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통섭과 지적 사기』를 읽고서, 답답한 느낌이 들었는데 여기 글을 보게 되었다. 조금 시원해질까 싶어서 말하고 싶은 것을 풀어놓기로 한다. 윌슨의 Consilience에 대한 번역어로서 역자 최재천 교수는 '통섭'이라는 말을 고안해 냈다. 그러면서 그 말의 근거를 들기를, 원효스님에게서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정말 그럴까? 원효스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나?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나 자신 원효스님의 글 중에 좋아하는 것만 몇 편 보았을 뿐, 그 모든 저술을 다 읽은 적이 없어서 그런가 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거기에 김상현 교수가 「원효는 통섭을 말하지 않았다」라는 글까지 쓴 것을 보았다. 나 자신 아직 최재천 교수의 번역 『통섭』이라든가, 그 분의 글을 읽은 것은 없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그 비판자들이 전하는 정보에 의하여 생각해 보건대 윌슨이나 최재천 교수가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을 통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고, 통합이라는 것 역시 자연과학을 중심으로 놓고 거기에 인문사회과학을 흡수시키는 방향에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많은 비판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러한 관점은 "환원주의"라 할만 한 것이다. 그럼 여기서 문제는 과연 원효스님도 그런 환원주의를 말하였던 것일까? 만약 원효스님의 논리 중에 환원주의를 용인하는 논리가 있다면, 설사 원효스님의 저술에서 '통섭'이라는 말이 안 나온다고 하더라도 최재천 교수가 "통섭은 원효에게서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면, 최재천 교수는 원효스님을 왜곡한 것이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아는 한 원효스님은 "결코" 환원주의자가 아니다. 만약 지금 원효가 살아와서, 윌슨과 최재천 사제의 '통섭' 주장을 본다면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자연과학은 자연과학대로, 인문학은 인문학 대로, 사회과학은 사회과학대로 하게 하라.
자연과학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자연과학이 하는 말이 옳다. 인문학의 입장에서 보면, 인
문학이 하는 말이 옳다. 그리고 사회과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회과학이 하는 것이 옳다."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러한 원효의 입장을 '화쟁(和諍)이라 말한다. 싸움을 화해시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효스님은 오늘날 말해지는 것과 같은 '학제적' 접근과 같은 것을 거부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다만 그 어느 학문 하나를 중심으로 놓고서, 나머지 학문을 그 속으로 '통섭'시키는 것을 반대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애당초 어떤 학문이든지 그것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다 특수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자연과학(그중에서도 진화생물학과 뇌과학)은 100점이고, 사회과학은 80점, 인문학은 70전 --- 이런 식의 점수매기기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많은 비판자들은 환원주의가 "제국주의"라거나, "식민주의"라고 지적하면서 비판한 바 있다. '통섭'이 환원주의인 한, 그러한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원효스님이 말씀한 일이 없을 분더러, 정면으로 원효스님과는 반대되는 입장인 것이다. 제국주의적 관점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효스님은 학문간의 경계나 벽을 높이 쌓아올리고 그 안에서만 아성을 쌓고 살아라고 말하지는 않으신다. 환원주의자가 아닌 그가 제기하는 해결책은 "함께 공부하라”는 것이다. 자연과학자가 인문사회과학을, 인문사회과학자가 자연과학도 함께 공부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원효스님에 대해서는,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의 원효스님 전기(그 제목은 '원효는 얽매이지 않았다'는 뜻의 원효불기/元曉不羈. 『삼국유사』 제5편에 있음)에서 원효스님의 학풍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배움에 있어서 스승을 쫒지 않았다(學不從師)”고 했다. 특정한 스승을 한 분 모시면서, 그 분의 학설만 따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최재천 교수는 윌슨을 따르고 있는 것인데, 원효스님 같으면 다른 스승들도 폭넓게 따르면서 배웠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자기 나름의 입장을 세워갔을 것이라는 말이다. 또 하나의 오해는 『화엄경』과 관련된다. 김상현 교수의 전언에 따르면, "통섭의 전도사격인 최재천 교수에 의하면, 화엄사상에 대한 원효의 해설에 통섭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고 한다."(253쪽) 화엄경은 대승불교의 가장 높은 봉우리라고 흔히 말해진다. 그 화엄경의 어떤 측면이 '통섭'과 관련되어 있다고, 오해하는 것일까?
이 역시 전적인 오해이다. 예를 들면, 꽃들이 있다. 많다. 그 많은 꽃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정해서 최고의 꽃이라 말한 뒤에, 다른 모든 꽃들은 그 꽃들보다 낮으므로 그 최고로 아름다운 꽃 하나만으로 다 수렴시키고 환원시키자, 이렇게 말하는 것은 화엄사상이 아니다. 화엄사상에서는, 많은 꽃들이 있다. 그런데 그 곷들은 다 하나같이 이쁜 꽃들이다. 아름답다. 그렇기에 놓아두자. 있는 그대로 꽃들이 저마다 자기 아름다움을 뽐내도록 두자. 이렇게 말한다. 모든 꽃들이 다 아름답다는 것은 '일(一)'이다. 그리고 하나하나의 꽃들이 다 아름다우므로 그대로 두자라는 것은 '다(多)'이다.
『화엄경』이나 화엄사상에서는 이 '일'과 '다'를 함께 말한다. 최재천 교수의 '통섭'논리가 환원주의라면, '다'를 없애고 '다'를 '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그것은 화엄의 사상이 아니다. 아무리 넉넉하게 양보해도 화엄의 '반쪽'일 뿐이다. 나머지 반쪽은 '다'를 '다'로서 놓아두고, '다' 안에서 '일'의 아름다움을 다 발견해 내는 것이다. 이 양자의 관점을 같이 보는 것, 그것을 중도(中道)라 한다. 불교는 중도이고, 화엄은 더욱더 중도이다. 양자를 같이 보는 것이 화엄이라 하더라도, 굳이 조금더 강조점이 놓여있는 것을 가린다면 전자가 아니라 후자이다. '다'를 '일'로 돌리는 것보다는 '다' 그 자체에서 '일'을 보는 것이라는 말이다. 옛부터 『화엄경』의 다른 이름으로 『잡화경』이라 했다. 화엄, 이라는 말은 꽃으로 장식한다는 말이므로 '잡화'는 잡스런 꽃들로 장식한다는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양면성을 갖는 화엄경 내지 화엄사상에서 전자 쪽만을 강조하면서 화엄을 오해하거나 왜곡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제국주의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동아시아의 옛날 여러 나라에서 전제군주들이 그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이데올로기로 화엄사상을 이용할 때도 그랬고,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일본의 우익철학자들이 전쟁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할 때에도 그랬다. "아시아는 하나라고" 말이다. 아시아는 하나일 수도 있지만, 아시아는 하나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원효는 통섭을 말하지 않았다」라는 글을 쓴 김상현 교수의 관점에 대해서 한 마디 해두고 싶다. 김상현교수는 원효는 '통섭'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자기는 그런 단어를 원효의 저서에서 못 보았다고 했다.), 그 대신 원효가 '화쟁'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좋은 지적이다. 그런데 그렇게 최재천 교수를 비판하는 듯하더니, 뒤로 가면서 최재천 교수의 관점이 마치 원효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함으로써 최재천 교수가 계속 원효스님을 왝곡하면서 원효스님을 빙자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듯한 논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러나 최재천 교수가 강조하고 있는 통섭이 원효의 사상과 통하는 바가 없지 않은 것같다"(253쪽)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김교수가 드는 예로서, 원효의 개합(開合)의 논리를 들고 있다. "'통섭'은 분석과 종합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라는 최재천 교수의 설명은 원효의 개합 논리와 매우 닮아있다."(253쪽)고 한다.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다. 원효스님의 개합의 논리를 보자. "원효는 『금강삼매경』의 종요(宗要, 핵심, 주제 ---인용자)를 '통합해서 논하면 일관一觀이요, 열어서 말한다면 열 개의 문十門이다.'라고 했다."(253쪽)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원효스님에게서 '개합'이라는 것이 적용되는 범위는, 김상현 교수가 『금강삼매경론』이라는 원효스님의 주저를 들어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의 텍스트 안에서의 일이다. 『금강삼매경』의 주제를 말하자면, 하나로 좁혀서(합해서) 본다면 일관이고, 각론적으로 펼쳐서 논의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열가지 범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 윌슨이나 최재천 교수에 의해서 논해지는 '통섭' 논의는 동일한 하나의 텍스트 안에서의 일이 아니다. 텍스트(학문)과 텍스트(학문) 사이의 문제이다. 원효스님이 말하는 개합의 논리는 이렇게 범주를 달리하는 곳까지는 펼쳐서 말할 수 없다. 이 점을 김상현 교수는 오해 내지 착각한 것이다. 유감인 것은 『원효연구』를 짓는 등 원효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긴 김상현 교수가 2013년에 불의에 작고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이러한 나의 의견 역시 전할 길이 없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애당초 '통섭'(한자로 쓰면 아마도 '統攝'이 아닌가 싶은데)이라는 말을 새롭게 조어한 것 자체가 문제였을 수도 있을 것같다. 강신익 교수가 그 대신에 "내가 '사물에 널리 통한다'는 통섭보다는 '언뜻 보기에 서로 어긋나는 뜻이나 주장을 해거하여 조화롭게 한다'는 뜻의 회석會釋 또는 회통會通을 더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221쪽)고 했는데, 나 역시 '회통'이라는 말을 선호하고 싶다. '회통'에서 '회'는 수도 서울이라는 의미이다. 서울에 가기만 하면 팔도 사람들 다 만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 교통편이 어떻든 늦게 가든 빨리 가든 다 서울에 도착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만 이 회통이라는 말도, 아시아(인도 및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널리 쓰인 것으로 알지만, 실제로 꼼꼼히 따져보면 회통에도 두가지 차원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평등적 회통과 차별적 회통이다. 후자, 즉 차별적 회통은 바로 최교수가 말하는 '통섭'과 같은 것을 말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어떤 용어를 쓰느냐 하는 것보다, 그 말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점일 것같다. 마지막으로 원효스님의 입장에서 최재천 교수에게 한마디 해보면, 이런 말씀이 되지 않을까? "최교수, 이제 내 이름은 그만 팔게나. 정 이야기하고 싶다면, 『원효전서』라도 좀 정확하게 읽어보고서 하든지 ---.“
(2014년 5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