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朝人物考四十六
홍봉세(洪奉世) 묘갈명(墓碣銘) - 임숙영(任叔英)
불초(不肖)가 철이 들면서부터 아버님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근세에 어질기로는 고(故) 판결사(判決事) 홍공(洪公)만한 분이 없다.”고 하셨다. 나는 그때 아직 어렸으나 마음속에 이미 홍공이 어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30년 후에 공의 손자 홍백순(洪百順)이 공의 시종 사적(事蹟) 가운데 환하게 빛나서 어둡게 덮어둘 수 없는 것 약간 조목을 뽑아 내게 비명(碑銘)을 부탁하기를, “우리 할아버지를 이곳에 장례하면서 내가 손수 옆에다 송백(松柏)을 심어 그 나무가 지금 한 아름이나 되게 자랐는데, 아직 신도 비문(神道碑文)이 없으니, 내가 어떻게 그 책임을 피하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그 역시 때를 기다린 것이니, 자네는 이에 유의(留意)하기 바라네.”라고 하므로, 나는 적당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양하였다. 그런데 스스로 생각하기를, “재주 없는 내가 어떻게 장자(長者)의 행실을 말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아버님께서 여러 차례 일컬으신 바를 불초가 익숙히 들은 지 오래이니 우연이 아니라고 여겨져, 사양할 수만 없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그 본말(本末)을 비석에 새긴다.
공의 휘(諱)는 봉세(奉世)요 자(字)는 흠중(欽仲)으로, 남양인(南陽人)이다. 증조 홍정(洪淀)은 원주 판관(原州判官)이요, 할아버지 홍임(洪任)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이다. 아버지 홍경림(洪景霖)은 공조 판서인데 중종(中宗) 때 정국공(靖國功)으로 익원군(益原君)에 봉해졌으며, 어머니는 함양 여씨(咸陽呂氏)이다.
공은 세가(世家)의 자제로 천부의 아름다운 자질(資質)을 타고났는데, 마침 국가가 문명(文明)하여 여러 군자(君子)가 조정에 가득해서 선비들이 모두 세탁 자수(洗濯自修)하는 때를 만났다. 이에 더욱 뜻을 세워 향학(向學)하면서 날마다 제공(諸公)과 함께 읍양(揖讓)하며 위로는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을 스승으로 아래로는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형제를 사귀며 공부하였다.
바야흐로 조정에서 탁용(擢用)하려고 하는데 기묘 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도(道)를 행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에 진취(進取)하려는 생각을 접고 물러나 자수(自守)하다가 나이 4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아버지 명에 따라 석갈(釋褐)하였다.
내외 열 여섯 관직을 거쳐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이르고 또 남양(南陽)과 춘천(春川) 수령으로 나가 두 고을 백성을 다스렸으며, 제일 나중에 괴산 군수(槐山郡守)와 여주 목사(驪州牧使)를 지냈는데, 수령을 지낸 것이 여덟 번이었다.
이르는 곳마다 공평하고 염근(廉謹)하여 서리(胥吏)들이 두려워하며 간사한 짓을 하지 못했는데, 공이 떠나게 되면 백성들이 아직도 사모하여 “그분은 우리를 잘 무휼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유애(遺愛)가 이러하였다. 춘추(春秋) 78세인 만력(萬曆) 3년(1575년 선조 8년) 12월 24일에 집에서 졸(卒)하였다.
공은 성품이 강엄(剛嚴)하고 침후(沈厚)하여 표리(表裏)가 완전히 갖추어졌다. 말이 간결하고 기욕(嗜欲)을 절제했으며 급할 때에도 반드시 위의(威儀)가 있었으며, 종일 용모를 엄숙 단정하게 하였다. ≪근사록(近思錄)≫ 및 ≪중용(中庸)≫ㆍ≪대학(大學)≫의 책을 좋아하여 일찍이 하루도 읽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늙을 때까지 그 공부를 조금도 폐하지 않았다.
행실은 혼자 있을 때 부끄럽지 않기에 힘썼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어 종신토록 비통해 하였고 판서공(判書公, 홍경림)을 삼가며 조심히 모셔 어긋남이 없자 판서공 역시 어질게 여겨 중시해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물었다.
정암이 죄를 얻어 저자에서 장(杖)을 맞게 되었는데, 당시 군간(權姦)이 바야흐로 정암에게 이빨을 갈고 있었다.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저들이 이때를 노려 그 노여움을 다 풀려고 하는데 어떻게 할 줄 모르겠다.”고 하였다. 공은 혼자서 후한 뇌물을 써서 옥졸(獄卒)의 독수(毒手)를 늦추어 권간들 뜻대로 되지 않게 하였다.
이를 말미암아서 정암이 즉시 죽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능성(綾城)에서 죽어 용인(龍仁)으로 반장(返葬)하기에 미쳐 공은 또 가서 슬피 곡(哭)을 하였다. 당시 시사(時事)가 급해서 선비들이 자신을 구하기에도 겨를이 없었는데, 누가 기꺼이 달려갔겠는가?
한번 발을 들어 함정(陷穽)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 경계하지 않음이 없는데, 곧장 정에 따라 의(義)를 폈으니, 아! 이를 어찌 쉽게 말할 수 있는가? 공의 지위가 덕(德)에 걸맞지 않은 것을 혹자는 병통으로 여기어 하늘을 원망하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세상에서 하늘을 논하는 자들은 혹 하늘이 아득하고 어두워서 믿을 것이 없다고 여기니, 대개 그 기필할 수 없는 것이 그러하다.
그러나 오복(五福)에서 수(壽)를 제일 먼저 드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가? 공의 나이 80세에 가까웠으니, 하늘이 선인(善人)에게 갚는 것이 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데, 어찌 벼슬을 말하는가? 벼슬이란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부인(夫人)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 박승약(朴承爚)의 손녀요 동부 주부(東部主簿) 박훈(朴薰)의 딸이다. 현숙하고 법도(法度)가 있었는데 공보다 먼저 졸(卒)하였으며, 졸한 29년 후에 공이 졸하여 부인의 묘에 합부(合祔)하였는데, 묘(墓)는 광주(廣州) 치소(治所) 남쪽 30리 되는 호동(狐洞) 언덕에 있다.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홍준(洪準)은 일찍 죽고 아들 하나가 있으니 바로 홍백순(洪百順)이다. 딸은 광흥창 수(廣興倉守) 성호문(成好問)에게 출가해서 2남 4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성희순(成希舜)이요, 차남 성희익(成希益)은 군수(郡守)이며, 장녀는 민여충(閔汝忠)에게, 다음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수(金睟)에게, 다음은 신노(申櫓)에게, 다음은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윤승훈(尹承勳)에게 출가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말의 흠결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위 무공(衛武公)이 90세에 시를 지었네.1)
이 어찌 늙어갈수록 더욱 자신을 다스린 게 아닌가?
그는 예성(睿聖)이니 마땅히 그러함이 있었네.
우뚝한 홍공은 훌륭한 스승 얻어서 늙어서도 수행에 부지런했는데,
평생 지킨 대요(大要)는 자신을 속이지 않은 것이니 은미(隱微)하다고 말하지 말라.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도다.
기색이 엄숙 장엄하여 해이함이 없었고 시청(視聽)과 언동(言動)을 신중하게 했네.
성현의 책을 보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 의심하지 않았네.
칠순을 넘겨 팔순을 바라보니 뉘 쇠퇴하지 않으랴만,
부지런히 이처럼 게으르지 않았네.
저 기수(淇水) 모퉁이를 보니 푸른 대나무 아름답게 무성한데,
덕행(德行)과 학문(學文) 닦는 것 한가지 규례(規例)이네.
벼슬에서 포부 다 펴지 못한 것 슬프지만,
자신에 간직한 것 조금도 훼손하지 않았네.
현손(賢孫)이 가업(家業)을 이어 떨어뜨리지 않아
잠덕(潛德)을 드러내려고 비명(碑銘)을 구하는데,
어떻게 큰 비석에 새길 것인가?
[각주]
1) 춘추 시대(春秋時代) 위 무공(衛武公)이 90세에 “흰 옥의 흠은 갈아 없앨 수가 있으나 말에 허물이 있으면 어떻게 해볼 수 없네.[白圭
之玷尙可磨也 斯言之玷不可爲也]”라는 시를 지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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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故掌隷院判決事洪公墓碑
不肖自有知, 先君子恒語不肖, 近世賢者, 莫賢故判決事洪公。 不肖其時尙少也, 然於心固已志洪公之賢矣。 其後三十年, 公之孫百順, 始采公終始事蹟焯焯不可昧者若干條, 屬余以墓石之銘曰: “自吾祖葬于是, 吾手植松柏於其側, 樹今拱矣。 顧神道之文, 尙未具也。 吾安所逃其責? 雖然, 其亦有待矣, 願子之留意於斯也。” 余謝非其人, 自惟不才, 安得道長者之行? 又自惟先君子所稱之勤, 及不肖所聞之熟且久, 蓋非偶然者, 亦有不可得以辭者矣。 遂敍其本末, 而刻于碑曰:
公諱奉世, 字欽仲, 南陽人也。 曾祖諱淀, 原州判官; 祖諱任, 知中樞府事。 父諱景霖, 工曹判書, 中宗時, 用靖國功封益原君。 母咸陽呂氏。
始公以世家子弟, 挾天質之美, 適遇國家文明, 衆君子滿朝, 士莫不洗濯自修。 於是益刻意向學, 日與諸公揖讓, 上師靜菴, 下交聽松兄弟, 磨礱事業。 方欲致其用於朝廷, 旣而罹己卯之禍, 道否不可有爲。 於是乃絶意進取, 退而自守其身。 年四十餘, 始以父命釋褐, 歷內外十六官, 至掌隷院判決事。 又出而治春川、南陽兩府之民, 最後爲槐山郡守、驪州牧使, 凡爲守令者八。 所至公平廉謹, 吏畏戢不敢爲姦, 旣去, 民猶思之曰: “是善撫我。” 其遺愛如此。 春秋七十八, 以萬曆三年十二月二十四日卒于家。
公剛嚴沈厚, 表裏完備。 簡言語節嗜欲, 造次必有威儀, 終日不見其不肅括容也。 篤好《近思錄》及《中庸》、《大學》之書, 未嘗一日不讀, 至老不少廢其功。 其行以不愧屋漏爲務, 自以早失所恃, 終身貯悲痛之心。 事判書公, 謹謹無違, 判書公亦賢而重之, 遇事必問於公。 靜菴之得罪, 當受杖于市, 時權姦方切齒於靜菴, 議者謂乘時必盡售其怒, 顧無如之何。 公獨以厚賂弛獄卒之毒手, 俾不得盡如權姦意。 由是靜菴得不卽死, 及死于綾城, 歸葬於龍仁, 公又往哭盡哀。 當是時物色急, 士不暇自救, 孰肯以其身赴之? 一擧足陷穽, 恐懼靡不戒, 乃能直情而伸義, 嗚呼! 是豈可以易言哉? 公位不稱德, 或者病焉, 不能不致憾於天。 以故世之論天者, 或以天茫昧不足恃, 蓋以其不可必者如是也。 然獨不思五福先言壽乎? 公年幾八十, 則天之所以報施善人者, 亦不可謂不厚矣, 何事於爵? 夫爵者自外而至者也。
夫人密陽朴氏, 議政府檢詳諱承爚之孫, 東部主簿諱薰之女。 賢有法度, 先公卒, 卒二十有九年。 公又卒, 祔于夫人墓, 墓在廣州治南三十里狐洞之原。 生一男一女: 男曰凖, 早卒, 有子一人, 卽百順。 女適廣興倉守成好問, 生二男四女: 長希順; 次希益, 郡守。 女長適閔汝忠, 次適判中樞府事金睟, 次適申櫓, 次適議政府領議政尹承勳。 銘曰:
斯言之玷不可爲, 衛武九十作厥詩。 是何耄期愈自治? 其曰睿聖宜有之。 卓哉洪公能得師! 旣老修行亦孶孶。 平生大要毋自欺, 莫謂隱微人已知。 色莊氣肅無弛時, 視聽言動愼其儀。 聖賢之書不停披, 朝聞夕死復奚疑? 踰七望八孰非衰? 勤勤不倦乃如斯。 瞻彼淇澳竹猗猗, 切磋琢磨同一規。 不究於官其可悲, 存乎己者少無虧。 賢孫承家業不隳, 欲發潛德求文辭, 何以刻之有豐碑?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