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유회(人生遊回)
갑갑해서 아침마다 눈을 뜨면 일기상황을 살핀다. 오전 흐림, 오후비...
순박한 중년은 고뇌하다 순종한다. 비가 온다는데 나갔다가 비맞은 중꼴이 되면, 나 스스로 볼상이 사납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루 이틀, 예전엔 비가 온다면 이틀 중 하루 정도를 그럴 것이라고 수긍을 하였다면, 요즘은 사흘 중 하루정도로 신뢰가 떨어졌다.
문제는 과학문명이 발달할수록 기후변화에 대한 시시각각 정보를 종합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예민해진 국민들에게 욕먹지 않으려고, AI에다 약을 주고받고 엄살을 섞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같은 아나로그는 오래전에 덩치 듬직하여 티비 화면을 많이 먹아서서 구수한 목소리로 기상현황을 알려주던 김0환 기상통보관을 머리속에 담고 살아간다.
예보가 틀릴수도 있을 것이란 예외적 상황을 솔직하고, 경험섞인 속내로 불신들을 커버해 내는 것이었다.
오늘따라 제대로된 외출을 하고 싶은데, 아침부터 비가 내렸고, 오후 늦게 비 소식이 잡혔다.
요즘들어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처음 가보는 곳이 아니라, 달포쯤 전에도 다녀오고 몇차례 갔다왔던 곳, 어느 동영상의 배경이 되었던 양산의 황산공원이다.
동영상에는 주로 가수 남인수의 노래들을 엮어 부르는데, 그들은 가수가 아닌 6,70대 화가, 시인, 교수 등으로 구성된 순수한 동네 놀이패들이다.
그들의 노래나 기타 실력은 댓글에서도 평가가 그랬지만, 티비화면에 나오는 소위 노래꾼들은 저리 가란다. 욕심이 있으면 전국적 선발대회라도 출전이라도 할텐데, 그들은 전혀 그런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 야외에서 막걸리통 놓고 노랫가락 타령이라. 나는 그런 그들의 모습이 마냥 부러웠다. 정자에 앉아 먹걸리 마시다 기타 반주에 구슬프게 울려나오는 노랫가락, '나는 사람이 아니외다', '서귀포 칠십리' 등 사연 깊은 노래들...
그럴때마다 나란 인간은 도대체 이 나이가 되도록 제대로된 취미 하나갖지 못하고 뭘하고 살았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들이 그렇게 신선처럼,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노래부르던 그 배경이 바로 내가 가고자하는 곳인 이명박 정부때 4대강 사업으로 조성된 황산공원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양산행 지하철로 옮겨탔다. 호포역, 나는 이곳을 자주왔다. 오늘처럼 황산공원을 가기 위해서도 왔고, 아니면 양산역에서 내려 호포를 향해 강변으로 걸어간 적도 있었다.
구포와 삼량진을 잇는 철길을 넘어서면 생태공원 형태의 습지가 나온다. 일부러 가꾸지 않아 갈대며 작은 나무들이 자라는 곳이다.
공원은 엄청 너르다. 곳곳을 다양한 형태로 꾸며 놓았지만, 아직은 초창기라 자연스런 생태를 좋아하는 내가 만족하기엔 10년은 족히 더 걸려야 할 것 같다.
쉬엄쉬엄 한시간 반쯤 걸으니 양산시 취수장에 도착했다. 돌아와야 하는데, 시간도 이르고 또 욕심이 생겨난다. 강물위로 설치된 자전거 도로를 따라 올라가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작은 우산을 쓰는둥 마는둥...아프리카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우산을 쓰는 것을 보지 못한 것 같다. 더위로 땀에 젖으나 비에 몸이 젖으나 그게 그것이라는 생각이 들듯하다.
원동면 입구에서 산길로 접어들었다. 동네도 없는 곳에 버스정류소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곳에서 가져간 도시락을 먹었다.
그리고 삼량진과 물금 잇는 산중턱에 난 도로를 따라 걷다보니, 언젠가 지나다 들렀던 신라말 최치원선생의 유적지 '임경대'가 보였다. 낙동강을 굽어보는 누각에서 시 한수를 읊으면, 막걸리가 저절로 목구멍을 넘어갈 것만 같았다.
가만히 따져보니 동영상 속에서 남인수의 노래를 불렀던 이들이 머무르던 장소가 이 임경대와 황산공원 강변쪽으로 짐작이 갔다.
벌써 걷기 시작한지 서너시간, 비가 내려 잠시 앉아 쉴곳도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조금 무리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시작 호포역에서 원동면을 거쳐 양산시 증산역까지 가는데는 다섯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육신이 지치면 정신은 가벼워져서 좋다. 요즘은 옛날이 참 그립다. 만났던 사람들이 보고 싶고, 머물렀던 곳들이 보고 싶다. 나이가 들었다는 의미이다.
옛날 우리의 누님 또래가 시집을 갈때면, 신랑 친구들이 축사란걸 써서 읽었다. 요즘처럼 종이도 흔하지 않던 시절, 내용이 길다보니 창호지에다 글을 써서 두루말이를 만들어 연습하고 보관하다 그걸 식장에서 펼치면서 읽었다.
대략 내용은 비슷했다. "구르는 수레 바퀴인양 세월이 흘러, 어쩌구 저쩌구...마지막엔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변치말고 잘먹고 잘살아라." 그런 내용들이었다.
우리네 인생도 두루말이 휴지처럼 삶의 타래는 점차 두께가 얇아짐을 안다지만, 언제쯤 동이날지 모를일이다. 지나온 세월에 감사하고, 남은 시간들 이외수의 싯귀처럼, '연약한 풀꽃 하나라도...'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며 하루를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