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향(蘭香)의 인연(因緣)
실로 32년 만에 연락이 닿아 통화를 하였다. 서로가 너무 반가워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 하고 있는 일이 마무리되는 데로 곧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그동안 연락처를 알기 위해 수소문한지 몇 년 만에 소재를 찾으니 감개무량하였다.
나 보다는 6살이 많은 선배로 일찍이 선친께서 소개를 해 주셨다. 그가 곧 난초 박사로 유명한 「이 종석」 박사이다. 이 교수는 제주 대학에서 근무하면서 한라산이 원산지인 『한란』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대규모의 배양방법을 성공시켜 제주 농가 소득을 증대시킨 바가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난초 전문 원예학자이다. 나중에 서울여대로 근무처를 옮겨 그곳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도 광릉수목원에서 연구 활동을 계속하여 업적을 세운 토종 식물학자이다.
선친은 이 교수가 전북대에 교환교수로 오게 되면서 상면하셨다. 이 교수님의 조부님은 한말의 문장가로 유명하신 유학자 「석정(石亭) 이정직(李程稷)」 선생으로 선친께서 그분이 남기신 글을 완역하여 세상에 빛을 보게 한 인연이 있었다.원래 선친께서 「매천(梅泉) 황현(黃玹)」에 대한 시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으셨는데 「매천」과 「석정」은 매우 돈독하게 지낸 친구 그 이상의 사이였다. 선친은 자연스럽게 「석정」에 대한 관심을 경주하여 그의 유고를 발굴하고, 『소여록(燒餘錄)』을 번역하여 세상에 알린 인연으로 이 교수와 교류하게 된 것이다.
「석정」은 서예에 조예가 깊어 해서는 구양순체, 행서는 미불체와 동기창체, 비갈명은 안진경체를 많이 썼고, 특히 해서와 행서에 매우 뛰어났다. 그림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순수 묵화로 사군자를 많이 그렸고, 괴석·산수·수목·조류·어류를 소재로 한 그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특히 「괴석도」는 필법이 매우 특이하여 당대의 으뜸으로 꼽을 만하다. 차후에 조주승(趙周승), 송기면(宋基冕)등 그의 제자들이 서예와 그림 분야에서 탁월한 인물로 성장하였다.
이 교수와는 내가 서울에 근무하던 1989년도부터 종종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선친의 소개를 받고 서울여대의 연구실로 찾아가 알고 지내게 되었다. 이 교수 역시 내게 본인의 난초 관련한 저서와 아끼던 화분 중에서 두, 세 개 가량을 선물로 주었다. 화분을 키우다가 문제가 생기면 바로 찾아가 해결책을 배우면서 난초에 대한 상식을 넓혀 나가게 되었다. 이 교수는 일찍 내게 이르기를 절대로 돈을 주고 난초를 구입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당시는 난 재배에 대한 광풍이 불던 시기로 유명산지는 무분별한 채취로 몸살을 알았다. 그러나 근무지를 따라 유랑하다보니 한동안 서로 잊고 지내게 된 것이다.
난초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청아(淸雅)한 곳에서 다소곳이 앉아 그 자태를 보일 듯 말듯하며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인이 떠오른다. 어쩌면 각박한 생활 속에서도 마치 풀이파리 같은 두, 세 촉의 난초화분은 은은하게도 그 집 주인의 품위와 위상을 표현하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원래 심산유곡에서 비와 이슬을 머금고 살면서 항간(巷間)에 찌든 미진(微塵)과는 아예 가까이 하지 않고 속기(俗氣)와는 자못 거리가 먼 데서 살고 있는 사군자(四君子) 중에서도 으뜸가는 고고(孤高)한 난을 기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또한 예부터 난초를 가꾸는 일은 부와 고귀함을 상징하는 일이기도 했다. 더구나 난초는 세련미와 완벽한 절제감, 그리고 우아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옛 선비들이 중국 복건성이 원산지인 건란(健蘭)을 주로 가까이 했는데 죽죽 곧게 벋은 이파리가 마치 절조를 상징하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제주도가 원산지인 「한란」은 「추사」가 제주도의 대정으로 유배를 갔을 때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중국 난초 못지않게 기품이 있는 「한란」을 발견하고 키우던 「추사」의 기쁨이 대단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동양란 중 에서도 우리 토종의 「춘란」이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 춘란 역시 꽃을 감상하는 화예품(花兿品)과 잎무늬를 감상하는 엽예품(葉兿品)으로 구분하는데 특이한 종은 상당한 고가이다.
선친은 처녀 시집인 『석류초(石榴抄)』의 서문에 「신석정」시인과 나눈 난초를 키우는 네 가지 방법에 대해 강조하시길, “춘불풍(春不風), 하불일(夏不日), 추불건(秋不乾), 동불습(冬不濕)이라서 봄바람 여름 볕도 피해야지만, 가을에 너무 말리거나 겨울에 습해도 싫어하고 사철 직사광선은 물론 피해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에 「신석정」 시인은 “「완당 김정희」의 『사난결(寫蘭訣)』을 보면 생동하는 난을 만에 비유하여, 구천구백구십구분(九天九百九十九分)까지는 노력으로 얻을 수 있으나 그 나머지 일분(一分)은 노력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고 강조하셨다. 물론 인생살이 전체가 사람의 노력으로 완성할 수 없는 어떤 경지가 있는 법이니 매사에 겸손하고 보이지 않는 신의 섭리(攝理)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씀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교수의 두 세분의 화분에 안분지족(安分知足) 하라는 충고를 듣지 않고 점점 화분을 늘려가는 데 신경을 쓰게 되었다.
틈나는 데로 구파발에 있는 화훼단지에 들러 새로운 품종을 찾아 발품을 팔았다. 꽃의 색깔이 미묘하게 변화하는 화예품으로 소심란(素心蘭)과 기화(寄花) 등이 있었고, 엽예품으로는 귀중한 중투(中透)를 비롯하여, 복륜(覆輪), 호(缟), 호피(虎皮), 사피(蛇皮), 복륜호(覆輪縞), 등등의 난초들이 늘어나 60여개까지 늘어가면서 점점 난초의 노예가 되어 갔다.
어느 시점에서는 늘리기를 중지하고 자체 증식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아파트 구조상 여러 가지로 제약이 있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난초를 키우는데 있어서 통풍과 온도, 습도 및 물주기가 보통 까다로운 것이 아닌데 대부분 아파트의 주거시설은 이를 제대로 조절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온갖 주의를 기울여 부족하지만 잘 가꾸어 나가다가 사단이 나고 말았다. 마침 온 가족이 집을 떠난 1994년도 겨울에 갑자기 한파가 급습하여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그만 냉해를 입어 시름시름 앓다가 하나, 둘씩 사라지게 되었다. 그 아픔이야 참으로 컸지만 욕심이 화근이 되었으니 스스로를 책망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두 서너 개의 화분이면 충분하다는 이 교수의 선견지명이 옳았음이 판명된 것이다.
이런 추억을 되새겨 보면서 곧 이 교수와 만난다. 일단 전화로나마 나눈 선양사업과 도서 처리 문제 등을 상의할 예정이다. 선대가 물려주신 무형의 정신적인 영향으로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자리를 함께하게 되니 참으로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근년에 들어 궁금하게 여기던 3~4 명과 소통이 되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아무쪼록 나의 후대에서도 세교(世交)의 전통이 이어지길 바라며 여력이 닿는 데로 그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할 것이다.
(2022. 10. 3.작성/ 10. 12.발표)
첫댓글 남당의 글을 읽으며 세교를 통해 금란지계를 이루고 계시는 것을 봅니다.ㅡ쇠처럼 단단하고 난초 향기처럼 그윽한 사귐, 사이 좋은 벗끼리 마음을 합치면 단단한 쇠도 자를 수 있고 우정의 아름다움은 난의 향기와 같이 아주 친밀한 친구ㅡ 옛 인연을 찾고 이어가는 모습이 참 좋습니다.
蘭香萬里라는 말이 있듯이 남당의 깊고 오랜 친교가 널리널리 향기롭게 퍼지는 듯합니다.
더불어 청아한 난향이 가득한 곳에서 그 향기에 흠뻑 취하는 薰浴을 한 것도 같습니다.
1980년대 한때 난초에 빠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법정스님께서 난초 키우는 일이 너무나 마음이 쓰이기에 텅빈 충만을 위하여 난초 키우기를 포기한 것처럼 나 역시 내 정성으로는 어렵단 판단 아래 두손을 들었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동창에 두고 알뜰살뜰해야 한다는 난 키우기에 대한 미련이 없지 않습니다. 남당의 고아한 난초지교를 잘 이어나가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아도 적어도 순우만큼은 관심이 있을것으로 여겼는데 틀림없는 사실이니 반갑네요. 사실 어느면에서는 마음과 생활의 여유가 병행되어야 제대로 몰입하게 되지요. 더구나 좀 기온의 변화가 심한 곳은 생육의 제한도 있어 까다로운 식물입니다. 나래실 한 켠에 따뜻한 온실을 만들어 다시 시작하는 것도 좋을듯 합니다만, 너무 전문적으로는 손대지 마시길!
살다 보니 어찌 어찌하다 난이 몇 생겼었는데, 정성이 부족하여 모두 사라지고 만 경험을 저도 하였습니다.
사람이나 난이나 정성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난향이 여기까지....바람에 날려오는 것 같군요. 향기로운 우정 계속되길 바랍니다
난향이 여기까지....바람에 날려오는 것 같군요. 향기로운 우정 계속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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