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7 (토)
온 신경이 오후 5시 국회에 쏠려 있었다. 대통령 배우자 특검법 투표가 있고 난 뒤 여당 국회의원들은 죄다 일어나서 본회의장을 나가버렸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반대를 할 건 알고 있었지만 투표조차 하지 않고 나가다니 기가 막혔다. 아니, 반대하더라도 투표로 해야지, 우리에게 그렇게 투표해달라고 머리를 조아릴 때는 언제고 엄중한 시국에 자기에게 주어진 투표권을 행사조차 하지 않는 건지 머리끝까지 분노가 차올랐다. 나갔던 국회의원 두 명이 돌아왔지만, 결국 정족수가 모자랐고 의장은 산회를 선포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내란을 획책한 대통령 직무를 하루라도 빨리 정지시켜야 하는데...! 분노와 함께 절망감이 마음을 드리웠다.
저녁이 되자 시위에 갔던 친구들의 사진과 영상이 SNS에 속속 올라왔다. 강추위에 떨면서 국회 밖을 지켰는데 간절히 바라는 결과를 얻지 못해 기운이 빠졌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뉴스를 보고 절망한 나보다 외려 그들은 활기차고 낙관적이었다. 광장에서 한목소리로 외치면서, 신나는 K-pop에 응원봉을 흔들면서, 선결제로 연대의 마음을 전하면서 서로에게서 희망의 에너지를 주고받는 모습이 놀라웠다. 지치지 않고 될 때까지 싸우겠다는 그들을 보며, 다음 토요일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나가야지 다짐했다. 8년 전, 탄핵 촛불집회 때 아이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광장에 나가서 촛불을 들지 못한 게 내내 부채감으로 남아있다. 이번엔 꼭 역사의 현장에 참여하리라.
2024.12.14 (토)
평소 같으면 여유를 부렸을 토요일 오전, 결전의 날 아침이니 마음이 바빴다. 다들 응원봉을 들고 나온다는데, 나는 응원봉도, 미리 주문한 깃발도 없으니 고전적으로 피켓을 만들어가야겠다 싶었다. 아이 방에서 두꺼운 마분지 하나와 열두 색의 매직을 꺼내 들었다. 뭐라고 쓸까 고민하다 앞면에는 “탄핵이 답이다” 뒷면에는 영어로 “YOON OUT"이라고 적었다. 가장자리에는 희망을 상징하는 별과 간절한 염원을 담은 촛불, 타오르는 분노를 표현하는 불꽃을 그려 넣었다. 글자 하나, 그림 하나에 탄식과 기도를 새겨 넣었다. 지켜보던 아이도 나서서 꾸미기에 동참해 주었다. 그렇지, 이게 살아있는 민주시민교육!
다음은 비장하게 옷을 챙겨 입었다. 어차피 모자를 꾹 눌러쓸 예정이니 머리는 감지 않아도 되겠지. 아래위 모두 발열 내의를 챙겨 입고 양말은 두 개를 신었다. 두꺼운 기모 트레이닝복 상하의에, 모자와 머플러 장갑까지 꼼꼼히 챙겼다. 수족냉증인이라 어그 부츠를 고민했지만 많이 걸어야 할 테니 운동화를 신었다. 집에 핫팩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어쩔 수 없지. 아이에게 인사를 건네고 남편과 집을 나섰다.
서울로 가는 경의선에는 사람이 꽉 차 있었다. 평소 토요일 낮에도 이렇게 사람이 많을까, 이 중에서 몇 명이 여의도로 가는 사람일까, 나처럼 중무장한 사람들을 흘금흘금 쳐다봤다. 홍대입구역을 지나 당산역에 도착했다. 여기서 한 정거장만 더 가면 국회의사당역이다. 역사 안은 짙은 색 롱패딩에 백팩을 멘 사람들로 가득했다. 평소 사람이 많고 북적이는 곳을 극도로 싫어하는 터라 압박감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차분하고 질서 있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다행히 빈 객차가 도착해 여유 있게 승차했다.
국회의사당역에 내렸다. 늦게라도 참석하려던 개신교 시국 기도회는 이미 끝났나 보다. 국민의 힘 당사 앞에서는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이 마이크를 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사이로 “내란 수괴 윤석열 탄핵, 내란 공범 국민의 힘 해체”라고 쓴 상여 행렬이 지나갔다. 흰 상복에 누런 삼베 상모까지 갖춰 입고, 실제 상여를 운반하듯 곡소리를 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으로 갔다. 본 집회는 한 시간 뒤부터지만 이미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었다. 앉을 자리를 찾을 수 없어서 국회의사당 대로를 가로지르는 여의도공원 중간쯤 흙바닥에 방석을 깔았다. 앉자마자 진행자의 구령에 맞춰 구호를 외쳤다. “탄핵해! 탄핵해!” 발언자들의 거침없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엄마 아빠들, 대학생들, 특히 보랏빛 페미니스트 응원봉을 든 젊은 여성들이 확연히 눈에 띄었다. 나도 페미니즘 부스 연명부에 이름을 쓰고 응원봉을 받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