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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척간두의 낙동강전선 속 UN군(한국군 포함) 최초의 공격작전 승리!
해병대 진동리지구전투
- 백척간두의 낙동강 전선,
남해안으로 우회해 통영과 진해를 위협하는 북괴군 6사단을 분쇄하고,
요충지 진동리지역 완전 장악한 UN군 최초의 공격작전 승리의 전투 -
鎭東里地區戰鬪
제1차 鎭東里地區戰鬪
1950년 8월 5일 11:30시 西部地區戰鬪 司令官 李應俊 소장으로부터 그 간 수립한 해병대의 전과에 대한 격찬이 있었고 今後도 더욱 용전분투하여 滅共戰線의 선봉이 될 것을 바란다는 격려사가 있었다. 이날 해병대는 서부지구전투 사령부로부터 미 육군 제25사단으로 소속이 변경되어 미 육군 제25사단소속 트럭으로 咸安국민학교를 출발, 馬山을 경유하여 8월 5일 15:30시 '진동리'에 도착하였다.
馬山에 집결한 해병대는 미 육군 제24사단에 배속되었다. 서부지구전투사령부 작전명령 제8호에 의하여 해병대는 육군 閔機植部隊(미 제25사단 배속)와 경찰관 崔天이 지휘하는 警察部隊와 협력하여 이 작전을 담당하게 되었다.
UN군 최초 공격작전 승리의 대한민국 해병대에 붙잡혀? 온
흥남철수의 또 다른 영웅 현봉학
연일 패주하는 육군과 유엔군과는 달리, 나가는 전투마다 대승을 거뒀다. 전쟁 초기부터 ‘귀신 잡는 해병’의 신화를 만들어 나갔다.
첫 번째 승리는 8월 1일부터 12일 사이 경남 창원군 진동리에서 거뒀다.
지금은 마산시 합포구로 행정구역이 바뀐 이 지역 전투에서 김성은 부대는 부대원 전원 1계급 특진이라는 진기한 기록을 세웠다.
파죽지세처럼 호남지방을 유린하고 경남 진주를 거쳐 고성까지 쳐들어 온 인민군 6사단은 8월을 앞두고 부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낙동강 주 전선보다 상대적으로 허술해 보이는 남해안으로 우회해 통영과 진해를 위협해 왔다.
남해안 전선은 미 육군25사단 작전지역이었다. 제주도에서 급거 출동해 마산에 상륙한 김성은 부대는 미 25사단에 작전 배속돼 미군의 지휘를 받게 됐다. 처음 부여된 작전명령은 함안∼진동리 간 도로를 확보하라는 것이었다. 8월 1일부터 진주∼마산 국도 진동리 분기점 요소마다 병력을 배치하고 이틀을 잠복 중이던 3일 새벽 3시쯤 도로변 주막에서 여인의 비명소리가 나더니, 곧 차량의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인민군 6사단 정찰대였다. 전 대원을 깨워 비상경계에 들어간 해병대는 기척을 죽여 적을 코앞에까지 유인해 일제히 요격을 가했다. 별다른 저항을 받아본 일이 없었던 적은 크게 당황했는지, 어둠 속에서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다가 궤멸됐다. 뒤 이어 본대가 달려왔을 때 해병대는 신속히 철수해 또 다른 매복지에 몸을 숨겼다. 적이 출현하면 또 기습을 가하고 철수하는 기동성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이 전공은 아군 실종자들에 의해 해군 수뇌부에 즉각 보고됐다. 실종됐던 본부중대장 염태복 상사는 우여곡절 끝에 마산 해군헌병대를 찾아갔는데, 마침 그곳에 나와 있던 통제부사령장관 김성삼 대령에게 상황보고를 하게 됐다. 입담이 좋은 염상사의 보고를 받고 흥분한 김대령은 손원일 참모총장에게 보고했다. 신생 해병대의 첫 전과에 크게 고무된 손제독은 국방부장관에게 건의해 전 부대원에게 1계급 특진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사기가 오른 김성은 부대는 5일에는 적이 장악한 진동리 전방의 야반산 고지를 육박전으로 공격했다. 구식 소총과 수류탄만으로 전차를 가진 주력부대를 궤멸시켰고, 7일부터는 진동리 북쪽 4km까지 진출한 적을 격퇴하고 마산으로 통하는 도로의 요충지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 작전에서 미군과의 통역문제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
미 25사단에 배속된 김성은 부대에는 통역관이 없어 불편했는데, 민간인 한 사람이 찾아와 통역관 자원봉사를 청했다. 손제독 처남 홍성은 씨였다. 미국 아메리칸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미 군정청장관 비서실장을 지낸 경력의 소유자였다. 미군 참모들과 김성은 부대장 사이에서 통역 서비스를 하던 그는 며칠 후 슬그머니 행방을 감추었다.
격전지를 수행하면서 통역하는 일이 무섭기도 했을 것이다. 그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사이 다른 통역관이 나타났다. 미 25사단장 통역관으로 부임하던 현봉학(아주대 명예교수) 씨가 백남표 소령에게 붙잡혀 온 것이다.통역이 없어 갑갑해하던 부대장을 본 백소령은 현씨가 영어를 잘한다는 걸 알고 반강제로 끌고 왔다.
해군본부가 제공한 지프를 타고 마산으로 가는 현씨 차를 세우고 검문을 한 것이었다. “수고 많으십니다. 저는 미 25사단장 통역관으로 가는 현봉학이라는 사람입니다.” 어디로 가는 누구냐는 물음에 그는 국방부장관 추천서를 내보였다.
“거기는 안 됩니다. 더 급한 데가 있습니다.” 검문을 하던 백남표 소령은 통역관이라는 현봉학 씨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대로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난처한 표정을 짓는 현씨에게 권총을 들이대며 차에 올랐다. 그리고 운전병에게 명령했다.
“진동리로 차를 돌려!”그렇게 해서 김성은 부대로 붙잡혀 온 현씨는 해병대 장비 현대화에 큰 공을 세웠다.
그 덕분에 해병대는 통영상륙작전을 잘 수행할 수 있었다.
현씨는 미국 리치몬드 대학 의학부에서 임상병리학을 전공한 의사였다.
1950년 3월 귀국해 모교 세브란스의대에 국내 최초로 임상병리실을 개설한 그는, 전쟁이 일어나자 통역요원으로 전쟁을 돕자고 결심했다.
김성은 부대장은 새로 온 통역관이 현시학 해군소령의 친형이라는 사실을 알고 더욱 친밀감을 느꼈다. 해병대를 위해 좀 무리한 부탁을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비가 너무 열악하다는 것을 미군 측에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려고 해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답답했는데, 이제 미군에 사정을 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김부대장은 현씨에게 오랜 숙원을 설명했다. 미 25사단에 가서 BAR 자동기관총을 구해 오라는 부탁도 했다. 다음 날 아침 현씨는 장교 한 사람과 부대를 나섰다. 장교는 현금이 가득 든 돈 가방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BAR을 구해 오는 ‘사업자금’이라고 했다.“돈은 얼마든지 써요. 그 대신 BAR은 꼭 구해 와야 합니다.”
잘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부대장의 당부가 마음에 걸렸다. 25사단 군수참모를 찾아간 그는 한국 해병대의 사정을 설명하고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재고량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부대장이 돈 가방을 챙겨 준 이유를 그때야 알았다. 군수참모와 그 보좌관을 마산 시내 근사한 요정으로 초대해 밤새도록 ‘주지육림’ 공세를 퍼부었다. 어디서나 그것은 묘약이었다.
BAR 자동기관총 구입 ' 일등공신'
다음 날 아침 현씨는 BAR을 원하는 수만큼 얻을 수 있었다. 덤으로 각종 실탄까지 수십 상자를 얻어 트럭에 가득 싣고 돌아왔다.“그때 해병대 장비는 형편 없었어. M1 소총도 부대원이 다 갖지 못했으니 말이야. 그때 마침 현봉학이 온 거야. 돈은 마음대로 쓰라고 했지.”
김부대장은 생전에 진동리 얘기만 나오면 이런 말을 했다. 현씨 덕분에 좋은 장비를 갖게 됐고, 그래서 통영상륙작전 때 요긴하게 썼다는 것이었다.현씨는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미 25사단과 김성은 부대의 협동작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미군 측에서도 그가 사단장 통역관으로 오던 사람이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작전 임무를 척척 수행해 내는 김성은 부대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문제를 삼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1950년 11월 해병대가 강원도 고성지구에 주둔하고 있을 때, 또 한 차례 종군을 했다. 이번에는 미 10군단 민사부 고문이라는 직함이었다.
그런데..
나는 종북깡패입니다!!
누가 종북 반역자 였는가?
나는 민주깡패, 정치깡패, 종북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달게 받겠습니다.
"누가 종북 반역자 였는가? 에바다 (yis4****) 님의 글 "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4976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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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그러하듯이/배인숙
* 'Un Poete/Alain Barriere' 의 번안곡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마주보며 속삭이던 지난날의 얼굴들이
꽃잎처럼 펼쳐져 간다
소중했던 많은 날들을 빗물처럼 흘려보내고
밀려오는 그리움에 나는 이제 돌아다본다
가득 찬 눈물 너머로
아~아~아~아~아~아~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거울을 보면 생각이 난다
어린 시절 오고가던 골목길의 추억들이
동그랗게 맴돌다 간다
가슴 속의 하얀 꿈들을
어느 하루 잃어버리고
솟아나는 아쉬움에 나는 이제 돌아다본다
가득 찬 눈물 너머로
아~아~아~아~아~아~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눈을 감으면 생각이 난다
헤어지던 아픔보다 처음 만난 순간들이
잔잔하게 물결이 된다
눈이 내린 그 겨울날
첫사랑을 묻어 버리고 젖어드는 외로움에
나는 이제 돌아다본다 넘치는 눈물 너머로
아~아~아~아~아~아~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창가에 앉아 하늘을 본다
떠다니는 구름처럼
날아가는 새들처럼
내 마음도 부풀어가네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
지평선을 바라보며 나는 이제 돌아다본다
저 푸른 하늘 너머로
우~우~우~우~우~우~
Un poete(시인)/Alain Barriere
Un poete ne vit pas tres longtemps.
Il se croque la vie a pleines dents,
Brule toutes cartouches en meme temps,
Se moquant des faux-culs, des faux-semblants.
Un poete ne vit pas tres longtemps.
Un poete ne vit pas tres longtemps.
Si vous l''avez cru voir vieillissant,
Son fantome, son spectre, assurement,
Ou sa derniere blague d''etudiant,
Un poete ne vit pas tres longtemps.
ah ah ah ah ah.....
Un poete se meurt, de temps en temps.
Ce n''est pas la cohue a l''enterrement.
Juste quelques amis, quelques parents.
On n''a pas alerte les Presidents.
Un poete se meurt de temps en temps.
Un poete se meurt de temps en temps.
On ne retrouve pas de testament,
Encore moins d''heritiers, de pretendants.
Seule est la la compagne des jours sans.
Un poete se me! urt de temps en temps.
ah ah ah ah ah ...
Un poete, c''est sur, c''est emmerdant
Et ca n''est jamais tres, tres bien pensant.
A la moindre injustice, ca va gueulant
Contre les cons, le vice et les puissants.
Un poete, c''est sur, c''est emmerdant.
Un poete, c''est sur, c''est emmerdant.
Ca ne craint ni l''exil, ni les tourments.
Ca ecrit quand est grand le denuement
Avec la derniere goutte de son sang.
Un poete, c''est sur, c''est emmerdant.
ah ah ah ah ah ...
Un poete, ca vit tres, tres longtemps.
Si j''ai dit le contraire, apparemment,
C''est que les mots, les mots, c''est bien changeant
S''ils sont dits au passe ou au present.
Un poete, ca vit tres, tres longtemps.
Un poete, ca vit tres, tres longtemps.
On ne compte pas le nombre de ses enfants.
Il en nait chaque hiver, chaque printemps,
Qui la gloire du prophete vont chantant.
Un poete, ca vit tres, tres longtemps. (bis)
시인은 오래 살지 못합니다
그는 혹독하게 자기 인생을 산산조각내고
동시에 잉크를 모두 써버린답니다.
허울뿐인 바보들과 허식들을 비웃으면서
시인은 오래 살지 못합니다
시인은 오래 살지 못합니다
강신이 설령 그가 쇠퇴해가는것을 본다 생각했을지라도
확실히 그것은 그의 환영이나 망령
혹은 그가 학생때 저지른 최악의 실수였을겁니다
시인은 오래살지못합니다
때때로 시인은 죽어갑니다
정례식에 떠들썩한 군중은 없지요
그저 몇몇 친구들과 부모님만 있을뿐
지위가 높은사람에겐 알리지도 안았지요
때때로 시인은 죽어갑니다
때때로 시인은 죽어갑니다
유언장을 사람들은 찾아내지 못하지요
하물며 유산을 요구하는 상속인들도
배급이 없는날 그의 애인만이 거기에 있답니다
때때로 시인은 죽어갑니다
시인은 믿을만하지만 정말 골치아프지요
그런데 그는 매우 매우 보수적인 사람은 결코 아니랍니다
아주 작은 부당함에도 그는 외칠겁니다
머저리들과 악습과 권력자들에 대항해서
시인은 믿을만하지만 정말 골치아프지요
시인은 믿을만하지만 정말 골치아프지요
그는 추방도 고통들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훌륭한 대단원의 막을쓰지요
그의 온정열을 다쏱아
시인은 믿을만 하지만 정말 골치아프지요
시인은 아주아주 오래살지요
내가 필경반대로 말한것은
그말들 말들은 진정 변하기 때문이랍니다
그 말들이 과거와 현재에서 말해진다 할지라도
시인은 아주 아주 오래살지요
시인은 아주 아주 오래살지요
아무리 사람들이 자기 아이들이 몇인지 헤아린다 하더라도
겨울이 올때마다 봄이 올때마다 아이들은 태어날테고
누구를 위해 예언자의 영광을 노래하게 될런지요
시인은 아주 아주 오래살아요
Alain Barriere
1935년 11월 18일 브르타뉴 지방 라 트리니테 쉬르 라 메르에서 태어나
가수 겸 작사, 작곡가로, 본명은 알랭 베레크다.
로리앙, 앙제 및 파리에서 교육을 받은 뒤 4년간 공예 기사로 일했으며
1959년 샹송계에 들어가 59년 최초의 작품을 발표,
프랑시스 르마르크에게 인정을 받고 코크 들 라 샹송 콩쿠르에서
르마르크는 '카티'라는 노래를 불러 대성공을 거두었다.
1962년 유러비전 콩쿠르의 프랑스 대표가 되어 'Elle etait si jolie'를 불렀고,
작품으로는 '마리 지오콩드', 'Ma vie' 등의 히트 작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