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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꽃 필 무렵
李 星 圭
1969년도 경부고속도로 건설당시
천안~신사리간 토공 주감독관
현재 7.7회 국방부 간사 겸 총무
전쟁 아닌 전쟁-공사감독관의 업무
언제 피었는지 내가 앉은 야산 끝자락에서 산기슭을 따라 진달래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정신없이 공사현장을 뛰어다니다 보니 언제 진달래꽃이 피었는지도 몰랐다. 내가 걸터앉은 논두렁을 따라 무더기무더기 탐스럽게 피어난 진달래가 마치 자기를 봐달라는 듯 활짝 웃고 있었다. 앞산에서는 마침 뻐꾸기 소리도 들려왔다.
참으로 나에게는 한가롭고 평화스러운 한 瞬間이었다. 누구도 대신 경험해 주지 못할 나만의 유토피아 같은 時間, 그 속에서 나는 잠시나마 大自然 속에 흐뭇하게 안겨 幸福감에 젖어 들었다.
때는 1969년 꽃피는 봄!
지금의 독립기념관 인터체인지 입구 교량(천안서 청원군 속창리간 지방도 육교로 고속도로 밑으로 시공 중이었음) 공사가 한창하고 있었다. 그런데 골재 규격이 맞지 않아 삼환기업 시공회사 현장 소장에게 시정을 요구한 후 콘크리트 타설을 중지시켰다. 骨材와 戰爭을 치른 후 잠시 休戰 狀態에서 마음을 비우고 나니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진달래꽃이 그제야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때 이 한림 건설부 장관 보좌관을 하고 그 후 일찍 병사한 윤종용 선배(육사 #17기)의 뒤를 이어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건설공사 구간 중 천안공구 사무소의 천안-신사리 구간 건설공사 주감독관을 맡았다. 한 해 겨울을 지내고 날씨가 풀리면서 토공과 암거 및 소교량 공사 등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막상 교량 상부 콘크리트 타설을 하려고 하니 骨材 規格(#467)이 不合格으로 나와 시공을 못 하고 中斷시켰다. 얼마 전 신탄진 PC빔 제작 현장에 가서 콘크리트 강도를 확인하고 잭킹(Jacking)까지 완료, 현장에 필요한 PC빔을 운반하여 상부 구조식 거푸집을 조립했는데, 콘크리트타설 직전에 골재 규격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공정에 맞추어 공사도 빨리 해야 하겠지만 품질도 철저히 관리해야하므로 즉시 공사를 중단시켰다. 그리고 골재를 재 반입하던가 골재 입도가 맞게끔 필요한 조치를 하도록 지시했다. 그 과정에서 시공회사 관계자들과 언쟁이 벌어지고 몸싸움까지 불사해야 했다.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다 보니 공사 감독관이라는 업무는 마치 戰爭 아닌 戰爭을 치르는 전투와 같았다.
그날도 한바탕하고 나서 나의 本來의 모습 즉 ‘高速道路 監督官’이 아닌 ‘하나의 人間’으로 잠시 돌아왔더니 앞산에서 우는 뻐꾸기 소리가 들리고 앉아 있는 산기슭을 따라 활짝 핀 진달래꽃이 처음 으로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목슴을 위협받은 위기일발의 상황
한해 전 겨울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고속도로 건설을 조금이라도 빨리 완공하기 위하여 겨울에도 날씨만 좋으면 구조물 공사를 했다. 하루는 암거(통로)공사를 晝夜로 강행하고 있을 때였다. 지금은 레미콘 트럭을 활용하여 콘크리트를 타설 하지만 그 당시는 기계식 믹서를 1-2대를 준비하여 주로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작업을 하였으며 믹서의 용량이 부족하여 통상 야간작업까지 하였다. 또한 믹서가 고장이 나면 손비빔을 해오곤 했다. 저녁을 먹고 밤 10시경 현장에 우리 감독팀 3명이 도착해 보니 타설중인 콘크리트의 슬럼프(slump)치가 너무 맞지 않아 즉시 믹서작업을 중지시켰다. 그 당시 상황은 콘크리트 인부 30여명이 아침 새벽부터 믹서 1대로 계속 콘크리트작업을 하여 피곤도 하고 짜증도 나는 가운데 그 동안 일한 임금(당시 현장에서는 15일 간격으로 간조라 하여 노임을 주었다)도 못 받고 힘든 일만 하고 있어 불만이 막 폭발하려고 할 때였다. 우리 감독관의 중지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약속이나 하듯이 콘크리트용 삽(오삽)을 들고 완장을 찬 3명의 감독관들을 뺑 둘러싸고 그 칼날 같은 콘크리트 삽으로 당장이라도 내려치려고 하는 위기일발의 긴박한 상황이 벌어졌다. 일꾼들은 자기들의 什長 命令에 따라 群衆心理로 行動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危機狀況을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하고 머리를 번개처럼 움직여 보았으나 뾰족한 수가 없어 나는 우리 감독관들을 둘러싼 인부들 중 그래도 나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을 골라 한방에 넘어뜨리고 三十六計를 놓을 覺悟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인부들과 대화로 풀려고 회유작전을 하면서 긴장의 순간이 흘러갔다. 그런 가운데 좀 시간이 지났을 때 어둠 속에서 많은 인부 중에 한사람이 난동 두목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감독관들은 죄가 없으니 놔줍시다. 그래야 나중에 노임이라도 받게 해줄게 아니오!”라고 외치자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던 포위망이 느슨해지는 감을 느끼는 순간 어둠 속 恐怖의 包圍網에서 얼른 빠져 나와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2km이상 떨어진 감독관 사무실에가 도움을 청하고 경찰에도 알려 후속 조치를 하도록 했다. 하마터면 죽을 뻔한 現場監督 하루 일과에 대한 한 斷面이었다.
現場監督官은 아무리 현장 조건이 어렵다고 하여도 맡은 임무와 책임을 완수하기 위하여 不撤晝夜 자기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自己自身의 存在까지도 망각하고 현장을 東奔西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면 진달래꽃도 앞산의 뻐꾸기 소리는 나와는 아주 거리가 먼 것으로 인식되어지기 때문에 진달래꽃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고 뻐꾸기 소리도 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精神一到 何事不成“이란 우리 옛말처럼 누구나 어떤 일을 오직 다른 것은 다 잊고 한 가지만 하겠다는 精神的 肉體的 渾身의 努力으로 자기가 목표로 한 목적에만 精進한다면 그 목표는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나로 하여금 실감하게 한 하나의 事件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나는 나를 잊고 오직 고속도로 건설 공사에만 전념 할 수 있었던 정말로 경험하기 어려운 體驗을 했던 것이었다. 31년이 지난 지금 젊은 나이(당시 28살)에 그런 엄청난 일을 해 낼 수 있었는지 참으로 신기하기 짝이 없다.
또 나에게는 믿을 수 없는 이런 일도 있었다. 노체 시공중 논, 수렁 등과 같은 軟弱地盤이 많아 자연지반을 제거(clearing)하고 그 위에 성토하도록 示方書에 명기되어 있어 시방서대로 시행하다 보니 1층 다짐 성토가 30cm로서는 계속 스폰치 현상만 나타나 다짐은 고사하고 성토 작업조차도 할 수 없어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장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일본서적을 겨우 구입하여 圖解와 漢字의 뜻만을 가지고 내 나름대로 해석하여 가면서 軟弱地盤을 盛土해 나갔다. 때로는 천안공구소장이신 주낙영 선배님(육사#12)을 아침 일찍 찾아가 그 해답을 받아 오기도 했지만 그래도 현장 여건이 理論과 달라 解決하기는 힘이 들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노력하고 있던 어느 날 신기하게도 꿈에서 ‘내가 원하는 解答’을 알려주어 軟弱地盤 盛土作業을 成功的으로 解決할 수 있었다.
품질과의 전쟁-공사감독관의 업무
現場 施工은 언제나 原則(표준시방서)과 現實間에 乖離로 뒤범벅이 되어 때로는 나를 괴롭혀 왔는데 공사를 감독하는 입장과 시공자 사이의 간격은 좀처럼 좁혀지지가 아니했다. 특히 내가 나이가 젊고 보니 회사의 젊은 기사들과의 계속되는 시공 상의 견해 차이는 튼튼한 고속도로를 만들겠다는 나의 굳은 의지를 흔들었으니, 점점 더 표준시방서에 의한 기본적인 原則만을 主張하다 보니 내 마음의 갈등은 심화되어 가끔 술로 답답함을 달래기도 하는 일이 많았다. 國家의 百年大計를 위한 高速道路이며 國民을 위한 高速道路建設인데 甲과 乙간 思考의 差異가 있어 처음 하는 현장근무에 많은 隘路를 느낄 수밖에 없었으니 어떻게 그 막중한 일들을 다 해냈는지 지금 생각하면 알 수가 없다. 어린 나이에 覇氣만 있었지 覇氣 외는 아무 것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나는 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 하나로 거뜬히 그 막중한 대역사의 중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으니 남이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간에 내 마음속에 대단한 自矜心을 가지고 현재 살아가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 현장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어려움과 난관이 있었으니 그 어찌 다 졸필로 표현할 수는 있을까? 고속도로를 만든다는 그 발상조차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그 시절 참으로 대단한 일을 해낸 것이다. 지금은 高速道路 2000km時代! 당시는 시작에 불과 하였으니 경험도 기술도 없이 ‘始作하면 된다’는 마음만 먹고 고속도로건설에 뛰어든 우리들은 모두가 맡은 일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渾身의 努力을 다했을 뿐이다. 가끔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왜곡하거나 믿으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참으로 잘 못된 社會的 觀念이며 빨리 고쳐야 할 우리 生活文化가 아닌가 싶다. 또한 잘된 것도 잘 못한 것도 다 역사적 사실이니 만큼 모두가 잘 보전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보다 짧은 역사를 가진 미국을 觀光旅行時 살펴보면 가끔 자기들만의 歷史를 創造하고 간직하려는 미국국민들의 강한 意志를 느낄 수 있다. 짧은 역사 부족한 문화를 나름대로 잘 보존하여 미국사람들만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現實은 어떠한가? 있던 것도 없애는 일이 종종 있으니 나중 後孫에게 정신은 없고 物質的 遺産만을 물려줄 것인지? 어려운 質問이다.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가끔 우리들은 6.25때 먹을 것이 없어 굶다시피 했다고 하면 우리 아이들은 “아빠? 왜 라면이나 끓여 먹지요?”라고 반문을 하는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나 6.25를 격은 나로서는 주먹밥하나 제대로 얻어먹지 못했으니 너무나 隔世之感을 느낄 뿐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지금의 고속도로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국가의 대동맥인가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꼭 필요하다. 한마디로 ‘맨손으로 만든 고속도로!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고속도로! 당시 건설의 역군들이 자기들의 생과 바꾼 고속도로건설!’이었다는 것을 歷史에 길이길이 알려야 될 것이다.
1.21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과 경부고속도로 파견
1968년 1월 29일!
내 人生의 大轉換이 되는 歷史的인 날이었다. 며칠 전까지 경기도 의정부북방 축석리 지역에 출동하여 당시 靑瓦臺를 奇襲하려던 共匪일당들의 퇴로를 차단 一網打盡하려고 출동하였던 작전을 끝내고 막 부대로 복귀한 때였다. 갑자기 團(第6軍團 隷下 1110 野工團)에서 연락이 왔는데 陸軍本部로 派遣命令이 났다고 하여 나는 대단히 어리둥절하였다. 그때 나는 결혼한 지 달포가 지나 서울 본가에서 신부를 시골(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송우리)로 막 데려와 살림을 차렸는데 또 서울로 발령이 나서 가야한다니 아내는 軍의 命令이야 어떻든 서울로 못 가겠다고 하여, 처음에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시외버스 편으로 서울로 출근하여 중량교 부근에 위치한 당시 建設公務員敎育院에서 가서 高速道路에 관한 基本知識을 敎育받았다. 교육을 수료하고 서울-부산간 고속도로건설공사 사무소 총무과에 배치 받아 道路編入用地 擔當事務를 ‘68.8월 중순까지 약 7개월가량 수행하다가 병천1교 건설현장을 거쳐 정식으로 신사리-몽단이간 고속도로건설공사 토공 부감독관으로 근무하게 됨으로써 나의 경부고속도로 施工監督官의 任務는 始作되었다. 天安工區 천안-신사리간 건설공사를 마치고 大田工區로 옮겨 대전-증약간 고속도로건설공사 토공과 길치터널, 아감터널을 완공함으로써 1970년 7월 7일 착공 2년 6개월 만에 京釜高速道路 竣工式에 參席하게 되었다. 고속도로준공 후에도 현장을 정리하고 아침 일찍 서울사무소 본부에 올라와(당시 대전 선화동에 가족과 같이 살고 있었음) 전 공구에서 수집하여온 각종 공사에 관한 歷史的 資料를 개략 정리하고 陸軍에 復歸할 때(’70.11.24)까지 2년 10개월간 총무과 관리계 용지매수담당, 신사리-몽단이간 고속도로 건설공사 토공 부감독관, 천안-신사리간 고속도로 건설공사 주감독관, 대전공구 기술과 근무, 대전-증약간 고속도로 건설공사 주감독관 등 맡은 임무를 수행하였다. 軍으로 復歸하여2군 제1205건공단 제119대대 제1중대장으로 보직을 받아 계속 군 건설공사의 임무를 받아 수행하면서 高速道路建設現場에서 體驗한 經驗들이 내가 陸軍大領으로 1994년 3월 停年으로 退役 할 때까지 軍 服務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지금도 京釜高速道路建設에 참여하여 3년을 하루같이 일에만 파묻혀 살았던 시절을 무척 幸福하고 名譽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런 마음을 간직하고 생을 마감 할 때까지 살아갈 것이다.
또한 統一된 韓半島가 1일 生活圈이 되도록 高速道路 1만km時代도 머지않아 우리 앞에 닥칠 것이라고 期待해 본다.
2000년 5월
현재 韓國軍事問題硏究院 硏究委員/7‧7會 幹事
(당시 天安-新沙里間 高速道路 土工 主監督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