.
장자에 많이 나오는 얘기지만 아무리재주가 좋고 글이 좋다고 하여도 목수의 기술, 용접의 기술, 수레바퀴 만드는 기술 등 그 모든 기술의 묘리(妙理)는 절대로 말이나 글로써 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오래오래 하여 마음으로 터득해야지 말로서나 문자로서는 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만 문자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깊이 생각해 보는 사람은 다 언어 문자의 피해를 생각해서 경책하는 것입니다.
「널리 배우고 지혜가 많으면 자성이 도리어 어두어지느니라」
廣字多智하면 神識이 轉暗이니라 .
달마스님의 말씀입니다.
「도를 위해서는 날마다 덜고, 배움을 위해서는 날마다 더하느니라. 덜고 또 덜어서 무위에 이르니 무위로써 못 할 것이 없느니라 」
爲道日損이요 爲學日益이라 損之又損하야 以至於無爲니 無爲而無不爲니라.
이것은 노자(老子)의 말씀인데 실지로 도에 깊이 들어온 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속의 번뇌망상을 쉬는 것이 더는 것이니 도를 이룰려면 분별망상을 쉬어 버려야 하고 학문을 배우려면 문자를 하나라도 기억하여 더 보태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는 바른 믿음(正信)과 삿된 믿음(邪信)이 있읍니다.
팔만대장경이 부처님 설법인데 다 바른 믿음이지 삿된 믿음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방편가설(方便假說)과 실담(實談)이 있는 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옛 조사스님들도 마음이 즉 부처(卽心卽佛)라는 말 이외에는 모두 바른 믿음이 아니고 삿된 믿음이라고 했읍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즉 부처라고 아는 이것이 바른 믿음이며 부처님의 바른 법(正法)인줄 바로 알아서 자기 마음을 깨쳐서 부처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도를 깨쳐서 부처를 이루었지 깨치지 않고 부처를 이룬 사람이 없고 조사된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우리 불교의 철칙(鐵則) 입니다.
유교에 양명학파가 있는데 불교와 관련이 많습니다. 그 왕양명의 말을 인용해 보겠읍니다.
「사람 사람마다 지남(指南)이 있어 만가지 변화의 근원이 본래 마음에 있구나, 앞서의 잘못된 소견을 웃노니 가지마다 잎마다 밖으로 찾았네.
……………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것을 홀로 알 때 이것이 하늘과 땅 만유의 근본 기틀이로다. 자기집의 무진장의 보화를 버리고 집집마다 밥그릇 들고 거지노릇 하는구나」.
人人이 有箇定盤針하야 萬化根源이 本在心이라 却笑從前顧倒見하노니 技技葉葉外頭尋이로다…
無聲無昊를 ?知時에 此是乾坤萬有基라 ?却自家無盡藏하고 沿門持針效負兒로다.
여기서도 공연히 언어문자에 끄달려 딴 곳을 더듬고 있었음을 경책하니 가지마다 일마다 밖을 찾았다고 반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루 바삐 마음을 돌이켜서 방편가설과 삿된 믿음에 얽매이지 말고 내 마음이 오직 부처인줄 알아서 내 마음속의 무진장의 보물 창고의 문을 열자는 것입니다.
왜 남의 집에 밥 벌어 먹으러 다니며 거지 노릇을 합니까?
이제까지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계속해서 이야기 해왔읍니다.
이야기가 조금 벗어나지만 종교란 궁극적으로 무엇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불교란 어떤 종교상의 특징과 무엇을 근본으로 삼느냐 하는 문제를 잠깐 살펴봅시다.
물론 불교나 예수교나 회교나 이미 다 알다시피 세계적인 종교임에는 틀림없으나 각기 그 교조의 입장이 다르고 그 내용이 상이(相異)하므로 같은 종교라고 하더라도 사뭇 다를 수 밖에는 없겠읍니다.
그러나 각 종교의 입장과 내용은 다르다 할지라도 구경목표(究竟目標)는 다 같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서 이야기하자면 서울로 갈 때 북쪽에서 가든지 남쪽에서 가든지 서쪽에서 가든지 동쪽에서 가든지 어디서 가든지 간에 서울이 목표인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의 목표는 공통적 입니다.
그러면 그 공통적인 종교의 목표가 무엇이냐 하면 상대·유한의 세계에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유한의 세계는 생멸(生滅)의 세계이며 절대·무한의 세계는 해탈(解脫)의 세계이나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종교의 근본목표인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이란 것은 상대·유한의 세계에서는 실현되지 않읍니다.
인간의 근본 욕구는 영원한 행복에 있는데 상대·유한의 세계에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지 아니하면 영원한 행복을 얻지 못하니 우리가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갈 것을 목표로 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읍니다.
이것이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그 종교의 근본 목표입니다.
그러면 다른 종교는 그만두고 불교의 구경 목표는 무엇이냐 하면 부처님이 다른 경에서도 많이 말씀하셨지만 기신론(起信論)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읍니다.
「일체고(一切苦)를 버리고 구경의 낙을 얻는다」(離一切苦하고 得究竟樂이니라)
모든 고(苦)를 다 버려버리고 종국적인 최후의 낙, 영원하고 절대적인 즐거움(樂)을 얻는다는 것이 우리 불교의 목표이니 그것은 곧 상대·유한의 세계를 떠나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는 것과 그 내용이 꼭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상대·유한의 세계를 버리고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울로 갈려면 서울 가는 이유를 알아야지 무조건하고 서울만 간다고 하면 미친 사람이니 그 이유를 좀 설명하겠읍니다.
천지만물이 많아서 동물도 있고 식물도 있고 무생물도 있읍니다.
동물 가운데 사람이 딴 동물과는 모든 면에서 수승(殊勝)해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읍니다.
사람이란 살아 있는 물건인데 살아 있는 동안에 무엇을 목표로 하고 활동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철학자나 과학자나 종교가나 어느 학자 어느 사람이든지 간에 사람이란 살아 있는 동시에 분명한 살아가는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가 무엇이냐 하면 행복에 있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사람이란 살아있는 동안에 그 산다는데 있어서 고생되는 조건이 많이 따라 있읍니다.
여러 학자들이 사람의 고생의 내용을 각 방면에서 연구하고 분석해 보면 사람이란 실제로 고(苦)의 존재이지 낙(樂)이란 극히 일부분 뿐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읍니다.
「삼계가 불타는 집이요, 사생이 고해로다」(三界가 火宅이요 四生이 苦海로다)
삼계, 중생이 사는 이 우주 전체가 불타는 집과 같다는 것이니, 그렇게 고생이 많다는 말이며, 사생(四生), 생명으로 태어나는 모든 것이 고(苦)의 바다라는 것이니 불타는 집에서 고생만 하고 사는 것이 인생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나서 살아있는 동안에 고생만 하다가 결국은 죽고 마는 것이니 그 동안 살다가 혹 좋은 일도 더러 있기는 있지만 그것은 순간적이어서 인생 전체로 볼 때는 고(苦)는 많고 낙(樂)은 적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데 자살(自殺)할 수도 없고 그냥 살고 싶지 않다고 해서 살지 않을 수도 없는데 어떻게 좀 고생을 덜 하고 행복하게 살 수 없느냐 하는 생각은 고생하는 사람이 생각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역사적으로 수 천 년 동안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야만 이 고생하는 중생 가운데서 좀더 행복하게 살 수가 있겠느냐 하여 그 방법을 모색해 왔읍니다.
행복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일시적인 행복과 영원한 행복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이것을 보면 모든 것이 다 상대·유한으로 되어 있어서 모순에 모순으로서 투쟁의 세계입니다.
투쟁의 세계에서 일시적으로 행복을 얻었다 해도 종말이, 끝이 있고 맙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이상 일시적인 행복에만 만족할 수는 없으니 당장 한 시간 후에 죽더라도 지금은 어떻게 하면 좀 오래 살면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느냐는 것을 공상(空想)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니 이것이 영원한 행복의 추구라고 볼 수 있읍니다.
그래서 영원한 행복을 상대·유한의 세계에서는 이룰 수가 없으니 절대·무한의 세계를 구상하고 따라서 거기 가서 영원한 행복을 받도록 노력하자는 것이 종교의 근본 뜻이라고 말해 왔읍니다.
이 현실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영원한 행복이라는 것을 성취할 가능성이 없으니 그것이 실현될 현실을 떠난 다른 세계를 모색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교의 천당설(天堂說)입니다.
이 현실 세계란 모든 것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 내에 있어서 영원하고 무한하지 못합니다.
이 현실 세계에서는 아무리 뛰고 굴리고 재주를 넘어 보았자 중생이 참으로 본능적으로 욕망하는 영원한 행복이라는 것은 절대로 성취할 수 없읍니다.
그러니만치 이 현실 세계에서는 영원한 행복의 추구를 완전히 포기하고 다른 세계를 찾아 그 곳만이 절대·무한하며 영원한 행복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 예수교의 천당설입니다.
저 하늘을 자꾸자꾸 올라가면 천당이 있으니 그곳에는 모든 것을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을 못할 것이 하나도 없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일체를 초월한 절대자 하나님이 계시니, 그 하늘 나라 천당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거기 한번 들어가면 영원토록 생명을 누리고 영생하여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여 왔읍니다.
사람이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리는 곳이 있다면 현실 이것을 다 버리고 그 곳으로 가자고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할 것 아니겠읍니까?
아방궁이다 뭐다 해봐야 다 헛 것이니 다 버리고 그곳으로 가자 이것이 각 종교의 시발점(始發點) 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종교가 조직화되고 체계화된 이후부터 인류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지배하였는데 불교는 삼천년, 예수교는 이천년, 바라문교는 사천여년의 세월이 흘러왔읍니다.
사람의 지혜가 발달되기 전에는 천당설을 아무 주저 없이 믿고 따랐는데 차차로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그런 가르침이 거짓말 같은 생각이 들어 방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읍니다.
그래서 큰 신학자들이 나서서 “합리(合理)·불합리(不合理)를 논하지 말고 예수의 말씀을 무조건 믿으라”고 했읍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저 유명한 신학자 성 어거스틴은 “불합리(不合理)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고 했읍니다.
그러므로 예수교에 대한 근본이 어디 서있느냐 하면 절대적인 믿음,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 절대적인 신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요즈음에 와서는 우주 과학시대가 되어서 하늘 나라를 맹목적으로 그대로 믿으라 하는 것은 통하지 않게 되었고 여러 신학사상들이 주장되어 예수교 사상 자체도 전환하고 있지만 근본 교리는 그렇게 구성되어 있읍니다.
그러므로 천당에 계시는 절대 신인 하나님을 내놓고는 예수교를 찾아볼 수 없고 하나님을 의지해서만 그 하나님의 힘, 타력(他力)으로써 절대·무한의 세계인 하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니 다른 여타의 종교들도 대개 그런 경향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는 그와는 다릅니다. 상대·유한의 세계를 벗어난 절대·무한의 세계를 어느 곳에서 찾느냐 하면 자기의 마음 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절대·무한의 세계가 다 갖추어 있는 것이지 내 마음 밖에, 이 현실밖에 따로 있지 아니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딴 종교하고 틀리는 불교의 독특한 입장입니다.
혹 어떤 때는 타력적인 방편을 쓰는 것도 결국은 자력으로 자기 마음을 밝히려는 데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불교를 믿으려면 자기에게 그러한 절대·무한의 세계가 갖추어 있다는 것, 내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믿는 것이 근본 조건입니다.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여 사용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부처님이나 옛 조사 스님들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오늘날 심리학이나 정신 의학의 발달로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이 있음이 차츰차츰 실증되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불교는 처음과 끝이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인간을 완성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는데 그 인간이 상대적 존재냐 절대적 존재냐 하면 절대적 존재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기가 절대적 존재이며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개발해서 참으로 완전한 인격을 완성하자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어서 앞으로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많은 기여를 할 날이 있을 줄 나는 믿습니다.
이 소식을 게송(偈頌)으로 한번 읊으면 이러합니다.
기이하다 내 집의 큰 보배창고여
무한한 신기로운 공이 측량키 어렵네
의지(意地)를 몰록 벗어나
마음 근원을 사무치면
신령한 빛이 영원토록
무너지지 않는 몸을 비추도다.
奇哉自家大寶藏이여
無限神功妙難測이로다
頓超意地徹心源하면
靈光이 長照不壞身이로다.
이렇게 내 마음 속의 보배 창고를 확실히 믿고 개발하면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되는 것 입니다.
이제까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계속 강조해 왔읍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마음을 깨치려고 하면 여러 방법이 있는데 교(敎)에 있어서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삼승십이분교가 벌어지고 또 선(禪)에 있어서는 언어 문자를 버리고 바로 깨쳐야 한다고 하였읍니다.
그러나 선의 근본 입장에서 볼 때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기 전에 이미 알아 맞쳤다해도 공연히 땅에서 넘어져 뼈를 뿌러트리는 사람입니다.
하물며 덕산스님이 비오듯이 몽등이로 때리고 임제스님이 우뢰같은 할(喝)을 한다 하여도 곽 속에서 눈을 부릅뜨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읍니다.
송장이 곽 속에서 아무리 눈을 떠 봐도 무슨 소용이 있겠읍니까?
그런데 내가 법상에 앉아서 쓸데없이 부처가 어떻고 선이 어떻고 교리가 어떻고 이러니 저러니 하는 이 법문은 중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생들에게 독약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이 법문이 사람 죽이는 독약인 비상인줄 바로 알 것 같으면 그런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불법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읍니다.
부처 되려는 병, 조사(祖師) 되려는 병, 이 모든 병을 고치는데는 우리의 자성을 깨치면 이런 모든 집착을 벗어나서 참으로 자유자재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자기자성을 깨치지 못하고서는 집착을 버릴래야 버릴 수 없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이 바른 사람이라면 부처님이나 달마조사가 와서 설법을 한다 하여도 귀를 막고 달아나 버려야 합니다.
예전에 무착(無着)이라는 스님이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그 절 공양주를 하고 있었읍니다.
그런데 하루는 큰 가마솥에 팥죽을 끓이고 있는데 그 팥죽 끓는 솥 위에 문수보살이 현신(現身) 하였읍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큰 종을 치고 향을 피우고 대중을 운집(雲集) 시키려고 야단했을 터인데 무착스님은 팥죽을 젖던 주걱으로 문수보살의 뺨을 이리치고 저리치면서 말했읍니다.
「문수보살은 너 문수보살이며 무착은 내 무착이로다」
그러자 문수보살이 게송을 읊고 사라졌읍니다.
그와 같이 이 대중 가운데서 「성철은 저 성철이고 나는 나다 그런데 긴 소리 짧은 소리 무슨 잠꼬대가 그리 많으냐」 하고 달려드는 진정한 공부인이 있다면 내가 참으로 그 사람을 법상 위에 모서 놓고 한없이 절을 하겠읍니다.
그런 무착스님의 기재가 참으로 출격장부(出格文夫)이며 시퍼렇게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내 밥 내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어깨서 남의 집 밥을 구걸하느냐 말입니다.
부디 내 밥 내 먹고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언어문자를 익히는 것 뿐만 아니라 육도만행(六途萬行)을 닦아서 정각(正覺)을 성취하는 것이 어떠냐고 흔히 나에게 수좌들이 묻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예전 조사스님들이 많이 말씀하셨읍니다.
「육도만행을 닦아 성불하려고 하는 것은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것과 같다」고 그런데 어떤 바보같은 사람이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 갈 것입니까.
육도만행이 보살행으로서 아무리 좋다고 하지만은 바로 자기 자성을 깨치는 것만은 못한 것입니다.
이조 오백년 동안 불교계를 볼 때 서산(西山)스님을 대표라고 대개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보는 것은 좀 틀립니다.
진묵스님이 말씀하셨듯이 명리승(名利僧)이지 참다운 도인(道人)이 아니더라 그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조 오백년 동안의 불교 대표자라고 학인들은 봅니다.
다음의 말씀은 서산스님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일생동안 어리석은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승이 되길 바라지 않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산스님의 문집(文集)이 여러 권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러나 이런 결심이 있었기 때문에 서산스님의 문집이 후세에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투철한 각오가 없었다면 일종의 문자승이나 되고 말았지 어찌 이조오백년을 대표하는 스님이 되었겠읍니까.
우리가 앞으로 공부를 함에 있어서 이론과 실천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경전을 배우면서 참선을 하고, 참선을 하면서 경전을 배우고 조사어록을 얽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언어문자는 산 사람이 아닌 종이 위에 그린 사람인줄 분명히 알아서 마음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여기 대중 가운데서도 여러가지로 공부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염불하여 삼매를 성취하여 성불한다.
주력으로 삼매를 성취하여 성불한다.
경을 보아 삼매를 성취하여 성불한다는 등등.
그러나 그 무엇보다는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것이 성불하는 지름길이라고 조사스님들은 다 말씀합니다.
그러니 이 법회(法會) 동안에는 누구든지 의무적으로 화두를 해야겠읍니다.
이제 내가 화두를 일러줄 터이니 잘 들어십시요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고」
(不是心不是物不是佛이니 是什麽오)
내가 일러준 이 화두의 뜻을 바로 알면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고 자성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흔히 이 화두의 뜻을 잘못 알고 마음이라 하면 어떻고 물건이라 하면 어떻고 부처라 하면 어떠냐고 하는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늘 마음 속에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의심을 지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지금까지 자기가 참구하는 화두가 있는 사람은 그 화두를 놓치지 말고 더욱 간절히 의심을 지어가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읍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잠깐 동안이 나마 조용히 앉아 있으면 항하사 모래알 같이 많은 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나으니라. 칠보탑은 필경 부서져 티끌이 되거니와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은 바른 깨달음을 이루느니라」
부처님 당시에도 마음을 깨치는 방법으로 경행(輕行)과 좌선(座禪)을 가르치셨읍니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선정(禪定)을 익혀라〉고 간절하게 말씀하셨읍니다.
선정(禪定)은 앉아 있든지 서 있든지, 말할 때나 말하지 않을 때나 마음이 망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한 곳으로 모이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오로지 경행과 좌선만을 가르치시고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 우리들은 오직 참선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앞에 나온 임제스님과 덕산스님에 대해서 앞으로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잠시 언급할까 합니다.
두 분 스님은 예로부터 조사스님들 가운데서도 영웅이라고 칭송을 받는 분들 입니다.
임제스님은 처음 황벽스님에게 와있으면서 수행의 태도가 순수하고 열심이었읍니다.
그때 수좌(首座)로 있던 목주스님이 계셨는데 감탄하여 “비록 후배이기는 하나 대중과는 다른 바가 있구나”고 말하였읍니다. 그리하여 임제스님에게 물었읍니다.
「상좌(上座)는 여기 온 지가 몇년이나 되었는가」
「삼년입니다」
「그러면 황벽스님께 가서 법을 물어본 적이 있는가」
「없읍니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를 모르겠읍니다」
「너는 어찌하여 황벽스님에게 가서 〈어떤 것이 불법(佛法)의 긴요한 뜻입니까〉 하고 물어보지 아니 하느냐」그 말을 듣고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에게 가서 그렇게 불었는데, 묻는 소리가 아직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황벽스님이 갑자기 몽둥이로 스무대나 때렸읍니다.
임제스님이 몽둥이만 맞고 내려오니 목주스님이 물었읍니다.
「여쭈러 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제가 여쭙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실스님이 갑자기 때리시니 그 뜻을 제가 알 수가 없읍니다」
「그러면 다시 가서 여쭈어라」
그 말을 듣고 임제스님이 다시 가서 여쭈니 황벽스님은 또 몽둥이로 때렸읍니다.
이와같이 세번가서 여쭙고 세번 다 몽둥이만 맞고 말았읍니다.
임제스님이 동아와서 목주스님께 말했읍니다.
「다행히 자비를 입어서 저로 하여금 황벽스님께 가서 문답케 하셨으나 세번 여쭈어서 세번 다 몽둥이만 실컷 맞았읍니다.
인연이 닿지 않아 깊은 뜻을 깨칠 수 없음을 스스로 한탄하고 지금 떠날까 합니다.」
「네가 만약 갈 때는 황벽스님께 인사를 꼭 드리고 떠나라」
임제스님이 절하고 물러가자 목주스님은 황벽스님을 찾아가서 여쭈었읍니다.
「스님께 법을 물으러 왔던 저 후배는 매우 법답게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하직 인사를 드린다고 오면 방편으로 그를 제접하여 이후로 열심히 공부케 하면 한 그루 큰 나무가 되어 천하 사람들을 위해 시원한 그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임제스님이 와서 하직 인사를 드리니 황벽스님이 말씀하셨읍니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너는 고안(高安) 개울가의 대우(大愚) 스님에게 가거라. 반드시 너를 위해 말씀해 주실 것이니라」
임제스님이 대우스님을 찾아 뵈오니 대우스님이 물었읍니다.
「어디서 오는고」
「황벽스님께 있다가 옵니다」
「황벽이 어떤 말을 가르치든가」
「제가 세번이나 〈불법의 긴요한 뜻을 여쭈었는데 세번 다 몽둥이만 맞고 말았읍니다. 저에게 무슨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겠읍니다」
「황벽이 이렇게 간절한 노파심(老婆心)으로 너를 위해 철저하게 가르쳤는데 여기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것이냐」
임제스님이 그 말 끝에 크게 깨치고 말했읍니다.
「원래 황벽의 불법(佛法)이 별것 아니구나」
대우스님이 임제의 멱살을 잡고 말했읍니다.
「이 오줌싸개 놈아 ! 아까는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더니 지금은 또 황벽의 불법이 별 것 아니라고 하니 너는 어떤 도리를 알았느냐, 빨리 말해보라! 빨리 말해보라」
임제스님은 대우스님의 옆구리를 세번 쥐어 박았읍니다.
그러자 대우스님이 멱살 잡은 것을 놓으면서 말했읍니다.
「너의 스승은 황벽이지 내가 간여할 일이 아니니라」
임제스님이 대우스님께 하직하고 황벽스님에게 돌아오니, 황벽스님은 임제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물었읍니다.
「이놈이 왔다 갔다만 하는구나. 어떤 수행의 성취가 있었느냐」
「다만 스님의 간절한 노파심 때문입니다」
「어느 곳에서 오느냐」
「먼저번에 일러 주신대로 대우스님께 갔다 옵니다」
「대우가 어떤 말을 하던가」
임제스님이 그간의 일을 말씀드리자 황벽스님이 말씀했읍니다.
「뭣이라고 ! 이 놈이 오면 기다렸다가 몽둥이로 스무번 때려주리라」
그러자 임제스님이 말했읍니다.
「기다릴 것 무엇 있읍니까. 지금 곧 맞아 보십시오」
하면서 황벽스님의 뺨을 후려쳤읍니다.
황벽스님이 말했읍니다.
「이 미친 놈이 여기 와서 호랑이 수염을 만지는구나!」
그러자 임제스님이 갑자기 고함을 치니 황벽스님이 말했읍니다.
「시자야 이 미친 놈을 끌어내라」
그 후 임제스님이 화북(華北) 지방으로 가서 후배들을 제법하면서 사람만 앞에 어른거리면 고함을 쳤읍니다.
그래서 임제스님이 법 쓰는 것을 비유하여 우뢰같이 고함친다(喝)고 평하였읍니다.
덕산스님은 처음 서촉(西蜀)에 있으면서 교리연구가 깊었으며 특히 금강경에 능통하여 세상에서 주금강(周金剛)이라고 칭송을 받았읍니다.
스님의 속성(俗姓)이 주(周)씨 였읍니다. 당시 남방에서 교학을 무시하고 오직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하는 선종의 무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분개하여 평생에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금강경소초(金剛經疏鈔)를 젊어지고 떠났읍니다.
가다가 점심(點心) 때가 되어서 배가 고픈데 마침 길가에 한 노파가 떡을 팔고 있었읍니다.
덕산스님이 그 노파에게 「점심을 먹으려고 하니 그 떡을 좀 주시오」 하니, 그 노파가 「내 묻는 말에 대답하시면 떡을 드리지만 그렇지 못하면 먹을 드리지 않겠다」고 하니 덕산스님이 「그러자」고 하였읍니다.
노파가 물었읍니다.
「지금 스님의 걸망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읍니까?」
「금강경소초가 들어 있소」
「그러면 금강경에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말씀이 있는데 스님은 지금 어느 마음에 점심을 하시려고 하십니까」
「점심(點心) 먹겠다」고 하는 말을 빌어 이렇게 교묘하게 질문했읍니다.
그러자 이 돌연한 질문에 덕산스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읍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그렇게도 금강경을 거꾸로 외우고 모로 외우고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떡장수 노파의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다 달아나 버렸읍니다.
그래서 노파에게 물었읍니다.
「이 근방에 큰 스님이 어디 계십니까」
「이리로 가면 용담원(龍潭院)에 숭신(崇信) 선사가 계십니다.
점심도 먹지 못하고 곧 용담으로 숭신선사를 찾아 갔읍니다.
「오래 전부터 용담(龍潭)이라고 말을 들었더니 지금 와서 보니 용(龍)도 없고 못(潭)도 없구만요」
하고 용담 숭신선사에게 말하니 숭신스님이 말했읍니다.
「참으로 자네가 용담에 왔구만」
그러자 또 주금강은 할 말을 잃어버렸읍니다.
그 때부터 숭신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하루는 밤이 깊도록 숭신스님 방에서 공부하다가 자기 방으로 돌아오려고 방문을 나서다가 밖이 너무 어두워 방안으로 다시 들어 갔읍니다.
그러니 숭신스님이 초에 불을 켜서주니 덕산스님이 받으려고 하자 곧 숭신스님이 촛불을 혹 불어 꺼 버렸읍니다.
이 때 덕산스님은 활연히 깨쳤읍니다.
그리고는 숭신스님께 절을 올리니 용담스님이 물었읍니다.
「너는 어깨서 나에게 절을 하느냐」
「이제부터는 다시 천하 노화상들의 말을 의심하지 않겠읍니다」
고 덕산이 말했읍니다. 그 다음날 덕산스님이 〈금강경소초〉를 법당 앞에서 불살라 버리며, 「모든 현변(玄辯)을 다하여도 마치 터럭 하나를 허공에 둔 것 같고, 세상의 추기(樞機)를 다한다 하여도 한 방울 물을 큰 바다에 던진 것 같다」고 하였읍니다.
그 후 후배들을 제접 할 때는 누구든지 보이기만 하면 가서 몽둥이로 때려 주었읍니다.
그래서 덕산스님이 법 쓰는 것을 비유하여〈비오듯이 몽둥이로 때린다〉고 평하였읍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씩 대중방을 뒤져 책이란 책은 모조리 찾아내어 불살라 버리곤 하였읍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참선에 신심을 내어 자성을 바로 깨치도록 노력합시다
성철스님 법문
방편을 붙잡고 진리인양 하는것이 짜증나는 거예요.
손가락을 보지말고 달을 보라고 하잖아요.
깨달은 후의 세상이 보입니까?
그것이 달이예요.
찾는 행위(보는 행위)를 그만두면 찾는 자가 곧 그것. 달과 방편을 구분짓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다른거 다필요없어요.
신심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신심이 생기면 부처와 소통이 됩니다.
다른 것은 다 필요없어 제쳐두고 신심이란 것을 취하셨군요. 다음엔 무얼 취할 건가요
그만 쉽시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취하면서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죠?
부처와의 소통을 위해서?
그래서
어떻게 되셨나요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셨나요
부처와의 소통은 지나가는 거지에게나 줘버리고
대지에 피어나는 새싹들의 노래나 듣자구요
활짝
개똥철학이 또 나왔군..
제가 이런거 때문에 선불교를 싫어하는거예요.
신심조차도 무의미하다.
니잘났다.
이놈의 선불교는 부처님을 섬기기를 해.. 불법을 알아.. 완전 개망나니가 따로 없어..
고승이라고 하는 작자들이 헛소리나 짓거리니 신도들도 그모양이지..
그래 도교는 신심이 없다고 칩시다.
중국철학이 원래 신심하고는 상관없는 것이라서 인정합니다.
그럼 아예 중국철학으로 가던가.
불교에서 신심을 빼놓으면 그게 철학이지 종교요.
신심에는 손지심(덜어 냄),쉬는 것 보다 수승한 방편도 더물지 않나요^^
앎을 그만 내려놔 보십시다
이것 저것 다짬뽕시켜놓는거까지 이해한다 칩시다.
그래도 어느정도 끝까지 가보고서 이것저것 섭취해야 할거 아니요.
불교인척 하면서 신심까지 빼먹으면 그게 도교지 불교요.
도교로 하면 도교로 얘기해주었지. 누가 불교로 얘기해주냐구요.
그래도 불교의 신심의 맛이나 보고 도교를 하던지..
아니면 아예 도교로 가던지..
중국철학 인정합니다.
수준이 높아요.
중국철학에다가 불교를 집어넣으면 서로 상충되어서 아무것도 안됩니다.
중국철학은 중국철학대로 가야해요.
불교가 중국철학속에 있으면 불법하는 사람들은 뭐가 되냐 말이요.
지금의 선불교는 도교입니다.
도교로 밀어붙이면 서로 통할수 있어요.
허나 신심있는 불자가 도교로 갑자기 턴하면 서로 상충되어버리고 불자는 바보가 되어버려..
우리는 불교에 좀더 정통하고 신심이 깊은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소통하는 이유는 불교인이든 아니든 지향점이 같거나 비슷하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부분을 좀 더 유연하게 받아들이며 교류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만
재물을 원하면 지장보살 3천번하시구요.
몸이 건강할려면은 홍삼드시구요.
깨달음을 얻으시려면은 신심을 키우시구요.
문명이나 인간의 비밀을 알고싶으시다면 외계인을 연구해보세요.
지금 님이 전하고자 하시는 뜻,그리고 그 전달자는 무엇입니까 무상하며 고이며 무아임을 통찰할 뿐.
...깨달음인가 뭔가는 그 무언가가 얻어지는게 아닙니다. 만약 얻어지는게 있으시다면 언젠가 모두
내려 놓아야 할 때가 올것입니다. 얻는것 보다 내려놓기가 더 힘이 들지요 지금처럼.... 그렇지 않겠습니까
불교했다가 도교했다가 이놈의 선불교는 알켜주어도 알아듣지도 못하고 지잘났다고만 하니
제가 불교식으로 무상,고, 무아를 사용하니 왔다갔다 한다고 하시는데 대화를 위해 그런 표현을 사용해 봤을 뿐이고....
무상,고,무아로 통찰하는 것은 곧 손지심(방아착)이며 황벽의 방망이와 한 맛임을 말씀드린 것이며 방문객님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표현과 뜻을 같이합니다 . 다만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고해서 고정된 상을 취하는게 아니란 것만 참고하신다면...
도교는 너무 시시해서 안할뿐이요
도교보다는 성리학이 더 어렵지 그래서 유학자들이 도교와 선불교를 우습게 보았지요
선불교만 살려두고 전부 없앴으니 말해 무엇합니까
불교가 할게 뭐있어
신심아니면 전부 말장난이야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2.04.15 22:09
미타의 본원력을 아느냐 모르냐입니다.
그게 불교의 핵심이예요.
정토진종게시판에다가 제가 쓴글을 쭉 읽어보시고 얘기합시다.
님이 불교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말이지요.
저는 자력에 관심이 없어요.
님이 얘기하는 내용은 전부 자력이예요.
저는 달마이고 혜능이고 그들의 깨달음에 관심이 없어요.
그경지를 높게 보지도 않구요.
물론 그들이 만약 살아있다면 재미있게 얘기하겠지요.
본원자랑을 하면서요.
중생이 깨달음을 원하면 미타가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것은 신심하나로 결정되는 것이예요.
중생이 보살을 원하면 미타는 중생을 보살로 만들어주세요.
미타에게 있어서 중생을 보살로 만드는 일은 누워서 식은죽먹기보다 쉬워요.
다만 중생이 보살이 되기 싫어할뿐이죠.
진리는 이러할진데 거기다가 뭐 그렇게 개소리를 짓거리고 있습니까?
멍멍멍
믿음에 의한 미타의 본원력은 잘은 모르겠지만 이를 타력이라 하나요? 타력은 극락왕생은 시켜줄지 몰라도
극락에 가서도 스스로 공부를 해야하지 않나요. 지금 님앞에 석존께서 계시더라도 견성은 본인 스스로 해야 합니다.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아난조차 석존 생존시에는 아라한이 되지 못했지 않습니까
본인이 하는 것이죠.
본인이 원하면 미타께서 시켜준다고 썼잖아요.
미타께서 깨닫기 싫어하는 중생들까지 깨침을 주지않죠
그렇습니다
일방적으로 스승이 알을 깨주면 사산이되지요. 본인이 안에서 안갖힘을 쓰며 깨어서 나오려할때 스승이나 도반이
절묘한 타이밍에 밖에서 두드려 주는것이죠 선불교에서하는 파격이 이것 아니겠습니까 황벽의 방망이가 아무리 맛이
좋다한들 원하지 않는이에게 내려친다면 폭행에 쇠고랑을 찬단 말이죠. 그렇게 자력과 타력이 함께 하지요
서산대사가 새벽닭울음을 듣고 깨치셨다고하는데 자력이냐하면 이 또한 새벽닭이 황벽의 방망이와 같은
매개체 였단 말이죠 자력만이라고 핦수도 없어요 흔히들 극락을 가면 공부가 힘들다하지요 고통이 없는데 공부에 대한
동기를 부여받기 힘들어서...
우리삶을 고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늘 동기부여를 받는단 말이죠 그러니 늘 자와 타가 함께 합니다 서산의 새벽닭,황벽의 방망이(황벽),고해는 모두 미타의 가피......
문제는 그렇게 구분 짓는 자가 있을 뿐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이거죠 오온의 덩어리이니 무상,고,무아로 통찰하기도하고
어떤 단체에서는 사진이니 불태워 버려라는 방편을 사용하기도 하고 이미 부처이므로 손댈것도 없다고 하는 곳도 있단말입니다
모두 같은 말 아닙니까? 그렇다고 맛도 모르면서 흉내를 내는 것은 세상에 거짓말장이들 수만큼 많지 않겠습니까 무슨 수로 이들의
거짓말하는 행위를 근절시키겠습니까.........창밖이 환하군요
누가 뭘 구분지어요..
세상은 깨닫기전이나 깨닫기후나 달라진게 없어요.
주인공을 찾았다고 내가 없어지나요.
답답한소리만 하고있네..
자력은 자력안에서 평생 논다니깐..
타력이라는 말의 의미도 모르면서 자꾸 헛소리만 하지말라니깐요.
제가 말하는 타력이 뭔지 생각좀 해보세요.
타력이란 연기란 말이요.
답까지 다 달아줄게요.
답을 알던 모르던 머리로 아는 그런것이 아니니깐..
제가 하는 말은 저의 생각도 아니고 저의 깨침도 아니예요.
부처와의 소통이요.
선불교와 대화하면 경계는 무지 높아져요.
저는 경계가 높아지는 것을 원치않아요.
보살이 되고 싶지도 않구요.
영원히 중생으로 불보살의 보살핌속에서 살고 싶어요.
허지만 미타가 그렇게 나두지는 않을거 같네요.
한번 이길로 들어서면 계속 앞으로 가야하니깐..
깨치기 전이나 깨친 후나 세상은 똑같단 말이죠.
깨치기 전에도 불보살의 가피속에서 살아왔고 깨친후에도 불보살의 가피속에서 살아가죠.
다만 그것을 본인이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일뿐이요.
상대가 모르는 문자를 늘어놓고 이것도 모르는 것이라고 정신차리라고 한다면 그건 님만의 리그가 되는 것이오. 부처와의
소통을 운운하시면서 대화자와의 소통을 무시하면 안되지 않나요 님이 자타라는 개념을 끌어왔고 귀의는 그 개념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헛바퀴를 굴렸으니 뉘를 탓하리오 다 내탓이오 하면서 탓하는 이넘이 뭐꼬 하는 게 화두를 드는것이요
이미 견성후라도 님말씀대로 세상은 달라지는 것이 없소. 이건 아시네...그러니 이 뭐꼬를 할뿐. 님들의 표현으론 연기와 인과를 살핀다
이게 같은 말이란 말이오. 왜 불교를 그렇게 다르게 특별한 것으로 포장하시는지 원 참, 거품을 넣지 맙시다. 이렇게 어렵게 해서
불교
를 수호하겠다는 님들의 참 의미가 오히려 벽을 쌓게되지 않을까 걱정이오.
그리고 타력이 연기란 의미로 사용했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오.
새벽별을 보고 깨치신것도,방망이를 맞고 터진것도, 닭소리를 듣고 깨친것도 연기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요 님이 말씀하신 미타의 가피만 타력이 아니라 이 또한 타력이며 결국 자타의 구분이 없지않소... 참 같은 것을 그렇게 다르게 구분해 놓다니 몰라서 그러는 것이요들 아니면 고매한 무엇으로 포장하면 본인이 그런 것으로 동일시 되는데 따른 기대심리요 시간도 많으시오들.
문자가 아닌 소리나 행동으로 깨친것이 누가 틀렸다고 했나요.
다만 그 깨침이 그리 특별한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별종처럼 보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더 나아가자면 경계에 따른 높낮음이 있긴 있죠.
허지만 그런 얘기는 불필요할수도 있어요.
하루아침에 불교의 모든것을 얘기할수도 없는일이구..
누가 누가 깨쳤다. 그게 뭐 어쩌라구요.
깨친것은 자신만이 알지 스승이 너는 깨쳤어. 너는 못깨쳤어.. 그런것은 거짓말이예요.
남이 어떻게 그사람이 꺠쳤는지 안깨쳤는지 안다는 말이요.
선불교에서 행하는 인가는 엉터리죠.
그리고 그인가에 현혹되어서 그것을 받을려고 하는 짓거리도 우스운 얘기예요.
그리고 고승이라고해도 죽을때 전부 지옥에 안떨어질려고 발버둥칩니다.
죽을때 지옥에 눈앞에 보이거든요.
경지가 높을수록 지옥은 확연히 보여요.
괜히 인간으로 태어나 죄만짓고 가는거죠.
불쌍한 중생들..
참 궤변인것 같소. 맛을 본것같이 주장을 늘어 놓으시는 양반이 어찌 맛을 모르는 것처럼 그런 독단적인 엄살을 부리시는 것인지
이 주고받는, 발단은 님이 귀의의 글에 댓글을 달아서 시작이 되었고, 귀의가 일일이 주절주절 되는 것은 맛을 모르는것 같은데
맛을 본것처럼 단언을 늘어놓으시니 의무방어 차원이였으며 님또한 그런 차원이라면 귀의는 교인이 아니니 교를 가지고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오. 다만 선불교도 보호 육성할 가치가 무궁무진한 불교의 한 방편이며 우리의 문화 유산임을 잊지는 말아야겠소.그리고
인가라는 짓거리로 중생들을 속여온 뭇고승들의 참회의 목소리를 들었다니 님의 천이통은 매우뛰어난 것 같소.
일본에 에오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신심이 없이 깨쳤다고하죠 몇년있다가 자살을 했지요
자력은 그런거예요
너무 그런류의 깨달음만을 탐하지 말라는 것이죠
자력의 깨침은 유리와 같이 금방 깨져요
에오의 사행선은 남방불교의 부정관이 원류아닌가요 자타가 차별이
없다고 믿는 귀의이지만 굳이 그렇게 인정을 하더라도 자력이라고
하시는 에오의 사행선(부정관)은 님들의 기반인 남방불교의 기법이죠
그리고 깨어질 것이 남았다면 깨어져야 하지요 그게 수행의 길임을 모르시오
깨친게 있다는 그래서 움켜질 뭔가가 있다면 인가해줄 수 없는 요소입니다.
그렇게 인가를 하는 것 아니겠오
여기 카페는 남방불교가 아닌데요. 대승불교카페예요.
신심이 깨어진다고 보시나요?
한번 만들어진 신심은 절대 안깨어져요.
절대 안깨어지는 것을 타력의 신심이라고 깨어지는 신심을 자력의 신심이라고 하죠.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님의 타력과 자력의 정확한 의미가 법성이 아닌 아미타라는 대상을 두고서...
신앙인의 소양으로 신심을 이르시는 모양인데 귀의는 신앙인이 아닙니다.
교인이 아니란 말씀. 님은 그렇게 귀의를 자력이라고 구분을 지으시는 모양인데....
님의 타력은 천지간에 인격적인 절대자가 있다는 믿음. 아 놔~~ 귀의가 지금 누구하고 모슨 짓거릴 한거지
아미타불이 법신불이여.. 석존도 법신불이구요.. 중생도 법신불이죠..
근데 신심은 타력에서 생기니깐.. 타력,, 타력 그러는 거예요..
선불교의 폐단, 선불교만이 아니라 대승불교는 보통 그런 측면이 있는데...특히 선불교에 노출된 이들의 경우, 다음의 폐단이 심해요...
이해의 편의를 위해, 비유를 들겠습니다. 무협지를 보면, "무초 승 유초"라는 말이 나옵니다. 무초승유초란 말이, 초식을 이해하고 체득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무초승유초라는 것을 신봉하여, 초식을 외면한다면...고수는 고사하고, 하수조차 될 수 엄습니다.
선일화의 많은 경우는...무초의 경지에 이른 절대 고수, 혹은 무초의 맛을 얼핏 엿본 절정 고수, 혹은 초식의 정점에 이른 일류 고수들이 등장합니다. 근데 그것만 보고, 3류도 몬되는 이가 흉내 내게 하는 폐단이 있죠.
귀의가 3류다를 완곡하게 표현하신 것이라면 감사히 받겠습니다만, 선불교의 일부 폐단 때문에 선불교 자체를 가치절하시키는 것은 오히려 님같은 분의 도리가 아닌듯합니다
두 분 즐담 했습니다.^^ 방문객님 답변 잘들었고 귀의가 먼저 의의 제기를 했으니 예를 갖춰 감사하다는 말씀드리며, 님들의 리그를 즐기시기를. 다만 앞으로 인터넷에서 선불교를 까는 글은 좀 줄어들겠다는 기대를 하면서.....
참 용수님 선사 임제의 주먹질을 이 곳에 두고 갑니다. 훈풍에 부처님의 소식이 보이는구나
귀의가 나갔다가 잠깐 다시 들어왔는데...용수님의 신란성인 운운 정토진종 인터넷 찾아보니 일본에서 들어온 일본 불교구먼 사전에 공개 좀 하시지 ....아미타불
신심으로 선불교를 넘어서 훨훨 날아가시기를
성철스님도 선불교에서는 이단이지요 신심을 강조하셨으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