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굴사건 희생자 유골이 더 이상 방치되어선 안됩니다>
□ 유골이 발굴되기 까지
금정굴 현장 골짜기에는 택시기사들조차 접근을 꺼려하던 곳이었다. 지금은 등산로가 되어 근처 주민들의 휴식처가 되었지만 이는 발굴이 되고 난 뒤의 일이었다. 발굴이 되고 진실이 밝혀지고 난 뒤에야 비로서 금단의 땅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금정굴 현장은 이런 모습이었다.
(발굴 전 금정굴 모습. 1995년 MBD PD수첩)
금정굴 유족회는 결성 1993년 9월 15일 고양시의회 의장에게 탄원서를 제출했으나 접수를 거부당했다. 그러자 9월 20일 유족회는 다시 대통령, 고양시장 등에게 청원서를 제출했으며, 9월 24일 유골발굴을 시작했다. 당시 지역신문사 사장이었던 이은만씨는 “금정굴에서 유골이 나오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며 조롱했다.
(1995. 9. 발굴 중인 금정굴 모습. 1995년 MBD PD수첩)
희생자들이 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발굴 5일째 되던 9월 29일이었다. 이후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금정굴 현장 위는 발굴된 유골로 온 산이 뒤덮였다.
(금정굴 현장에 널려 있는 유골)
분노한 유족들은 1995년 10월 2일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진정했으며, 10월 13일에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유골 시위를 벌이기에 이르렀다. 유족과 고양시민회 등 시민사회단체는 유골감식을 위해 서울대로 옮겨지기 전까지 밤을 새며 유골과 함께 현장에 머물러야 했다.
이상 있었던 일을 일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93. 9. 15.고양시의회 의장에게 탄원
1993. 9. 20.대통령, 고양시장 등에게 청원서 제출
1993. 9. 24.제3차 위령제 후 유골발굴 시작
1995. 9. 29.유골 출토되기 시작
1995. 10. 2.진상규명 및 책임자처벌 진정
1995. 10. 13.여의도 유골 시위
1995. 10. 16.발굴 중단. 이후 11. 16.까지 발굴된 유골을 현장에서 지킴
□ 유골 감식 후 16년 동안 방치
금정굴 현장에서 발굴된 유골은 1995년 11월 16일 감정을 위해 서울대 법의학교실로 옮겨졌다. 1차 감정 결과는 1996년 4월 6일 나왔다. 당시 서울대 법의학과 이윤성교수는 희생자 수는 160명 이상이며 두개골이 완성되지 않은 미성년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이후 유골을 영구 봉안하기 위한 노력은 ‘부역했다는 의심만으로 집단학살’했다는 국가범죄를 은폐하려는 세력들에 의해 매번 좌절되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사회 정의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1999년에는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구성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2005년에는 충북대 박선주 교수팀이 학살지 발굴 예비조사를 마쳤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가 경찰을 지휘하던 국가가 금정굴사건을 잃으켰다는 내용의 진실을 밝혔으며, 2010년에는 지자체 선거에서 야 5당 후보들이 금정굴 희생자의 유해안치 및 평화공원 조성 정책협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고, 2011년 4월에는 고양시의회가 유해를 임시안치하기 위한 예산을 통과시켰다.
(발굴 후인 1995년 서울대 법의학교실로 옮겨 진 유골)
(1995년 발굴된 유골은 2011년까지 무려 16년 동안 방치되고 있었다)
이상을 일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95. 11. 16.유골감정을 위해 서울대 법의학교실로 모심
1996. 4. 6.유골감정 1차 보고서. 희생자 수 160명 이상이며 미성년 포함 추정.
1999. 2. 10.경기도의회,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구성 결의안 통과
2000. 12.고양시의회에 위령사업 시행 촉구 청원서 제출
2002. 9. 14.고양시의회 위령사업촉구결의안 부결
2005. 7. 21. ~ 8. 2.충북대 박선주 교수팀, 학살지 발굴 예비조사
2007. 6. 26.‘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 금정굴사건 진실규명 결정
2010. 5. 18.야 5당 후보, 유해안치 및 평화공원 조성 정책협약 체결
2011. 4. 28.고양시의회, 유해 임시안치 예산 통과
□ 언제까지 임시 안치하고 있을 것인가?
서울대 법의학교실에 방치되고 있던 유골은 2011년 9월 24일이 되어서야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롭게 모셔진 곳은 납골시설인 ‘청아공원’이라지만 이는 영구 봉안 시설이 아니라 2년 계약의 임시 안치 시설이다. 2012년 12월 아무런 진전 없이 벌써 한 해가 지났다. 이제 한 해가 더 지나면 다시 갈 곳을 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금정굴 사건은 전쟁을 빌미로 200여 명에 이르는 민간인들을 무참히 살해한 집단학살사건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이유로 희생된 주민들이 한반도 곳곳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확인했다. 거기에 ‘토벌’이니 ‘소개’니 하는 온갖 작전을 빌미로 희생된 주민들이 있다는 것도 밝혀졌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이 분들, 그것도 60년 전에 돌아가신 분들이다. 무엇이 두려워서 이들의 봉안을 꺼려하는가? 분명한 것은 이들의 죽음을 외면하는 자들이 말하는 인권과 평화는 “기만”이라는 사실이다.
(유골을 모시기 전 서울대 법의학교실 앞에서 제례를 지내고 있다)
(유골을 옮기고 있는 유족들)
(2012년 9월 청아공원. 새로운 조치가 없는 한 이 조차도 내년에 그친다)
첫댓글 금정굴 유족님 들께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한일이 열일 이라고 비단 이뿐이겠습니까? 반드시 이번 대선에서 정권을 교체하고 정의가 숨쉬는 사회가 오기를 기대합니다. 同病相憐이라고 남의일 갖지 않습니다. 끝까지 투쟁해서 구천을 떠도는 寃魂들의 恨을 풀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