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090406피p001왜피없이는아니하는가
[09 대구강의 6] - [피 1] - 왜 ‘피’ 없이는 아니하는가? 09,04,0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사람은 정(情)으로 산다 ??
오늘부터는 ‘피’ 라는 책을 가지고 강의를 하겠는데, 게시판에 집사님이 광고를 하면서 ‘열공(?)’ 이라고 적어놓았는데 말이다. 아무튼 피 튀게 열심히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먼저 이 책의 머리말에 보면 “사람은 정(情)으로 산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니 이 책에 대해서 반대하려고 하면, 적어도 “사람은 정이 없이도 살 수 있다” 라고, 그렇게 반대되는 주장을 제대로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닌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은 정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면서, ‘정(情)’ 이라는 것에 대해서 극구 부인을 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지식적으로는 그게 가능할지 몰라도, 물론 일시적인데, 그러니 그런 지식적인 것은 잠시 잠간뿐이고, 계속해서 남는 것은 바로 이 ‘정’ 이라는 말이다. (오늘 간식은 초코파이, ㅋㅋ)
예를 들어서, 부부사이의 경우에, 비록 상대방이 복음을 모른다고 해서 헤어질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식보다는 그놈의 정이 더욱 더 꽉 잡아당기기 때문에 말이다. 물론 비단 부부사이만 그런 것은 아닌데, 아무튼 그놈의 정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 그러면 ‘정(情)’ 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먼저 이 ‘정(情)’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도대체 ‘정(情)’ 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초반부터 조금 어려워도 할 수 없는데, 어렵지만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몸이 과연 내 것인가?” 라는 것이다. 물론 정답은 ‘×’ 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내 것’ 이라고 하는 것은, 먼저 몸이 있고 난 다음에 결과적으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몸은 어디까지나 몸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닌데, 즉 몸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그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 몸에게 “야, 늙지 말라” 라고 한다고 해서 어디 늙지 않는가? 몸은 자기가 무엇이라고 요구를 하든지 간에, 그냥 몸은 몸 그대로 가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은 ‘나’ 라는 것을 이 몸에다 맞추어야 하는데, 즉 ‘나’ 라는 의식을 말이다. 그러나 ‘나’ 라는 의식은 허풍이나 떨 줄 알았지 실제로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 오늘은 몸이 아파서 운전을 못합니다 ??
예를 들어서, “몸아, 내일 중요한 일이 있는데, 감기에 걸리면 안 된다” 라고 해서 어디 몸이 감기에 걸리지 않는가? 오늘 아침에 여기 보성 2차 아파트를 산책하는데 경비를 서시는 분이 뭐라고 방송을 하는고 하니, “아침부터 방송을 해서 죄송합니다. 오늘은 셔틀버스 기사가 몸이 아파서 운전을 못하니 알아서 출근을 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 버스기사 양반이 자기 몸과 적당히 타협을 해서, 즉 “야, 오늘 좀 쉬고 싶다” 라고 해서, 그래서 일부러 몸이 아프다고 이야기한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는 일을 하고 싶은데, 그런데 몸이 그만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꾀병을 부리다가는 요즘과 같은 시절에는 주민들에게 이미지를 버려서 바로 잘린다는 말이다. 물론 몸이 아파서 쉬어도 잘리는 수가 있지만 말이다.
자기는 사실상 운전을 하고 싶은데, 하지만 몸이 도저히 말을 듣지 않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는 상황에선 ‘나’ 라는 의식이 따라주어야 하는데, 그래서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든지 해서 “오늘은 몸이 아파서 도저히 운전을 못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나’는 이미지 관리밖에 할 줄 몰라 !!
그러니 결국 이 ‘나’ 라는 것은 허풍쟁이인데, 즉 아무런 실속도 없고 큰소리만 칠 줄 안다는 것이다. 경상도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사실은 모두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이 ‘나’ 라는 것은 매일같이 관리하는 것이 바로 자기 이미지인데, 자아는 정말로 그것밖에는 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몸이 계속해서 늙어 가는데, 그러니 아무리 이미지 관리를 젊게 하더라도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데, 즉 전혀 부합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몸은 몸으로만 남을 뿐이고, ‘자아’ 라는 것은 몸을 겉돌면서 상상만 하는, 그러니 결국 자아도 일종의 이미지에 불과하고, 즉 자아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아를 만들어놓고, 이 자아와 몸을 일치시키려고 애를 쓰지만, 하지만 이때 자아가 정작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자아, 즉 남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인의 자아가 부러워서 말이다. 그래서 타인의 자아, 즉 타인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하나로 묶으려고 엄청 애를 쓰는데, 그것을 바로 ‘정(情)’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정(情) - 몸의 피곤함을, 타인과 나눔으로서 위로를 받으려고 !!
그렇다면 ‘몸’은 무엇인가? 몸은 아무리 타인의 몸과 결합을 하려고 해도 안 되는데, 그런데 자아는 타인과 결합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몸은 말을 안 듣는데 말이다. 그래서 사람은 처음에는 정으로 버티다가, 몸이 아프게 되면 나중에는 어떻게 되는가? “이제 당신도 귀찮다” 라고 하면서, 아주 냉철하게 자기 몸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몸이 시들고 죽어가면서 결국은 자아도 눈을 감게 되는데, 그때는 과거의 그냥 기억이 아니라, 자기가 잘나갔던, 즉 좋았던 기억만을 되새기면서 “참, 그때가 좋았는데”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자기 몸도 없어지고 자아도 없어지는데, 즉 몸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자아는 그냥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정으로 산다” 라고 하는 것은, 몸이 주는 피곤함을 타인과 더불어 함께 나눔으로서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의식에서 나온 것인데, 그래서 사람들은 이 정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자기 몸의 피곤함을 덜기 위해서 정을 찾는다는 말이다.
◈ 하지만 성경은, 환경도 몸도 저주아래에 !!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몸이 왜 피곤한지를 말이다. 그것은 바로 몸과 그 환경 전부가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환경도 피곤하고 몸도 피곤하다는 것이다. 환경이 조금 나쁘더라도 몸 하나로 버티면 어느 정도는 되는데, 백만 하나, 백만 둘, 그렇게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 몸마저도 피곤하니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다는 것이다.
날씨가 구리무리하면 어떠한가? 온 몸 마디마디가 쑤시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환경에 따라서 몸도 아프니, 또한 자아도 아프니, 결국은 의지할 곳이 ‘정(情)’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정으로 산다고 했을 때, 도저히 그것이 반발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종교는 이차적인 문제이고 말이다.
◈ 마음 맞는 3명만 있으면, 지옥도 견딜만해 ??
그래서 제가 이런 말을 했는데, 마음이 맞아서 대화가 되는 사람이 3명만 있으면 그곳이 지옥이라도 견딜만하다고 말이다. 그렇게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지옥도 천국이 되는데, 왜냐하면 사람은 정으로 사니 말이다. 서로 마음이 맞다고 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얼마든지 누구라도 친구가 될 수가 있어서, 그렇게 정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좋다고 그렇게 난리를 치다가 나중에 성격이 맞지 않다고 헤어지고 하는데, 그것은 성격이 맞지 않는 게 아니라, 대화가 되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다. 대화가 되지 않으니 정이 없고, 그러면 당연히 살아가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한 집에서 정도 없이 무슨 수로 같이 사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과 정이 있는 사람을 찾아가고, 나는 나와 정이 있는 사람을 찾아가자” 라고 해서 서로 찢어진다는 것이다. 주위 사람과 자식을 생각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지, 힘이 든다는 말이다. 그런 것이 한때 기분이 아니라, 냉각기를 거치고 나면 그것이 오히려 서로의 솔직한 마음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왜 ‘정’이 아니고 ‘피’ 인가?
그러니 인간은 정으로 산다고 하는 굴레를 우리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데, 그렇다고 하면 이 책의 제목을 ‘피’ 라고 하지 말고 ‘정’ 이라고 하면 좋지 않겠느냐고 할지 몰라도, 머리말 중간쯤에 보면, “이제 그 낯선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라고 하는데, 물론 이 세상의 종교는 정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기독교도 그렇고 불교도 그렇고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 정이 기본인데, 그래서 몸이 피곤하면 정으로 때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을 나눌 상대자가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그 누구든지 상관이 없이 말이다. 아무튼 인간은 그렇게 정을 붙이면서 살아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책제목이 ‘정’이 아니라 ‘피’ 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피 자체가 이질적이고 낯설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 종말이기에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도록 !!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도 나오듯이, 사도바울은 자기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말씀이 모든 신학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사람을 좋게 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납득이 되고 동의가 되는 소리를 한다는 의미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는 말이다.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이해가 되지 않듯이,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도조차도 이제는 도저히 사람들이 이해할 수가 없는 발언들을 하기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제는 마지막 종말이기 때문에 말이다.
◈ ‘정’이 아니면 그냥 꺼지세요 !!
그러나 사람들은 정으로 살기 때문에, 그러한 정과 관련된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해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되면, “아니, 그것이 제가 정을 붙이고 사는데 무슨 도움이 됩니까?” 라고, 즉 “그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좀 풀어서 말해보면, “제가 정을 붙이고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하면, 저는 그러한 소리는 듣지 않겠습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의 기준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도들의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정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을 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정의 반대말이 심판이니 말이다. 즉 정을 살려고 하는 것이고, 심판은 죽으라고 하는 것인데, 또한 정은 축복을 원하고 심판을 저주를 퍼붓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8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천사라고 할지라도 내가 전한 것 말고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대번에 저주가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축복이 아닌 저주가 말이다.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그러나 저주는 넘 싫어 !!
그래서 길가는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앞의 말을 때내어 버리고 “저주를 받을 찌어다” 라는 것만 생각하는데, 도대체 앞의 말이 어떤 정당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고 말이다. 아무튼 저주를 받는다고 하면 인상을 쓰고 기분 나빠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정으로 사니까 말이다. 몸은 마구 늙어 가고, 그런 정이라도 없으면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의 늙고 피곤한 몸을 도닥거리고 보담아 줄 정이 필요한데, 그러한 정이 있을 자리에 사도바울이 말한 저주를 집어넣게 되면, 그것으로 그냥 빠이빠이를 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의 계시이고 정당성이 있어도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을 모으려고 하면 교회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가? 결단코 저주를 말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 뒤에 뭐라고 하는가? 자기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 참으로 낯선 이야기들 !!
그러니 사실 사도의 이런 이야기가 참으로 낯설다는 말이다. 자기가 하는 본업이 있고 취미 삼아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인 경우에, 자기의 본업이 있기에, 그런 본업을 받쳐주는 의미에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에게 이러한 복음을 이야기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항상 이런 이야기는 낯설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낯설다’ 라는 것은 들어도 그만, 듣지 않아도 그만이라는 것인데, 즉 자기에게는 그렇게 진지하기도 심각하지도 않다는 말이다.
이 ‘피’ 라는 책의 주제가 바로 이것인데, 제가 그렇게 이 책에 대해서 독후감을 좀 써달라고 부탁을 그렇게 해도 아무도 글을 올리지 않는데 말이다. 무슨 겁들이 그렇게 많은지, 아니면 책을 돈을 받고 팔아서 그런가? 분명히 공짜로 그냥 받은 사람도 있을 텐데 말이다. (ㅋㅋ)
◈ 낯설음이, 피해자의 낯설음으로 !!
이렇게 복음이 낯설기 때문에, 그런 낯설음이 그냥 낯설음이 아니라 피해자의 낯설음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그러한 피해자의 발생을 한 글자로 줄이면 그것이 바로 ‘피’ 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말하는 피는, 피해자의 ‘피’ 라는 말이다. 그러니 책제목이 참으로 멋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러한 ‘피’ 라고 하는 제목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정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본심을 먼저 이야기해야 하고, 그리고 여기에 반해서 복음이 낯선 이유를 설명하고, 그리고 그것이 낯설기 때문에 거기에서 어떤 세력이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피해를 입히는 가해자 노릇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 정으로 살아가는 인간 전체가 다 말이다.
그런데 그 가해자가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까발리는 식이 성령의 능력이고, 또한 부활의 세계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해서 죽었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모든 나라와 모든 인간에게 무엇이 덮치는고 하니, “나는 너희들에게 죽임을 당한 바로 그 피해자이다” 라는 것인데, 즉 다른 글자들은 때내어 버리면 한 글자로 ‘피’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이제 나는 피로서 이야기하겠다. 그러니 어느 누구라도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산다는 것은 꿈도 꾸지 말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자체로서 이미 전체가 다 죽어있다는 말이다.
◈ 왜?
이제 교재로 사용할 이 책 9페이지를 보면 그 소제목이 ‘왜?’ 라고 되어있는데, 즉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았는데 그 하나님은 간 곳에 없고 이 세상에 피로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낯선 이야기인데, 그래서 그들이 뭐라고 반박을 하는고 하니까, 그들도 역시 한 글자로 ‘왜?’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피!’ 라고 하고, 인간들은 ‘왜?’ 라고 한다는 말이다. 무슨 한 글자로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도대체 무엇이 어려우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피!’ 라고 하시고, 인간들은 거기에 대해서 ‘왜?’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와땀시롱?” 이라고 말이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의 피’ 라고 되어있는데, 왜 그렇게 하나님은 피를 흘리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자비하시고 형체도 없고 몸도 없는데 왜 피를 흘리시는가?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 마침내 !!
이 책의 마지막은 317페이지에 보면 그 소제목이 ‘마침내’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니 인간들이 아무리 ‘왜?’ 라고 물어도, 하나님은 거기에 대한 답변을 새삼스럽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피로서 답변이 다 된 것인데, 그러니 처음과 마지막이 모두 다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대로 했다는 것이다. 표현이 좀 거칠지만 말이다.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서, 주로부터 와서, 주께로 돌아가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냥 오셔서 피를 흘려놓고는 “너거들은 이제 죽었다” 라고 하면서 그냥 마감을 해버린다는 것이다. 또한 무덤을 찾아가서는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무덤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코 주님의 음성을 피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 무덤 속까지라도 !!
‘마침내’ 무덤에 있는 인간들도 모두 다 불러내는데, 즉 “니가 세상에 있을 때 나를 어떻게 생각했지?” 라고 하면서, 그렇게 다시 한번 더 추궁하는 식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참으로 남자답지 못한데, 한번 지나간 것은 그냥 잊어주면 되는데, 그런데 무덤 속까지 기어코 찾아가서 일일이 다 불러내어서 파헤치고 마니 말이다.
이 책이 어려운 것은 바로 ‘왜?’ 라는 것 때문인데, 그리고 성도만이 ‘왜?’ 라고 묻는 것이지, 만약에 불신자라고 하면 그 ‘피’를 보고 전혀 그렇게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의 본업이 아니기에 말이다. 인간들은 그냥 “정 주시는 하나님” 이라고 여기는데, 그러니 마음이 정에 있지 피가 아니라는 것이다.
◈ ‘피’로 시작해서, ‘피’로 마치는데 !!
그러니 인간들이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는 ‘피’ 라는 제목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책을 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성도가 아니면 말이다. 한 전도사님 둘째 아들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하는데, “아이쿠, 제목이 피가 뭐꼬? 이 제목을 보고서 누가 사겠노?” 라고 말이다. 물론 내용을 알게 되면 더욱 더 안 사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그러니 ‘구속의 피’ 라고 하든지, 앞에 무슨 설명이라도 좀 있어야 하는데, 그냥 ‘피’ 라고 하니 어떻게 구입해서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제가 ‘피’ 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사실 ‘구속의 피’ 라고 할 필요조차도 없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인간들이 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챙기려고 하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피’ 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간에, 즉 인간들이 어떻게 나오든 간에 전혀 상관이 없이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일을 펼치시는데, 그래서 피로 시작해서 피로 마쳐버린다는 말이다. 여기에 전혀 다른 것은 개입될 소지가 없다는 것이다.
◈ ‘정’과 ‘낯섬’ !!
여기 5페이지의 ‘머리말’에서의 강조점은 ‘정’과 ‘낯섬’ 인데, 즉 인간들은 정을 원하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무엇인가? 너무나 낯설고 이질적이라는 것이다. 즉 그야말로 엉뚱한 이야기들이고, 우리가 생전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것이 이사야 53장에 나오는데, 누가 믿었고 알았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전혀 그분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핍박할 수밖에 없었는데, 즉 그분은 전혀 흠모할 만한 모습이 아니었기에, 그래서 우리들은 “아니, 저분이 누구지?” 라고 하면서 관심조차도 없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우리 인간들의 태도 때문에 그분은 버림을 받았는데, 놀랍게도 그렇게 해서 버린 자들이 바로 ‘자기 백성’ 이라는 말이다.
(사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진짜 복음은 계속해서 낯설게 낯설게 !!
이러한 공식(?)은 그야말로 아주 독특한 것인데, 사실 유대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오신다고 하면 반기고 좋아할 자들인데 말이다. 그런데 바로 주님은 그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또 그것 때문에 피해를 입었는데,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자기를 외면한 그 인간들을 일일이 다시 찾아다니면서, “나를 외면한 너희들이 바로 진정한 나의 백성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힘으로 주의 백성이 될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주께서 되돌아와서 다시 찾아주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러니 여기 5절에 나오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라는 말씀은, 그야말로 낯설기가 그지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처음 시작도 낯설고, 또한 마지막에도 낯설기 때문에, 진짜 복음은 계속 그렇게 낯설게 낯설게 가야한다는 것이다.
흔히 목사들이 이런 전략을 세우는데, 처음 온 사람들을 살살 꼬셔 가지고, 즉 “예, 하나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여러분의 모든 한과 괴로움을 들어주고, 또 위로도 해줍니다” 라고 말이다. 일단 그렇게 해서 교회에 나오게 해서, 그 다음에 복음을 전하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목회방식은?
그러나 그렇게 되면 목사가 하는 목회이지 예수님이 하는 목회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언제 그렇게 사람을 꼬드기고, 또 사도바울이 언제 그렇게 했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의 목회는 정말로 간단한데, 즉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신 자만 찾는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광부가 광산에서 금을 캘 때 어떻게 하는가? 옆에 아무리 흙들이 많고 돌들이 있어도,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금이 들어있는 광석만 쳐다보지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 금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결코 놓치지를 않는데, 마치 독수리가 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먹잇감을 놓치지 않듯이 말이다.
◈ 스님, 목탁은 이제 그만 !!
마치 우리 주님은 이러한 독수리와 같아서, 자기 백성이 어디에 있는지, 심지어 절간에서 염불을 외고 목탁을 두드리고 있다고 해도 찾아가서 목탁을 빼앗아버리고 구원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 어디든지 간에 거침없이 쳐들어가서 빼내오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기를 “나는 망하는 자들이나 구원을 받는 자들이나, 아무튼 나는 복음만 전하면 주께서 알아서 하신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즉 택한 백성 같으면 믿게 하실 것이고,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택한 자가 아니라고 하면 돌아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를 못한다” 라는 말씀을 계속해서 적용시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9페이지를 살펴보자.
** [왜] - “…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
(히 9: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
여기에 보면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라고 하는데, 도대체 누가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예를 들어서, 엄마가 딸에게 “진주야, 이제 그만 놀고 숙제를 해야지” 라고 하면, 딸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엄마가 빵을 사주지 않으면 아니하나니(?)”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엄마는 뭐라고 하겠는가? “알았다. 맛있는 빵을 사줄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피가 없이는 아니하나니” 라는 것인데, 그러면 그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가?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물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아주 간단한데, “피가 없이는 아니하나니”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정만 찾고 정으로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을, 주님은 아주 낯설게 다가와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피가 없이는 하지 않는다” 라고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열심 ??
박영선 목사가 놀랍게도 ‘하나님의 열심’을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그러한 열심의 성격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이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어디에 열심을 가지고 일을 하시는지 말이다. 왜 그런가? 믿음이 없어서 그것을 모른다는 말이다. 아무튼 하나님이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그런데 인간이 구원을 받는데 열심히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무엇으로 구원을 받는가? 그것은 감히 말을 못하는데, 성화론으로 구원을 받는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오직 피, 이 피가 없이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거룩은 바로 이 피 안에 들어있는데, 믿음과 소망과 사랑도 피 안에 있고 말이다. 이 책에 그런 내용들이 다 나온다는 것이다.
◈ 성도는 저주와 축복을 가름하는 기준으로서 !!
제사에는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화목제가 있는데, 바로 이런 피를 흘리는 제사가 없이는 그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 어떤 축복도 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축복을 받는 것을 엄청 좋아하는데, 그러나 과연 그 축복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한번 살펴보라는 말이다.
축복은 바로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같이 제사를 들릴 때 흘리는 피에서 나왔는데, 그러면 축복은 무엇인가? 그 피가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인데, 밖에 있던 피가 말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축복을 받은 동시에 남들에게는 그만 저주의 기준이 되고 마는데, 즉 “내 속에 있는 피를 믿지 않으면 너는 저주를 받는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성도는 저주와 축복을 가름하는 기준으로서 등장한다는 말이다.
◈ 미션 임파스블 !!
그러니 자기가 받는 것만 챙기려고 하지 말고, 자기가 바로 저주의 기준으로서 살아간다고 하는 그 엄청난 사명도 함께 생각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저는 그러한 사명 앞에 무엇을 하나 붙이고 싶은데, 즉 ‘불가능한 사명’ 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미션 임파스블’ 인데, 물론 일반적 미션은 인간이 얼마든지 감당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션’ 이라고 하는, 남미에서 선교사들이 고생하는 이야기들을 담은 유명한 영화가 있는데, 그 주제곡이 또한 얼마나 장엄한지, 아무튼 인간들은 바로 그런 사명을 두고 미션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명을 주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인간들이 감당할 수 있는 사명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 먼저 이스라엘 내부를 !!
그러므로 성도에게 주어진 모든 사명은 불가능한 사명이라는 말인데, 이스라엘도 역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이스라엘에게도 사실 불가능한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스라엘이 그 사명을 감당하기 이전에 이미 이스라엘 내부에서부터 내부를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제대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내부조정을 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이 되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 이방나라를 증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이스라엘에게로 보내셨는데, 외부가 문제가 아니라 내부조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해야만 외부에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사건과 사건이 흐른다 !!
이스라엘의 내부를 넓게 그려보면, 여기 이 안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사건과 사건이 흐른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곧 시편의 주제이기도 한데 말이다. 이렇게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건과 사건이 계속해서 점철되면서 이어져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의 주제는 “과거 사건들을 오늘의 이스라엘아 잊지 말라” 라는 것인데, 즉 과거의 사건들을 말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일어났던 홍해사건이나 광야사건들을, 주로 선지자가 개입된 사건인데, 노아사건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건들과 동일한 맥락에서 지금 사건들을 주고 있으니, 그런 사건들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곧 시편의 주제이고, 그러니 시편은 그런 사건들이 줄줄이 연결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본인들은 그런 사건을 믿을 생각은 전혀 하지를 않고, 현재에 어떤 덩어리가 있다고 하는 것만, 즉 ‘이스라엘’ 이라는 덩어리가 있다고 하는 것 자체를 그만 자기와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덩어리는 주님의 것인데,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것이라고 여기니, 그래서 결국은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뜻인고 하니까, 항상 사건이고 또한 새로운 사건이 와서 부딪쳐야 하는데,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만의 구원론을 계속해서 다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지난번에는 믿었고, 이제는 성화차례인데, 그 다음에는 영화롭게 해야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경우에는 사건이 아니라 자기의 것을 챙기려고 하는데, 하지만 사건이 그만 자기 소유가 되어버리면, 그 사건은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것이 있다고 할 때는, 또 다른 사건이 다가와서 그 기존의 사건을 박살을 내어야 한다는 말이다. 성도는 바로 그런 사건을 매일같이 만나야 하고, 아니 만난다는 것이다.
◈ 성도는, 단 하루라도 십자가 사건이 터지지 않은 적이 없어 !!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인데, 이 십자가 사건은 자기에게 한번 터지고 지나가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들이닥친다는 말이다. 즉 성도는 단 하루라도 이 십자가 사건이 없는 적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정으로 만나지만, 그러나 성도에게 있어서 주님과의 만남은, 복음을 위한 십자가 사건으로서 매일같이 만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건을 통해서 “아하, 나는 단 하루라도 주님이 없이 살아갈 수가 없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즉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함께 동행을 하시는 주님 덕분에 살아가는 것이지, 자기가 주님을 과거에 한번 알았다고 해서, 그것을 우려먹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특히 목사들이 교회를 자기 소유화시킬 때, 주님의 사건은 떨어져 나가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교회가 주님의 교회라고 하면, 목사가 자기 교회라고 우길 때, 어디에선가 낯선 성도가 와서 복음을 이야기하는 사건이 터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목사님, 그것이 과연 복음입니까? 정신 차리세요” 라고 말이다. 바로 그럴 때 그 교회는 사건에 부딪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사울이 당회장이고, 부교역자가 다윗 ??
어제 사무엘상의 사울과 다윗에 대해서 설교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거기는 사울이 당회장이고 부교역자가 다윗인데, 부교역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대목을 그냥 건너뛸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러니 부교역자가 제 아무리 돌려서 설교를 해도 당회장은 인상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만약에 복음을 아는 부교역자라면 자기도 하나의 사건으로서 그 교회에 취직했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 교회에서 자기도 좀 먹고살아야 하겠다고 여기면 어떻게 되는가? 그때부터는 당회장에서 빌어 붙어서 “정을 주세요, 사랑이 필요해요, 키워주세요”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십자가 사건은 낯선 사건이 되어야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되면 낯선 사건이 아니라 정을 달라고 하는 사건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정을 달라고 하는 자들 때문에 누군가가 피해를 입게 되는데, 그분이 바로 우리 앞에 ‘피’로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게 되면, 이제 이 ‘피’ 라고 하는 책의 윤곽이 드러나게 되는데, 사실 이 정도라도 누군가가 평가를 좀 해주었으면 참 좋겠는데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인생들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십자가가 보이는 길과 십자가가 없는 길이다. 천국이 미리 보이는 길이 아니라 십자가가 먼저 보인다.
◈ 두 갈래의 길 !!
이것은 저의 주장이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좁은 길과 넓은 길을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 두 갈래의 길을 과학적으로 그림을 그려서 이야기를 해보면, 마침 지금 녹화가 되고 있으니 말이다. 말로서 설명하면 실감이 나지 않아서 말이다.
◈ 오잉, 홀로그램 ??
만약 여기에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을 어려운 말로 ‘피사체’ 라고 하는데 말이다. 즉 이 사람을 사진기를 가지고 찍으면, 여기 필름이 있고 또 렌즈도 있고 말이다. 그러면 빛이 들어와서 피사체가 거꾸로 고립이 되어 상(像)이 맺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필름을 보게 되면 인물만 들어있다는 말이다. 어제 오후설교에 이것을 말로 설명하다보니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입체사진으로 해보면, 그것을 ‘홀로그램’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즉 필름이 이렇게 있고 또한 렌즈가 있다고 하면, 이것은 레이저 광선으로서, 빛의 파장이 흩어지지 않게 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거울을 통해서 곧 바로 오게 되는데, 아무 것도 거치지를 아니하고 말이다. 즉 순수한 레이저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인물을 향해서 발사하게 되면, 그 인물은 하나이지만 광선은 두 개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입체사진이 되는데, 물론 그냥 보면 이상하게 얼룩덜룩하지만, 그러나 이렇게 비추어보면 입체로 보인다는 것이다. 광선이 두 개라서 그러한데, 하나는 순수한 광선이고 다른 하나는 불순물이 섞인 광선이라는 말이다. 왜 이것을 불순광선이라 하는고 하니까, 레이저가 곧바로 왔으면 모르는데, 뭔가를 거쳐서 왔기 때문에 그만 간섭을 받았다는 것이다. 불순한 대상에 의해서 말이다. 그래서 입체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 순수한 거룩 그것이 바로 ‘공의’와 ‘자비’ !!
이것이 바로 성경해석의 원리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죄인에게 주님의 깨끗함이 들어오게 되면, 죄인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만 피해자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그만 깡패에게 마구 얻어터져서 코피가 나고 이도 두 개씩이나 날아간 모습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곧 사랑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피해를 입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진짜로 왔으니 그야말로 순수한 거룩인데, 그것이 바로 공의와 자비라는 것이다. 그것이 로마서 11장에 나오는데, 이렇게 하나님에게는 두 개가 나오는데, 하나는 공의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라는 것이다.
◈ 생명책과 행위책 !!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책이 두 종류가 나오는데, 하나는 생명책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책이라는 것이다. 생명책은 한 권뿐인데 반해서 행위책은 여러 권인데, 결국은 이렇게 여러 개가 있다는 것이 바로 문제가 되는데, 왜냐하면 순수하지를 못하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행위책으로 심판을 받을래? 생명책으로 심판을 받을래?” 라고 해서, 그 대답이 ‘행위책’ 이라고 하면, 그것은 바로 죽음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가 제대로 행한다고 해도, 그런 행위자체가 이미 불순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답변이 ‘생명책’ 이라고 하게 되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구원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말이다.
◈ 설교는, 죄인과 그로 인한 피해자를 동시에 !!
이렇게 두 개의 방식이 놓여있기 때문에, 설교자는 반드시 불순하기 짝이 없는 죄인의 부분과, 또한 그 죄인을 용서하시는 피해자로서의 주님의 상황을 그대로 전달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성경해석은 제대로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새언약으로 해석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성경말씀에 의하면 이미 우리 인간의 불순함은 이미 확정되었는데, 여기서는 이 ‘확정’ 이라는 표현이 아주 적절한데 말이다. 물론 예수님의 용서하심과 사랑하심도 이미 확정이 다 되었고 말이다. 그러니 성경해석에 있어서 그 어떤 해석을 하더라도 미완료나 미완성은 남아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미 죄인으로 확정이 되었기에 말이다.
그러니 "지금은 비록 죄인이지만, 말씀을 제대로 지켜서 의인으로 살자“ 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기 때문에, 물론 우리가 더욱 더 나아졌음을 증거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미 죄인으로 확정이 되었고, 또한 주님의 은혜와 사랑도 이미 확정이 되었으니, 모든 모든 공로는 누구에게 돌리는고 하니, 당연히 주님께 돌려드리고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이것을 연극으로 한번 !!
그것이 제대로 된 성경해석인데, 아무튼 이렇게 순수한 광선이 있는 한 사건은 계속해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사실상 그림보다도 연극으로 한번 해보면 더욱 더 실감이 나는데, 여러분이 학생이라고 하면 제대로 한번 일으켜 세워서 시켜보겠는데 말이다. 점잖은 이미지 관리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그래도 간단하게 연극으로 하면, 여기 대식 형제가 주님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조 장로님과 이근호는 주님에게 “구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옆에 있던 믿음이 전혀 없는(?) 강 장로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어이 이근호 목사,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을 받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주님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한껏 인사를 땡기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겠는가?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서 이근호는 무슨 대답만을 할 수 있겠는가? “아니, 장로님이 왜 구원을 받아야 되지요?” 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은 전혀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구원이 아니라 저주를 받아야 당연하니 말이다.
그렇게 했을 때 뭔가에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아하, 그렇구나.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구나” 라고 했을 때, 바로 그때는 같은 주님을 만났기에 서로 동일한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아니, 이 목사는 성경대로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이야기를 해야지, 어떻게 구원받을 자격도 없다고 하면서, 그렇게 나를 무시하면 되는가?” 라고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설픈 연극을 하다가 더 어렵게 된 느낌이 드는데(ㅋㅋ), 아무튼 성도의 경우에는 주님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데, 즉 믿음이 있는 목사는 지금도 예수님과 대화하고 있는데, 그런데 교인들은 그런 주님이 믿어지지 않으니, 그래서 “목사님,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 한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가? 설령 아무리 복음을 아는 목사라고 해도 안 된다는 말이다. 구원은 주님이 하는 것이니 말이다. 물론 인간은 흉내를 내는데 있어서 또한 타고난 재주가 있기에, 그렇게 시키는 대로 한번 하려고 하지만 결국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과, 주님과 동행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전혀 다른데, 즉 하늘과 땅 차이라는 말이다.
◈ 인생의 길이 두 갈래인가?
인생의 길이 두 갈래라고 했을 때, 사실 길이 하나라고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예수님의 길만 있다고 하면 참 좋겠는데 말이다. 왜 두 갈래인고 하니까, 그것이 아까 말한 홀로그램인데, 주님을 믿고 싶은데 믿을 수 없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두 갈래의 길 중에서 주님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말이다.
예수님께서 좁은 길과 넓은 길을 제시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 인간들의 생각에는 얼마든지 천국에 가는 깃을 믿을 수 있다고 여기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그 길은 전혀 우리의 타입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백이면 백 명이 다 넓은 길을 좋아하는 타입이지, 세상에 어느 인간이 좁은 길을 가느냐는 말이다.
◈ 다시, 왜 정(情)으로 사는가?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인간은 정(情)으로 살아가는데, 그러니 친구도 열 명보다는 백 명이면 더 좋다는 것이다. 정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으니 말이다. 그렇게 정으로 사는 것이 인간이니, 남편이 불신자라고 해서 이혼할 필요도 없고, 굶지 않도록 돈만 제대로 잘 벌어다주면 고맙게 생각하면서 살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정으로 사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몸이 너무나 피곤하니 말이다. 자기가 아프면 누가 옆에서 돌보아주어야 하고 말이다. 그러니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보다도 가까이 있는 사람이 더 그리운 것인데, 즉 사람의 따뜻한 칭찬과 위로와 받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팬이 되어서, 자기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무조건 옳다고 하면서 박수를 쳐주는 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낯선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정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당연히 넓은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 간단하나마(?)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
그래서 목사가 개척교회를 한답시고 마누라까지 합쳐서 두 세 명을 앉혀놓고, 아무리 설교를 하려고 해도 설교할 맛이 전혀 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두 세 명이 아니라, 뭔가가 잘못되어서 길을 잃은 사람들이 50명 정도가 우르르 몰려오면, 갑자기 목사의 설교하는 톤이 올라가고 신바람이 나서 그만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무안 화평교회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시골에서 매주 서너 명을 앉혀놓고 예배를 드리다가, 새로운 교인이 두 명이나 오니, 너무나 흥분해서 복음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5시간이나 하는 바람에, 두 번 다시 그들이 오지를 않았다는 것이다(ㅋㅋ). 김을수 집사님이 2시간을 특강하고, 계속해서 오용익 목사님이 3시간을 하고 나니 말이다.
◈ 왜 ‘피’ 인가?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누군가가 그러한 정보를 열심히 알려주어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왜 피인가?” 라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의 힘으로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아담의 속성을 그대로 물려받았기에 말이다. 그렇게 믿지를 못하니까, 그것을 조금 전에 ‘불가능한 미션’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은 불가능한 미션을 주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전혀 실적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맙게도 말이다. 노아가 달랑 8명의 자기 식구만 구원시켰다고 해서 주님에게 기합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노아는 친한 친구도 한 명 없었던 것 같은데, 자기 식구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은 처음부터 실적을 묻지 않고 다만 ‘보내심’ 인데, 로마서 10장에서 말이다.
(롬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것이 요한복음 21장에서는 그것을 ‘목격자’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본 것을 증거하면 되는데, 전혀 실적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원에서 증인으로 서면 월급을 얼마나 받는지, 그런 실적을 묻는 것이 아니라 본 것과 들은 것만 증언하면 된다는 말이다.
(요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것을 가지고 또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즉 주님이 사람을 보내주어도 자기가 사명감이 없으니 모르는 척 하면서 지나쳐 버린다는 말이다. 주님이 보내주시면 귀하게 여기고 5시간이 아니라 5일이라도 복음을 전할 열정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농땡이나 치고 말이다. 제가 그런 양반들 때문에 욕을 엄청 들었는데, 그들이 방종하도록 방치했다고 말이다(ㅋㅋ).
◈ 십자가가 보이는 길과, 없는 길 !!
다시 교재로 돌아와서, 인생에 두 갈래 길이 있는 것은 홀로그램이라고 했는데, 즉 인생은 불순하다는 것을 알려는 길이 하나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해주시는 길이 또 하나 있다는 말이다. 즉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한쪽 길은 십자가가 보이는 길이고, 다른 길을 십자가가 없는 길이라는 것이다.
◈ 과연, 십자가란 무엇인가?
제가 지난 일요일 아침에 십자가 마을에 “십자가란 무엇인가?” 라는 글을 하나 올렸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 마을의 사이트도 새롭게 개편이 되고 해서 말이다. 사람이 자꾸만 처음 자리로 되돌아가려고 하는데, 그런데 오래 되면 그 처음 자리를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란 무엇인가?” 라고 해서 글을 올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도대체 십자가가 무엇인데 당신들만 안다고 우기는가? 우리 모두가 아는 것인데, 당신들만 아는 것처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물을 때, 그때 답변할 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 마을에도 행함이 마구 치고 들어올 때가 있는데,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말이다. 복음으로 시작한다고 해놓고는, 그런데 나중에 보면 엉뚱한 것이 여기저기에 마구 스며들어있다는 것이다.
‘예수사회’ 라는 잡지도 그러한 경우인데, 처음에는 복음만 이야기한다고 해놓고는 나중에는 엉뚱한 것들도 모두 다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처음부터 정체성이 없기 때문인데, 그러니 행함을 주장하는 자들도 마구 들어온다는 말이다. 그런 것을 걸러야 하는데, 도무지 그렇게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정수기가 청소를 제대로 해주지 않으면 오히려 세균을 더 배양하게 되는 것과도 같은데, 그래서 그 정수기를 또 정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떤 조직이 있을 때, 그 조직이 불의를 감시한다고 했을 때, 그 조직의 내부에서 생기는 불의를 감시할 장치가 또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한 조직의 장치의 또 장치가 있어야 하고 말이다.
◈ 무한태행 ??
이것을 논리학에서 ‘무한태행(?)’ 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 은행이나 금융기관들을 감독하는 것이 금융감독원인데, 그런데 그 금융감독원의 감독은 누가 하는가? 흔히들 중이 자기 머리를 깍지 못한다고 하는데, 바로 이런 것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것이 십자가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모두가 다 여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빼고 그 나머지는 누구든지 결코 앞서 나오지 말라는 것이다. 그 누구든지 말이다. 인간은 누구든지 여전히 제자리 뛰기인데, 그러니 교회에 다닌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십자가를 면제해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이 ‘누구든지’ 라는 것에는 남녀노소 구별도 없고, 또한 목사, 집사, 장로, 권사 등등, 그런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곧 “계속해서, 영원토록, 누구든지” 라는 말이다. 즉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정신이라는 말이다.
(눅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이미 너는 죽은 놈이야 !!
“십자가란 무엇인가?” 라는 글에 살펴보면 세 가지가 나오는데, 첫째가 ‘공평하다’ 라는 것이고, 누구든지 말이다. 둘째가 ‘자기 부인’ 인데, 그것은 한 번에 아니라 항상 그렇게 해여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이미 십자가가 일종의 사형틀이니, 즉 “이미 너는 죽은 놈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사는가? 그것은 바로 죽기 위해서 산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참으로 간단한데, 십자가 마을은 왜 개설했는가? 당연히 죽으려고 개설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 마을을 얼마든지 공격하라는 것이다.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죽으려고 있으니 말이다. 그냥 죽으려고 하면 심심하니(?) 그렇게 고생하면서 돈까지 들여서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죽으려고 하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려고 하면 자기 행함을 죽이는 것 말고는 없는데, 자기 행함을 죽이라고 하면 방법은 단 한가지, 자기가 죽는 것 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있으면 자기 행함을 누적하게 되고 의식하기 마련인데, 죽으려고 환장한 놈은 자기 행함을 인정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귀는 그 자체가 ‘고소자’ 라는 의미인데, 즉 인간의 행함을 고소한다는 말이다.
◈ 십자가가 있는데 어떻게 낙심을 !!
아무튼 그렇게 해서 십자가가 먼저 보이고, 그러한 십자가가 있는 길이 사는 길이고, 없는 길은 죽은 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성도는 낙심하거나 절망할 이유가 없는데, “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니 결코 낙심할 이유가 없다” 라는 것이 성경말씀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죄인이구나. 그러니 낙심된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라고 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죄인으로 지적하는 것은, 그런 주님의 십자가가 있음을 기뻐하라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를 자책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한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 눈앞에 있는데 누가 꾀겠는가? 그것은 바로 악마인데, 악마는 그 십자가를 없애버리면 대승리라는 것이다.
아까 제가 ‘무한태행’ 이란 말을 했는데, 즉 “나는 반성한다. 그렇게 반성하는 나를 또 다시 반성한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마귀는 이런 것을 엄청 좋아한다는 것이다. “더욱 더 예민하게, 더욱 더 예리하게 너의 죄를 반성해야지. 더 더 반성을 해!” 라고 하면서 인간들을 마구 부추긴다는 말이다. 십자가를 숨기기 위해서 말이다.
◈ 목사님, 회개가 무엇입니까?
오늘 아침에 십자가 마을 사이트에 보니, 어느 목사님이 “회개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했던데, 그래서 친절하게 제가 답변을 해놓았는데 말이다. 즉 사람은 자기가 반성을 하면 할수록 자기가 반성을 한 만큼 사람이 의로워지는데, 그러니 그렇게 의로워지는 것을 또 다시 반성하려고 하니 그야말로 환장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 언젠가는 그 반성이, 즉 회개가 멈추게 되는데, 그 멈추는 순간이 바로 해탈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가 신이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하는 반성이고 회개인데, 하지만 그것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회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대구의 이현래 집단이 바로 그러한데, 결국에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자기들이 곧 신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거기에 가서 모두 ‘아멘’을 하는데, 하지만 자기들은 무엇이 잘못하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자기 내부의 자아실현의 욕구를 반영해주니 말이다. 물론 이현래 집단이 자기 반성도 많이 하고 자기들은 부족하다고 이야기는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다 자아실현으로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십자가가 없는 길은 죽음의 길이다. ‘살았다’ 라는 것이 얼마나 기분이 좋은 일인가!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해도 살아있음을 인하여 충분하다. 그래서 산 자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살아있음을.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는 사실이다.
◈ 먼저 죽음이 있어야 살림이 !!
이렇게 ‘살았다’ 라는 것이 기분이 좋은 일이 되려고 하면, 자기는 지금까지 ‘죽었다’ 라는 것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도 모르고 무슨 살았음을 아느냐는 말이다. 마치 큰 수술을 마친 환자에게 의사가 “이제 살았습니다” 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서 누가복음 24장 13절 이하를 살펴보자.
(눅 24:1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눅 24: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눅 24: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눅 24: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 그들은 처음에는 왜 주님을 몰라보았는가?
저는 이 말씀이 아무리 보아도 신기한데 말이다. 왜 처음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아보도록 그렇게 나타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자기 제자들과 동행을 하면서도 마치 주님은 자기가 멀리 있는 것처럼, 즉 주님은 함께 있으면서도 제자들은 마치 자기들만 있는 것처럼 여기도록 하셨다는 말이다. 도대체 주님은 왜 그렇게 하시느냐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주님이 일하시는 방식인데, 주님은 반드시 자기 공로가 나타나지 않도록 동행하는 것조차도, 즉 “내가 열심히 기도했으니 동행해주고, 구원해주지” 라고 하는, 그런 단 1퍼센트라도 인간의 행함과 공로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눈을 떠서 보게 해주어야만 비로소 바라볼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에게 공로를 돌리게 하는 그 대표적인 방식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을 하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 복음서는 서신서의 배경 !!
사실 이런 것이 신학적인 것이고 상당히 어려운 부분인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기록한 이 복음서들은 그 자체에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해답은 사도바울의 편지를 비롯한 사도들의 서신서에 있는데, 그렇다면 앞서 있는 복음서들은 무엇인가? 이 복음서들은 바로 예수님이 오시고 난 다음에 사도들에 의해서 진행되어지는 그 결론부분을 바쳐주는 배경이 되도록, 그렇게 환경을 조성해준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왜 제가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뭐라고 하는가? 자꾸만 복음서들을 보면서 그만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봐라. 여기에 이렇게 큰 상이 있고, 또 작은 상이 있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성경말씀을 보면서도 하는 짓이, 매일같이 복음서에서 상급과 같은 것을 끄집어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는 짓이 그야말로 유대인들과 똑같은데, 즉 자기의 행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짓거리를 한다는 것이다. 즉 “봐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선한 행함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산상설교는 그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겠는가? 당연히 모두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이전의 사건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공관복음서의 내용들이 오늘날 성도들에게 그대로 들어와서는 엄청난 절망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즉 마태, 마가, 누가가 기록한 복음서들이 말이다. (그러면 요한복음은?)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이 전혀 지키지 못할 말씀들로 가득하니 말이다.
도대체 어느 인간이 산상설교를 지킨단 말인가? 주님은 우는 자들에게는 기뻐하라고 하고, 웃는 자들에게는 슬퍼하라고 하시는데, 그것이 얼마나 역설적인 이야기냐는 것이다. 인간은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는데 말이다.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그냥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탤런트들처럼 억지로 연기를 하면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말이다.
◈ 바리새인들이 바로 우리의 모습 그 자체 !!
그런데도 목사들이 자꾸만 복음서를 설교하면서 억지를 부리는데,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함께 있었던 그 상황이, 바로 우리 자신들도 역시 그러한 바리새인들 못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다른 곳을 찾을 필요도 없이, 이 바리새인들이 인간들의 대표자들인데,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 있었던 그 모든 이야기들이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사울왕은 무엇을 관리한다고 했는가? 자기 이미지 관리인데, 그래서 여자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 라고 했을 때, 처음에 사울은 자기를 보고 천천이라고 했을 때 기분이 째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이 만만이라고 했을 때 어떻게 되었는가? 여자들도 참 눈치가 없지 말이다. 사울이 천천이면 다윗은 999명이라고 하면 되는데 말이다. 그렇게 되니, 사울은 자기 이미지 관리가 무너지면서, 그 다음부터는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삼상 18:6)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삼상 18:7)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삼상 18:8)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삼상 18: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 죄인을 의롭게 하는 것도 주님의 일 !!
그것이 전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 곧 사울인데, 물론 바리새인들의 모습도 우리이고 말이다. 그것을 그대로 적용시켜서, 우리 같은 죄인을 의롭게 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업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우리는 그것을 증거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를 두고서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는데, 사도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그 어떤 바리새인들이라고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다만 주님의 은혜가 임해야 되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누가복음 24장에서, 만약에 주님이 당회장이라고 하면, 그래서 교인들이 10명 정도가 왔다고 하면, 그래서 주님께서 그냥 속 시원하게 교인들의 눈을 다 뜨게 해서, “어이, 내가 이렇게 왔다. 구원을 받아라” 라고 하면,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도바울이 성령으로 설교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하시는가? 주께서는 끝까지 자기 백성을 놓치지 않는데, 그것은 인간들이 애를 써서 놓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만약에 주님이 그렇게 하시면 누가 무슨 짓을 해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동행’ 이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것은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만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 이상으로 예수님이 여기 계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중요시하다보니,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 계심’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서 ‘예수님의 여기 계심’을 느끼는 순간, 그것은 죽음보다 큰 충격이다.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없어진다.
여기에 보면 ‘죽음보다 큰 충격’ 이라고 하는데, 과연 정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있어서 죽음보다 더 큰 충격이 어디 있는가? 정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충격이 바로, 자기가 정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이 죽었을 때라는 말이다. 미운 자식이 죽어도 그렇게 속이 상하는데, 사랑하는 자식이 죽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어떤 사람은 자살까지도 하고 마는데, 그야말로 충격이라는 것이다.
◈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 !!
그런데 예수님은 얼마나 낯선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해도 사람들은 충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정으로 사는 것이지 피로 사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 있다고 하는 것이, 자기가 죽어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충격이라는 것이다. “아하, 주님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우리에게 이제야 눈을 뜨게 하셨구나” 라고 말이다.
그 이전까지는 신학을 이야기했고, 그냥 복음을 강의만 했는데, 그런데 막상 자기가 눈을 떠보니 이제 죽어도 좋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밥을 먹고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실업자가 되던지, 실업가가 되던지 말이다. 주님이 실업자와 동행해서 구원을 해주겠다고 하는데, 그런 실업자 무슨 대수냐는 것이다.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 그래도, 아직 남아있다 ??
어제 아침설교시간에 이런 예를 들었는데, 판때기(판자?)가 이렇게 있는데, 사람이 이미 바쳐진 존재로서 이렇게 판때기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면, 자기가 목욕을 했던 말았던 간에, 손톱을 깎았던 말았던 간에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판때기가 올라가면 그것이 중요하듯이, 즉 주님이 함께 계신다면 그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완성이고, 완료라는 말이다. 물론 새언약의 효과이고 말이다.
귻런데 어떤 사람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래도 아직 남아있다” 라고 하는데, 즉 ‘이미, 아직’ 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것은 어떤 경우인고 하니, 이미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미완료를 생각하는 인간들의 실상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미완료에 해당된다는 말이다.
물론 나중에 ‘점점 더’ 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데, 그러므로 주님이 눈을 뜨게 해주면 자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마저 채울 수 있는 것이 이미 밑바탕에 완성적으로 마련이 되어있다고 하는,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다 마련이 되었음을 말이다.
◈ 이미 창세 전부터 관계 자체가 !!
예를 들어서, 삼촌과 조카사이에 있어서 태어날 때의 관계가 그런 것이지, 조금 더 조카가 되고 조금 더 삼촌이 되는 법은 없다는 말이다. 즉 삼촌이 삼촌 값을 하고, 조카가 조카 값을 하는 것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삼촌의 관계를 때내어 준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이 서로 형제간인데, 하지만 사실은 남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처음에는 자기들이 서로 형제인 줄로 알았다는 것이다. 야곱은 창세 전부터 장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장자가 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애를 쓰는 그 자체가 미완료라는 말이다.
◈ 인간자체가 미완료이기에 !!
왜 미완료인고 하니까,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미완료라는 것이다. 그러니 미완료라고 여겨서 그것을 채우려고 하지 말고, 완료된 것만 바라보게 되면, 이 미완료가 참으로 시건이 없는(철없는?) 우리의 죄 속에 포함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하는 완료가 따로 있음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완료는 없는데, 그런데 자기 자신만을 쳐다보면 항상 미완료라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 인간자체는 미완료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하나님의 일은 이런 충격 속에서 진행된다.
그러므로 자기의 죽음보다 더욱 더 센 충격이 왔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일은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설교자가 설교를 하면서, 자기 노후대책이나 생계를 걱정한다고 하면, 충격적으로 설교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설교자가 이번 설교를 마치고 “나는 이제 죽으려고 합니다. 먼저 가서 미안합니다” 라고 한다면, 당연히 설교 질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교인들이 “아하, 저 목사가 드디어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오 목사님, 사모님을 생각해야지요 !!
무안의 오 목사님 설교를 들어보면, 그 설교를 김을수 집사님이 저에게 고자질을 하는지 몰라도 메일로 보내는데 말이다(ㅋㅋ). 그러면 저는 “아이쿠, 좀 참지”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데, 그냥 마구 숨이 넘어간다는 것이다. 119에 신고를 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아무튼 인간에게 죽음보다도 더 오래가는 충격은 없는데, 그 다음 충격은 우리 힘으로 유지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밧데리를 채운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매일같이 동행해주어야 하는데, 물론 우리는 매일같이 우리 자신의 미완료에 신경을 쓰고 말이다. 그 미완료로 인해서 짜증을 내고 미흡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자기 이미지대로 채워지지 않는다고 하나님에게 불평을 하고 말이다.
그러한 미완료가 계속 남아있는데, 그런 미완료가 있어주어야 주님이 다시 찾아오면 자기 죄를 느낀다는 것이다. “아하, 십자가가 눈앞에 있는데, 마귀가 나를 꾀는구나” 라는 식으로, 그래서 미완료가 또 남아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인데, ‘나’ 라는 존재가 굳혀지지 않도록 말이다.
◈ 매일같이 주물러대는 주님 !!
밀가루를 반죽해서 오래두면 굳어지는데, 그럴 때는 땅에 때기를 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안 되면 다시 물을 부어서 다시 주물러야 하고 말이다. 그렇게 매일같이 주님은 우리를 주물럭 주물럭거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틀 분의 만나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있다고 한다면 썩어서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먹지도 못할 썩은 것을 모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그래서 주기도문에 보면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 하자면, 일용할 양식 이상으로 욕심을 부리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해서 그 죄의 용서함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즉 “우리 죄를 용서하옵시고” 라고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덕택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전혀 남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그만 딱딱한 덩어리가 되어있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자기 자신이 조금 전에 말한 그러한 밀가루 반죽처럼 부드럽게 잘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 덩어리로 되어서 굳어있다는 것이다. 덩어리가 되어서 말이다.
◈ ‘나’ 라는 허상이 사라지면 !!
그렇게 ‘나’ 라는 허상이 있어버리면 남이 전혀 용서가 되지 않지만, 그러나 그 허상이 사라지고 나면, 남이 그만 천사로 보인다는 것이다. 즉 자기를 인간으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붙어주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남을 존경하라는 것이 아니라, 같은 죄인인데 무슨 존경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 주님이 붙여준 것은, 심판은 주님에게 있으니 자기들은 심판할 권리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교재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일은 충격 속에서 진행이 되는데, 그 충격이 무엇인고 하니, “주께서 여기 계시다” 라는, 그것이 바로 충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도가 증거할 것도 주께서 십자가로서 여기 계신다는 사실인데, 그것이 사도행전 3장 16절에 나오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칠 때, 바로 그러한 점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행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 앉은뱅이와 주님과의 거래 ??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앉은뱅이와 함께 있음을 베드로와 요한이 보았다는 말이다. “야, 주님이 지금 너와 함께 있어. 그러니 믿으면 돼” 라고 하니, 그래서 앉은뱅이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은 베드로와 요한이 아니라, 앉은뱅이와 주님과의 거래(?)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칭찬을 하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뭐라고 하는가? “우리들은 목격자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리들의 노력과 열심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거기에 주님이 함께 했음을 보았을 뿐이다. 그래서 일어나라고 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겸손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하니 말이다.
설교자가 교인들에게 전도를 하면서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알아듣지를 못하는데, 하지만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그러한 복음을 전하게 되면, 너무나 좋아하면서 믿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설교자는 그 어떤 경우라고 해도 오직 복음만을 전해야 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사도는 자기 삶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미 산 사람의 자격으로 죽은 세상을 다루는데 전념했다.
(딤후 2: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 군사는 자기 생활이 없어야 !!
이것은 조금 전에 한 연극을 생각하면 되는데, 즉 다른 사람들은 주님과 악수를 하고 있는데, 하지만 주님이 없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을 보고서 닥달을 낸다는 것이다. 즉 “당신은 지금 누구와 이야기를 하는가? 나하고 이야기해” 라고 말이다. 하지만 주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대화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 있는 디모데후서 2장 4절 말씀을 보면,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생활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도대체 그런 사람이 누가 있는가?
사람들이 제가 하는 이야기하는 가운데 오해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들인데, 즉 ‘자아’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자아를 없애라는 것은 불교에서나 하는 짓이고 말이다. 아니,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의 자아를 없앤다는 말인가?
왜냐하면, 몸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자아가 있기 마련인데, 그러니 그것을 주께서 다루신다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도록 말이다. 물론 천국에 가도 자아는 없어지지를 않는데, 왜냐하면 면류관을 주님께 드려야 하니까 말이다. 그러니 무엇을 제거하고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분께서 다루시고 또한 가지고 노신다는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