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특집 / 동성애 쓰나미로 다음세대 무너진다!
동성애, 한국은 어디까지 왔을까?
지난 6월 28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제16회 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행사는 동성애자를 비롯해 성(性)소수자들(경찰추산 7000여명)이 참석했다. 미국 대법원이 모든 주에서 동성결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오면서 성소수자들은 한껏 고무된 시기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메르스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청와대와 대립각을 세웠지만, 많은 군중이 몰리는 퀴어문화축제는 허용했다. 박 시장은 작년 10월 방미(訪美)했던 당시 인터뷰 도중에 동성애를 언급했다. 기자가 "대만이 아시아 최초로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국가가 될 듯하다"고 말하자, 박 시장은 "한국이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아시아의) 첫 국가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박원순 시장은 시민운동가 출신 대권주자 정치가로 동성애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만큼 동성애를 인정하는 유권자의 시류를 읽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국민일보>를 제외한 모든 언론들이 동성애 찬동 일색이다. 동성애는 더 이상 성적소수자들이 아니다.
2001년 9월 홍석천이 커밍아웃을 했다가 방송에서 도중하차했다. 2002년 12월 하리수의 성전환수술 공개 이후 커밍아웃이 한국에도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홍석천과 하리수는 이후 인기 있는 연예인과 유명인사가 되었다.
2009년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 ‘커밍아웃 정치인’ 최현숙 씨는 “많은 성소수자들이 직장 내에서 당당하게 커밍아웃하지 못하고 있다”며 “성 전환자 같은 성소수자들을 노동현장에서 이성애자들과 똑같이 대우하는 ‘퀴어한 노동권’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영화감독 김조광수 씨가 김승환 씨와 2013년 9월 청계천 광통교 앞에서 공개적으로 동성결혼식을 올렸다. 그해 12월 서대문구가 "동성 간 혼인은 민법에서 일컫는 부부로서의 합의로 볼 수 없다"며 자신들의 혼인신고를 수리하지 않자 "민법 어디에도 동성 간 혼인금지 조항이 없다"고 주장하며 서부지법에 불복신청을 냈다.
올해 들어서도 3차례나 기일이 변경되는 우여곡절 끝에 7월 6일 첫 심리가 열렸고, 심리를 마치고 나온 김조광수 감독은 재판부가 신청을 받아줄 것을 눈물로 호소하기도 했다.
지난 5월 23일 서울 인권재단 다목적 홀에서 창원문성대학교 간호과 교수 여기동(52) 씨와 찰스 카야사(44)가 결혼을 했다. 그들이 인연을 맺은 건 지난해 12월 8일. 여 씨가 카야사 씨에게 영어 통역을 해주면서 알게 됐다.
서울에 살던 여 씨는 창원문성대학 간호과 교수로 일하면서 창원에 둥지를 틀었다. 현재는 경남장애인권리옹호네트워크 활동가다. 필리핀 출신인 카야사 씨는 지난 2005년 돈을 벌고자 한국에 왔다. 엄격히 말하면 여 씨는 동성애자고 카야사 씨는 양성애자다.
여 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동성인 축구부 선수를 보고 가슴이 뛰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알게 됐다. 카야사 씨는 12살 때 성 정체성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엄격한 집안 분위기 탓에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숨겨오다 대학생 때 커밍아웃을 했다.
부부는 서로 협력자, 동반자이기에 함께 살아가고, 사랑하고, 성장하려고 결혼을 선택했다. 미국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동성결혼을 인정하는 추세지만 한국은 아직 합법화가 안 됐다.
여 씨는 "화가 많이 난다. 왜냐면 동성애자는 국민의 의무인 세금도 내고 군대도 가고 자기 역할을 다한다. 하지만 반대로 권리가 동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혼인 신고서를 내고 법적 다툼을 하고 싶었지만 남편인 찰스가 현재 미등록 이주노동자라 피해를 볼 수 있어 내년 4월쯤 필리핀으로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인터뷰 당일, 부부는 커플 티를 입고 동성애 운동의 상징인 무지개 색 배지를 달았다. 부부는 "동성애자의 권리를 지지하고 옹호를 확산하고자 이렇게 인터뷰를 한다. 사랑은 단순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곧 나의 파트너이고 삶의 동반자이다. 그리고 사랑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건 사회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라고 강조했다.
(경남도민일보 2015년 7월 24일 김민지 기자 요약)
레즈비언 크리스 목사
크리스 목사(47). 10일 서울 서대문의 한 카페. 그는 매우 떨리는 마음으로 인터뷰에 나왔다고 말했다. 자신이 동성애자이고 더욱이 목사라는, 일반인들이 보기엔 ‘모순적인’ 정체성을 세상에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모종의 소명 의식을 가지고 나온 것처럼 보였다.
그는 딸 셋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여자아이들과 잘 놀지 못했다. 여자들의 놀이는 격렬함이 없고 승리감이 덜했기 때문이다. 대신 여자들과 있으면 편했고 안전함을 느꼈다.
“내가 다르다는 건 어렸을 적부터 알고 있었지만,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꾹 눌렀지요. 목회자의 길을 걸으면서 성 정체성을 밝히는 것은 자살행위였으니까요.”
독실한 보수 기독교단의 신자였던 그는 10년 가까이 목회자의 외길을 걸었다. 1991년 국내의 유명 신학대를 다니며 교육전도사로 일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복음주의 계열 신학대학원을 졸업했고, 미국 교단과 미국 내 한국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숙제는 괴물처럼 버티고 있었다. 그는 외면했다. 남자도 여자도 사귀지 않았다. 에이즈에 걸린 한 동성애 기독교인이 병을 딛고 일어서면서 “예수께서 에이즈를 고쳐주셨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커밍아웃’의 계기는 미국의 한 병원에서 원목(병원 목사)을 하던 중 찾아왔다. 환자들과 교우하고, 죽음을 앞둔 이들과 기도하고, 그의 죽음을 가족들에게 알리는 일이었다. 그는 다른 목회자들과 병원 목회교육의 일종인 ‘임상목회교육’(CPE)을 받았다. 교육과정의 첫 단계는 ‘자기 개방’ 훈련이었다.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솔직히 드러내는 일이었다.
“이 숙제를 풀지 않고서는 온전한 크리스천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용기를 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대대적으로 나의 성적 지향에 대해 ‘커밍아웃’ 했습니다.”
미국교회도 보수주의가 우세해 동성애를 금기시한다. 그가 속한 교단에서도 ‘동성애 목회자 허용 건’이 총회에 올라오자, ‘차라리 내가 목사직을 버리겠다’며 일부 목사가 반발해 부결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당장 파장은 크지 않았다. 교육을 마치고 한 어린이병원의 목사로 부임했다. 커밍아웃을 하니 평안해졌다. 하나님과의 불일치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차츰 알아갈 교단 목사들을 생각하니 암담해졌다. 1년 반 동안 고민했다. 15년 만에 미국생활을 접었다.
귀국 1년 만에 한 대형병원에서 원목으로 와달라는 제안이 왔다. 신부와 목사 등이 모여 병원 환자들을 상담하고 돌보는 일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과거와 달리 나에겐 성적 취향을 숨기지 않는 원칙이 있었어요. 이 일을 책임진 신부님께 ‘나는 동성애자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신부님은 ‘개인적인 성향이니 괜찮다. 그걸 전제로 일하지만 않는다면 받아들이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던 중 신부님께 ‘미안하다.
경영진이 결격사유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지요. 정말 힘들구나, 과연 목회자로서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있을까? 두려웠습니다.”
목회의 꿈을 깨끗이 포기한 걸까?
“목회를 완전히 접은 건가요?” 여러 번 물었다.
“목회는 내가 선택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신학교를 간 거고, 뭔지는 모르지만 (성 정체성도) 내가 고른 게 아니에요. 나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목사라는 직업을 통해서 나를 찾고 싶었던 거예요.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았지만요.”
크리스 목사는 그 뒤 한 시민단체에서 일한다. 현재 자신의 일도 목사의 소명처럼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크리스 목사는 ‘성경 무오설’에 갇힌 보수 기독교계가 성경을 열린 시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성경 무오설은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영감으로 인간에 의해 써졌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는 이론이다. 크리스는 오히려 여성, 민중, 동성애자 등 주체에 따라 성경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고 말한다.
“성경은 (시대적 한계에 처한) 사람이 썼습니다. 사람이 썼지만 또 (주류의) 남성이 썼고요. 성경의 역사·문화적 배경은 그 시대의 것을 내포합니다.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몇몇 구절을 가지고 동성애자를 부정하게 보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기독교 내 성소수자 문제는 세계 기독교계의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에서는 동성애를 죄로 보고 종교적 해결을 시도하는 목회자들이 있는 반면 이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성경을 새롭게 읽어내는 성소수자 교회도 있다.
국내에서는 2003년 청소년 동성애자인 육우당 씨가 ‘난 천주교를 사랑합니다’라고 유서에 남기고 자살한 사건이 이를 고민하는 목회자들에게 충격을 줬다. 국내에서도 기독교 내 성소수자 문제가 부각된 것이다.
2007년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인연대’가 설립돼 성소수자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고, 성소수자들이 모이는 교회도 생겼다. ⋯
크리스 목사는 교회 내에 동성애 담론 자체가 토론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교회 안에 성적 지향 때문에 고민하는 청소년들이 많은데도, 한국교회는 동성애 담론이 나올 때마다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안 된다고 문을 닫아버립니다. 청소년들은 절망에 빠지고 때론 자살에 이르지요.” (한겨례신문 2013. 4. 12 남종영 기자 발췌부분)
(생략) 9월호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