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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여인의 죽음과 화랑의 후손 / 윤채근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반월성 북쪽 숲속으로 쫓기던 호랑이 여인은 달리기를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자신을 추격하는 신라 병사들이 내던 요란한 말발굽 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여인이 덤불 아래 땅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리자 조금 앞서 달리던 호랑이가 되돌아와 그녀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헐떡이는 호랑이 목젖을 어루만지던 여인이 인기척을 느끼고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들었다.
덤불 가까이 다가오던 사내는 겁먹은 표정으로 한동안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살며시 몸을 일으킨 여인이 조금씩 다가갈 때도 그는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여인 뒤로 호랑이가 모습을 나타내고서야 그는 움찔 놀라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여인이 평온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김현 낭도시여. 나의 낭군, 나의 정인이시여. 이제 약속한 대로 하소서.”
머리를 천천히 가로저은 김현이 대답했다.
“그대와 그저 하룻밤의 인연이었을망정, 그래도 우리는 부부라면 부부요. 짝의 죽음으로 벼슬을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니요?”
단호한 눈빛을 한 여인이 호랑이 목을 감싸고 단검을 녀석 목울대 가까이 댔다. 호랑이가 몇 차례 갸릉갸릉 하며 신음소리를 흘렸지만 반항하지는 않았다. 여인이 속삭였다.
“이미 끝난 얘기입니다. 이 녀석은 제 혈육과 같지만 기꺼이 벨 것입니다, 우린 운명이 똑같거든요.”
단검이 호랑이 목을 파고들며 길게 호를 긋자 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차츰 기력을 잃고 쓰러지는 호랑이를 감싸고 있던 여인 옷이 피로 물들어갔다. 본능적으로 허우적대던 발동작마저 멈추자 호랑이는 싸늘한 시신으로 변했다. 벌떡 일어선 여인이 핏물과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짐승으로 살아왔지만 사람으로 죽고 싶습니다. 다음 생에서 뵙기를 빌 뿐입니다.”
단검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댄 여인이 애모와 원망의 감정이 뒤섞인 기묘한 표정으로 김현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김현이 다급하게 울부짖었다.
“멈추시오. 제발 내 말을 들어보시오. 살길이 있소!”
천천히 검을 목에서 뗀 여인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살길이야 있겠지요. 하지만 그게 어디 사람의 삶인가요? 말씀해 보소서. 사람처럼 살길이 어디 있나이까?”
여인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며 김현이 대답했다.
“그대와 혼인까지 할 수야 없겠지만, 그렇지만 우리 더불어 살아갈 수는 있지 않겠소? 사람으로, 진정 사람으로 말이요.”
단검을 앞으로 내밀어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표시를 한 뒤 여인이 목멘 소리로 대답했다.
“그날 밤 흥륜사에서 낭군님을 만나지 말 걸 그랬습니다. 그랬더라면 그 달콤한 말씀에 부질없는 희망을 품는 이런 나약함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날 제가 탑을 돌며 뭘 빌었는지 아시나요?”
김현이 말없이 고개를 젓자 여인이 말했다.
“딱 하루만, 딱 하루라도 좋으니 어엿한 사람으로 살게 해달라고 빌었나이다.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룬 이상 소녀는 여한이 없나이다.”
호랑이 여인과의 만남그날 밤, 오월의 감미로운 바람이 흥륜사 금당 앞 뜨락으로 불어오고 있었다. 서라벌의 젊은 남녀들은 뜨락 가운데 서 있는 탑 주위를 돌며 각자 소원을 빌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적은 차츰 뜸해졌고, 김현 앞을 돌던 한 쌍의 젊은이들마저 범종루 맞은편에 우뚝 서 있는 미륵존상에 머리를 조아린 뒤 남쪽 길달문 방향으로 사라지자 완벽한 적막이 찾아왔다. 허공을 향해 긴 한숨을 내쉰 김현이 속삭였다.
“올해도 벼슬길에 기약이 없다면 내 삶은 깊은 어둠에 잠겨 덧없이 끝나는 것인가?”
경내를 환히 밝히던 석등 불빛이 마침내 꺼지고 금당을 지키던 승려들도 회랑을 돌아 각자의 침방으로 들어갔다. 한때 통일신라 수도 동경(경주)의 최대 사찰 중 하나였던 흥륜사는 어느덧 사세가 기울어 폐사되기 직전 상황에 놓여 있었다. 군데군데 기와가 무너져 내린 객방을 둘러보며 서성이던 김현은 마지막으로 탑을 한 바퀴 더 돌기로 작정했다. 그가 탑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한 여인이 눈에 띄었다.
동경 사람은 입지 않는 이방인 복장을 한 여인은 가죽으로 된 신발 코를 사뿐사뿐 들어 올리며 홀로 탑을 돌다 김현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달빛을 등진 여인은 흡사 사람으로 화한 여우거나, 불사약을 훔쳐 달로 도망갔다는 선녀 항아처럼 보였다. 여인 뒤로 바싹 다가선 김현이 말없이 그녀를 따라 탑을 돌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를 가득 채웠던 속세 근심은 어느새 사라지고 젊은 여인에 대한 애타는 갈망만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워갔다. 그가 살며시 물었다.
“어디 사시는 아가씨요? 보아하니 동경 분은 아닌 듯한데.”
문득 걸음을 멈춘 여인이 반쯤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서라벌 출신이 아닙니다. 먼 곳에서 얼마 전 옮겨왔답니다.”
상대가 다루기 쉬운 청루의 몸 파는 여자거나 떠돌이 가무단의 무희일 거라고 짐작한 김현은 조금 방심해 여인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여인이 그의 손 위로 자기 손을 포갰다. 손을 떼지 않은 채 몸을 돌린 여인 눈동자가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부처께서 벼슬 대신 여인을 보내주셨다고 믿은 김현은 거침없이 상대를 껴안았다. 잠시 숨을 헐떡이던 여인이 김현을 밀어내며 속삭였다.
“짐승도 아닌데 이런 데서 이럴 순 없습니다. 다른 곳을 찾으소서.”
다급히 이리저리 눈길을 돌리던 김현의 시야 안으로 허물어진 객방이 들어왔다.
여인의 슬픈 미소옷매무새를 다듬은 여인이 경첩에 비스듬히 매달린 객방 문짝을 살짝 밀자 달빛이 다시 밀려들었다. 여인의 오뚝한 콧날에 입을 맞춘 김현이 우중충한 방 안을 빙 둘러보았다. 열망을 채우고 나면 갑자기 주변이 온통 초라해 보이곤 했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잠자리를 막 끝낸 뒤인데도 여인은 여전히 사랑스러웠고, 그의 가슴을 채웠던 포만감은 아직 길게 여울져 흐르고 있었다. 그가 속삭였다.
“아가씨가 내 운명의 짝인가 보오.”
그의 품으로 파고든 여인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린 운명이 아니에요. 전 곧 떠나오니 미련 갖지 마소서.”
여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속마음을 읽으려 했지만 김현은 그게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여인의 눈동자는 총기로 빛났지만 아무 얘기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가 물었다.
“당신의 눈은 왜 아무 얘기도 하지 않소?”
슬픈 미소를 가벼운 한숨에 실어 객방 공기 속에 풀어놓은 뒤 여인이 대답했다.
“할 얘기가 없기 때문이에요. 소녀는 사람의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놀란 표정의 김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나 또한 그러하오. 나 역시 사람처럼 살지 못했소. 들어보시겠소?”
기이한 표정으로 일그러지던 여인 얼굴이 일순간 호랑이 형상으로 화하려다 갑자기 멈췄다. 김현은 자신이 뭔가 헛것을 봤다고 여겨 두 눈을 비벼댔다. 다시 자세히 들여다본 여인 얼굴은 탑을 돌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안심한 김현이 속삭였다.
“나는 몰락한 화랑 가문의 자식이오. 이 기구한 인생사를 들어주시구려.”
여인이 노래하는 듯, 염불을 외는 듯 나지막이 대답했다.
“소녀, 그 말씀까지만 듣고 떠나겠나이다.”
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운 화랑 세력은 태종 무열왕 사후에 힘을 더욱 키워나갔다. 신라의 강력한 호위 세력이던 그들은 권력 맛에 길들더니 끝내 왕권까지 넘볼 수준에 이르렀다. 이에 큰 위협을 느낀 신라 왕실은 피비린내 나는 숙청 작업을 통해 화랑 거물을 차례차례 제거해 나갔는데, 김유신과 함께 전장을 누빈 통일 영웅 죽지랑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권력으로부터 조금씩 소외되던 죽지랑은 말년에 이르러는 완전히 실세했고, 명예로웠던 과거 추억만 지닌 채 일개 필부로 삶을 마쳤다.
김현의 먼 조상은 죽지랑을 모시던 낭도였다. 죽지랑 사후 다른 동료들과 정처 없이 떠돌던 그는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자 저잣거리에서 곡예를 벌였다. 사람들은 말 위에서 춤추고, 높이 매단 밧줄 위에서 공중제비를 돌고, 몸을 굽혀 가랑이 사이로 화살을 쏘는 그를 ‘화랭이’라 놀려댔다. 화랭이 집단은 비록 떠돌이 재주꾼으로 신분이 천해졌지만, 한때 호국 전사였다는 마음속 자존심만은 지키려고 노력했다. 언젠가 세상이 다시 혼란스러워진다면 꼭 쓰일 날이 있으리란 기대가 남아 있었다.
김현의 기구한 운명하지만 세상은 그저 평화로웠다. 큰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왕실은 옛 전사 집단을 까맣게 잊었다. 그렇게 세월이 자꾸 흐르자 화랭이 대부분은 뿔뿔이 흩어졌고, 싸움꾼 기질을 유지한 일부 세력만 기마곡예단으로 생계를 꾸리며 수련을 이어나갔다. 김현의 아비 김선은 그런 무리 속에서 우두머리가 돼 있었다.
김선에게 기회는 느닷없이,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여전히 녹슬지 않은 무예 실력을 높은 가격에 사겠다며 다가온 낯선 사내는 이런 말로 김선을 유혹했다.
“김선 낭도. 지금이 화랑의 옛 명성을 회복할 절호의 시점이라 이거요. 부디 놓치지 말았으면 하오만.”
호기심에 달뜬 김선이 다급하게 물었다.
“우리를 관군에라도 편입해 주시겠단 말씀이오? 오랑캐들이 쳐들어온답디까?”
한참을 이리저리 말을 돌리던 사내는 마지막에 이렇게 속삭였다.
“관군들은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해주시게. 쯧쯧,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원. 잘 생각해 보시게. 꼭 성골만 왕이 되란 법이 어디 있나? 성골이 뭔 대수야? 무열왕 피가 섞였다는 뜻 아닌가? 왜 무열왕 피붙이만 왕이 돼야 하느냐 말이지. 훌륭한 진골도 많고 많지 않은가? 안 그래? 골품제 자체가 이미 낡았다 이 말이야.”
망설이는 김선을 무섭게 노려보던 상대 말투가 점점 포악하게 변해갔다.
“일단 내 입에서 이 말이 나간 이상 도로 물릴 순 없지. 우린 같은 배를 탄 거야. 왕을 죽이자고!”
김선은 덫에 걸렸음을 깨달았지만 상대 제안을 거절하는 순간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걸 모를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김선 무리는 신라의 마지막 성골 출신 왕인 혜공왕을 암살하는 데 동원됐고, 보이지 않는 장막 너머에서 이 잔인한 살육을 계획한 무명 진골 귀족이 다음 왕위에 올라 선덕왕(선덕여왕이 아닌 다른 왕이다)이 됐다. 선덕왕 즉위 직후, 덫을 놓았던 사내가 다시 김선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수고했어. 새 왕께서도 아주 만족하고 계셔. 한데 말이지. 잠시 몸을 피해 있는 게 어때? 적당한 때 반드시 불러줄 테니.”
상대의 섬뜩한 눈초리에 기가 꺾인 김선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말이야. 자네 부하들은 어쩌지?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잖아? 처리하기 힘들면 우리 쪽이 해줄게. 뭘 놀라나? 대답하기 힘든 거 알아. 내가 벌써 손 써놨어. 부하들에게 미안한 마음, 그런 것일랑 갖지 마. 그리고 자네에게 아들 하나가 있지? 김현이라고 했나? 그 아이는 내가 기르기로 하지. 나중에 찾으러 오든지.”
끈질긴 기다림서라벌에서 추방당한 김선은 서경으로 거처를 옮겨 이름을 감추고 살았다. 이후 새 장가까지 들어 다시 아들 하나를 둔 그의 여생은 비극으로 끝나버렸다. 후환을 없애려는 선덕왕 무리의 살육으로부터 간신히 목숨을 건진 몇몇 부하가 끝까지 그를 추적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배신자 김선의 시신을 토막 내 당시 반월성 한 귀족의 노예였던 아들 김현에게 보냈다. 김현은 아버지 시신과 함께 배달된 옛 부하의 편지를 읽고 사건 내막을 모두 알게 됐지만, 과연 누구에게 원수를 갚아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아버지 옛 부하들을 죽이고자 길을 떠나자니 그는 너무 잘 길든 노예일 뿐이었고, 이 모든 일을 벌인 원흉인 주인 귀족을 베자니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결정을 내리셨나요?”
김현의 가슴 안으로 파고들며 여인이 물었다.
“아무런 결정도 할 수 없었소.”
고개를 들어 김현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여인이 싸늘하게 물었다.
“무슨 말씀이 그렇습니까? 그럼 아버님의 원수를 계속 섬기셨어요?”
고개를 끄덕인 김현이 다른 누군가의 수척한 그림자인 양 힘없이 부스스 일어나 앉으며 대답했다.
“그랬소. 아니, 지금도 여전히 그리하고 있소. 어쩌면 너무도 잘한 결정이었소. 들어보시오. 나의 주군께서 어느 날 밤 침소로 날 부르지 않았겠소? 다 알고 계십디다. 아버님 시신이 도착하던 날, 이미 다 파악하고 계셨던 거요. 그리고 굳은 약조까지 해주셨소. 언젠가 당신이 큰 꿈을 이루게 되면, 그리 되면 화랑을 부활시키고 나도 크게 써주시기로!”
“지금 그리 되셨나요?”
“기다리고 있는 거요. 끈질기고 또 끈질기게. 내가 모시던 주인님이 누군지 아시오? 바로 선덕왕을 이어 얼마 전 왕위에 오르신 분이요. 지금의 신라왕이란 말이요. 벌써 주변에선 다들 나를 낭도라고 부르고 있소.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일 아니겠소?”
김현의 처량한 시선을 애써 외면한 여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우두커니 달빛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왕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저는 이만 떠나고자 합니다.”
모두에게 복된 일
급히 떠날 채비를 차린 뒤 객방을 나선 여인은 절을 벗어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다급하게 쫓던 김현이 그녀를 향해 외쳤다.
“낭자, 같이 갑시다. 왜 그리 빠른 거요?”
성난 표정으로 뒤돌아보는 여인 얼굴에 호랑이 줄무늬가 번지려다 이내 사라졌다. 공포로 엉거주춤 물러서는 김현을 향해 그녀가 말했다.
“돌아가소서. 우리는 갈 길이 다릅니다. 어서!”
다시 방향을 돌린 여인은 남산 쪽을 향해 민첩하게 몸을 움직였다. 한동안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김현은 무언가에 홀린 듯 발길을 재촉해 재차 그녀를 따라잡으며 소리쳤다.
“낭자가 무엇이든 난 상관없소. 이것도 부처님께서 맺어준 인연이지 않소?”
잠시 걸음을 멈췄던 여인은 뒤 돌아보기를 포기하고 다시 걷더니 산기슭 한 허름한 객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객점 문 앞에서 하염없이 그녀를 기다리던 김현에게 늙은 할멈의 거친 음성이 크게 들려왔다.
“네가 미친 게냐? 이를 어쩌면 좋으냐? 비록 좋은 일이었다만, 없느니만 못했구나. 곧 네 오라비들이 돌아올 텐데 어서 돌려보내라! 사람은 우리 분수가 아니다.”
이어서 여인 울음소리가 하염없이 이어졌다. 울음소리는 건너편 산에서 호랑이 떼 울음소리가 둔하게 들려올 무렵까지 멈추지 않았다. 쪼그리고 앉아있던 김현이 숨을 곳을 찾으려 일어섰을 때, 무언가 강력한 힘이 그를 낚아채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이름 모를 숲에서 깨어난 김현 앞에 여인이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가 턱을 괴더니 마치 달에게 얘기하듯 무심히 입을 열었다.
“제가 누군지 궁금하신가요? 실은 저도 모릅니다. 짐승인지, 아니면 사람 비슷한 무엇인지. 하지만 분명히 사람은 아닌 모양입니다.”
김현이 아무 대답이 없자 그녀가 돌아보지 않은 채 다시 말했다.
“전 이 운명이 싫습니다, 부처님께 기도하기도 이제 지쳤어요. 이럴 바엔 어서 다시 태어나고 싶습니다. 그럼…, 그렇다면 차라리 이리 하시면 어떻겠나이까?”
벌떡 일어선 그녀가 성큼 김현 쪽으로 다가오더니 하려던 말을 마저 했다.
“저를 죽여주소서.”
바짝 다가선 그녀가 얼어붙은 김현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며 속삭였다.
“저를 죽이소서! 내일부터 제가 다루는 아우와 도성 안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해치겠나이다. 아무도 저희를 말릴 수 없을 겁니다. 민심이 사나워지겠지요? 왕은 높은 벼슬을 걸고 저희를 잡을 사람을 구할 겁니다. 두려워 마시고 성 북쪽 숲으로 따라오소서. 기다리고 있겠나이다.”
말문이 막힌 김현이 한참을 망설이다 얼빠진 표정으로 신음하듯 말했다.
“아니, 내가 어찌…, 어찌 그대를?”
“대답 마소서. 이미 정해졌습니다.”
김현의 이마에 입술을 살짝 댄 그녀가 다시 속삭였다.
“생각해 보소서. 모두에게 복된 일입니다.”
호랑이 울음관군을 몰고 호랑이를 쫓아갔던 김현은 날이 어두워져서야 반월성으로 홀로 돌아왔다. 터덜터덜 느린 걸음으로 성문에 다다른 그의 손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호랑이 가죽이 들려 있었다. 수문장은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여러 개의 중문을 지나 원성왕이 쉬고 있던 당나라 양식의 후원에 이를 무렵, 김현의 얼굴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눈물로 뒤덮여 버렸다.
연못물에 발을 담그고 애첩과 바둑을 두고 있던 원성왕은 김현을 발견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불쾌한 감정 가득한 어투로 물었다.
“현이, 네 녀석! 호랑이를 잡아오라 했더니 그 무슨 거지꼴이냐? 손에 쥔 냄새나는 물건은 또 뭐냐?”
왕에게 천천히 다가가 무릎 꿇은 김현이 두 손으로 호랑이 가죽을 들어 바치며 대답했다.
“장안을 휘젓고 다녔던 호랑이 녀석의 가죽입니다. 지고 오기엔 너무 무거워 가죽만 벗겨 가져왔습니다.”
가죽에 손가락 끝을 살짝 대보고 나서 냄새를 맡으려 코를 몇 번 킁킁대던 왕이 말했다.
“가죽 냄새부터 없애고 무두장이에게 보내라. 사냥할 때 입으면 좋겠구나.”
가죽을 말아 허리춤에 움켜쥔 김현이 말없이 서서 움직이지 않자 왕이 힐끔 노려보며 다시 말했다.
“뭐? 뭣 때문에 그리 서 있느냐? 오호라! 약속을 지키라 그거냐? 에라 이 쩨쩨한 놈! 지 아비 닮아 탐욕이 가득하구나? 알았다, 이놈아! 내가 이급의 벼슬을 내린다고 했으니 지킬 거야. 어서 가 몸이나 씻어라, 이놈아!”
감사의 뜻으로 몸을 엎드려 부복했던 김현이 몸을 돌려 후원 뜰을 비틀대며 걸어 나왔다. 그의 등을 향해 왕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말이야, 이놈아! 그 왜 호랑이를 부리며 함께 날뛰고 다녔다는 계집은 어찌 됐냐? 그년도 잡아왔어야지, 안 그래? 놓쳤느냐? 아니면 돈이라도 받고 놔줬느냐?”
비스듬히 몸을 돌린 김현이 고개를 천천히 숙이며 대답했다.
“죽었습니다.”
왕이 비아냥대듯 볼을 씰룩이며 속삭였다.
“죽어? 그런 계집이 죽어? 네놈이 죽인 게 아니라?”
“네. 자결했습니다.”
“그런 표독한 년이 자결을 해?”
“그렇습니다. 정성스레 호랑이 가죽을 벗겨주고는 그동안 미안했다며 목숨을 끊었습니다. 왕께 정중히 사죄드린다는 말도 남겼습니다.”
음흉한 눈빛으로 김현을 한참 동안 쏘아보던 왕이 낯빛을 환하게 바꾸며 말했다.
“알았어. 가봐. 세상이 흉흉하니 앞으로 날 잘 보필해라. 알았지?”
고개를 끄덕인 김현이 돌아서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무두장이에게 가죽을 넘긴 그는 하염없이 어디론가 걸었다. 그는 이리저리 걷고 또 걸었다. 첨성대가 보였고 연꽃 흐드러진 연못물이 보였고, 월지의 소나무 숲도 보였다. 풍경이 거기 있었지만 마음은 그곳에 없었고, 세상은 공활해 텅 빈 채였다. 발걸음에 방향을 내맡겼던 그의 눈에 어느새 흥륜사 금당 앞 탑이 들어왔다. 달이 밝았다. 김현은 새벽이 되도록 엉엉 울어댔는데, 침방에서 잠을 설치며 뒤척이던 승려들에게 그 소리는 호랑이 울음으로 들려왔다.
* 이 작품은 ‘삼국유사’에 수록된 소설 ‘김현감호(金現感虎)’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