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도학교 길잡이 |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
안드레아 가스파리노 지음 | 성바오로딸수도회 옮김
20. 세 번째 여정: 사랑 나누기
최후 만찬 때 바치셨던 예수님의 사제적 기도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의 으뜸으로, 전 인류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예수님의 본보기에 따르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바칠 때 어느 지점에서는 사랑의 한계를 무너뜨릴 필요가 있다. 사랑을 나누며 모든 이 위에 사랑을 쏟아 부어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신자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 안에 모든 것이 되신다”고 말하였다. (1고린 15,28 참조)
예수께서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따라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의 여정에 시급히 모든 이를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모두를 청하는 기도]
진정으로 모두를 감싸안을 기도가 여기 있다.
“예수님, 당신 마음을 주십시오.”
우리가 기도할 때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모든 것을 진심으로 청하자. 더 이상은 청할 수 없다. 침묵 중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주시기를 청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큰 사랑에 대해 경의를 표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처럼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아십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것과도 같다.
용감하게 청해야 한다! “큰 것을 청하기 두려워하는 자는 큰 것을 얻을 수 없다.” (성 티리의 굴리엘모)
우리는 “모든 이 안에 모든 것이 되기” (골로 3,11)까지 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모든 이를 위해 간청해야 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청하고, 우리를 의지하는 사람들을 위해 청하고, 우리가 사랑하지 않거나 혹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청해야 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미워하는 이들을 위한 기도로 바뀐다면 얼마나 위대하겠는가!
또한 우리는 세계적으로 큰 문제들에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비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 교회와 세상의 정치·경제·평화에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과 그 외 모든 이들을 위해서 말이다.
사랑이 우리의 기도가 되도록 깨어 있자. 즉 사랑을 청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회개, 곧 사랑을 청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위한 기도가 우리 위에 반사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자.
“주님, 먼저 저를 변화시켜 주시고 당신의 마음을 주십시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번쩍이는 사고]
주님의 마음을 주시길 간청할 때는 애매하게 할 것이 아니라 분명히 정확하게 말씀드리자.
“주님, 당신의 마음을 주십시오! 바로 오늘을 위해 당신의 마음을 청합니다. 내일을 위해서는 내일의 기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의 양식을 청하라고 일러주시지 않았던가? 바로 오늘 필요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청하면 틀림없이 온종일 사건들과 사람들 그리고 해야 할 임무에 대해 새로운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청하고 또 오늘 생길 모든 일에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하루의 중요한 순간순간 주님 뜻에 큰 관심을 갖게 된다. 그때 힘겨움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이 보일 것이며 사악한 뜻이 사라질 출구가 열리게 되며 열기가 가라앉게 될 것이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의 순수성을 검토하고, 될 수 있으면 말을 적게 해야 한다. (모든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로 충분할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세 가지를 자문할 필요가 있다.
- 깨어 있는가?
- 하느님이 모든 생각의 중심인가?
- 사랑으로 모든 것을 하는가?
[스승들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기도하기가 어려운가? 스타레즈 테오파노 일 레클루소는 이렇게 말한다.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도움을 주시려고 언제나 가까이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나 이 도움은 찾아 나서고 수고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은 피곤을 모른다.” (성 티리의 굴리엘모)
왜 시몬 웨일이 “기도의 핵심은 배려이다. 배려의 특성은 기도의 특성과 직결되어 있다”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P. 페닝톤은 이렇게 말한다. “진실한 기도는 말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있으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오직 그분 앞에 있어라. 그리고 그분께서 원하는 바가 이뤄지도록 내버려 두어라. …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다른 모습으로 창조하실 수도 있으셨다. 즉 우리가 무엇에 집중해야 할 때에는 환상을 가라앉힐 수도 있고 기억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는 개폐기나 감정을 제어하기 위한 기능을 설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의 성찰과 집중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우리 안에 그대로 두셨다. 왜냐하면 그 장애물들은 우리의 사랑을 그분께 보이기 위해 아주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바치기 어려운 것은 그분의 단순함 때문이다. 우리는 독창적이고 복잡하고 어느 정도 특별한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 만족을 하려 한다. 우리는 여러 가지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을 좋아하며 용감하다는 칭찬을 듣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과정이며, 모든 것을 그분이 하시도록 맡기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에는 칭찬을 받거나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드러낼 만한 요소가 없다.
기도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배운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도 이를 전해야 한다. 이것은 임무이다.
레바논 시인 칼릴 지브란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에 대해 놀라운 직관을 갖고 있다. 그는 “당신이 사랑할 때 당신 마음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고 하지 마시오. 오히려 하느님 마음 안에 당신이 있다고 말하시오”라고 하셨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전부이다.
[중대한 비합리성: 삼위일체적인 죄]
저명한 신학자 브르노 포르테는 이를 일러 '그리스도교 사상의 가장 큰 자가당착'이라고 한다.
교회가 성삼위에 대한 기도를 가르치고 실천해 온 지 2000년이 되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그것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 브르노 포르테는 '삼위일체의 유배'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실제로 삼위일체는 추상적인 천상의 정리(定理)처럼 보일 수 있다."
칸트는 성삼위의 신비가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눈물과 지상에서 흘리는 그들의 땀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추상적인 천상의 정리"로 변해버렸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우리 탓이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무엇보다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한 가지 제안]
흠숭의 시간을 갖는 단계에 이른 사람들을 위해 성삼위의 신비에 들어가기 위한 구체적 제안을 한다.
첫 15분 동안은 성령과 함께 ‘회개의 시간'을 갖고, 사랑하기를 배우며, 또한 사랑을 간청하기 위해 모든 것을 성령께 바친다.
두 번째 15분은 예수님의 사랑에 주의를 집중시키면서 그분께 모든 것을 바쳐드리며 사랑하시도록 내맡긴다. 사랑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읽는다.
세 번째 15분은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내맡기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바쳐드린다. 그리고 사랑을 통교한다.
“아버지, 당신은 나의 모든 것입니다!”, “제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주십시오. 바로 오늘의 중대한 상황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청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에게 그 리스도의 마음을 주십시오…”
마지막 15분은 하느님의 현존을 즐기며, 감사드리고, 그분의 발치에 머물러 있음을 기뻐한다.
기도가 지성적이 될 때 우리와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은 변화된다.
-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 안드레아 가스파리노 지음/ 성바오로딸수도회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