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면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12년이 돌이킬 수 없는 저승의 강을 건넜다. 직선적인 시간에 기초한 물리적 수치로서 2012년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한겨울 매섭고 모진 눈보라가 아릿한 매화향기 흩날리는 봄날의 서정에게 자리를 내주는 시절이 되었다. 그러하되 영화는 어제처럼 작년처럼 관객 옆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
한여름이나 한겨울 영화관은 대개 썰렁하다. 그도 그럴 것이 방학을 맞은 청소년을 위한 만화영화나 가족영화가 개봉영화의 주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관객의 구미에 맞는 예술영화나 문제작을 방학기간에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주목할 만한 몇 편의 영화가 개봉되어 관객들에게 적잖은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이 글에서 나는 <7번방의 선물>,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과 <가족의 나라>를 돌아보려고 한다. 영화에서 만나는 다채로운 주제와 인물, 세태와 문제의식을 살피려는 게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풍성하고 유의미하게 채색하는 영화를 찬찬히 반추하려는 것이다.
<7번방의 선물>, 다시 천만 신화를 쏘아 올리다!
지난 1월 23일 개봉된 <7번방의 선물>은 3월 9일 기준 1205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것은 <왕의 남자>(1232만)와 <광해, 왕이 된 남자>(1230만)에 근접하는 수치로써 조만간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새로 세울 것으로 보인다. 몇몇 전문가들은 역대흥행 1위 <괴물>(1301만)과 2위 <도둑들>(1298만)을 뛰어넘는 대기록을 세울 것으로 내다보기도 한다.
여섯 살배기 아이의 지능을 가진 용구와 그의 딸 예승의 이야기를 눈물과 웃음으로 버무린 영화 <7번방의 선물>. ‘세일러 문’ 책가방을 가지고 싶어 하는 예승을 위해 가방을 구하러 나섰다가 불의의 사고로 인해 여아 강간살해범으로 몰리는 용구. 그가 교도소에서 맞닥뜨리는 좌충우돌 기상천외한 사건이 영화의 중심 줄거리를 이룬다.
용구가 처하게 되는 상황은 작위적이다. 가방 때문에 경찰청장의 어린 딸을 따라나섰다가 아이가 느닷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용구는 살인범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문제는 용구의 상태가 너무도 비정상적임에도 불구하고 신속한 수사결과는 그를 살인범으로 확정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의 검찰과 경찰의 어리석음과 무능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교도소 수감자들이 잠시 머리를 맞대고 도달하는 아이의 사인을 검경의 최고 수사관들이 몰랐다는 사실에 영화는 기초한다. 따라서 <7번방의 선물>은 까다로운 관객에게는 선뜻 다가서지 않는다. 영화구조와 내용이 가족을 축으로 멜로드라마 요소와 신파적인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어서 너무나 빤한 영화라는 느낌을 자아낸다는 결함도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제기하고 있는 사형제의 문제는 설득력 있고 의미심장하다. 지난 15년 동안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던 한국에서 요즘 간간이 들려오는 사형집행 방침은 끔찍하기 때문이다.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인간이 인간을 처형하는 행위가 과연 정당한가, 하는 문제를 <7번방의 선물>은 은연중에 객석에 전달하고 있다. 영화의 부수적인 선물이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사랑의 모순에 대하여!
제63회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 2월 28일 개봉되어 관객과 만나고 있다. 홍상수 영화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있지만, 아이러니와 촌철살인, 과도한 음주와 잉여의 섹스가 배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신선하다. 그러나 지식인, 특히 교수집단에 대한 비난과 상황의 반복, 열려있는 결말은 여전하다.
영화감독이자 강사인 성준은 유부남이다. 그는 영화과 학생 해원을 사랑하고 관계를 맺는다. 아내와 해원 사이에서 방황하는 성준은 사랑의 미로를 헤매면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는 해원과 잠정적으로 작별하지만, 해원을 잊을 수 없다. 그들이 잠시 헤어진 사이에 해원은 영화과 남학생과 동침하고, 성준은 죽을 만큼 괴로워하고 불처럼 화를 낸다.
해원의 엄마와 아빠는 이혼했다. 내일이면 엄마는 아들이 있는 캐나다로 떠난다. 작별을 앞두고 모녀는 처음으로 오랜 시간 같이 지낸다. 식사하고, 길을 걷고 차를 마시며 지난날들과 다가올 날을 예감한다. 해원의 마음은 너무도 쓸쓸하고 아프지만, 엄마는 전혀 그렇지 않다. 캐나다의 새로운 생활로 들떠있는 엄마를 보며 한결 더 외로워지는 해원.
해원이 좋아하는 언니 연주는 7년째 유부남 중식을 남모르게 만나고 있다. 이른바 ‘불륜관계’를 장기간 맺고 있는 두 사람. 중식은 해원이 성준과 맺고 있는 관계가 마뜩치 않다. 해원이 한국인들의 영혼과 정신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그는 그녀가 외국에서 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내면과 관계를 돌아보지 않는 중식과 연주.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있다는 중년사내는 이혼남이다. 우연히 맞닥뜨린 해원에게 과도한 애정공세를 퍼붓는 그는 결혼할 사람으로 해원을 지목한다. 해원은 그런 남자가 싫지 않다. 외려 중년 사내에게서 매력과 중후함을 느끼며 사내의 애정공세에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대체 해원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그녀의 흉중은 독서하기 어려운 중층구조다.
해원이 성준과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이 학교에 나돈다. 그것을 확인하려는 남학생에게 모든 것을 순순히 털어놓는 해원. 성준이 자기중심적이고 우유부단하기에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하지만, 그런 성준을 끝내 놓지 못하는 해원. 연주와 중식의 관계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기라도 하는 것일까. 해원은 정말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나가는 것일까.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21세기를 살아나가는 한국의 평균적인 인간들에게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잔다는 것의 본원적인 의미는 또 무엇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결혼과 실제 전개되는 결혼 내지 이혼의 실체는 또 어떠한가. 가족과 가정, 부부와 애인의 관계설정은 얼마나 견고하고 의미 있는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간다는 일은 정말로 가치 있고 소중한 일인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묵직한 문제를 가볍고 경쾌하게 풀어낸다. 그래서다. 영화가 쉽고 친숙하게 다가오는 까닭이. 또 그래서다. 베를린 영화제 수상을 점쳤던 기자들의 조급증을 질타할 수 있는 까닭이. 세계가 날로 좁아들고, 삶의 조건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시점에 새털처럼 가벼운 영화를 호평할 정도로 가벼운 베를린영화제는 아니지 않는가.
<가족의 나라>, 그들에게 국가는 무엇인가
2006년 <디어 평양>과 2009년 <굿바이 평양>으로 영화계에 이름을 알린 양영희 감독. 평양과 북한, 재일조선인과 그 후예를 다룬 그녀의 영화는 모두 기록영화였다. 이번에 관객을 찾은 <가족의 나라>는 양영희의 첫 번째 극영화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문제는 여전히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조총련계 조선인이다. 그것의 배경에는 북송사업이 자리한다.
지난 1959년부터 20년 동안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이 북한에 송환된다. 전후 일본에서 겪어야했던 고된 세상살이와 조선인 멸시와 차별을 겪은 사람들은 적잖게 자발적으로 북송선에 오른다. 그들은 일본정부와 북한정권이 맺은 협정에 따라 일본의 귀환이 불가능함에도 제 발로 북송선에 탑승했다. 무려 9만 4천명이 그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다.
성호는 16세 나이로 일본을 떠나 북한으로 간다. 그의 북송에는 조직원이었던 아버지의 바람과 판단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북송되기 전에 첫사랑이었던 ‘순이’를 평생 잊지 않고 살아왔다. 평양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둔 성호는 뇌에 종양이 발견됨으로써 일본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허가를 받는데 성공한다. 무려 5년의 지독한 노력 끝에 말이다.
25년 만에 일본 땅을 다시 밟은 성호. 일본인 친구들과 순이 그리고 성호의 누이동생 리애가 그를 맞이하여 작은 파티를 연다. 첫사랑 순이와 오래 전 함께 불렀던 연가를 기억해내는 성호. 그렇게 성호의 귀국일정은 훈훈하고 애틋하다. 뇌종양은 장기간의 치료와 관찰이 필요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성호는 급작스러운 평양 소환명령을 받게 된다.
성호를 동행한 감시원 양 동지는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니고, 동생 리애를 포섭할 것을 종용한다. 일본인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에 익숙하게 살아온 리애는 숨도 쉬지 않고 오빠의 제안을 거부한다. 그들의 행복한 일상에 조금씩 금이 가고, 가족관계는 날마다 불편해진다. 그러다가 들이닥친 소환통보는 청천벽력처럼 가족들을 동요하게 만든다.
“이런 일은 자주 있어. 그곳(북한)에서는 생각하면 안 돼.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야. 단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살아남는 것, 그것뿐이야.”
영화에서 성호가 리애한테 들려주는 북한의 실상은 그런 것이었다.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의 사진이 걸려 있는 성호와 리애 부모의 안방에서 양 동지는 잠시 혼란스럽다. 하지만 성호를 데리고 귀환하는 양 동지의 단호함은 마지막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
승용차 창문을 열고 순이와 불렀던 노래를 나직하게 소리 내서 불러보는 성호. 그런데 갑작스레 창문이 닫히고, 노래는 정지한다. 양 동지가 창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개인생활과 사사로운 감정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사회와 그것을 대표하는 인물 양 동지.
양영희의 영화는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이고, 개인은 국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사이에서 가족이란 또 무엇인지를 캐묻는다. 개인의 판단과 희망을 처절할 정도로 무력화시키는 나라가 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확인한다. 나아가 우리가 지금 맺고 있는 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얼마나 정상적이고 의미 있는지 양영희는 묻고 있는 것이다.
글을 마치면서
작년 말과 금년 초에 주목할 만한 외국영화 몇 편이 상영되었다. 빅토르 위고 원작에 기초하여 뮤지컬 형식으로 제작된 <레미제라블>은 가혹한 수탈에 봉기한 프랑스 민중의 이야기를 사랑과 용서의 서사와 결합하였다.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동양적 세계관, 특히 윤회와 순환의 개념으로 현대문명을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덴마크 영화 <더 헌트>는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에 묶인 어른들의 집단적 광기를 치밀하게 잡아냄으로써 현대판 마녀사냥과 개인의 존엄성을 밀도 있게 성찰하도록 인도한다.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외국영화와 달리 지난 3개월 동안 한국영화는 재미가 대세를 이루었다. 액션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베를린>, 배우들의 치열한 연기대결로 관심을 모은 <신세계>, 독특한 소재로 화제가 된 <사이코메트리>와 <분노의 윤리학>. 그 가운데 나는 <7번방의 선물>과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그리고 <가족의 나라>를 살펴보았다.
우리가 주목하는 가족의 주제를 희비극적으로 풀어내면서 사형문제를 생각하도록 인도한 <7번방의 선물>. 사랑의 궁극적인 의미를 물으면서 가족의 해체까지도 심각하게 사유하도록 하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마침내는 개인과 국가의 관계설정과 여전히 작동하는 국가폭력의 실체를 아프게 조명하는 영화 <가족의 나라>.
영화와 더불어 우리는 세상과 관계와 존재의 의미를 다각도로 성찰한다. 우리에게 허여된 삶의 복잡한 양상과 관계, 거기서 연원하는 슬픔과 아픔, 환희와 좌절, 절망과 미래기획을 돌이키는 것이다. 삶은 여전히 운동할 것이고, 우리가 대면하는 사람들의 면면 또한 변화무쌍할 것이기에! 2013년 제2사분기 영화의 약진과 비상을 고대하면서 글을 마친다.
* 이 글은 <대문> 2013년 봄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