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댁 형제들의 여행기
모처럼 형제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부모님의 대를 이어 고향집을 지키시는 큰형님 내외분과 서울의 둘째형님, 세종시의 셋째형님, 여동생을 대신해 참석한 서울의 매제, 그리고 저까지 도합 여섯명이네요. 창원사는 막내아우는 사업의 일정상 불참을 했구요. 함양군 서상면 영각으로 출가해살다가 20여년 전 타계한 누님의 빈자리는 이럴때 더욱 안타깝습니다. 허리를 다치셔서 한 달간 입원치료를 하시고 퇴원하신 큰형수님을 축하해드리자는 명분의 모임이지만 사실 서로가 바쁘게 살다보니 자주 모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보호대를 허리에 차신 형수님은 물론이요 파월 교엽제 상이용사이신 큰형님의 건강은 염려가 될 정도로 심하십니다. 주말을 피해 주중을 택하여 무리한 여행을 자제하자면서도 고향일대의 수려한 자연과 뜻 깊은 유적지를 탐사하는 의미깊고 행복한 일박이일의 여행기를 일주일이 지나서야 포스팅합니다.
북상면 월성리 내계를 출발 함양군 안의면 심진동 용추골로 향하는 수망령을 넘는 것으로 본격적 여행을 시작합니다. 고개 정상에서 물을 볼수 있다해서 水望嶺이라 부른다지만 우리 형제들은 아득한 옛날의 아픈 흔적을 보고저 험준한 재와 골을 더듬습니다. 60여 년 전, 이십대초반의 나이에 첩첩산중 이 오지 골짜기에서 가마를 쌓고 숫을 구웠다는 큰형님과 물어물어 형을 찾아 갔었다던 둘째형님의 눈물나는 추억은 아득한 세월 무성한 숲속에 깊이 묻혀버렸습니다.
끝이 없이 이어지는 형제들의 옛날 이야기는 맨날맨날 한결같은 레파토리입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의 그 이갸기가 그 이야기.
수망령 정상에는 이렇게 예쁜 정자도 있습니다.
덕유산 장수사의 조계문. 한국동란으로 불타버린 폐사지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일주문만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남계서원.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있습니다. 1552년(명종7년)에 창건되었으나 정유재란때 소실되었다가 1612년에 복원되었으며 소수서원 다음으로 건립된 우리나라 두번째의 서원이며 훗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남아있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집안의 선조 갈천선생께서는 선친 석천공의 스승이요 동향의 큰 선비이신 일두 정여창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이 서원의 건립에 누구보다 앞장을 서셨습니다.
藍溪書院의 정문인 풍영루
남계서원의 바로 옆에 있는 청계서원. 탁영김일손(濯纓 金馹孫)을 기리기 위해 1907년에 세워진 강학개념보다는 사당 성격의 서원입니다. 정여창과 함께 김종직의 제자였던 김일손은 강직한 사관의 전형으로 '조의제문'이란 글을 사초에 넣음으로서 무오사화가 촉발되며 희생이 되었습니다. 탁영이 이 지역 일대에서 청계정사를 짓고 후학들을 양성하였던 일이 있음에 그를 기리는 훗날의 유생들이 유허비와 서원을 세웠습니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한옥마을. 좌안동 우함양이란 말의 유래를 만들어내었다는 대표적 반촌으로 지금도 100년 이상된 크고 작은 기와집 62채가 있답니다. 14세기에 경주김씨와 하동정씨가 터를 잡았고15세기에 풍천노씨가 들어왔다고 하는 이마을은 풍천노씨와 하동정씨들의 집성촌으로 일두고택, 하동정씨고가, 오담고택, 풍천노씨대종가 등등의 잘 보존된 전통가옥들을 볼 수 있습니다.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한 일두고택의 사랑채. 민속자료로 지정되어있답니다.
일두고택의 안채입니다. 정여창의 생가자리에 1570년에 지어진 이후 후손들에 의해 여러번 중건되었다고 합니다.
530년 전통의 가양주인 솔송주를 익히고 있는 모습입니다. 솔잎으로 담그는 술로 1997년에 후손들에 의해 개발복원 되었다고 합니다.
함양 읍내에서 일박을 하면서 상림숲을 산책하였습니다. 신라의 고운최치원선생께서 함양의 태수시절에 조성한 방풍 방수등의 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만든 숲으로 하림은 없어지고 상림만 남아 있습니다.
숲의 동쪽길을 따라 수킬로미텨에 달하는 연꽂지가 조성되어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황산대첩비지의 어휘각. 이성계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에는 글자를 모두 갈고 쪼아버린 왜인들의 횡포만 남아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원래의 대첩비를 왜인들이 아래 사진과 같이 파쇄하고 글자를 모두 쪼고 마모시켰습니다. 위 사진이 새로세운 비인데 받침석과 머리 부문은 원래 것으로 올려 놓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왜인들의 횡포를 흉물스럽게 된 원래의 비석. 이것이야 말로 이 자체로 유물입니다.
남원에 왔으니 광한루를 안보고 갈 수가 있나요. 여름날의 한가한 광한루에 폭염만 가득합니다.
남원추어탕의 원조격인 새집입니다. 번듯한 새로운 건물로 영업장이 확대되었군요. 새집이란 뜻은 날아다니는 새가 아니라 억새를 뜻하는 것이라지요. 치아가 부실하신 큰형님과 자극적 음식을 피하시는 형수님께서도 좋아하셨습니다.
예로 부터 산수 좋기로 유명한 안의 삼동 우리의 고향입니다. 북상 위천골짜기 원학동, 용추 안심골짜기 심진동, 서상 서하골짜기 화림동을 말하지요. 예전에는 벌로 보이던 사물들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니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좌일것입니다. 건강이 좋지 않으신 큰형님 내외분을 모시고 하는 여행이다 보니 무리할 수 없어 멀리 가지 못하고 고향일대를 드라이브 했습니다. 용추골을 더듬고 함양군 수동면 지곡면등을 두루 돌아 함양로를 따라 남원으로 향합니다. 지리산 일대를 구석구석 손바닥 들여다 보듯 꿰뚫고 있는 셋째 형님이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팔령재를 넘어 흥부마을을 끼고 인월을 지나 박초월 생가를 지나치고 황산대첩비지를 찾았습니다. 고속도로나 좋은 길을 버리고 일부러 운치있는 길을 찾아 여유롭게 훈행하는 창밖의 풍경이 더 없이 좋습니다. 24번 국도로 황산로를 달리다가 운봉에서 60번 국도로 바꿔타고 고기리 구룡계곡 주천면 730번 국도로 남원시에 들기까지 아찔한 지리산의 절벽길을 달리고 재를 넘었습니다. 산속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왜 이리 산을 보면서 더 좋아할까요.
온화하고 자애로우신 부모님의 성품을 이어받은 우리 옥산댁 7남매의 자랑은 우애입니다. 서로가 바쁜 세상살이에 치이다보니 자주 얼굴을 맞댈 기회가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기쁘고 살가운 만남을 앞으로 얼마나 많이 가질 수 있을까요. 우리 고향 안의 현감을 지내면서 청나라에서 보고 배워온 물레방아를 실생활에 이용하기도 했던 연암 박지원의 詩 燕巖憶先兄을 뇌어 봅니다.
我兄顔髮曾誰似(아형안발증수사) 每憶先君看我兄(매억선군간아형) 今日思兄何處見(금일사형하처견) 自將巾袂映溪行(자장건몌영계행)
우리 형님 얼굴과 수염이 누구를 닮았던고 돌아가신 아버님이 생각날 땐 우리 형님 바라봤네 이제 형님이 그리우면 어디메서 본단 말고 두건쓰고 옷입고 나가 냇물에 비친 나를 보아야겠네
ㅡ 끝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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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공이산의 블로그 원문보기 글쓴이: 임공이산
첫댓글 중산에 큰형 내외분~제가 잘아는 분들인데
종범님과 형제 분이셨다니 더` 반갑네요~ 저의 아버님과 같은 유공자 회원분이라~ㅎ,ㅎ
가족여행 부럽기도 하구요~ㅎ,ㅎ 축하 드립니다
그리고 즐감하고 갑니다~건강 하세요~^^
고맙고 감사합니다. 선배님의 어르신께서는 한국동란 유공자이신가보군요.
우리 형님은 북상에서는 최초의 파월장병으로 백마부대 소속 이셨습니다.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나 죽거던 큰세이를 부모님 맞잡이로 여기고 잘들 지내거라"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