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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원문보기 글쓴이: 선과
내화리 삼층탑
이번이 세차례 들렸다. 묘하게도 오디가 지천이었던 계절에만 들렸다 오늘도 모두 소년소녀가 되어 유년의 고향 맛을 음미하며 탑그림자에 몸을 눕혔다. 답사기는 옛님방 글을 참조 바라며 문화재청 자료를 가져왔다.
"문경시의 깊은 산골짜기에 서 있는 규모가 작고 아담한 3층 석탑이다. 이 절터의 유래나 규모는 알 수 없으며, 발견 당시 3층 몸돌이 근처에 새로 지은 제실(帝室)의 주춧돌로 사용되고 있는 등 탑의 각 부분이 흩어져 있었다. 1960년 9월에 전부 수습하여 복원하였다.
문경 토박이 가인강산님은 문경의 볼거리.먹거리를 하나라도 더 알려주기 위해 산골 산북면과 영 어울리지 않을 듯한 상호인 뉴욕제과로 안내했다. 전국에 소문난 주메뉴인 찹쌀떡(모찌)은 이미 동이나 팥빵으로 만족했다. 그맛이 궁금한 옛님의 미식가들은 간판에 실린 전화로 주문하면 택배 가능할 것이다.
훗날 우리님들 답사길에는 지근에 위치한 대승사, 김룡사, 천주사지 탑. 대하리 소나무, 장수황씨종택을 동선에 포함시키고 찹살떡도 맛보길 바란다.
봉서사지 마애약사(?)여래
봉정리 마애약사여래불.마애관음보살. 어느해 저위 봉서사지 석탑 근처를 헤매이었지만 뵙지 찾지 못했었다. 밭에서 일하시는 할머님 말씀에 의하면 여름에는 찾기 힘들고 겨울에 오면 된다고 하셨었다. 봉서사지 반대편 산아래에 위치했으니 어찌 만날 수 있었겠는가?
산속 외로히 위치한 문화재 안내간판 설치도 고맙지만 경북 성주 세종대왕 태실 접근로 이정표를 벤치마킹하여 큰길 입구에서부터 소로, 농로길에 이정표를 세웠으면 좋겠다. 현재 이정표로는 정확히 접근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기 쉬울 것이다.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면 이번 답사길에 알았지만 반곡리에서 봉서사지 탑까지 도로 확충 공사와 연계하여 접근로를 모색해보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사적이 전해오지 않은 봉서사의 불상으로 추정되며 앙련의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약사여래좌상은 큰 바위의 한면에 조각되어 있다. 왼손에 약합을 들고 있으며 삼도가 뚜렷하고 습의는 통견이다. 이목구비의 마모가 심하고, 두광과 신광은 세겹 동심원이며 선각으로 표현한 습의 자락도 유려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문화재청 일반 설명에는 약사여래불로, 전문 설명에는 아미타불로 묘사해 놓아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일반과 전문의 구분은 무엇일까?
아미타불이라면 관세음보살로 미루어 지장보살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봉서사 자취처럼 안타깝게도 행방이 묘연하다.
관음보살 입상
연화좌위에 서서 매듭이 고운 승각기를 입은 마애관세음보살입상은 아미타불좌상 아래쪽 바위에 조각되어 있다. 관세음보살상은 원래 아미타불좌상의 협시보살이었으나 10여년전 2차에 걸친 도난이 미수에 그쳐 현위치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연유를 안다면 제위치로 모셔야하며 다른 협시불인 세지보살도 본존 옆에 봉안하는 날 관광 만점의 문경시는 자랑스런 문화행정으로도 만점 도시가 될 것이다.
주형거신광배 모양의 자연 암반에 새긴 삼산관을 착용한 관세음보살입상은 가벼운 바람에도 법의가 나풀거릴까바 왼손을 가슴에 두고, 오른손은 곧게 내려 군의를 눌리고 있다. 습의는 선각으로 얕게 표현했고 한국동란의 전화로 총탄흔적이 보인다.
담쟁이 덩굴이 민족상잔의 상처를 아우려는듯 보살을 감싸고 있다.
봉서사지 삼층탑...누들스님 사진
예전에 그렇게 어렵게 찾았던 봉서사지 석탑. 그 앞에서 우리는 다음을 기약했다.
모든 님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특히 가인강산님에게 거듭 감사드립니다.
답사는 情 입니다.
2009.06.13 |
첫댓글 부처님도 협시 보살님도 아름다우십니다. 마모 된 대로 이끼 낀대로 참으로 아름다우십니다. 그 앞에서 하염없이 쳐다보고 싶은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