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 악보
솔섬 국민학교는 학이 불티처럼 날아와 앉는 솔밭 가운데에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소나무가 흔들려 학교의 지붕이 보이지 않지만,
맑은 날에는 상어등 같은 용마루가 솔숲 사이로 가만히 내다보입니다.
내내 분교였다가 제 이름을 갖게 된 지 겨우 한 살밖에 안 된 학교.
소나무의 잔가지가 와 닿는 창가에서 보면 앞섬의 귀퉁이에 있는 등대너머로
먼 수평선이 가물거립니다.
그리고 배가 지나가는 자리는 바닷물이 인두자국처럼 은빛을 띠우기도 하지요.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까지 합해서 네 분, 학생 수도 적고 교실도 모자라서
1학년과 3학년, 2학년과 5학년, 4학년과 6학년이 각각 한 교실에서 사이좋게 배웁니다.
바닷가, 울타리도 치지 않은 모래밭이 곧 운동장이기 때문에
쉬는 종이 울리면 아이들은 공놀이나 고무줄놀이를 하기보다는
물오리를 쫓아다니거나 까치집을 지으며 노는 것이 큰 즐거움입니다.
벼랑에서 꽃을 피운 풍란이 솔바람에 향기를 실어 보내오기도 하고,
'땡땡' 학교의 종소리가 바람을 타고 거슬러가기도 하지요.
가끔 길을 잘못 든 물새가 열어 둔 창문으로 교실에 들어오기도 해서
아이들의 함성을 받으며 나가는 것을 그려 보셔요.
멀리 태평양으로 트인 바다 가운데서는
돌고래가 더러 머리를 물 밖으로 내밀어 보이기도 해서
아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갑자기 학교 안이 떠들썩했습니다.
솔잎으로 귀를 후비며 놀던 솔바람도, 모래성을 허물고 있던 잔물결도
일순 숨을 죽였습니다.
아이들의 환호성이 너무도 컸던 것입니다.
"풍금이 왔다아!"
"어머, 풍금이 저렇게 생겼다냐?"
"조용히 해요, 조용히."
"어머, 저 소리 좀 들어봐."
"쉬! 조용히 하라니까."
한쪽에서 풍금이 울리면
다른 교실의 아이들이 서성거리고, 또 술렁거려서 공부가 안 될 것을 아신 교장 선생님이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았습니다.
그러고는 풍금을 교단 위에 올려놓게 했습니다.
급히 나오느라고 다른 아이의 신발을 신은 아이,
서로 앞줄에 나서려고 목을 움츠려서 일부러 키를 작게 하는 아이…….
그들을 정리하느라고 선생님 세 분은 한참이나 애를 먹었습니다.
드디어 키가 크고 푸석머리인 이선생님이 교단 위에 올라가서 풍금 앞에 앉았습니다.
아이들은 숨을 죽였습니다.
어느 하나 코를 훌쩍이는 아이도 없었습니다.
파도만이 제 발걸음을 소리내어 재어 볼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섬아이들이 육지꿈을 꾸다가 어슴프레 듣는 철썩이는 소리였습니다.
밀려오는 파도소리를 따라 풍금이 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도, 미, 솔, 도, 도레미파쏠라시도……'
갈매기가 두 마리 용마루 위에 앉아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마을쪽으로부터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맨발로 달려왔습니다.
이선생님이 처음 연주하신 곡은 <애국가>였습니다.
누구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아이들은 입을 모아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고향의 봄>을, 그리고 <섬아기> <이순신 장군>을 크게 크게 풍금에 맞춰 불렀습니다.
솔바람은 풍금소리와 아이들의 노래를 사방으로 실어 갔습니다.
바닷가에서 파래를 뜯던 아주머니들이, 그물을 손보던 아저씨들이 허리를 폈습니다.
아이들이 노래를 하는 동안 교장 선생님은 발밑에서 모래가 쓸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학교 운동장인 모래벌에 밀물이 어느새 다가와서
아이들의 고무신코 언저리를 핥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은 그만 교실로 들어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바닷물이 점점 차올라 발목을 적시는데도 움직일 줄 모르고
"선생님, 한 곡만 더요, 한 곡만 더 불러요." 하고 졸라댔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무얼 부를까?"
이선생님이 한 곡만 더 할 생각으로 물었습니다.
"등대지기요."
뒤쪽에 선 여자아이들 가운데서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그래요, 좋아요."
"선생님, 등대지기 불러요."
여기저기서 손뼉을 치며 좋아라 했습니다.
누구가 시킨 것이 아닌데도
아이들은 모두 등대가 서 있는 노루섬 쪽을 향해서 돌아섰습니다.
그러고는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수염이 허연 등대지기 할아버지가 사는 곳,
밤이면 고기잡이 나간 아이들의 아버지와 삼촌과 그리고 언니를 위해 불을 밝혀 주는 곳.
등대지기 할아버지가 늘 광실을 닦고 있는 노루섬을 향해서…….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ㅡㅡㅡ'
다음날 솔밭 근처 학교의 운동장가에는
어디서 밀려왔는지 빠알간 꽃잎들이 악보처럼 길게 띠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ㅡ '정채봉'님의 <숨쉬는 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