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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1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12주)
믿음의 사람-빵을 먹는 사람들(2)
왕상19:4~8; 엡4:25~5:2; 요6:35, 41~51
지난 한 주간도 많이 더우셨지요? 지난 주 수요일에 입추가 지났지만, 불볕더위는 한동안 계속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요즘은 어디가나 에어컨이 있고, 집에서도 더울 때는 에어컨을 계속 켜고 살아서, 전기요금 걱정은 되지만, 그나마 열대야가 계속되는 이 더위는 피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에어컨이 없이 생활하고 일하시는 분들은 계속된 더위에 몸과 마음이 지쳐 있을 듯 합니다. (저희 집에서도 나비는 에어컨 바람 들어가지 않게 문 닫아 걸고, 찜질방 같은 곳에서 혼자서 수련하고 있는데, 보기에도 여간 딱한 게 아닙니다. 그래도 몇 년 전에 냉기는 전혀 쐬지 못할 때보다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아무튼 이 더위에 지쳐 있는 분들 모두가 건강 상하지 않고 남은 여름을 잘 지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제1독서 말씀, 열왕기상 엘리야의 이야기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의 천사가 두 번째 와서, 그를 깨우면서 말하였다.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서, 밤낮 사십 일 동안을 걸어, 하나님의 산인 호렙산에 도착하였다.”(왕상19:7~8)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완전히 탈진하여 나 죽여 줍소 하며 네겝 사막의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잠을 자던 엘리야에게 천사가 두 번씩이나 찾아와 먹을 것을 내어주며 그를 깨우면서 하던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력에 따라 주기적으로 이 말씀을 읽고 있는데, 정말 지쳤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천사를 보내 이런 일을 하셨지 하는 생각에, 이 말씀을 읽으면 가슴이 찡 합니다. “일어나서 먹어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지쳤을 때마다 천사를 보내서 이런 일들을 하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에게 천사를 보내 우리를 깨우며 말씀하실 것입니다. “일어나서 먹어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사를 보내실 때마다 그 천사가 가지고 온 과자와 물 한 병을 잘 알아보고, 그것을 먹고 마시면서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엘리야는 너무나 지쳐 있어서 한번으로는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처음에는 불에 구운 과자와 물을 먹고 마신 뒤 다시 잠이 들었는데, 두 번째 주님의 천사가 와서 그를 깨우며 말하지요. “일어나서 먹어라.”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리고 그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서, 밤낮 사십 일 동안을 걸어, 하나님의 산인 호렙산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다 알다시피, 엘리야가 누굽니까? 당시 강력했던 아합왕에게 도전장을 내민 사람이 아닙니까? 그리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가 850명과 싸워, 하나님이 참 신임을 증명해낸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던 사람이 아합왕의 아내였던 이방 여인 이세벨의 분노에 화들짝 놀라고 맙니다. 성경 말씀대로 하면,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해서” 유다의 브엘세바로 급히 내려갔고, 거기서 더 내려가 네겝까지 내려 간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의 싸움이 갈멜산에서 있었는데, 브엘세바로 내려갔고 더 나아가 네겝까지 내려갔다는 것은, 여러분이 지도가 상상이 될지 모르겠는데, 우리식으로 하면, 신의주에서 이방 선지자들과 싸우다가 부산까지 급하게 도망한 것이지요. 거기다 더 나아가 대마도까지 내려간 셈입니다. 끝까지 간 것이지요.
이런 급한 전세 변화는 한편으로는 놀랍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삶에서 종종 있는 일입니다. 뭔가 잘 될 것 같다는 희망에 부풀었다가, 한순간에 탈진해 버리는 일은 우리에게도 종종 일어나니까요.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천사를 보내서 원기를 되찾게 하십니다. 이때는 내가 이뤄야 했을 성취를 아쉬워하고 그것을 회복하려고 하기보다는,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힘을 회복해야 합니다. 원기를 얻는데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이때 계속해서 내가 이루지 못한 “일들”에 마음을 두고 그 “일”을 다시 어떻게 해보려 하고 지난 시간들을 곱씹는다면, 오히려 있는 원기마저 빼앗기게 됩니다. 그래서 천사도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오늘 우리 본문에는 없지만, 엘리야는 40일을 더 걸어 호렙산에 도착한 후에 거기서 진짜 중요한 기회를 얻습니다. 호렙산 동굴에서 그는 하나님과 대면합니다.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며 지나갔지만, 거기에 주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지진이 지나가고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주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불 다음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콜 더마마 닥카>라고 하는데, “부드러운 고요함의 소리”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더마마>는 바람이 세게 불다가 딱 멈춘 후에 고요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소리”는 소리 없는 소리겠지요. 크고 강한 바람이 바위를 쪼개며 지나갔고, 지진과 불이 지나갔지만, 거기에 주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음 찾아온 고요함, stillness, 시인 T.S.엘리엇의 말대로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의 고요한 지점”(the still point of turning world)이었던 것이지요.
이 <콜 더마마 닥카>(부드러운 침묵의 소리) 속에서 엘리야는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알아듣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나 혼자 남아서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바로 앞에서 두번씩이나 엘리야는 뭐라고 강변했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주님만을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예언자들은 칼에 맞아 죽었고,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까지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콜 더마마 닥카>(부드러운 침묵의 소리) 속에서 엘리야가 깨달은 사실은, 이스라엘에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사람, 바알에게 입을 맞추지 아니 한 사람이 칠천 명이나 남아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 혼자 외롭게 싸우고 있는 줄 알았는데, 똑같이 힘들게 함께 싸우고 있는 사람이 7천명이나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힘들다 보면, 자신 혼자 외롭게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이들은 다 잘 사는 것 같은 자신만 혼자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힘들게 그러나, 이 세상에, 자신의 역경에, 자신의 처지에, 무릎을 꿇지 않고, 자신의 삶을 지켜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다들 쉽게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각자의 어려움을 이겨내며 그래도 꿋꿋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진짜 자기의 삶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려고 하고, 사랑하며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이나마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천사가 가져다주는 구운 과자와 물 한 병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저는 요즘 우리 다안이와 다안이 엄마 아빠를 보면서 많이 묵상합니다. 한 생명, (옛날 어른들이 핏덩이라고 했지요) 그 여린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스스로 자기의 삶을 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구운 과자와 물을 가져다주었을까? 다안이 엄마 아빠가 다안이에게 온통 마음을 쓰면서 그 핏덩이에게 기울이는 사랑과 정성을 보면서 감사하고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게 다안이 엄마아빠만 그런가요? 지금까지 여러분도 그렇게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런 정성과 돌봄으로 이렇게 살아있는 거지요. 물론, 우리 양육자들이 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상처도 있고 아픔도 있습니다. 그것이 발달 트라우마로 남아서 지금까지 우리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는 그것이 훨씬 심한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어릴 적, 그들의 정성과 돌봄은 분명 우리에게 왔던 천사의 과자와 물 한 병이었습니다. 제가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키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저보다 나비가 훨씬 더 많은 수고를 했겠지만), 저는 요즘 다안이와 다안이 엄마아빠를 보면서, 돌아가신 저희 어머니와 아버지를 종종 생각합니다. 나도 저런 돌봄을 받았겠구나, 그분들이 분명 한계가 있고 약점이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 그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서 나를 돌보고 키웠겠구나, 그래 나도 저런 사랑을 받았지, 저런 돌봄을 받았지, 이런 생각하면서 돌아가신 부모님께 감사합니다. 60을 훨씬 넘어서 이런 생각하는 게 좀 늦긴 하지만, 그러나 이런 감사는 제게 지금도 힘이 됩니다. 나를 긍정하는 요인이 됩니다. 요즘 심리학이 우리에게 어릴 적 상처와 트라우마를 많이 알려준 것이 한편 성장에 도움도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무 상처나 트라우라를 드러내는 쪽으로만 자신을 규정짓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것을 드러내는 이유가 그것을 넘어서기 위함이지 그것으로 자신을 규정지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시때때로 천사를 보내서 구운 과자와 물로 우리의 원기를 회복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그랬고, 우리 삶의 위기마다 그랬습니다. 지금까지 살아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아, 매 순간마다, 내가 지쳐 잠들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천사를 보내서 구워낸 과자와 물을 가져다 주셨구나, 그걸 먹고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살고 있구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콜 더마마 닥카>(부드러운 고요한 소리)를 듣게 되었구나, 그래서 내가 진짜 “나”를, 진짜 내 “존재”를 만나게 되었구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사를 천사로 알아보는 것이 은혜입니다. 감사를 감사로 알아보는 것이 은혜입니다. 은총을 은총으로 알아보는 것이 은혜입니다. 자비를 자비로 알아보는 것이 은혜입니다. 구원을 구원으로 알아보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의 빵”, “살아있는 빵”을 진짜 “생명의 빵, 살아있는 빵”으로 알아보는 것이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본문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말씀하시지요. 이런 생명의 빵이 있으면, 여러분 좋겠지요?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에게 수가성의 여인이 “제게도 그 물을 주십시오. 그래서 목마르지 않고, 물도 길러 나오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좀 엉뚱하게 말했던 여인의 말이 여러분의 생각이지요?
예, 우리가 평생 먹고 자란, 천사의 구운 과자와 물은, 결국은 <콜 더마마 닥카>(부드러운 침묵의 소리)를 듣기 위함입니다. 그 침묵의 소리는 오늘 요한복음으로 말하면, 생명의 빵,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 그랬을 때, 유대인들이 보인 반응은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어디서 이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사기를 치는가?” 였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이라고 하실 때,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가요?
여러분은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나”라고 할 때, 그 “나”는 유대인들의 눈에 보였던 그 예수, 아버지가 요셉이고, 형제들도 알고 있고, 자기들과 똑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그 예수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라고 할 때, 그 “나”는 작은 물결로서의 “나”가 아니라, 자신이 바다임을 알고 있는 “나”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작은 물결로서 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예수는 허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바다임을 똑똑히 알았던 분입니다. 물결이, 파도가, 바다임을 똑똑히 안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라고 할 때, 우리는 그분이 물결을 말하는지, 바다를 말하는지 구별을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알려주려고 쓴 책이기 때문에 특히 이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애를 씁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유대인과 논쟁하다가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었다”(요8:58)라고 하신 말씀이 나오지요? 또 요한복음에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생명의 물이다 라고 하면서 <에고 에이미>, “나는 ~이다”(I AM)라는 말씀이 자주 나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가 아버지께서 보내신,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먼저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파도 한 조각, 물결 한 조각이 결국은 바다임을 아신 분이구나, 지금 이 분은 작은 물결, 작은 파도로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다로서 이 말씀을 하시는구나 하고 알아들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물결이 바다고, 파도가 바다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우리가 이 의미를 다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작은 물결로 살고 있고, 작은 파도로 살고 있습니다. 거기서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돈오의 깨우침으로 깨우칠지, 점수의 깨우침으로 깨우칠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Reality)을 꼭 기억하고 있으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빵을 떼어 먹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빵이 뭐라고요? “진실로 너희가 바다다”, “진실로 너희도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는 리얼리티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에베소서에서 사도바울이 한 말로 말하면,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어주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사랑으로 살아가십시오.”라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이 말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랑덩어리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긴장하지 말고, 사랑으로 살아가십시오.”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앞에서 말한 일상생활 속에서 갖는 두려움과 긴장, 불안과 염려 대신, (바울이 여기서 말한 거짓말, 화를 쌓아두는 것-노여움을 품고 사는 것, 도둑질 하는 것, 남을 헐뜯는 말을 하는 것, 모든 악독, 격정, 분노 소란, 욕설은 모두 다 두려움과 긴장, 불안과 염려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긴장, 불안과 염려를 더 강화시킵니다) 참된 말,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어 궁핍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 적절할 때 해서 덕을 세우는 말, 친절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며(연민), 용서하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힘은 질그릇인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보배(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