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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돌과 비비추
 
 
 
카페 게시글
동산*문학관* 스크랩 승천 외 / 김해자
동산 추천 0 조회 43 09.07.29 10:57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승천 / 김해자 

 

 

 


한 집 건너 지하공장
미싱 소리 드르륵대던 곳
사철 시꺼먼 하늘만 내려앉던 청천동
십자약국 골목 파란 대문
빨간 닭장집 안 녹색 부엌문
방문 벽에 걸린 푸른 작업복
왼편에 하얀 명찰 생산2과 김정례
앉은뱅이책상 앞에 〈해고무효소송 승소판결문〉
옆에 방송통신고등학교 교재, 안에 쓰다만 편지
"공부 열심히 해. 돈 걱정 말고 누나만 믿어라"
방문턱에 걸린 두 발
부엌 바닥에 늘어뜨린 긴 머리칼
아궁이에 타다 만 연탄
잠긴 문 바라보다 멈춘
반쯤 열린 눈
밖에 하얀 눈

 

 

 

 

 

 

인연 / 김해자

 

 

 

너덜너덜한 걸레

쓰레기 통에다 넣으려다 또 망설인다

이번에 버려야지, 이번엔 버려야지, 하다

삶고 말리기를 반복하는 사이

또 한 살을 먹은 이 물건은 1980년 생

연한 황금색과 주황빛이 만나 줄을 이루고

무늬 새기어 제법 그럴싸한 타월로 팔려온 이놈은

의정부에서 조타 둘 안아주고 닦아주며 잘 살다

인천 셋방으로 이사온 이래

목욕한 딸아이 알목을 뽀송뽀송 감싸주며

수천번 젖고 다시 마르면서

서을까지 따라와 두 토막 걸레가 되었던

20년의 생애,

더럽혀진 채로는 버릴수는 없어

거덜난 생 위에 비누칠을 하고 또 삶는다

화염 속에서 어느덧 화엄에 든 물건

쓰다 쓰다 버릴 이 몸뚱이

 

 

 

 

내 사랑은 오류 / 김해자




밤새 방전된 핸드폰 속에
끝내 말이 되지 못한 울음소리가 들어 있다
수신지를 잘못 찾은 흐느낌 사이 토막난 채
찍힌 사랑한다, 미안하다는 말
암호 같다 접선을 잘못한,
SOS 타전 같다 사랑에로 가는 길
잃어버린 자가 일부러 잘못 누른,
아니, 나에게 내민 간절한 손인지 모른다
밤새 떨어진 포탄과 화염 속에서 흘린
머나먼 아라비아 남자의 눈물인지도
누군가 잘못 누른 번호는 말하는 것 같다
모든 사랑은 이렇게 어긋난 부호라고
잘못 배달된 메시지는 말하는 것 같다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네 사랑이 오류라고


  


저는 기울어져도 / 김해자




강 속으로 처박힐 듯 비틀린
포플라나무 반쯤 드러난 허연 가랑이 사이로
산뽕나무 몇 줄기 푸르다 곧다

애초에 벼랑에 뿌리내리진 않았겠지
댐이 생기면서 강물은 불어 오르고
흙이 무너져 내리면서 발 닿을 길 없는 허공 중
허둥대다 바둥거리다 차츰 물가로 기울어졌겠지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산다는 건
때로 목까지 차오른 물살을 견디는 일
무량의 강물 위로 몸의 반쪽 엎어지며
수많은 낮과 밤을 홀로 버티는 일
그러던 어느 날
산뽕나무 씨알 하나 날아왔을 테지
하고많은 땅 다 두고 하필이면 거기에 떨어졌겠지
산다는 건 때로 알 수 없는
운명에 이끌리어 몸을 내주는 일
저도 모르게 얽혀 한몸이 되기도 하는 일

뒤돌아보지 않고 흘러가는 푸른 강물 속
굽은 그림자 하나 흔들리고 있다
곧은 살붙이도 함께 젖고 있다



母音 / 김해자

 


    
가슴에 쑥뜸을 피우다
나도 몰래 아아아 소리치다
문득 생각하니, 모든 고통은 모음이구나
신음 속엔 가사가 없구나,

그렇다 사랑의 소리도 모음
아니면 침묵이다 진짜 사랑은
모음만으로도 꽉 찬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은
소리없는 웃음도 동그란 모음이고
당신 때문에 흘린 눈물에도 가사는 없었다

쑥뜸을 뜨면서 생각한다
우린 너무 많은 말을 저질렀다는 걸
하나하나 다른 저마다의 고통과 하나 되면서
깨닫는다 하나가 되면 단순해진다는 걸
푸른 잎 소리없이 감싸는 흰 빛처럼
저 찬란한 침묵 속의 하나처럼




스스로 그러하게 / 김해자


    

밤새 비 내린 아침
옥수수 거친 밑둥마다  
애기 손톱만한 싹이 돋아났다
지가 잡초인 줄도 모르고, 금세 뽑혀질 지도 모르고
어쩌자고 막무가내로 얼굴 내밀었나
밤새 잠도 안 자고 안간힘을 썼겠지
온몸 푸른 심줄투성이 저것들
저 징그러운 것들, 생각하니 눈물난다

누구 하나 건드리지 않고 무엇 하나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하게 솟아오른 저 작은 생 앞에
우리네 시끌벅적한 생애는 얼마나 엄살투성인가
내가 인간으로 불리기 전에도 내 잠시 왔다 가는
이승의 시간 이후에도 그저 그러하게
솟았다 스러져 갈 뿐인 네 앞에
너의 부지런한 침묵 앞에 이 순간
무릎 꿇어도 되겠는가

 


詩어머니 / 김해자

 



보지 않고는 훔칠 수 없는
시어머니의 아랫도리를 닦다 눈을 돌렸다
두 번의 수술과 몇 차례 방사선으로
거웃마저 거의 사라져 숨을 곳 없는
생산도 사랑도 멈춘 채 배설기능만 남은 은밀한
그곳이 발가벗겨져 형광불빛 아래 무참했다
열다섯에 전쟁을 만나 고아원 전전하다
남의 집 식모살이 파출부 미싱질에 반찬공장까지
한평생 끌고 다니던 몸뚱이 끝내
벗어나지 못한 지하 셋방에 뉘였구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내게
고역이자 매번 치뤄야 할 돈뭉치인 당신은
잊을 만하면 새로운 고통을 수혈해주는 당신은
통증 저장소, 모르핀과 스테로이드 대신
몽상과 침묵으로 통증을 관리하는 나는
약에 버무려진 똥 앞에서 노란 개연꽃
흐드러진 연못을 떠올리다
황금빛 연못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나는
아픈 媤어머니 앞에서 곰곰 여자를 생각하다
울음밖에는 고통 알릴 길 없는 애기똥풀로
돌아간 당신에게로 엎어지며 다시
사랑할 힘을 얻는다

아무것도 못하는 가난한 시여
시를 낳는 여자여, 어머니여



아시아의 국경 / 김해자

 



땡볕에 눌러쓴 털모자의 땀냄새가 지나가고
사탕수수 자루 이고 가는 여인의 부르튼 맨발이 지나가고
구루마 끌고 가는 회초리 같은 아이의 종아리가 지나가고
가슴에 면도칼 숨긴 아이들 희번덕거리는 눈이 지나가고
원달러 원달러 외치는 흙먼지속 다물지 못하는 입이 지나가고
때절은 스웨터 속 불룩하게 솟아오른 노숙의 담요가 지나가고
지뢰 속에 다리 묻은 주름진 아코디언소리가 지나가고
마약과 매춘을 실어 나르는 부황든 뺨이 지나가고
무기 실은 트럭이 지나가고 탱크가 지나가고 전쟁이 지나가고
내전이 지나가고 학살이 지나가고 혁명이 지나가고
팔 잘린 부처가 지나가고 목 없는 시바가 지나가고
불타는 한낮 목마른 이슬람이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가고  
아 어머니, 메콩강이 국경을 지우며 경계를 허물며 도도히 흘러가고
부겐벨리아 꽃 붉게 붉게 피어나고

 

 



놓친 손 / 김해자

 



1
그대는 가고 여름은 오고
먼 나라 죄 모르는 아이들은
가마솥 바닥에 붙은 누룽지처럼 불길 속에서 타들어가고
사흘 내내 비는 내리고
평양에도 서울에도 죽어라고 비는 내리고
사방의 길은 다 끊기고    

2
아현동 높다란 석벽 청청한 담쟁이 사이  
본대에서 떨어져나간 담쟁이덩굴
몇 마디 벽에 묶인 채 젖고 있다
문득 투드득 실이 끊어지는 소리 내내 한몸
이어주던 혈관 터지는 소리 환청처럼 들리는데
미라가 되어서도 벽 움켜잡은 손이여    
너는 칼바람 함께 맞으며 어깨를 겯던
선 끊긴 빨치산이다 그의 얼음 박힌 수족이다
살아남아, 다시 수직의 벽 솟구쳐 오르는
어린 담쟁이 이파리들 간절히 손 뻗어
떨어져 나간 주검 청청히 덮어주는데    
지난겨울 수화기를 울려대던 해소기침 소리여
끝내 놓쳐버린 그대 작은 손이여    

 

 

영아다방 앞에서 / 김해자

 



퇴근무렵 다방 입구에 쪼그려 앉아
너를 기다리는데 비틀거리는 그림자 하나
비에 젖은 청천동 네거리를 휙 지나간다

누구는 부평역에서 도장 파는 걸 보았다 하고
주안에서 찌라시 돌리는 걸 보았다 하고 누구는
국수를 맛깔스럽게 말던 노모와 함께 인절미 파는 걸 보았다 하는데
교통사고로 고장난 기억 이끌고 아는 얼굴마다 찾아다니던
흉터투성이 얼굴, 다방 건너편 포장마차 불빛 새로
바로 엊그제인 듯 말갛게 비쳐온다

감방에서 배운 기술 들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던
그 해 겨울,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 없는 공장문
끝없는 공단길 담벼락 끼고 한없이 걸으면
치욕처럼 배가 고파왔다던,
네 눈물 사이로 흉터는 도드라지고
흉터를 분칠할 학력도 재능도 없었던
네게 쏟아지던 겨울비 바로 오늘인 듯
딱지 아물지 않은 붉은 상처 게워내며
오늘도 비는 내리고 너는 끝내 오지 않고
세달째 농성중인 건너편 산곡동 성당에는
빛바랜 플래카드 몇 만장처럼 날리고 있다

 

 



바람의 경전 / 김해자




산모퉁이 하나 돌 때마다
앞에서 확 덮치거나 뒤에서 사정없이 밀쳐버리는 것
살랑살랑 어루만지다 온몸 미친 듯 흔들어대다
벼랑 끝으로 단숨에 떨어져 버리는 것
안을 수 없는 것
저 붙잡을 수도 가둘 수도 없는 것
어디서 언제 기다려야 할 지 기약할 수 없는 것
집도 절도 없이 애비 에미도 없이 광대무변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허공에 무덤을 파는,  
영원히 펄럭거릴 것만 같은 무심한 도포자락
영겁을 쓰고도 한 자도 새기지 않은 길고긴 두루마리
몽땅 휩쓸고 지나가고도 흔적 없는
저 헛것 나는 늘 그의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



만월과 초생달 / 김해자


      

요양원 앞 잘생긴 후박나무에는
나만 아는 동그란 흉터가 있다
일부러 만들어놓은 듯 봉합이 잘 되어
가지가 잘린 게 아니라 만월 속에 가지를 박아놓은 듯한,
가지를 쳐낸 자리, 그 상처에 기울였을
잎과 줄기 뿌리와 온몸의 세포들
오 저들 스스로를 내던지지 않고서야 어찌
상처가 저리 찬란한 무늬가 될 수 있는가

초생달 모양으로 남은
아직 벌건 내 머리의 흉터 주위에는
어린 억새가 돋아났다 엎어지며 뒤집어지며
상처를 덮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초생달에로 기울인 채 솟구치는 하얀 억새밭
메스에 닿지 않고서야
그 비명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서야 어찌
하룻밤 사이에 너는 네가 아니게 되었는가

 



벼랑 위의 사랑 / 김해자


     -클림트의 그림 '키스'를 보다



꽃밭이다 찬란한 햇살과 따스한
바람이 빚어낸 바닥에서 꽃이 된 남자의
황금빛 가슴 속에 묻혀 시간을 잊은  
여자의 몸에서도 황금 잎사귀가 돋고
찰나에도 덩굴은 자라는데  
여자 발끝이 벼랑 끝에 걸려 있다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의 눈은 감겨 있고
키스는 끝나지 않는다  

사랑은 벼랑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듯
벼랑은 사랑을 위해 존재한다는 듯
사랑은 필사적이고 벼랑은 완강하다  
살아가는 일이 벼랑이라면 모든
사랑은 벼랑 끝에서만 핀다 지금
안전한 자여 안전한 사랑은 완전하지 않다
저 심연을 보아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벼랑 끝에서 벼랑을 잊은 채 우리는  
이 순간 영원이다 말하는
저 백척간두의,  
    


불을 피우다 / 김해자

       
    

무쇠솥 달구는 장작불도
구겨진 종이 한장부터 시작한다는 걸
눈보라 치는 아궁이 앞에서 배운다 소리 없이
오래 타는 참나무도 저 혼자는 불붙지 못하나니  
잘 마른 잎과 잔가지들이 몸을 태우고야  
장기전에 들어갈 수 있나니 숱한
불쏘시개들의 분신을 보며 다시 배운다  
아무리 한 구덩이에 들어가 얽혀도
다리 펼 자리는 있어야 한다는 걸 서로
얹고 걸치되 위아래로 옆으로 뻗어나갈 틈이 없고서는
서로가 서로를 불러들이지 못하나니  
믿고 기다릴 일이다 조금 더디게 때로 급하게
어떤 놈은 조용히 어떤 놈은 시끌벅적하게
모두 저 생긴대로 어우러져 불꽃 찬란히 타오르나니  
부지깽이 휘저어 함부로 쑤석거리지 말 일이다
허나 잊지 말 일이다
뜨거운 금빛 혀와 풀어헤친 머리카락 사이
푸르게 빛나던 불의 눈물방울을
이미 사그러진 불쏘시개들의 소신공양을

 


바다 / 김해자

 



넓어서인 줄만 알았습니다
깊어서인 줄만 알았습니다
억겁 시간 늙지 않아 늘 푸른 당신
제 몸 부딪쳐 퍼렇게 멍든 줄이야
제 몸 부서져 하얗게 빛나는 줄이야

밀어내지 마라, 미워하지 마라,
흘러오는 건 모두 받아들이는
당신은 지금 이 순간도 멍듭니다
생채기는 나로부터 생긴다는 듯
상처 없인 늘 푸를 수 없다는 듯

흐르고 흘러 더 낮아질 것 없는
당신은 오늘도 하얗게 피 흘립니다
스스로 나누고 잘게 부수면
아무도 가를 수 없다는 듯
거대한 하나가 된다는 듯    

 



이계숙 / 김해자

 



잉그리드 버그만 뺨치게 생겼지만
마흔 넘도록 키스 한번 못해 본 여자
남자랑 자보지는 않았지만 무슨 종교의식처럼
체위 물어가며 섹시하게 연애소설 번역한 여자    
몸 튼튼하고 마음 착한 남자 만나 연애하겠다던 여자
남이 자긴지 자기가 남인지 곧잘 헛갈리던 여자
남의 일에도 삼투압이 잘되어 넘어갈 듯 좋아하던 여자
아름다운 거리 한치가 모자라 눈물깨나 빼던 여자  
운동은 못하고 배고픈 운동권들 밥만 해댄 여자
손 많이 가는 반찬도 후배들이 맛있게 먹으면 입이 헤 벌어져  
서너 시간 다듬어서라도 콩나물 한 양푼 무쳐주던 여자  
조선고추장 풀어 애호박국 기막히게 끓이던 여자
정작 자신은 굶은 끼니가 많았던 이미 병 깊었던 여자
원없이 아프다 간 여자 그래서 눈물도 안 나오는 여자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여자, 이 생을 건너  
몇만도의 불 속으로 들어갔다 유리벽 하나 사이 랄라
낮과 밤 사이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 랄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바르도로 떠났다
아, 자비로운 이여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저 여자를 지켜주소서
불 속에서도 다른 생에서도 다시는 아프지 않게 하소서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위해 사는 무한 허공의
빛으로 환생하게 하소서  

 



*티벳에서는 사람이 죽은 다음에 다시 환생하기까지 머무는

사후의 49일간의 중간상태를 바르도라 부른다.

<티벳 사자의 서>에 의하면 바르도에서 死者는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고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선택한다고 한다.

 



목각 기러기 / 김해자

 

  
                        
한밤중 눈을 뜨면
언젠가부터 날 노려보는 놈이 있다
단 한번의 눈맞춤에 영원을 저당 잡힌 기러기 한 쌍
지전보다 빨리 구겨지고 동전보다 먼저 쇳냄새 풍기는
일상의 머리맡에 반복도 회귀도 용납치 않겠다는 듯
찰나에 멈춰 버린 나무야 기러기야  
날더러 어쩌라고 노려보는 것이냐.
구겨져 가는 건 나만도 당신만도 아니라는 듯.
썩어가는 건 향기라든가 떨림이라든가,
한겨울 튀어나오는 나뭇가지 여린 눈 같은
희망만도 아니라는 듯.
한발짝도 떼지 않는 기러기여 그래서 너는.......
문 닫고 나면 그만인 방 안에서 열고 있느냐
산 넘어갔다는 사랑을, 물 건너갔다는 혁명을,
가고 다시 오지 않는 시간을.
아무 것도 아니었어, 속삭이는,
돌아앉으면 그만인 컴컴한 방 속에서
그래도, 숨죽여 죽이고 있는 것이냐
순간들의 죽음을 영원들의 무덤을
죽여 다시, 살리고 있는 것이냐.

 



화엄華嚴 / 김해자

 

 

위태로이 솟은 바위
홀로 거친 파도에 휩싸인다
날카로운 바위에 온몸 부딪치며
파도는 거친 물보라를 일으킨다
바위에 부서지는 것은 파도인데
깎이는 것은 바위구나 굳은 나구나

뼈 없는 당신이 나를 빚었다
파도여 거품이여 형체도 없이 온전한
몸이여 지치지 않는 노동이여
내가 아픈 것은 당신 때문이 아니다
당신도 나의 고집 때문에 아프게 밀려갔을 것이다
모난 나여 못난 나여 내가 닳아 사라질 때까지
아파라 함께 뒹굴어라



이승 / 김해자

 



물길 뚫고 전진하는 어린 정어리떼들을 보았는가
고만고만한 것들이 어찌 말도 없이 서로 알아 제각각 한 자리를 잡고
어떤 놈은 머리가 되고 어떤 놈은 허리가 되고 꼬리도 되면서
한몸 이루어 물길 헤쳐 나아가는
난바다 헤치고 태평양 인도양 지나 남아프리카까지
늠름한 정어리떼들을 보았는가
가다가 어떤 놈은 가오리떼 입속으로 삼켜지고
가다가 어떤 놈은 군함새의 부리에 찢겨지고
가다가 어떤 놈은 거대한 상어와 고래의 먹이가 되지만
죽음이 삼키는 마지막 순간까지 빙글빙글 춤추듯 나아가는
수십만 정어리떼, 끝내는 살아남아 다음 생을 낳고야 마는
푸른 목숨들의 일렁이는 춤사위를 보았는가
수많은 하나가 모여 하나를 이루었다면
하나가 가고 하나가 태어난다면 죽음이란 애당초 없는 것
삶이 저리 찬란한 율동이라면 죽음 또한 축제가 아니겠느냐
영원 또한 저기 있지 않겠는가

 

 

 

 

축제 / 김해자



물길 뚫고 전진하는 어린 정어리 떼를 보았는가
고만고만한 것들이 어떻게 말도 없이 서로 알아서
제각각 한 자리를 잡아 어떤 놈은 머리가 되고
어떤 놈은 허리가 되고 꼬리도 되면서 한몸 이루어
물길 헤쳐 나아가는 늠름한 정어리 떼를 보았는가
난바다 물너울 헤치고 인도양 지나 남아프리카까지
가다가 어떤 놈은 가오리 떼 입 속으로 삼켜지고
가다가 어떤 놈은 거대한 고래 상어의 먹이가 되지만
죽음이 삼키는 마지막 순간까지 빙글빙글 춤추듯
나아가는 수십만 정어리 떼,
끝내는 살아남아 다음 생을 낳고야마는
푸른 목숨들의 일렁이는 춤사위를 보았는가
수많은 하나가 모여 하나를 이루었다면
하나가 가고 하나가 태어난다면
죽음이란 애당초 없는 것
삶이 저리 찬란한 율동이라면
죽음 또한 축제가 아니겠느냐
영원 또한 저기 있지 않겠는가

 

 

 

 

사랑초 / 김해자


 
활짝 연 자줏빛 심장은
당신에게 날아가는 화살이다 아니
당신이 꽂히길 기다리는 과녁이다
따스한 빛살이여, 당신에게 닿을 수 있다면 온몸
굽혀서라도 간다 속 비치는 말간
연자줏빛 혈관 내뻗다 지지대 휘감고 돌아
비틀린 허리, 가늘고 긴 용맹정진이여
당신에게 가는 길은 날마다 용솟음치고
밤마다 숨죽이는 일 당신을 사랑하는 길은
밤마다 희망을 접고 날마다 다시 손 뻗치는 일
당신과 만나는 길이 나를 떼어내는 일이라면
이미 시들어버린 어제의 가슴이야,
어젯밤 뚝 떨군 자줏빛 시신 위로
오늘은 여린 살잎 하나 솟아 오르고

 



 

 

 

 

 

 

****************************************

김해자 시인

 

1961년 전남 신안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 등단
전태일문학상, 백석문학상 수상

현재 진보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 발행인

시집

<무화과는 없다>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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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7.30 23:13

    첫댓글 민주 항쟁의 주역.....대단한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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