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운곡서원(雲谷書院) 400년 은행나무
2024.11.3(일) 경주 동대봉산 무장봉(624m) 암곡탐방로 억새산행 및 도리마을 은행나무숲 탐방후
오늘의 경주 마지막 일정으로 수령 400년 은행나무로 유명한 운곡서원을 찾는다.
운곡서원은 정조 8년(1784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 고려태사(高麗太師) 권행(權幸)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추원사(追遠祠)를 세우고 위패를 모시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 1403~1456)와 구봉(龜峰) 권덕린(權德麟, 1529~1573)을 추가 배향하였고
운곡서원으로 개편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고종 5년(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으나 1930년 유허지(遺墟址)에 설단(設壇)하여 향사를 지냈으며
1976년에 신라 밀곡사(密谷寺) 터로 추정되는 경주시 강동면 왕신리 청수골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경덕사(景德祠), 신문(神門), 5칸의 중정당(中正堂), 각 1칸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외삼문(外三門), 6칸의 유연정(悠然亭), 주소(厨所) 등이 있다.
묘우인 경덕사(景德祠)에는 권행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동무에는 권산해, 서무에는 권덕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중정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고 매년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에 향사를 지낸다.
동·서재와 유연정은 유생들이 수학하며 거처하는 곳이고 전사청은 향사 때 제수를 마련하여두는 곳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초정(初丁 : 첫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유물로는『태사실기(太師實記)』·『죽림실기(竹林實記)』·『구봉집(龜峰集)』·『효경(孝經)』·『두고세고(杜皋世稿)』 등의
목판과 문집 약간권이 소장되어 있고 재산으로는 전답 7,000평, 임야 84정보 등이 있다.
16:30 운공서원에 도착하여 약 30여분간 수령 400년의 은행나무 명소인 운곡서원을 둘러본다.
雲谷書院 入口 표시석
주차장의 은행나무
운곡서원 안내도
유연정 앞쪽의 노거수 은행나무 한 그루
수령 330년(1982.10.29. 보호수 지정)
유연정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으로 좌측 칸을 통간(通間)의 우물마루로 꾸며져 있다.
이 정자는 용추계곡과 노거수 은행나무 등 주변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1800년대 초기의 건축 수법을 보여준다.
'유연정(悠然亭)'이란 정자 이름은 도연명(陶淵明)의 시 <음주(飮酒)>에서 따왔다.
음주(飮酒) - 도연명(陶淵明)
초가를 지어 마을에 살고 있으니 /結廬在人境
수레의 시끄러움도 없네 /而無車馬暄
묻노니 그대는 어찌해 그럴 수 있는가 /問君何能爾
마음이 머니 땅이 절로 외지구나 /心遠地自偏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따다가 /採菊東籬下
고요히 남산을 바라보네 /悠然見南山
산의 기운 저녁이라 아름다운데 /山氣日夕佳
나는 새들도 서로 짝지어 돌아가네 /飛鳥相與還
이런 속에 참된 뜻 들어 있으니 /此中有眞意
말로 표현하고자 해도 이미 말을 잊었네 /慾辨已忘言
유연정(悠然亭)은 운곡서원의 부속 건물로, 서원에서 남쪽으로 80m쯤 떨어져 있으며
이 정자는 순조 11년(1811년)에 용추계곡의 용추대 위에 세워졌다.
안동권씨 시조인 권행(權幸)과 그의 후손 권산해(權山海), 권덕린(權德麟)을 추모하여 세워졌다.
노거수 은행나무
유연정 앞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1,100여 년 된 영주 순흥(順興) 압각수(鴨脚樹)의 자손이라고 한다.
압각수는 은행나무의 잎이 오리발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순흥(順興) 객사 뜰에 있던 압각수(鴨脚樹)가 단종 원년(1452년)에 갑자기 말라 죽었다.
그때 점쟁이가 말하기를 "압각수가 다시 살아나면 순흥이 복향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유배 중이던 금성대군이 순흥에서 조카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순흥은 폐향되어 풍기군의 속현이 되었습니다.
240여 년이 지난 숙종 때 말라죽은 압각수에 생기가 돌고 나무가 살아나서 큰 숲을 이루었다.
그 후 순흥이 복향되었고 2년 뒤에 단종의 왕호도 회복되었고 사육신도 복권되었고 압각수 아래에 금성단(錦城壇)이 만들어졌다.
권산해는 조선시대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으로 있다가 단종이 귀양을 가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세조가 몇 차례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고 이후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탄로 나자 이 일에 연루되어 투신자살하였다.
갈산(葛山) 권종락(權宗洛, 1745~1819)은 단종 때 죽은 충신들이 모두 복권되고 증직이 되었지만
자신의 12대조인 권산해만 누락된 것을 억울하게 여겨 정조 13년(1789년)에 정조가 거동할 때
임금의 수레 아래 엎드려 눈물로 호소하여 이에 권산해는 복직되었고 금성단에 배향되었다.
갈산 권종락은 서울서 돌아오는 길에 순흥 금성단에 들러 압각수 큰 가지 하나를 가지고 와
그 가지를 심어 자란 나무가 지금의 은행나무라고 한다.
수령 : 330년. 높이 : 30m. 가슴높이 둘레 : 5.3m.
소재지: 경북 경주시 강동면 왕신리 314
<11월 중순경 운곡서원의 은행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