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치는 청어목에 어류이다.
4월부터 6월까지 서해 남해 연안에서 잡힌다. 한때 너무 많이 잡아 우리 연안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다를 몰랐으니 대책인들 제대로 세웠을까. 다행스럽게 옛날 같지는 않지만 최근에 준치가 다시 잡히고 있다.
단오절을 전후에 잡히는 준치가 제일 맛이 좋다. 그래서 단오절식으로 준칫국, 준치만두 등을 즐기기도 했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1924 간행, 2019년 복간)에는 ‘준치는 단오밋처 ㅅ벼를 정하게 가리고 회를 치면 빗이 푸르고 지저분하여 보기에 조치 아니하나 맛은 고소하야 조흐니라’라고 했다.
또 ‘굽든지 찌든지 이렇게 맛있는 것은 자반 중에 으뜸으로 아나니’라며 자반준치를 꼽았다. 맛이 있는데 문제는 가시다.
준치는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에는 ‘진어(眞魚)’로, ‘이재난고, 명수지문, 왜사일기’ 등 일기나 간찰이나 문집에는 ‘시어(鰣魚)’로 표기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 ‘준치어’로, 서유구는 <경세유표>에 ‘쥰치’로 소개했다. 준치는 우리말이고, 시어는 중국에서 사용한 한자어다. 서유구는 진어를 ‘우리말 속어’로 풀이했다.
조선시대에 어류 중에 이문이 많은 것으로는 청어와 석어이며, 그 다음이 시어라고 했다. 이렇게 조기, 청어, 준치는 조선시대 주목한 바닷물고기였다. 중국 명나라 때 장강에서 오월에 잡은 준치를 북경에 공물로 바치기 위해 수 많은 말이 동원되었고 수족관이 만들어졌다. 조선에서도 준치는 진상품이었고, 은사품으로 신하들에게 내렸다.
* 가시의 교훈, 시어다골(鰣魚多骨)
송나라 문인 팽연재는 평생 한스러운 것 다섯 가지가 있는데, 그중 첫째 한은 시어에 잔가시가 많은 것이라 했다. 준치는 가시가 많다. 그런데 이놈의 가시가 등뼈를 가운데 두고 일정하게 같은 방향으로 자리를 잡은 게 아니라 눕기도 하고 서기도 했다. 그러니 맘대로 먹을 수가 없어 조심해야 한다. 달콤함에 취해 올라오는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 요즘 딱 어울리는 말이다. 조선시대 이를 빗대어 조선시대 준치를 선물했다.
해남 연동 해남유씨 녹우당이 소장했던 ‘1629년 윤선도 은사장’을 보면, 내전에서 준치 열 마리를 보낸다는 은사문이 있다. 진어(眞魚)는 준치를, 은사문은 왕실에서 신하에게 내리는 선물을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자산어보>에 ‘비늘은 크고, 가시가 많으며, 등이 푸르다. 맛이 달고 담백하다. 곡우 뒤에 우이도에서 잡히기 시작한다’고 했다. 우이도는 정약전이 동생을 기다리며 눈을 감은 곳이다. 암청색 등과 은빛 배의 색이 청어를 닮았다. 또 아래턱이 위턱보다 길게 나온 것도 같다. 동해에 출몰하는 청어와 달리 준치는 서해에서 볼 수 있다. 어류는 수온에 따라 옮겨 다니니 인간의 기준으로 서식지를 구분하기는 어렵다. 다만 들고 나는 때가 분명하다. 여름으로 가는 길목인 오뉴월이 산란을 위해 황해로 올라온다. 그래서 시어(鰣魚)라 했다. 중국 송나라 문인 유연재는 ‘시어다골’이라 했다. 여름이 지나면 사라지는 준치를 시어라했다. 맛이 빼어난데 가시가 많다는 의미다. 그래서 달콤함에 취하지 말하는 뜻이다. 문득 준치가 강어귀에서 잡히면 여름이 왔음을 알았다. 그리고 가을이면 다시 물러간다. 이렇게 들고 나는 때를 아는 것만큼 지혜로움은 없다. 맛이 좋아서가 아니라 준치의 생태가 인간에게 시사하는 바가 커서 준치(峻峙) 혹은 진어(眞魚)라 했던 것 아닐까.
* 중국 명 황제가 탐낸, 조선 준치?
옛날 준치가 맛이 좋아 사람들이 즐겨 찾아 씨가 마를 위기에 처했던 모양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가시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맛도 좋고 뼈도 많지 않으니 금상첨화였다. <조선일보>(1926.1.11.)에 소개된 내용이다. 옛날에는 준치라는 생선이 가시가 없었다. 하루는 준치가 고기의 왕을 찾아가서, “임금님 내 몸에는 가시가 없습니다. 동무들은 나를 물컹이라고 놀리고 사람들은 나를 가시가 없는 생선이라 먹기 좋다고 자꾸 잡아간답니다. 라고 했다. 왕은 ‘그 까짓것 걱정하지 말아라. 네 몸을 가시투성이로 만들어주마’라고 했다. 그리고 온 바다에 생선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저희들 가시를 한 개씩 뽑아 준치에게 꽂아주어라’라고 했다. 생선들이 왕의 말대로 가시를 하나씩 꽂아 준 후로 준치는 모든 생선 중에 가시가 가장 많은 물고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럼 준치는 정말 썩어도 맛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역한 냄새가 진동한다. 국어사전에는 썩어도 준치를 ‘본래 좋고 훌륭한 것은 비록 상해도 그 본질에는 변함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한다. 명나라 주원장이 준치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준치가 많이 잡히는 남경은 명나라 수도이기도 했다. 준치는 단오 무렵 우리나라 서해를 거쳐 중국 남경 바다에 이른다. 그런데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긴 후에는 물 좋은 준치를 구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장강 산지에서 북경 자금성까지 준치를 옮겨오는 거리가 무려 1,300㎞에 이른 탓이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운반을 하지만 천여 마리 중에 왕이 먹을 수 있는 신선한 준치는 몇 마리에 불과했다고 한다. 나머지는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준치를 맛본 관리들은 장강에서 잡은 싱싱한 준치를 맛보고는 시어가 아니라고 했다고 한다. 왕이 하사한 준치가 진짜 준치맛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라고 한다. 황해에서도 준치가 잡혔지만 최고이 준치는 조선의 바다에서 잡은 준치를 최고로 꼽았다. <세종실록>(1429, 세종11 기유 7월 19일)에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해물 등 물건을 요구했는데, 그 물목에 진어 1830마리, 민어 500마리, 상어 90마리, 망어 380마리, 홍어 300마리 등 어류 19종, 젓갈 10종, 해조류 9종, 기타 5종을 요구했다.
<세종실록>(1429, 세종11 기유 7월 19일), 중국이 조선에 요구한 해물 중 준치(眞魚)가 가장 많은 양을 차지했다(출처, 규장각) |
* 목포 준치회 비빔밥
유달산 길목 오동나무에 보라색 꽃이 활짝 피면 안강망으로 잡은 준치가 어시장에 올라온다. 맛이 절정에 오른 때다. 잡은 즉시 빙장을 해야 할 만큼 생선살이 연하고 부드럽다. 제철이 짧기도 하지만 제거하기 어려운 잔가시를 먹을 수 있도록 칼질을 해야 하는 것도 번거롭다. 맛이 일품이니 철이 되면 준치회를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그래서 진어라고 했을까. ‘옥담시집’의 만물편에 준치를 ‘팔진미’에 비견할 만큼 맛이 좋다고 했다. 산미를 더해 조리하는 것은 살균과 뼈를 연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흔히 생선은 뱃살이 맛있다고 하지만 준치는 뱃살이 딱딱하고 가시가 많아 잘라내는 것이 좋다. 준치가 나오는 철이면 준치회무침을 먹으려는 사람들이 선창가 식당에 줄을 선다. 목포 준치회무침 비빔밥은 조기탕과 함께 나온다. 나오는 준치보다 준치를 찾는 식객들이 더 많아지면서 밑반찬의 정성은 예전보다 살짝 떨어져 아쉽다. 그래도 준치는 준치다.
준치가 가장 맛이 좋은 시기는 단오무렵이다. 단오에 잡은 준치로는 단오철에 먹는 준치국을 끓이기도 했다. 또 준치를 찐 후 살을 긁어 양념한 쇠고기와 수분을 제거한 오이채를 섞어 준치만두를 만들기도 했다. 이것이 여름을 알리는 시절음식이다. 또 준치를 소금에 절여 자반을 만들거나 구이를 만들기도 했다. 일반인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준치회무침비빔밥이다. 준치를 이용한 귀한 음식으로 준치김치, 준치만두 등도 있다. 평택준치김치는 국제슬로푸드협회가 지정하는 ‘맛의 방주’에 등재되기도 했다. 좀 사는 집은 준치김치를 담갔고, 그렇지 않으면 준치 대신 밴댕이를 이용했다. 모두 평택 등 서해에서 잡히는 것들이다. 봄과 여름이 제철인 준치를 어떻게 보관해 김장때 이용했을까.
글쓴이 김준
광주전남연구원 책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