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019주일설교 한 사람으로 시작되는 구원의 역사(창세기6:9-22)
본문: 창세기6:9-22
제목: 나의 족보
오늘은 창세기6:9-22의 말씀을 가지고 “나의 족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나의 족보”
지난 주간에 택배를 하나 받았습니다. 족보였습니다. 저는 해주 오씨입니다. 그리고 판사공파 25대손입니다. 그리고 족보에는 이름이 상근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내는 김명숙 딸은 주영이와 새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런 족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분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 집안에서는 사촌 형이 관심이 있어서 족보를 새롭게 만든다고 하여서 성화에 못이겨 참여하게 되었고 책을 받았습니다.
족보는 시조가 누구이고 어떻게 해서 나까지 왔는지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래서 족보를 통해서 조상이 누구이고 그 조상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족이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족보가 있는 사람도 있었고 없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할아버지 때만 하여도 족보 없었던 모양입니다. 고향에서 살지 않고 따로 떨어져 나와 살아서 족보를 보지 못하였는지 아버지와 아버지 형제간의 이름을 항렬에 따라 짓지 못했습니다. 잘못 들어서 우리 항렬로 아버지 항렬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우리 항렬이 뿌리 근자를 썼는데 할아버지가 잘 몰라서 아버지에게 뿌리 근의 항렬로 이름을 붙였고 또 아버지는 몰라서 항렬과 상관없는 이름으로 우리 형제간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둘째 작은 집만 아셨는지 항렬을 찾아 썼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족보를 보면서 알 수 있는 내용은 별로 없습니다. 아니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살펴보니 기록되어야 할 것도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기록되어 있는 것도 잘못 기록되어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기록되었다고 해도 누가 이제 조상이 무엇을 했는지 관심이나 가집니까? 친척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어떻게 나의 삶이 남을 것인지가 관심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나의 족보가 있어야 합니다. 나를 말해 줄 수 있는 족보 곧 나의 삶이 어떠했는지 나를 통해서 일어난 일이 무엇이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 바로 나의 족보가 됩니다.
여러분의 족보는 어떻게 기록될 수 있습니까? 세상에 불이나면 없어지거나 썩어질 책이 아닌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될 여러분의 족보는 어떻게 될까요? 오늘 본문은 그 모델로 노아의 족보가 나와 있습니다. 노아의 족보를 보면서 우리의 족보를 어떻게 써 나가야 할지를 찾아보는 그런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노아의 족보
9절에서 노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인이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표준에 맞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법적 용어입니다. 다시 말해 그렇게 인정하는 것이지 사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 주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죄가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노아도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것이 있어서 의인이지 완전한 의인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노아가 믿음으로 그렇게 인정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무슨 행동을 완벽하게 해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2절에 말씀하는 대로 노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따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한 번에 따랐는지 몇 번이고 거부하다가 따랐는지는 말씀하고 있지는 않지만 결국에는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이라는 말을 도덕적으로 완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도덕적으로 완전했다면 성경이 앞뒤가 맞지 않게 됩니다.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는데 그 말씀이 틀리게 됩니다.
그래서 노아라는 영화에 보면 노아가 아주 거친 그런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 땅에서 지키며 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대라는 말은 노아가 살았던 500년간의 세대를 말합니다. 그 세대 동안 노아는 완전한 자라였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당대의 사람들이 노아를 어떻게 보았을까요? 어떻게 판단했을까요? 노아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했을까요? 완전한 자라고 칭송을 하였을까요? 멋진 사람이라고 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전혀 다른 반응이지 않을까요?
왜 그렇습니까? 세상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세상은 자신에게 좋게 해 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서 의인인 곧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노아에 대한 평가가 어떠했을까요?
분명 노아는 세상의 길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의 길로 갔다면 어떻게 의인이라고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었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세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습니다. 세상은 많은 사람이 선택하는 길이 옳은 길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하다보면 그것이 유행이 되고 대세가 되는 세상입니다.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오직 사람들이 그것을 좋다고 하여 따르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따라서 하고 있으면 그것이 옳은 것이 됩니다.
그렇기에 노아는 비범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려면 분명 강인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세상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 속에 있는 뜻을 행하려면 약해서는 할 수 없습니다.
분명 세상은 노아를 고집불통이라고 놀렸을 것입니다. 세상은 노아를 잘못 살고 있다고 조롱을 했을 것입니다. 세상은 노아를 가지고 잘못된 집착에 빠졌다고 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사람들로부터 그런 소리를 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왜 그런 소리를 들었습니까? 그것은 본문에서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노아가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늘 하나님 앞에 있었습니다. 물론 동행하다 보면 다른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것을 따라가는 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곧바로 자신의 길을 바꾸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빠와 아들이 어느 길을 걷는다고 합시다. 걷다 보면 아들이 아빠 옆에 딱 붙어 있을 수도 있지만 긴 길을 가다보면 그렇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아빠와 아들이 다른 곳을 바라 볼 수도 있고 아빠가 가려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아들이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이 아빠의 말을 듣고 아빠가 이리 오라고 하면 오고 여기에 집중하라고 하여 간다면 최종적으로 말하게 됩니다. 동행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도중에 꾸중을 들을 수도 있고 이리 오라는 소리도 들었지만 아들이 아빠를 떠나지 않았다면 결국은 동행한 것이 됩니다. 사람을 기계가 아닙니다. 이런 생각 저런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세상에 있었지만 세상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당대의 사람들과 같이 살지 않았습니다. 많이 흔들렸겠지만 많은 사람이 가는 세상을 따라 가고 싶기도 하고 쉽게 사는 길을 가고도 싶었지만 그래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2.노아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하시다.
노아는 의인이였습니다. 당대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의인일 수 없으며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그래서 완전한 자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런 노아가 살던 세상은 하나님 앞에 부패하였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자신들을 잘 산다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패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판단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판단과 사람의 판단은 다릅니다.
우리는 항상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에 대한 생각보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는 지에 대한 생각을 기억하여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을 다르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노아의 당대의 세상은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였습니다. 여기서 온 땅이라고 함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부패하였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땅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땅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보시기에 심히 좋다고 하셨던 땅이었습니다. 땅은 하나님이 주신 유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이 서글프게 파멸되었습니다. 땅은 강포로 가득찼습니다. 부당한 거래가 판을 치고 타인의 권리는 부당하게 침해되었습니다. 인간의 권리가 짓밟히게 되었습니다.
도덕적인 존재였던 인류가 육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해 주었습니다. 모든 혈육있는 자를 땅에서 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을 얘기 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모든 혈육 있는 자의 멸망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혈육있는 자의 멸망을 노아에게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노아에게 살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멸망한 관한 책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요한계시록을 읽게 해 주신 것은 우리에게 살길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비밀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살길을 주시기 위해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3.노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멸망을 이야기 하시지만 한편으로는 노아의 살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혈육이 있는 생물을 살길도 제시해 주십니다. 노아 뿐 아니라 자녀 셋과 그 자부들도 살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살려 주신 것입니까? 18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이 땅에 온 이유도 분명 있듯이 하나님께 멸망의 자리에서 구원해 주시는 이유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언약을 세운다는 것은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노아와 그 가족을 살려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창세기 9:9절에서 홍수 후에 그 언약을 노아를 통해서 실현시켜 주십니다. 그렇게 하시므로 홍수를 다시 일으키지 않고 여자의 후손이 승리하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을 온전히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고자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노아의 족보를 살펴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족보는 어떠합니까? 어떻게 기록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족보는 무엇이라고 기록할 수 있을까요? 단지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를 낳았고 무슨 일을 했다로 끝나는 족보일까요?
하나님은 우리도 노아이길 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의인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속에서 완전한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도덕적인 완전한 자가 아니라 넘어지고 자빠져도 그래도 하나님과 동행하려고 하는 그런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살면 여러분의 자녀들도 그것을 보고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망하는 이 세상에서 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