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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나라를 끔찍하게 사랑한 과학자, 공병우
한글날 큰잔치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이대로
내가 국어운동을 하면서 만난 분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분, 내게 많은 가르침과 감명을 주신 공병우 박사가 이 땅에 오신 지 내년이면 100년이 된다. 나는 공 박사께서 이 땅을 떠나시기 전 7년 정도 모시고 한글사랑운동을 함께 했다. 긴 세월은 아니지만 참으로 많은 것을 공 박사님으로부터 배우고 감동했다. 박사님은 한글과 한겨레와 한국을 남달리 사랑하시고 그 사랑을 죽는 날까지 실천하셨다. 임은 안과 의사로 이름이 나있다. 그리고 한글타자기를 발명한 분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 보다 한 인간으로서, 한 한국인으로서 더 아름답고 멋있고 살고 뜨겁게 일하시고 깨끗하게 가신 분이다.
나는 일찍이 공병우식 삶과 의식이 한국병 처방전이고 치료약이라고 글을 쓴 일이 있다. 그분처럼 살면 오늘날 한국의 여러 문제가 일어나지도 않고 또 잘 풀린다고 보아서다.
오늘날 한국의 큰 문제가 무엇이 있는가? 학벌과 간판을 중요시하는 데서 나오는 교육문제가 있다. 또 제 나라 문화와 말보다 남의 문화와 말을 더 섬기는 사대주의, 강대국에 빌붙어 저만 잘 살려는 이기주의가 넘친다. 실용주의보다 허용과 사치, 체면 차리기에 시간과 힘을 낭비하는 사람이 많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고 과학과 발명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바르게 살기보다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지배층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 밖에 많은 한국 문제가 있지만 모두 공병우식 삶과 의식을 배우고 익히면 모두 술술 풀린다.
마침 외솔회에서 내는 회지, ‘나라사랑’지에 공병우 박사님 탄생 100돌을 맞이해 ‘공병우 박사님 특집호’를 낸다고 해서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 내가 본 공병우 박사에 대해 써 보련다. 유명한 안과 의사로서 이야기나 한글기계화운동 이야기보다 이분을 모시고 활동하면서 보고 느낀 이야기와 온 국민이 알면 좋겠다는 사실을 적어 보련다.
1. 내가 공병우 박사를 만난 이야기
내가 공병우 박사를 처음 안 것은 1968년 국어운동대학생회 활동을 할 때였다. 그때 공 박사는 한글학회와 다른 한글단체의 유인물을 돈을 받지 않고 타자기로 찍어 주셨다. 그때 국어운동대학생회의 성명서나 유인물도 공 박사께서 그냥 찍어주셨다. 그래서 공박사님을 알게 되었고 박사님과 타자기에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때는 유인물이 활판 인쇄된 것이거나 손으로 쓴 글을 등사기로 밀어서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활판 인쇄는 비싸고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등사기로 찍은 건 손으로 쓴 거라 글씨도 예쁘지 않고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그에 비해서 타자기로 친 글은 깨끗하고 보기가 좋았다. 그래서 타자기가 편리한 기계요 공병우 박사님이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글사랑운동을 하면서 한글단체 행사나 모임에서 몇 번 뵌 일이 있지만 특별하게 만나 함께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1988년 공박사께서 미국에서 돌아오셔서 한글기계화운동을 다시 하시면서 1995년 돌아가실 때까지 자주 뵙고 한글사랑운동을 함께 했고, 공 박사님에 대해서 잘 알게 되고 많은 걸 보고 배웠다.
2. 국어운동대학생회의 모임방을 주시다
1988년 민주화바람이 불면서 사회단체의 국내 활동이 좀 자유로워지니 우리 국어운동대학생회와 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도 힘차게 한글사랑 운동을 하게 되었다. 그때 공박사님도 귀국하시어 옛 공안과 병원자리에 한글문화원을 열고 한글기계화운동을 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마침 내가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 회장을 맡고 대학생들과 함께 활발하게 국어운동을 하고 있었기에 공박사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공박사님은 반갑게 맞아 주시며 당신의 연구실 옆에 우리 젊은이들이 모일 수 있는 방을 주겠으니 함께 한글운동을 열심히 해보자고 말씀하셨다.
우리도 모일 방이 없고, 힘든 때였기에 고마운 마음으로 방을 얻어 그곳에서 만나고 여러 의논도 했다. 동문회는 다달이 지하 강당에서 ‘한글사랑 이야기마당’을 열었는데 신문이 새로운 활동으로 보고 자주 소개한 일도 있다.
그때 우리 옆방에 이오덕선생이 이끄는 글쓰기연구회가 있었고, 그 옆방은 글을 개발한 정래권, 이찬진 등 젊은이들의 연구실이었다. 공박사님도 외롭고 힘들었기에 젊은이들을 도와주었지만 진짜 한글을 사랑하고 한글이 잘 되길 바라는 순수한 마음에서 하신 일이었다. 한글단체나 어른들은 공박사님의 그런 마음과 활동방법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3. 한글과 나라를 끔찍하게 사랑한 분
공박사께서 한글기계화운동에 앞장서고 한글사랑운동을 열심히 하신 건 한글과 나라와 겨레를 끔찍하게 사랑하셨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책상 위에는 셈틀로 쓴 ‘한글사랑 나라사랑’이란 글귀가 놓여있었다.
한글이 서양의 로마자보다도 타자기에 잘 맞고, 손으로 글을 쓰는 것보다 기계로 글을 쓸 때 빠르고 예쁘고 편리한데 그걸 모르는 정부와 국민을 깨우치려고 애쓰셨다. 한글이 빛날 때 우리의 나라와 겨레가 빛나고, 한글이 빛나려면 한글을 기계로 써야 한다는 걸 깨달았기에 그걸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려 글을 쓰고 외쳤다.
한글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크고 한글과 나라가 잘되길 남달리 바라고 있었기에, 당신 개인이나 가정보다 그 일에 몸과 시간과 돈을 더 바치셨다. 내가 한글사랑운동을 함께 한 선생님과 선후배 동지들이 많지만 이분처럼 깨끗하고 뜨겁게 한글을 사랑하고 그 일에 몸바친 분을 본 일이 없다. 이분은 진짜 한글과 나라를 끔찍하게 사랑하고 실천한 분이었다
4. 한글기계화 선각자였고 선구자였다
이분은 남이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걸 먼저 알았고, 그걸 먼저 실천하려 했기에 외롭고 힘들게 살았다. 한글이 세계에서 으뜸가는 글자요 우리 겨레의 보물이라는 걸 알고 말하는 분이 많았지만 무조건 한글을 사랑하고 쓰자는 분이 많았다. 그런데 임은 타자기나 셈틀로 한글을 쓰면 참 편리하고 그 세상이 되어야 한글이 빛나고 겨레와 나라에 좋다는 걸 굳게 믿고 그 세상을 만들려고 혼신을 다하셨다. 말로만 그런 게 아니라 스스로 기계를 만들고 썼다.
그런데 정부나 다른 분들이 그걸 모르니 답답해했다. 정보 통신 전문가란 사람들도 그걸 모르기에 너무 힘들어하셨다. 다른 사람보다 30년을 앞선 생각을 하고 가다 보니 외롭고 힘들었다. 선각자와 선구자가 가는 길은 가시밭길이고 외롭다는 걸 느꼈으나 내 능력이 모자라 제대로 돕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타자기나 셈틀로 한문을 쓰기는 힘들어도 한글은 좋다는 걸 알기에 그 세상을 빨리 만들어 한문으로부터 해방되고 모두 편리한 말글살이를 할 수 있게 하려고 했다. 한글은 과학스런 글자이니 한글을 잘 부려 쓸 때 과학과 학문도 발달한다고 굳게 믿었다. 한글기계화가 빨리 될 때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보다 정보통신과 과학이 더 빨리 발전하고 그들보다 더 힘세고 잘사는 나라가 될 거란 것을 알고 그 연구와 실천을 했다.
5. 과학자였으며 발명가였다
공병우 박사는 안과 의사로서도 이 나라에서 가장 먼저 콘택트렌즈, 시력 검사표를 만들고 실용적이게 하는 등 많은 발명과 개발을 했지만, 한글 속도타자기를 발명하고 맹인을 위한 점자 타자기와 세벌식 한글편집기를 개발하는 등 한글이 빛나게 하는 연구와 발명을 많이 했다. 그리고 그 일은 오늘날 정보통신 강국이 되게 기초를 닦고 새 길을 개척한 것으로 큰 업적이다. 그 정신과 태도와 행동이 젊은이들에게 이어지고 일본이나 중국은 말할 거 없고 미국에 뒤지지 않는 정보통신 강국으로 이끌었다.
박사님은 과학과 발명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신문에 과학에 관한 기사가 나오면 오려서 여러 사람에게 보여 주면서 “우리가 과학과 발명을 중요시해야 발전합니다.”라고 과학자와 발명가를 키우고 우대해야 나라가 잘된다고 강조하셨다. 나는 1992년에 여성동아에 『내가 만난 사람』이란 제목으로 공박사에 대한 글을 쓴 일이 있는 데, 그때 ‘공박사는 과학자다.’라고 썼더니 그 글을 보고 “나 보고 과학자라고 말한 사람은 이 선생이 처음이오.”라면서 매우 기뻐하고 고마워했다
로켓트로 우주여행을 하는 첨단 과학시대에 붓이나 연필로 한문을 쓰던 원시시대 말글살이를 하자고 고집하는 사람들을 불쌍하고 안타깝고 답답하게 생각했다
6. 이름난 고집쟁이였고 천재였다
1950년대에 한국일보에서 ‘한국의 10대 고집쟁이’를 뽑았는데 첫째가 이승만 대통령이었고 셋째가 외솔 최현배 박사, 여섯째가 공병우 박사로 뽑혔다. 이들 모두 한글을 사랑하고 한글을 써야 한다고 고집 부린 분들인데 공박사는 이분들과 함께 고집쟁이로 뽑힌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외솔선생이나 공박사의 그런 고집이 아니면 오늘날 한글세상이 되었을까? 아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고집이다.
1993년인가 천재교육전문가인 변영애님이 쓴 "천재가 되려면 웃는 법부터 배워라."라는 책에 여섯 명의 천재를 소개했는데 물리학자 리차드 헤인박사, 예수, 석가, 수필가 김소운, 공병우, 번역가 전혜린이었다. 그 글쓴이는 천재는 학교 점수를 잘 받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과 하는 일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매진해 뜻을 이루는 사람, 어린애같이 천진스럽게 웃으며 자신이 하는 일을 즐겁게 열심히 해서 목적을 이루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바로 공박사가 그런 분이었다. 학생 때 낙제 점수를 받은 공박사지만 천재였다. 남들은 감히 생각하지 못하고 하지 못하는 일을 고집스럽게 해내는 천재였다. 초등학교에 가기 전에 천자문을 외우고 영어를 잘하는 자가 천재가 아니다
7. 붓은 칼보다 강하다
임은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즐겼다. 『나의 일생을 좌우한 작문 이야기』라는 글에서 ‘글자는 인간이 가진 무기 중에서 가장 강한 무기이다. 그러므로 글자가 바탕이 되는 책이나 신문을 많이 읽는 사람은 성공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독서가 단순히 지식을 넓히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그 지식이 올바른 판단과 실천의 바탕이 되어,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쓰면서 ‘붓은 칼이나 총보다도 강하다.’라고 말했다
또 ‘내가 본직인 의사 일을 버리고 반평생 동안, 한글 과학화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은, 세계에 둘도 없는 한글을 500여 년 동안 천대만 하다가 나라가 망하기까지 했는데도, 이를 반성하지 못하고 여전히 한자와 두벌식 기계들로 천대를 하고 있는 것이 하도 안타깝고 한심한 마음에서 한글을 더욱 강한 무기로 발전시켜, 우리가 세계 선진국 대열에 자랑스럽게 앞장서는 힘의 바탕을 삼자는 데 그 뜻이 있다. (1993. 11. 16.)’라고 썼다. 하찮은 것 같지만 문화 문명 발전의 근본인 글과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실천한 선각자요 개척자가 아니면 못할 말이다.
8. 시간은 돈이고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보통 사람들은 돈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아끼는데 공박사는 시간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아끼신 분이다. 타자기를 발명하고 쓰자는 것도, 한글기계화에 몸과 마음을 바친 것도 시간을 아끼자는 것이었다. 시간이 돈이고 생명과 같다고 보셨다. 공박사는 "많은 이들이 자동차가 달리는 고속도로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그보다 더 중요한 글쓰기 고속도로인 한글기계화는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게 안타깝다."라고 침이 마르게 강조했다. 고속도로로 자동차를 달리는 것도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고 타자기나 셈틀로 글을 쓰는 것도 시간을 벌려는 것이지만 온 국민이 언제나 이용하는 글자 고속도로를 닦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살아서 할 일은 많은데 죽을 날이 가까워지는 걸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한글은 훌륭한 글자이고 한글을 기계로 쓸 때 잘 살게 되는 데 그걸 모르는 한국의 정치인과 학자와 언론이 한심하고 답답해 그걸 알려주려고 발버둥쳤다. 그래서 넥타이 매는 시간도 아까워 매지 않고, 대낮에 결혼식을 하는 걸 반대하고, 장례식장도 가지 않고 한글기계화 연구에 몰두했다.
집에 오고 가는 시간이 아깝다고 난방시설도 제대로 안 된 연구실 야전침대에서 85살 할아버지가 자고 먹으며 한글기계화 연구를 하셨다. 시간을 돈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목숨처럼 여기고 아낀 분이다. 누구를 위해서, 왜 그러하셨겠는가
9. 고구마와 자장면으로 끼니를 때운 분
공박사를 아는 분은 공박사께서 매우 검소한 분임을 떠올린다. 당신의 몸과 가족을 위해서는 돈을 쓰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이 자신만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려고 발버둥치는 데 이분은 그렇지 않았다. 좋은 옷보다 깨끗한 옷, 편안함보다 부지런히 일할 때 건강하다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한글기계화 연구와 운동을 하신 분이다. 그분이 얼마나 검소하게 살고 소탈한 분인지 이야기가 많다. 보통사람이 보면 지독한 구두쇠로 보일 정도로 알뜰하다
1990년 어느 날 나는 이오덕, 밝한샘 선생들과 함께 우리말 살리는 시민모임을 만들자고 저녁때까지 의논하고 난 뒤에 공박사님을 모시고 저녁을 먹자고 박사님 연구실로 갔다. 그때 공박사는 "내 밥은 여기 있소. 이걸 먹으려는 참이었소."라면서 전기 풍로 위에 놓인 누런 냄비 뚜껑을 열어 보였는데 그 속에 고구마 세 개가 있었다. 그리고 당신은 식당에 오고 가는 시간이 아깝다며 그것으로 해결하겠단다.
최근에 김계곤 한글학회장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언젠가 한글단체장들과 회의를 하고 고기 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는데 공박사가 남은 고기를 주섬주섬 싸 가지고 가더군요. 그래서 어떤 분이 집에 개를 키우느냐고 물으니 사람이 먹는 음식을 왜 개를 줍니까라며 당신이 먹으려고 싸간다고 하더군요."라면서 공박사의 검소함을 설명했다. 종이 한 장도 물 한 방울도 아끼는 분이다
10. 어려운 사람과 좋은 일엔 돈을 아끼지 않는다
공박사는 자신과 가족엔 지나칠 정도로 돈을 아끼지만 눈먼 장님이나 한글운동 단체들, 남을 돕는 일엔 돈을 아끼지 않았다. 50년대 미국에 갔다 오면서 자식들에겐 연필 한 자루 사오지 않으면서 장님을 위한 흰 지팡이를 많이 사온 일, 시각장애인을 위해 천호동에 재활원을 만든 일, 기독청년회관 건립에 많은 돈을 내고, 안성에 금싸라기 같은 논밭 4만 평을 한글학회에 내놓은 일, 한겨레신문 창간 때에도 많은 돈을 내고, 한글기계화에 모든 재산을 바친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병원 개원 기념식은 하나도 하지 않아도 다른 단체 돕는 일엔 발벗고 나서니 가족은 공박사에 섭섭함이 많았던 거 같다. 최근 미국 정부에 차관급까지 올라간 재미교포 강영우님도 공박사의 도움을 받은 분이다. 수십 년째 공안과 교환원으로 일하는 분도 장님이다. 최근 세계에서 가장 좋은 누리집 만드는 제작법을 만든 나모인터랙티브 전 대표 박흥호님도 공박사가 이끌고 가르친 분이다. 남을 돕고 쓸만한 젊은이에게 길을 열어주는 일은 모두 본받을 일이다
11. 연필로 쓴 편지는 답장을 하지 않는다
한글운동에 대해 당신이 정한 원칙과 기준을 철저하게 시킨 분이다. 어린애 같은 순진함과 고집이 그 원칙에는 융통성을 보이지 않았다. 그 원칙은 한국인끼리 쓰는 글은 누구나 한글로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고 기계로 글을 쓰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자를 섞어서 써달라는 원고 청탁은 거절했다. 또 타자기가 아니고 연필로 쓴 편지는 답장을 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정했다. 한글사랑은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이고 실천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한글문화원을 연 뒤에 신문이나 방송, 잡지사에서 취재 요청이 많이 왔다. 그런데 기자가 와서 한자로 된 명함을 내놓으면 취재는 뒤로 미룬 채 ‘왜 한글로 이름을 써야 하는가? 왜 한글이 중요하고 한글로 글을 써야 하는가? ’에 대해 숨도 쉬지 않고 입에 거품을 물어가며 설명을 해서 기자들이 당황하는 걸 여러 번 보았다.
이런 모습은 공박사님의 글에서도 볼 수 있다. ‘1991년의 일로 기억한다. 해마다 「동아연감」의 부록으로 나오는 「동아 인명록」을 발간하는 곳에서 나의 이력을 적어 보내달라는 요청서가 왔다. 나는 한글만으로 이력을 적어 보내면서, 먼 훗날에 젊은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글만으로 인명록에 올려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랬더니 해마다 한자혼용으로 올려지던 내 이름이 그 해의 동아연감 인명록에는 쏙 빠져 버렸다. 그 이듬해에 또 요청서가 왔기에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한글만으로 적어 보내면서 한글만으로 공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마침내 나의 고집이 받아들여져 한글만으로 나왔고 그 이듬해에도 역시 한글만으로 기록되어 나왔다. 아울러 나는 1993년 판 동아연감 인명록에서 평소 한글을 사랑하고 한글만 쓰기에 앞장서는 분들의 이름이 모두 한자로, 이력 내용도 한자혼용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았다. 이 사실은 한글을 사랑하는 대부분이 아직 한글을 살리기 위한 투쟁에 철저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라고 썼다. 당신이 정한 원칙엔 타협이나 양보를 하지 않는 고집과 원칙이 자판 싸움에 불리했는지도 모르겠다
12. 학교 졸업장이 없는 박사
공병우 님은 의학박사다. 그런데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다녔지만 졸업장이 없는 박사다. 월반을 하거나 검정시험으로 자격을 얻어 진학을 했기 때문이다. 태어나기도 보통사람과 달리 8달 만에 태어나서인지 학교도 그런 식으로 다니고 박사도 2년 만에 땄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일류 대학을 나오고 높은 관직이나 직책을 가진 사람이라고 무조건 대우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얼마나 성실하고 능력이 있는가를 중요하게 여긴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일류 대학을 가려고 온갖 교육문제를 일으키는 데 이분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면 그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님은 그의 자서전에서 ‘...사실 나는 졸업장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다. 도대체 졸업이란 무엇인가? 공부를 끝냈다는 뜻이 아닌가, 죽는 날까지 학업을 계속할 일이지, 어떤 교육과정을 졸업했다는 것은 나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다. 나는 죽는 날까지 졸업 없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 나는 지금도 매일 공부를 한다. 교육계에서는 평생교육이란 말이 있는가 본데 나는 바로 그 평생교육을 목표로 살고 있는 사람이다. 평생교육이 어찌 졸업이란 게 있을 수 있겠는가. 대학 간판이 있어야 취직도 잘하고 결혼도 잘할 수 있다는 경박한 일련의 분위기가 있는 모양인데 나는 그 같은 간판주의를 몹시 경멸한다. 실력 있는 사람이 정당한 대접을 받고 사는 사회가 되어야 참다운 민주사회이다.’라고 쓰셨다
13. 한글기계화는 한국인이 발전시켜야 한다
공박사는 "눈병을 고치는 연구나 일은 외국인이 해줄 수 있지만 한글 기계화는 우리 한국인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며 돈 잘 버는 의사 일을 하지 안고 한글기계화연구에 죽는 날까지 50년을 바쳤다. 누가 자기 삶과 가정도 돌보지 않고 그렇게 일을 하는가. 오늘날 미국말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미국말을 배워서 자기만 빨리 출세하고 잘 살아보자는 사람들 같으면 꿈도 꿀 수 없는 바보짓이다. 한글도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회사가 만든 기계와 프로그램으로 글을 쓰면 편하다고 보는 그걸 표준으로 만든 공무원이나 전문가란 자들이 볼 땐 웃기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타자기도 한글 창제 원리와 특징을 죽인 네벌식과 두벌식을 표준으로 한 게 잘못이라고 바로잡으려 애썼고, 셈틀도 두벌식 자판에 완성형 코드를 고집하는 자들과 맞서서 싸웠다. 그러나 아직 정보통신 학자나 전문가도 조합형 코드는 이해하지만 세벌식은 이해하지 못하고 두벌식만 쓰자고 하는 이가 많으니 딱하다.
사람은 두 팔과 두 다리를 다 쓸 때 제 구실을 다 하는 데 한 손을 묶어 놓으면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셈틀에서 한글의 원리와 특징을 무시한 두벌식 자판과 완성형 코드가 옳다고 국가 표준으로 정한 자들이 버젓하게 학자요 관리로 대접받고 잘 살고 있으니 답답하고 한심하다. 앞으로 내가 세벌식 자판운동에 힘써야겠다고 다시 다짐한다
14. 서재필 박사와 외솔을 좋아한 분
공박사는 세종대왕을 가장 존경하지만 독립신문을 만든 서재필 박사와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과 그 제자 외솔 선생도 우러러보고 좋아했다. 그분이 『한글의 핏줄』이란 제목으로 1992년 한글날을 앞두고 쓴 글을 옮긴다. ‘한글의 할아버지는 서재필 박사이고, 한글의 아버지는 주시경 선생이고, 한글의 손자들은 최현배 박사와 이극로 박사이시다. 서재필 박사는 독립신문을 통하여, 오랫동안 안방에서만 살던 한글을 세상에 나와 햇빛을 보게 했고, 그분 제자인 주시경 선생은 서박사의 뜻을 받아들여, 또 그 제자들에게 전했다. 약 100년 전에 서박사는 한글문화 나무의 뿌리를 심었고, 주시경 선생은 그 뿌리에서 한글나무가 돋아나게 했고, 주시경 제자들은 나뭇가지와 잎을 피게 했다.’라고 쓰셨다.
또 그 글에서 ‘세계에서 으뜸가는 과학적인 한글을 500여 년 동안 천대만 해 오다가 나라가 망한 적이 있었음에도 아직 반성조차 못하고, 엉터리 한글 글자판과 코드 통일 등으로 한글을 더욱 천대만 하고 있는 한심한 현실은, 외국의 문화 침략을 막아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외쳤다
15. 한글기계화운동을 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던 이야기
공박사는 한글기계화 운동을 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기도 하고 군사혁명세력 김재규 같은 무리에게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그 충격으로 미국으로 망명을 갔었다. 미국에 가서도 쉰 것이 아니라 셈틀을 연구하고 와서 이 땅에 셈틀 세상을 만드는 기초를 닦고 가셨다. 공박사가 쓴 자서전 「고독한 투쟁」에서 『남산에 끌려갔던 이야기』를 보면 공박사가 정부나 관리들과 타협하지 않고 잘못을 바로잡으려다 고통을 받은 이야기가 있다.
‘나는 정부에서 정한 네벌식 표준자판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과학적으로 밝히기 위해, 임종철님과 함께 타자 경기 대회와 세미나를 열고 연구 보고서를 만들어 뿌리기도 했다. 그러자 정부는 글자판 통일을 위한 심포지엄을 방해하거나 자판 비교연구를 발표한 잡지사를 폐간하는 등 심한 탄압을 했다. 이렇게 탄압을 해도 소용이 없자 과학기술처 장관이 우리 집으로 와서 나를 회유하기 위하여 대한민국 문화상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장관에게 문화상을 사양했다. 그러자 중앙정보부에 고발을 했는지, 장관을 만난 지 며칠 후 남산에서 왔다는 두 사나이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먼저 사진실로 가서 앞가슴에 신문에서 보던 것과 같은 숫자판을 붙든 채 사진을 찍었다. 마치 간첩과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5~6명의 젊은이들이 책상에 둘러앉아 있는 사무실로 끌려갔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내게 “왜 정부의 시책을 반대하는가?”하고 질문을 했다. 과학기술처에서 잘못한 점에 대해 내가 몇 마디 말하자, 그 방에 있던 젊은 사람들이 일제히 “이 새끼, 여기가 어딘데, 정부가 잘못한 것을 따따부따하는 거야?”하고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공박사는 이런 고통을 받으며 세벌식 표준 투쟁을 하던 중 전 혁명주체인 김재규가 찾아와 군사혁명세력이 세운 중경 학원 이사가 되면 세벌식 자판운동을 도와준다고 하니 이사가 되었다가 집과 병원건물까지 모두 날렸다. 그들에게 사기당한 것이다.
16. 몸은 여든 살이지만 마음과 몸짓은 20살 청년
나는 공박사님을 83살일 때 만나 89살일 때까지 함께 모시고 한글사랑운동을 했다. 그런데 몸은 할아버지지만 마음은 20살 젊은이였다. 어린애기처럼 환하게 웃고 고등학생처럼 꿈같은 말을 하고, 20살 젊은이처럼 셈틀을 좋아하고 즐겨 썼다. 보통 할아버지들은 노인정이나 가서 놀거나 쉬려고 하는 데 젊은이보다 더 열심히 글을 쓰고 일을 했다. 보통 사람보다 30년 정도 앞선 생각을 하고 나이보다 50년을 젊게 생각하고 행동했다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 입원할 때까지 하루 한 시도 한글기계화에 대한 걱정과 연구를 안 한 날이 없다. 돌아가시기 전해인 1994년 가을 박사님이 급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만나자고 하셨다. 삼청동 댁으로 김슬옹님과 또 다른 한 분이 함께 만나니 “장난감 타자기를 값이 싸게 만들 수 있는 길이 없을까? 나와 함께 그 일을 하자!”라고 꿈이 부풀어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때 내가 그 분야 일을 잘 모르고 또 돈이 들어가는 사업엔 자신이 없어 힘들다고 말씀드렸더니 엄청나게 실망하셨다. 그렇게 말씀드린 뒤 얼마 뒤에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이 있었고 퇴원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참으로 죄스럽고 가슴 아프다. 불같이 살다 가신 임의 뜻을 이어 가는 데 속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17. 한글은 금, 로마자는 은, 일본 가나는 동
공박사는 『나의 예언』이란 글에서 ‘한글은 금이요, 로마자는 은이요, 일본 가나는 동에 불과하다. 세벌식 글자판은 금, 네벌식 글자판은 은, 두벌식은 동에 해당한다. 세벌식 글씨 꼴은 금, 다벌식 글씨 꼴은 은, 완성형 글씨 꼴은 동이다. 따라서 한글전용을 단행하고, 세벌식 글자판 입력과 세벌식 글씨 꼴을 출력하는 글자 생활은, 자판 통일을 이룩하고 능률 극대화로 세계 최고 수준의 문명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확신한다. 현재와 같이, 한자 혼용과 두벌식 글자판 그리고 네모 글씨 꼴로 하는 글자 생활은, 자판 통일이 불가능하고, 극도의 비능률적인 글자생활로 인해, 선진국보다 문화 수준이 50년 이상 뒤떨어져 있는 현실을 벗어날 수 없을 뿐 아니라, 날이 갈수록 더욱 뒤떨어질 것이다.’라고 썼다
또, ‘금나라 = 한글전용 + 세벌식 글자판 + 세벌식 글씨 꼴 = 최고의 문명국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은나라 = 한글전용 + 네벌식 글자판 + 다벌식 글씨 꼴 = 중등 정도의 문명국으로 발전할 수 있다. 동나라 = 한자혼용 + 두벌식 글자판 + 완성형 글씨 꼴 = 문화수준이 선진국보다도 50년 이상 뒤떨어진 현실보다도 더욱 뒤떨어지게 될 것이다. (1991.10.9)’라고 예언했다.
그 예언대로라면 우리는 지금 '은나라' 수준인데 빨리 '금나라'로 올라서야 할 것이다
18. 한겨레 신문이 살아야 이 나라가 산다
공박사는 한겨레신문이 창간될 때 미국에 있었는데 적지 않은 돈을 창간기금으로 냈으며 한겨레신문이 잘되길 간절히 바라며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한겨레 신문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무척 기뻐했습니다. 내가 기뻐한 까닭은 첫째, 한글 전용과 가로 짠다는 점이요 둘째, 군사 독재 정권과 싸우다가 희생을 당한 애국 언론인과 기자들이 단결하여 적은 봉급으로 희생적 운영을 한다는 점이요, 셋째는 정부나 재벌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서 대중의 주머닛돈을 모아 운영한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라고 쓰셨다.
한겨레신문이 제2의 독립신문으로써 한글전용을 주장하시면서 ‘한글 신문을 실지로 만들어 보급한 지가 거의 100년이 지나간 오늘에, 아직도 한자혼용 신문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한글전용을 반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얼마나 한심한 현실입니까? 독립신문처럼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한글 전용 일간지인 《한겨레신문》이 살아야 나라가 살고, 이 신문이 죽으면, 독립신문이 죽은 뒤 나라가 망한 것처럼, 또 나라가 망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만나는 사람에게 잊지 않고 한겨레신문을 구독해야 한다고 애독 권유를 하는 것입니다.’라고 한겨레신문이 잘되길 바라고 빌었다.
그리고 한겨레신문 신문기자들 책상마다 셈틀을 놓고 한글을 살리고 빛낼 일과 한글기계화 발전에 힘 써주길 바랐지만 그렇지 않은 걸 보고 실망하기도 했다
19. 살아서도 죽어서도 남을 도운 분
공병우 박사는 살아서도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고 죽은 다음엔 당신의 몸을 쓸만한 것은 산사람에게 주고 남은 몸은 의학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실험용으로 쓰게 했다. 참으로 거룩한 삶이었다. 요즘은 시신을 기증하거나 화장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이분이 돌아가실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아 사회에 큰 충격이었다. 살아서도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충격을 주었지만 돌아가시면서도 그랬다. 이분의 죽음과 유서가 알려진 뒤에 많은 분이 본받고 따랐으며, 모임도 생겼다
생전에 자서전에 쓴 유서다. ‘죽은 후 반드시 화장을 한 후, 타고 남은 재는 한 줌도 어디에든지 남겨 두지 말 것이며, 또 내가 죽은 뒤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나의 영혼도 남아 있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다. 살아서 많은 죄를 지은 내가 죽어서는 내 영혼이 또 죄를 지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자서전 7쇄: 225쪽과 272쪽
임의 주검은 유언대로 눈과 쓸만한 장기는 산 사람에게 주고, 남은 몸은 의대생 실습용으로 쓰였다고 한다.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이고 죽음이다.
20. 누리꾼 1세대 공병우 할아버지
공박사는 미국에서 오셔서 한글문화원을 연 뒤 당신이 국민과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써서 편지로 보내다가 그것도 모자라 한글문화원 집앞에 신문 가판대 같은 글 진열대를 만들어 놓고 아무나 당신이 쓴 글을 읽고 싶으면 가져가라고 진열해 놓았다. 글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세종성왕이 “어린백성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마음대로 이 글을 써라.”는 말씀을 실천했다. 그러다가 피시통신을 시작하니 더 빨리 많은 사람에게 당신의 뜻을 알릴 수 있는 길임을 알고 바로 그 통신을 시작한다
공박사는 한국의 타자기와 셈틀을 이용한 한글 정보통신 원조이자 누리꾼 1세대다. 1980년에 미국에 가서 셈틀이 발달한 것을 보고 셈틀을 배우고 연구했고, 1988년에 귀국해서 이 땅에 셈틀 세상을 만드는 데 가장 크게 이바지한 분이다. 모자란 인간들은 미국에 가서 조금 있다가 오면 혀 꼬인 소리나 하고, 영어를 잘해야 나라가 잘된다고 지껄이지만 공박사는 그렇지 않았다. 선진 과학기술을 배우고 연구하고 와서 그걸 우리나라에 적용해 나라발전을 꾀하려 하셨다.
미국에서 오자마자 강태진, 이찬진, 정래권 등 젊은 발명가들에게 연구실을 주고 당신이 배운 것을 알려주면서 그 젊은이들이 한글 편집기(워드프로세서)를 만들게 했다. 그렇게 해서 미국도 넘볼 수 없는 우리 글이 개발되었다
그리고 1992년 하이텔, 천리안 등 피시통신이 시작되니 바로 회원이 되어 날마다 한글사랑에 관한 글을 올리셨다. 그때 박사님 나이가 87살이었다. 그 나이에 날마다 무게 있는 글을 하나씩 써서 올렸다. 젊은이들에게 한글기계화의 중요성과 한글의 훌륭함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마치 예수나 그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과 같았다. 지금 젊은이들도 누리 통신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이가 많은데 15년 전에 90을 바라보는 할아버지가 날마다 누리 통신을 즐겼다.
마무리
공박사님은 미국에서 오셔서 무척 외롭고 힘드셨다. 한글기계화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고 함께 할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마침 국어운동대학생회에 모임방을 주고 동문회 회장인 나와 자주 만나 한글운동을 의논하다 보니 나를 믿고 자주 찾으셨다. 그리고 내가 셈틀과 한글기계화에 대해 잘 알고 그 일에 앞장서주길 바라셨다. 날마다 와서 당신이 쓴 글을 봐주고 또 토론하자고 하셨다. 타자기를 주시면서 타자기로 글을 써 오라고 하셨다. 나도 힘들고 귀찮았지만 나라도 박사님 곁에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따르고 모셨다.
그래서 타자기로 글을 써 드리면 "이 선생, 글을 참 잘 쓴다. 셈틀로 글을 쓰면 글이 빨리 늘고 더 잘 쓸 것 같다."라고 칭찬하시며 셈틀을 줄 터이니 날마다 좋은 글을 많이 쓰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셈틀을 다룰 줄 몰라 겁내고 사양했다. 그때 70이 다 된 문제안 선생님에게도 마찬가지 셈틀을 배우라고 하셨다. 그런데 문 선생님은 정래권 선생들에게 물으며 배웠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실망하시고 섭섭해하셨다. 박사님 뜻을 따르고 배우고 싶었지만 개인 삶을 위한 일도 있고, 한글사랑운동 행사 등 할 일이 많아 셈틀 배우기고 바로 못하고 “한글사랑운동은 제가 할 터이니 박사님은 한글기계화운동만 하십시오. 그리고 선생님 뜻을 꼭 제가 이어 가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내가 셈틀(컴퓨터)를 다룰 줄 알게 해서 누리 통신으로 한글사랑운동과 한글기계화운동에 앞장서게 하려고 하셨고, 1994년 여름에 나를 부르더니 "이 선생,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오. 이제 마지막이요. 시간이 없으니 밤 11시에 와서 12시까지 공부합시다."라고 비장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나는 더는 박사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삼청동 감사원 아래 공박사님 댁으로 찾아가 11시에서 12시까지 개인 교습을 받았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는데 11시에 댁으로 가서 초인종을 누르면 "아, 이 선생이오! 더운데 오느라고 수고했오!"라며 반갑게 아래층까지 내려와 내 손가락을 잡고 자판을 안 보고 칠 수 있을 때까지 셈틀을 가르치고 통신방법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그해 겨울에 병원에 입원하시고 깨어나지 못한 채 3월 7일 세상을 떠났다.
나는 박사님으로부터 셈틀을 배우고 새로 셈틀을 사고서도 박사님이 병원에 입원해 계신 동안에는 재촉을 안 하시니 피시통신을 하지 않았다. 바로 통신을 시작하겠다고 박사님께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나 박사님이 돌아가신 다음날, 1995년 3월 8일부터 오늘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누리 통신을 통해 한글사랑운동 글을 쓰고 있다. 마치 청개구리가 비만 내리면 울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후회하듯이 말이다.
사실 나는 박사님 때문에 시간을 많이 빼앗긴다고 생각하고 귀찮아했다. 그분이 자주 만나자고 해서 시간을 아끼려고 1989년에 자동차를 샀는데 지금까지 그 차를 16년째 쓰고 있다. 당신이 쓴 글을 봐달라고 하는 데 오고 가는 시간과 힘을 덜 들이려고 전송기계를 사서 전송으로 글을 받아 교정을 본 뒤 다시 보내드렸다. 직접 찾아가지 않고 시간과 힘을 덜 들이려는 방법이었다. 진짜 귀찮고 힘들었으나 나라도 임의 곁에 있어야 하기에 그렇게 모시고 따랐다
그러나 돌아가신 뒤 생각하니 그게 나를 사랑하고 많은 걸 가르쳐주시려고 찾은 것이었음을 깨닫고 스스로 마지막 제자라고 말하고 그리워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박사님을 생각하며 셈틀로 날마다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 이제 박사님을 위한 내 마지막 사업은 박사님이 많은 시간과 힘을 쏟은 세벌식 자판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 일을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 글은 2006년에 외솔회 나라사랑 지에 실은 글입니다. 3월 7일은 공병우 박사가 돌아가신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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