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히 긴 글이지만 추천합니다. 필자의 표현대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편이기 때문에 편집진처럼 여러분도 편안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황색 저널리즘을 성토하는 등의 '평이한' 입장과 달리 이 글은 또 다른 논쟁 지점을 지적하는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필자는 커밍아웃 등 동성애자 이슈의 전략적 시효를 의심하고, 커밍아웃에 시니컬해질 가까운 장래를 예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홍석천의 '커밍아웃', 그러나 분노와 연민만으로는 부족하다 / 이정우
이정우 queerART@yahoo.co.kr
전직 동성애자운동가. 무크지 디자인|텍스트 편집 기획자. 얼마 전 아트선재센터의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를 사직하고 강의와 시각문화비평, 그리고 독립 큐레이팅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 9월 17일, [일간 스포츠]의 오태수 기자는 홍석천 씨가 [여성중앙 21]이라는 여성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게이임을 밝혔다는 내용의 기사를 기고했다. 기사는 "충격고백 ... 난 호모다"라는 단순명쾌(?)한 카피를 달고 있었다. 많은 동성애자들은 기사의 진위에 대해 반신반의하면서도 야릇한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 기대감은 다음과 같은 반응으로 표현되었다. "드디어 한국에서도!?" 그러나 결코 열띤 반응은 아니었다. 오히려 적지 않은 수의 남성 동성애자들은 "하필이면 연예인 커밍아웃 1호가 홍석천이냐"라며 잔혹한 혀를 잘도 놀려댔다. 애당초 홍석천은 한국의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남자'들이 기대하는 우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위 '끼를 떨며' 과장된 여성적 제스처를 연발하는 홍석천에게 경멸의 시선을 던진 이들이 비단 이성애자 남자들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던, 한국 땅에서 연예인이 공식적으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힌다는 것은 문화사적인 표석으로 기록될만한 큰 사건이다. 따라서 나와 동성애자 단체의 활동가들은 사건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이러저러한 채널을 통해 사실확인 작업을 벌였다. 젠장, 아니나 다를까, 호주 시드니에 가있던 홍석천 씨는 자신에 대한 보도와 그를 둘러싼 설왕설래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홍석천 씨의 아버지께서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오, 세상에 홍석천 씨는 황색 언론에 의해 동성애자임을 폭로 당한 희생양이었단 말인가!
숨은 보갈 캐릭터, 홍석천
홍석천 씨는 방송에서의 전통적인 '은유적 동성애자 캐릭터(소위 '숨은 보갈 캐릭터'. '숨은 보갈'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숨기는 게이 남자를 일컫는다. '보갈'은 남성 동성애자들이 스스로를 비하해 만든 은어로서 '갈보'를 뒤집은 말이다)'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연기자이다. 동성애자의 사회적 존재가 널리 알려지기 오래 전부터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는, 동성애자를 은유하는 전통적인 조역 캐릭터를 등장시켜왔다. 그 비정상적인 캐릭터들은 언제나 주인공들의 주변을 맴돌며, 선남선녀인(이성애적 가치에 충실한) 주인공들을 돋보이게 하고, 각종 인간 관계의 중간에서 접착제 또는 촉매로 기능하는 존재로서 묘사되어왔다. 홍석천 씨가 만들어낸 자신의 극중 이미지는 그러한 은유적 동성애자 캐릭터의 전통 위에 서있다. 하지만 예전의 소위 '숨은 보갈' 캐릭터들이 지녔던 부정적인 이미지의 울타리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고정관념 상의 '여성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자신의 은유적 동성애자 캐릭터를 '개성'이란 이름으로 방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실 홍석천 씨가 데뷔 처음부터 동성애자 캐릭터를 자신의 무기로 들고 나온 것은 아니었다. 연예활동 초기, 홍석천 씨의 모습은 오히려 마초에 가까웠다. 따라서 일부 동성애자들은 홍석천 씨가 인기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에서 여성스러운 은유적 동성애자의 모습을 연기하는 데에 강한 반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가 남성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의 고정적인 편견 - '호모들은 기집애 같은 자식들'이라는 - 을 부추긴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거부감은 많은 남성 동성애자들이 지닌 '남성 콤플렉스'에 기인하는 것일 뿐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대다수 남성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 남성들에 비해 여성적이다. 하지만 그게 뭐가 어떻다는 말인가. 내가 조금 더 여성스런 존재로 인식된다손 치자, 그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저 내 눈에는 이성애자 남성들이 과도하게 '남자다울' 뿐이다.
게다가, 홍석천 씨는 근년에 더욱 과감한 캐릭터를 선보이는 중이었다. 그가 어느 심야 토크쇼를 통해 선보여 유행시킨 앙드레 김 사행시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혁신적 농담을 내뱉은 그는 곧이어 능청스럽게 키득거리며 몇 마디 덧붙이는 걸 잊지 않는다.
"에구구구- 어머머- 앙선배니-임, 죄송합니당"
이 농담은 동성애자로 추정되는 사람의 입을 통할 때에 그 힘이 발휘되는 것이다. 아마 같은 농담을 사람들이 이휘재 같은 사람이 내뱉었다면 그것은 치사한 인신공격성 농담으로 들렸을 것이다. 게다가 앙드레 김에게 '선배'라는 호칭으로 농담 반 진담 반의 사과 말씀을 내뱉는 모습은 기실 은유적 '커밍아웃'에 다름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 농담 따먹기 프로그램에서, 진행자인 남희석은 홍석천 씨에게 다음과 같은 짓궂은 - 다소 비열한 - 질문을 던졌다.
"앙드레 김을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희석은 '밥맛 없는 호모새끼'인 홍석천 씨를 놀려먹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홍석천 씨의 대답은 의외로 거침이 없었다.
"어머 무슨 말씀이예여, 제 스타일 아니예여! 제 스타일은 말이져- 장동건이란 말이예여-"
결국, 당황한 쪽은 홍석천이 아니라 남희석이었다.
이러한 반격을 시도하는 은유적 동성애자 캐릭터의 등장은 매우 중요한 변화였다. 이와 같은 변화를 반증하는 것인지 하용수씨는 자신을 둘러싼 여러 루머 - 소위 '에이즈 괴담'으로 알려진 그의 에이즈 투병설 - 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인터뷰를 자청하여 "내가 동성애자인지 아닌지는 사생활에 해당하는 부분이므로 밝힐 이유가 없다"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입소문을 통해 동성애자로 알려진 몇몇 연예인들이 "저, 동성연애자 아닙니다, 사지 멀쩡한 남자라구요-"라고 우겨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시대, 그 어둡고 우울한 한 시대가 서서히 종언을 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는 동성애자임을 공표한 연예인이나 유명인사, 정치인은 한 명도 없었다. 따라서 한국사회는, 이유가 어떻든, 홍석천 씨에게 주목하고 있다. 지난 21일 귀국한 홍석천 씨는 공항에서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대한 짧은 답변을 통해 이번 보도가 자의에 의한 커밍아웃이 아니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얼마 뒤 홍석천 씨는 역시 동성애자인 [한겨레21] 신윤동욱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사 건의 전말을 소상히 밝혔다.
기사에 따르면, 홍석천 씨는 [여성중앙 21]과의 인터뷰 자리에서 기사화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안 아무개 기자에게 개인적으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혔다는 것이다. 그것이 기자의 비윤리적 욕심에 의해 '커밍아웃' 기사로 둔갑되었고, 그 왜곡된 이야기가 안 모 기자와 친하게 지내왔다는 오태수 기자를 통해 일간스포츠의 일면 기사로 지면화된 것이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는 홍석천 씨가 기자를 '인간'으로 보았던 치명적인 실수로 시작된 것이었다.
따라서 많은 동성애자 단체들은 법적 소송을 하겠노라 기염을 토하고 있지만, 안 모 기자와 오태수 기자는 비윤리적인 짓을 저질렀을 뿐, 사실이 아닌 것을 보도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언론중재위원회를 통해 합리적인 조치를 취해본들 어떠한 제재나 보상을 받아낼 가능성은 희박하다. 뽀뽀뽀 등의 프로그램에서 도중 하차하게된 홍석천씨의 대응에도 문제가 없지 않다. 끝까지 방송출연을 사수하며 소위 '윗분'들의 압력에 저항했어야 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그가 일련의 고정 출연 프로그램에서 강제로 출연을 거부당했다면 그에게 '동성애자 차별'이란 명확한 투쟁의 지점이 마련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윗분들이 부담스러워 한다"는 말에 "그러면,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답하며 스스로 물러났다. 정말 아쉬운 대응이 아닐 수 없다. 비가시적인 동성애자 차별을 수면 위로 끌어낼 절호의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
분명, 당사자와의 사전 동의 없이 한 개인의 사생활을 언론을 통해 알리는 것은 인권유린이며, 다수(이성애)에 속하지 못한다고 해서 개인의 성적 정체성을 가십거리로 만들어 폭로하는 것은 정신적 테러이다. 이 사태를 야기함으로써 홍석천씨로 하여금 연예인으로서의 활동 중단 위기를 마주하도록 강제한 해당 기자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개자식'들이다. 하지만 상황을 조금 치환해서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동정과 연민으로 점철된 [한겨레 21]의 기사
예를 들어, 당신이 일본인으로 귀화한 한국 사람으로서 일본사회의 공적인 존재라고 치자. 만약 어느 기자가 당신이 '본디 조선사람이다'는 내용의 기사를 썼다면, 그것은 정말 비윤리적인 테러 행위인가? 당신은 그 기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가치 판단 게임 같다. 만약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어느 독일인 가족이 실제로는 유태인이라는 사실을 기사화했다면, 그것은 용서받지 못할 테러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계 일본인의 경우라면, 피해자가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게된다손 치더라도 그걸 가지고 '비열한 기자의 테러행위' 운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한겨레 21]의 기사가 온통 연민과 동정 어린 시선으로 점철된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 동성애자들은 '커밍아웃'이라는 가상적 공간 개념에 사로잡혀있는 것일까. 정말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놓는 비밀의 옷장이 존재하는 것일까? 동성애자들이 그 옷장을 박차고 나오면 길고 긴 차별의 문화에 종지부를 찍게되는 것일까?
홍석천 씨는 지난 22일,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이 사태를 정면 돌파하기로 결심했다. 신윤동욱 기자는 그 상황을 커밍아웃 기회를 박탈당한 자의 외롭고 씁쓸한 선택으로 묘사했다. 그렇다면 커밍아웃 기회란 무엇일까? 인기가 절정에 도달했을 때에 가족들을 미리 설득해 놓은 뒤, 기자회견을 가졌어야 좋았을 것이란 말인가. 나는 쥐뿔도 없는 학생 신분으로 요란스럽게 동성애자운동을 시작하며, 거창하게 커밍아웃을 했었다. 당시에 나의 행동은 '미친 짓'으로만 간주되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약점이 강점으로 바뀌는 장면을 수 차례 마주하며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커리어를 쌓아왔다. 결과적으로 말해, 내게 '학벌'이란 '쥐뿔'이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홍석천에게 일말의 '쥐뿔'은 없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그에겐 의외로 강한 무기로 변환될 수 있는 쥐뿔이 있다. 그가 '연예인'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예측컨대, 홍석천은 이제 더 이상 은유적인 동성애자 역할을 맡지 못할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그것은 방송계의 보수적인 시각보다도 더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가 여성스런 제스처로 남자 주인공의 팔뚝에 손을 대며 "어머 자기 오늘 멋지다-"라고 말하면 이제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노골적인 동성애자의 성적 표현으로 간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캐릭터 상의 위기를 극복하고 연기자로서의 돌파구를 마련한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이번 사태는 그에게 새로운 연예활동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커밍아웃하면 더 유명해지고, 더 인기 있는 연예인이 된다"는 미국 쇼비즈니스 사회의 현실이 많은 동성애자 연예인들을 이성애자 연기로부터 구출해내고 있지만, 그러한 양상을 만드는 데에는 언제나 무모한 모험가들의 수고가 있기 마련이다. 그가 과감하게 대처한다면 그는 '역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커밍아웃 전략의 시효 기간
하지만 거기에는 또 하나의 복병이 숨어있다. '옷장으로부터의 탈출'이란 근대 게이 판타지와 그에 근거한 커밍아웃 전략의 시효기간이 그것이다. 당신이 동성애자라면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동성애자임을 '공표'할 것인가? 모든 동성애자들이 자신에게 걸맞은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일본에 사는 조선인들은 모두 '본명선언'을 해야하는 것일까? 왜 일부 소수자들은 그러한 자가 폭로 의식을 거행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것일까? 그러한 도덕적 부채감의 원주소지는 어디인가? 동성애자는 진정 민족과 같은 '종족 집단'인가? 단지 취미 공동체가 아니고? 이미 서구에서는 포스트-게이 시대가 도래했노라고 떠드는 이들이 등장한지 오래이다. 그리고 포스트-게이적 징후들은 기존의 게이 저항 담론들의 무력화와 맞물려 한국과 같은 하위주체들의 사회에서 이제 겨우 의제화된 동성애자 인권 문제를 복잡한 상황에 몰아넣고 있다. 탈식민주의적 상황은 동성애자 사회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일부 동성애자들은 내 글의 논조에 분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커밍아웃 판타지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다. 동성애자들을 짓누르는 심리적인 장막이 가상적인 것이며 그것이 일회적인 '동성애자 선언'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경험에 의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러한 담론의 구조는 소위 커밍아웃하지 않은 대다수의 동성애자들을 거짓말쟁이로 전락시킨다. 그게 과연 옳은 것일까? 모든 동성애자들은 동성애자 선언에 대한 심리적 부채의식을 지고 살아야하나?
그렇다면 사도마조히스트들은 "나는 사도마조히스트요!"라고 선언해야하고, 시체애자는 "나는 시체애자요!"라고, 정신병환자는 "나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요!"라고 떠들고 다녀야 옳은 것일까? 실제 90년대 중반의 미국에서는 정신질환으로 투병 중인 소위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커밍아웃이 행해지기도 했다. 정신병이 수치가 아니며 의료보험 대상에도 포함되어야한다는 신념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과연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타인들에게 "나는 정신병력이 있소"라고 떠드는 것이 옳은 방법일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커밍아웃과 같은 자기선언 행위가 모든 소수자들에게 적용 가능한 모델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자기선언이 가능하지 않은 부정형의 정체성을 지닌 많은 이들은 자신의 욕망과 권리를 언어화시키지도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어쩌면 홍석천씨는 자기 선언과 변론의 기회를 획득한 운 좋은 사람일 지도 모른다. 앞으로 아무도 커밍아웃에 주목하지 않는 시니컬한 시대가 오면, 싸구려 변론의 기회조차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이 땅에서 동성애자 이슈가 소위 '약발'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니 나의 걱정은 좀 때 이른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나는 우리사회가, 특히 우리사회의 동성애자들이 조만간 감당해야할 변화를 언급하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주장만을 반복할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