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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소년과 소녀들은 프로야구를 보며 꿈을 키웠다. 30년이 지난 후, 그들은 프로야구의 주 고객층이 됐고, 야구의 유전자를 자식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앞으로 다시 30년이 흘렀을 때 지금의 아이들이 바톤을 이어받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지금의 야구가 아니라 미래의아이들에게 어떤 야구를 물려줄까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어른들이 할 일이다. KBO 총재 선임은 그래서 중요하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한국야구위원회(KBO) 유영구 총재가 전격 사퇴했다. 유 총재는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기 하루 전인 5월 3일 KBO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야구인들은 “역대 총재 가운데 가장 야구를 사랑했던 분을 잃게 됐다”고 아쉬워하면서도 “당장 9구단 선수수급과 10구단 창단 작업에 빨간 불이 켜졌다”고 우려한다. 그래서일까. 야구계는 “유 총재가 주도한 각종 현안을 무리 없이 진행하려면 후임 총재 인선이 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벌써 총재 후보들이 속속 세평에 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KBO 유영구 총재의 구속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발단은 지난해 11월이었다. 서울중앙지검은 “학교법인 명지학원의 자금으로 수익 사업체인 명지건설을 부당 지원한 혐의(배임 및 사립학교법 위반)로 유영구 전 명지학원 이사장을 수사 중”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유 총재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무혐의를 자신했다. 그러나 검찰은 같은 해 12월 유 총재를 출국금지하며 수사망을 좁혔다. 이때 유 총재는 예정된 행사를 그대로 소화하는 등 검찰 수사에 개의치 않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3월이 되자 검찰 주변에선 ‘프로야구 개막 전, 유 총재가 구속될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4월 2일 개막전에 유 총재가 개막식에 참석하자 “검찰이 유 총재의 혐의 사실을 밝히지 못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 흘러나왔다.
4월 29일 검찰이 유 총재 구속영장을 법원에 신청하며 사태는 급반전했다. 이때도 유 총재 측근들은 “법원이 검찰의 구속영장을 기각할 것”이라며 강한 자신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법원이 구속영장을 받아들이며 결국, 유 총재는 사건이 불거지고 나서 6개월 만인 5월 3일 구속됐다.
야구계의 충격은 유 총재의 구속보단 사퇴였다. 구속영장이 발부될 때까지도 KBO 고위 관계자는 “설령 총재님이 구속돼도 총재 취임 이전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므로 법원에서 최종판결이 나기 전까지 총재직은 그대로 유지하실 것”이라고 단언했다. 다른 야구인도 “KBO 총재직에서 사퇴하면 본인 스스로 유죄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며 “여간해선 사퇴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유 총재는 구속되기 하루 전, 직접 KBO에 찾아와 사직서를 냈다. 자신을 둘러싼 일련의 일들이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라 예감했다는 후문이다.
유 총재에게 예의를 차리기 전에 야구계에 사과부터 하는 게 도리다. 야구에 가장 애정이 깊고, 역대 총재 가운데 가장 분주히 활동했지만, 횡령과 비리 혐의로 낙마한 유영구 KBO 총재. 그에 대한 평가는 후대가 할 것이다(사진=KBO)
유 총재의 구속과 사임이 이어지자 8개 구단 사장들은 다소 놀란 표정들이다. 구속도 구속이지만, 사임까지 하리라곤 예상치 못한 듯했다. 충격이 컸는지 사장들은 신임 총재 인선을 두고 극도로 신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모 구단 사장은 사견임을 전제로 “유 총재가 야구계를 위해 많은 일을 하셨고, 명지학원 이사장 시절의 불미스러운 일로 구속된 것이지 KBO에서 비리를 저질러 사퇴한 게 아닌 만큼 후임 총재는 시간을 두고 선임하는 게 유 총재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른 사장들도 비슷한 입장이었다. “일단 총재 직무대행자를 선출해 KBO 행정을 맡기고 천천히 후임 총재를 물색하자”는 의견들을 내놓았다.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것이 전임 총재에 대한 예의”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밝힐 게 있다. 사장들이 그토록 예의를 차려야 할 대상은 유 총재가 아니라 자신들의 실패한 선택으로 피해를 본 야구인들과 야구팬들이라는 사실이다. 이유가 있다.
유 총재를 옹립했던 주체는 정치권도, 문화체육관광부도, 야구인들도 아닌 바로 8개 구단 사장들이 뭉친 이사회였다. 옹립 당시 이사회가 내건 명분은 거창했다. ‘정치인, 각료 출신의 낙하산 총재가 아닌 민선 총재야말로 프로야구를 책임지고 이끌 적임자’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역대 전임 총재 가운데 민선 총재는 12~14대 수장이었던 고 박용오 총재가 유일했다. 역대 총재 대부분은 임기 중 입각 혹은 국회의원 당선 등으로 도중하차하거나 개인 비리로 낙마했다.
그러나 유 총재 취임 과정을 상세히 아는 모 야구인은 “이사회가 내건 명분은 그저 대외용이고, 숨겨진 내막은 따로 있다”고 귀띔했다.
“원래 신임 KBO 총재엔 전직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모 전 의원이 내정된 상태였다. 그런데 모 구단 구단주가 자기구단 사장에게 ‘유영구 전 명지학원 이사장을 밀 것’을 지시하며 일이 틀어졌다. 이 구단주와 유 전 이사장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구단주의 지시를 받은 모 구단 사장이 다른 구단 사장들을 설득하기 시작하며 유 전 이사장이 KBO 총재로 급부상했다. 그리고 얼마 후, 사장들이 모 호텔에 모여 유 전 이사장을 KBO 총재로 모시자고 결의했다. 문화체육관광부(문광부)가 ‘사전 협의가 없었다’며 발끈했지만, 워낙 언론을 포함해 야구계가 낙하산 총재에 거부감을 나타내자 문광부도 한발 물러섰고, 우여곡절 끝에 결점이 많았던 유 전 이사장이 17대 KBO 총재로 취임했다.”
모 야구인이 말한 대목에서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결점이 많은 유 전 이사장’이란 대목이다. 몇몇 구단 사장들이 유 전 이사장을 옹립하려 할 때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는 ‘명지건설의 전 회장으로서 법적, 도덕적 책임이 없느냐’는 내용의 공개질의를 했다.
2009년 2월 유 총재가 취임할 당시 선수협이 보낸 유 총재에게 보낸 공개질의서 가운데 일부(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당시 선수협은 유 전 이사장이 명지대학 교비를 명지건설에 부당 지원했다는 세간의 소문을 수집했던 차였다. 또한, 유 전 이사장이 연루된 몇 가지 정보를 입수한 터였다. 선수협의 정보망이 대단한 것 같았지만, 유 전 이사장과 관계된 부정적 루머들은 이미 정치권과 언론에서 제기했던 평이한 내용이었다. 이를 구단 사장들도 모를 리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유 총재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구단 사장들 역시 선수협의 공개질의를 “신임 총재 흠집 내기”라며 불쾌해했다. 당시 모 구단 사장은 “한평생 교육자로 살아온 분께 대단히 실례되는 발언”이라며 선수협의 자제를 촉구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2개월 뒤 검찰은 항간의 루머가 사실이었음을 밝혔다. 구단 사장들이 “정치권과 각료 출신의 낙하산 인사가 아닌 역대 두 번째 민선 총재”라고 떠들썩하게 소개했던 유 총재는 정치권과 각료 출신의 역대 총재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비리 혐의로 구속됐다. 게다가 “한평생 교육자로 살아왔다”던 유 총재의 혐의는 역설적이게도 반(反)교육적인 교비 횡령이었다.
작은 인간관계에서도 사람을 잘못 추천해 그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면 소개해준 이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게 도리다. 당연히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대상은 문제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이지,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구단 사장들은 자신들이 옹립한 총재의 갑작스러운 사임으로 리그 전체가 흔들리고 있는데도 정작 피해를 감내해야 할 야구선수와 구단, 야구산업 관계자 그리고 소비자인 팬들에겐 사과는 고사하고 일언반구도 없다. 정작 예의는 횡령과 배임 혐의로 구속된 전임 총재에게만 차리고 있다.
문제는 신임 KBO 총재가 구단 사장들에 의해 다시 결정된다는 것이다. KBO 야구규약엔 ‘총재는 이사회(사장단 회의)에서 재적이사 4분의 3 이상의 동의를 얻어 추천하며, 총회(구단주 회의)에서 재적회원 4분의 3 이상의 찬성으로 선출한 후, 주무관청(문광부)에 보고한다’고 명시돼 있다.
대기업 오너들인 구단주들이 어떤 이가 총재감으로 적당한지 파악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주무관청인 문광부는 유 총재 선임 때부터 “KBO 총재 선출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그렇다면 이사회의 총재 추천이 곧바로 총재 취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다시 이사회의 이해관계와 입맛에 따라 총재가 결정된다면 야구계는 또 한 번 홍역을 치를지 모른다. 가뜩이나 유 총재 취임 후, 이사회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해졌다는 우려가 쌓여온 게 사실이다.
많은 야구인이 “유 총재 사퇴와 관련해 이사회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건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그만큼 지금껏 이사회가 총재 추천에 있어 투명하지 못했다는 뜻이고, 앞으로 투명하고 공개적인 절차에 따라 총재를 추천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밀실에서 탄생한 총재가 과연 얼마나 야구계의 존경과 신뢰를 받겠는가.
역대 KBO 낙하산 총재, 효과도 없고 끝도 좋지 않았다. 15~16대 KBO 총재였던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은 총재 취임 이전 이미 불법정치자금을 받아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집권 실세의 정치적 스승이라는 이유로 총재로 선임됐다. 결과는 똑같은 실수의 반복이었다. 실세 총재가 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야구계의 숙원사업이었던 새 구장 건설과 리그 확장이 그동안 그동안 힘있는 실세 총재가 부재했기 때문에 이뤄지지 못했던 것인가? 실세 총재들이 쓰라는 힘을 엉뚱한 곳에 썼기 때문에 지금껏 야구계 발전이 정체된 게 아니었나? 힘있는 실세 정치인 출신 총재는 오히려 집권층의 운명에 따라 언제나 폐기처분될 수 있으며 이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역량이 필요한 야구계에 항시 불안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지금의 규약에선 이사회의 일방적인 총재 옹립을 견제하거나 막을 장치가 없다. 물론 이사회를 뛰어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바로 ‘낙하산 총재’다.
이른바 ‘실세 정치인’, ‘실세 각료 출신’, ‘막후 실력자’가 정치권의 입김으로 KBO 총재가 되겠다면 이번엔 이사회가 이를 막을 장치가 없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부터 2009년까지 이사회가 민선 총재를 뽑은 건 유 총재와 12~14대 총재였던 고 박용오 총재뿐이었다. 나머지 9명의 KBO 총재는 정치권이 결정했고, 이사회는 군말 없이 정치권의 결정을 따라야만 했다.
프로야구 초창기만 해도 낙하산 총재가 반드시 부정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국방부 장관 출신의 서종철 초대 KBO 총재는 ‘야구계의 대통령’으로 불렸다. 총재 한마디면 제도와 규칙이 바뀐 데다 서 총재가 전두환 대통령의 군 시절 상관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 총재는 전 대통령의 후원을 등에 업고 야구계의 현안을 풀고, 프로야구의 위상을 높이는데 애썼다. 뭔가 일이 풀리지 않으면 구단주와 독대해 사안을 해결했다.
이용일 전 KBO 사무총장은 “행여 잘못 보였다간 낭패를 당할까, 혹여 잘 보이면 정치권에 줄을 댈 수 있을까 싶어서 대기업 총수도 KBO 총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1988년 서 총재는 임기가 만료되자 미련없이 KBO를 떠났다. 그러나 후임으로 문화공보부 장관 출신의 이웅희 총재가 취임하며 ‘낙하산 총재’는 고 박용오 총재를 제외하곤 2008년 12월 16대 신상우 총재가 사퇴할 때까지 계속 됐다. 정치권의 낙하산 총재 투입은 군사정권과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 정부를 가리지 않았다.
낙하산 총재 9명의 이력은 화려했다. 먼저 전직 각료 출신이 7명이나 됐다. 국방부 장관이 3명, 체신부 장관, 문공부 장관, 법무부 장관, 경제기획원 장관이 1명씩이었다. 정치인 출신은 11대 정대철 총재와 15~16대 신상우 총재 2명이었다. 정권이 KBO를 공기업 정도로 취급하지 않았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인사였다.
8개 구단의 홈구장 가운데 KBO 총재가 지자체를 움직여 건립한 구장은 부산 사직구장뿐이다. 서종철 초대 총장이 부산시장을 설득해 지었다. 이것도 지금으로부터 25년이 훌쩍 지난 이야기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문제는 ‘실세 운운’하며 야구계에 등장했던 역대 낙하산 총재들이 제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역대 9명의 낙하산 총재 가운데 3년 임기를 채운 이는 1, 2대 고 서종철 총재뿐이었다. 4명은 임기 중 입각 혹은 국회의원 당선 등으로 도중하차했다. 6대 오명 총재는 KBO 수장이 된 지 한달도 안 돼 각료로 입각하며 사퇴해 최단명 총재가 됐다. KBO 총재를 잠시 쉬었다가는 휴게소쯤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게다가 9명의 낙하산 총재 중 무려 4명은 개인적인 이유로 사퇴했고, 이 가운데 3명은 부정부패 혐의로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11대 정대철 총재는 취임 3개월여 만인 1998년 9월 건설사로부터 아파트 건설 등 청탁과 함께 수천만 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물러났고, 5대 이상훈 총재도 이듬해 국방장관 재직 당시 해군의 대잠수함 초계기 구매와 관련, 미국의 방산업체 제품을 선정해주는 대가로 기업체로부터 거액을 받은 게 밝혀져 사퇴했다.
16대 신상우 총재는 모그룹 관련 수재 의혹, 통신사 사장으로부터 법인카드를 받았다는 혐의에 이어 자식의 인사청탁 의혹까지 터지며 임기를 3개월 앞두고 서둘러 물러났다.
정대철, 이상훈 총재가 재임 이전 개인 비리 건으로 물러났다면 신 총재는 임기 중 개인 비리에 연루돼 사임한 경우였다.
역대 KBO 총재 취, 퇴임 일지. 총재가 입각하거나 국회에 입성할 때 후임 총재 인선은 발빠르게 이뤄졌다. 반면, 총재가 구속되거나 명예스럽지 못한 이유로 사퇴했을 경우 후임 총재 인선엔 2달 이상이 걸렸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야구계가 ‘실세 총재’에게 기대했던 건 실세답게 정치권에 힘을 써 야구계의 숙원사업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대 ‘실세 총재’를 자임했던 이들 가운데 야구계 숙원사업을 해결한 이는 거의 없었다. 1982년부터 올해까지 2만 명 이상 수용 가능한 야구장은 부산 사직구장과 인천 문학구장만이 생겼을 뿐이다. 사직구장은 서종철 총재의 작품이지만, 문학구장은 KBO 총재와는 별 상관없이 지어졌다.
지금껏 KBO를 ‘비리의 온상지’와 ‘버스 정류장’ 혹은 ‘공기업’으로 격하시킨 장본인은 바로 낙하산 총재들이었다. 그런데도 낙하산 총재를 원하는 이가 있고, 이를 막지 못한다면 야구계 스스로 존엄을 포기하는 셈이다. 더군다나 정치권의 낙하산 총재가 새 총재로 부임하면 내년 대통령 선거 결과에 따라 다시 총재가 바뀔 수 있다. 정치권의 개입은 또 다른 개입을 부르기 때문이다.
결론은 간명하다. 낙하산 총재는 효과도 없을뿐더러 끝도 좋지 않다는 것이다. 역사가 이를 증명했다. 역사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는 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미래의 야구인과 야구팬에게 더욱 좋은 야구를 전해주려면 지금이라도 현명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 시대가 우리에게 부여한 책무다.
신임 KBO 총재, 실세형이 아닌 실무형 전문가가 맡아야 한다 프로야구는 팬이 곧 소비자다. 소비자의 수준은 몰라보게 높아졌다. 그렇다면 야구계도 이참에 선진적인 방식으로 KBO 총재를 선임할 필요가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야구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신임 총재는 3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인사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유 총재가 사퇴 전까지 주도한 9구단 선수수급과 10구단 창단 그리고 대구·광주 새 구장 건설을 차질없이 이어갈 수 있는 야구계에 정통하고 추진력을 갖춘 인사다.
유 총재는 공과(功過)가 확실했다.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인사를 일방적으로 총재 특보로 선임해 야구계의 혼란과 ‘내 사람 챙기기’의 구태를 되풀이한 건 명백한 과오였다. 그러나 9구단 창단을 비롯한 리그 확장과 새 구장 건설을 위해 바쁘게 뛴 건 분명한 공로였다. 여기다 '베이스볼 아카데미'와 '심판 아카데미'를 설립해 야구계에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한 건 대단한 업적이었다.
그러나 유 총재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9구단 선수수급과 10구단 창단 유도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새 구장 건설도 마찬가지다. 지금 필요한 건 유 총재가 주도한 현안들을 무리 없이 승계할 이다. 그렇게 되려면 누구보다 현안을 잘 이해하고, 야구 생태계에 밝은 이가 총재를 맡아야 한다.
두 번째 KBO의 위상 정리와 야구계 현안을 책임지고 해결할 수 있는 소신 있고 청렴한 인사다. 역대 총재들은 취임 때마다 KBO를 개혁하고, 위상을 바로잡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취임과 함께 개혁은 고사하고 안주와 비호로 일관하기 바빴다.
프로야구 역사가 30년이나 됐지만, KBO의 행정은 아직도 불투명하다. 야구계를 통할해야 하는 KBO가 불투명하면 할수록 구성원의 존중과 동의를 받긴 어렵다. 무엇보다 누구보다 ‘페어플레이’를 실천해야 하는 KBO는 2004년 이후 한 번도 공채 직원을 뽑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후 직원은 보강됐다. 야구팬들이면 너나 할 것 없이 KBO 입사를 꿈꾸지만, 현실은 전혀 ‘페어플레이’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공채 출신이라고, 진급에 도움이 된 것도 없었다. 그나마 고무적인 건 최근 공채 출신의 과장이 능력을 인정받아 관리팀장에 선임됐다는 것이다.
각종 비리로 얼룩진 KBO 총재 위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철저한 사전 검증은 선행돼야 한다. 특히나 ‘신세 지지 않은 총재’가 필요하다. 신세는 곧 보은 인사로 규결되게 마련이다. 이 악습의 고리를 끊으려면 공정하고도 투명한 총재 검증 절차를 거쳐야 하고, 그러려면 총재 후보가 누구인지 공개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야구 인프라를 확충하고, 아마추어 야구와 연계해 전체 야구계 발전을 이끌 행정력과 정치력을 갖춘 야구 전문가가 절실하다.
프로야구는 30년의 역사가 흘렀지만, 야구 인프라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다. 프로야구 인기에 편승해 발전 가도를 달려야 할 아마추어 야구도 제자리다. 야구 인프라 확충에 대한 정확한 개념과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관철할 수 있는 실무형 전문가가 ‘실세형 총재’보다 후한 점수를 받아야 하는 이유다.
KBO는 공기업도, 휴게소도, 구단의 전유물도 아니다. KBO는 사단법인이며 규약 제1조에 명시한 데로 ‘우리나라 야구를 발전시키고 이를 보급해 국민 생활의 명랑화와 건전한 여가선용에 이바지’하는 대표체이다.
정치권이 낙하산 총재를 투하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뜻이며 KBO가 낙하산 총재들에게 ‘출세를 위해 잠시 머물렀다 가는 휴게소’정도로 취급받을 이유 역시 없다는 뜻이다. 덧붙여 KBO가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만큼 총재 선임은 이사회를 넘어 전체 야구인들의 지혜와 고민이 함께 더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일부에선 유 총재의 재판 여하에 따라 다시 유 총재를 복귀시켜야 한다는 말도 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유 총재가 무혐의로 풀려난다면 그의 복귀를 막을 명분은 없다. 되레 ‘억울한 누명’으로 고생한 유 총재를 따뜻하게 맞아야 한다. 그러나 재판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무엇보다 혐의가 유죄로 판결 나면 유 총재 재추대는 명분도, 실리도 없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해선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건 죄를 지면 그만한 대가를 치르고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사회다.
KBO 신임 총재 선임은 지체하면 할수록 손해다. 지체하기엔 해결해야 할 현안이 많다. 21세기에 맞는 KBO 총재 선임을 위해 전체 야구계와 소비자인 야구팬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이 마련되길 바란다.
구태와 악습은 닫힌 밀실이 아닌 열린 광장에서만 치유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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