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전도자의 삶에 관한 연구
목 차
Ⅰ. 서 론1
A. 문제 제기와 연구 목적1
B. 연구 방법과 연구 범위2
Ⅱ. 전도에 대한 고찰4
A. 전도의 정의4
B. 전도의 어원적 의미5
Ⅲ. 신, 구약 성경속의 전도자 고찰9
A. 구약의 전도자9
B. 신약의 전도자15
C. 모델 전도자(그리스도)17
D. 모델 전도자(사도바울)21
Ⅳ. 교회사의 전도자 고찰22
A. 초대교회 전도자22
B. 중세시대 전도자 24
C. 종교개혁시대 전도자27
D. 근세, 현대에 전도자29
E. 다락방 운동의 전도자34
Ⅴ. 전도자의 삶의 대한 고찰39
A. 전도자의 기본(오늘의 전도, 말씀, 기도)39
B. 전도자의 회복(개인, 세상, 전문성, 경제)44
Ⅵ. 결 론47
참고문헌49
Ⅰ. 서 론
A. 문제 제기와 연구 목적
마태복음 24장 14절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이 천국복음이 다 증거 된 후에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말세에 전도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확신하며 더불어 주님이 숨겨두신 제자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에 주님이 부탁하신 지상명령을 수행할 제자들을 찾고 세우는 데 진정으로 주님의 원하시는 전도계획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때 우리 주님은 또한 제자들을 만나고 붙여주실 것이라 확신한다.
이 복음 전파 사역을 주님 오시는 그날 까지 지속하기 위해서는 삶 자체가 전도자의 삶이어야 한다. 인생 전체를 통하여 전도자의 자세를 가지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그리스도와 복음을 사랑하며,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성령인도 받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항상 복음에 갈급한 심령을 가지고, 현장을 보며 하나님의 애통한 마음을 가슴에 담고, 현장가운데서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현장을 살리는 전도자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타락사건 이후로부터 모든 인생의 영혼은 아담이 지은 원죄로 인하여 사탄의 지배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일을 감당하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로 작정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아니면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친히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40일 동안 여러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감람산에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셨다.
이 구속의 사건은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뿐 아니라, 그 이전과 그 이후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영향력을 미치는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생들에게도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해 주신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당연성이 전달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마28:16-20. 막16:15-20. 요21:15-25, 행1:1-11과 같이 복음전파에 대한 사명을 위임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는 믿는 자들에게 당연한 사명인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사에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복음 사역을 감당했던 수많은 인물들이 있어왔다. 그들 가운데는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죽음을 무릎 쓰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던 인물들도 있으며, 어떤 이들은 타락한 교회에 반대하여 순수한 복음을 지켜냈던 인물들도 있고,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미개척 지역과 타락한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 온전케 한 자들도 있다. 이러한 교회사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했던 인물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복음인 말씀에 생명을 걸었던 사람들이고, 기도의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목숨보다 사랑하며 전했던 전도의 사람들이었다.
전도자로 살아가야 할 제자들 또한 그들과 동일한 목적과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행위에만 집착하여 전도와 삶이 분리된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전도와 삶이 분리된 이중적인 삶은 전도를 어렵고 힘들게 느끼게 만들며, 전도에 대한 부담을 가져오게 하고, 더 나아가 전도하기를 포기하는 데에 이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본 논문은 전도제자의 삶에 관하여 연구해봄으로서 전도자가 갖추어야 할 삶의 자세가 전도현장과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고, 또한 어떠한 자세들을 갖추어야 하는 지에 대하여 고찰해보고자 한다.
B. 연구 방법과 연구 범위
본 논문은 먼저 전도자의 7가지 삶의 관점에서 연구하고자 한다. 오늘의 전도를 늘 생각하면 오늘의 말씀이 성취되어지고 오늘의 기도를 누리고 있으면 내 현장에 말씀운동이 일어나며, 달란트와 전문성이 오고, 내 인생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이 증거 되기 시작되며, 하는 일에 증거가 와서 경제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7가지 삶이 하나로 연결되어 지면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을 얻게 된다.
본 논문은 제 Ⅰ장에서 본 논문을 통한 문제 제기와 연구 목적, 연구 방법과 연구 범위에 대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제 Ⅱ장에서는 전도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전도의 개념과 전도의 의미를 중심으로 하여 전도의 정의를 내릴 것이며, 주제에 방향을 맞춰 전도의 관점에서 조명할 것이며, 전도의 역사적 당위성과 역할 및 기능을 정리하고자 한다.
제 Ⅲ장에서는 성경속의 전도자 고찰을 통하여 구약의 전도자 7 Remnant를 중심으로 복음전파의 의미를 정의내릴 것이며, 신약에 전도의 모델이 되신 예수님의 전도방법과 사도바울의 전도의 역사적 당위성과 역할 및 기능을 정리하고자 한다.
제 Ⅳ장에서는 교회사의 전도자 고찰을 통하여 초대교회 전도자와 중세시대 전도자, 종교개혁시대 그리도 종교 개혁 이후의 근세와 현대 전도자와 다락방전도운동의 복음 가진 전도자들을 연구해 보고 복음의 중요성과 시대적 당위성을 조명하여 전도자의 역사적 당위성과 세계복음화운동을 위한 역할 및 기능을 상세히 정리하고자 한다.
제 Ⅴ장은 전도자의 삶의 고찰로 임마누엘의 축복을 날마다 확인하고 누리는 전도자의 삶의 기본인 오늘의 전도(복음), 오늘의 말씀, 오늘의 기도에 관하여 고찰하여 보고, 이 세 가지 기본이 전도자와 전도운동, 그리고 현장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에 대하여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제 Ⅵ. 논문의 결론으로 앞서 살펴본 전도자의 삶의 역사적 고찰을 통하여 다양성과 통일성 관점에서 구체화 할 것이며, 3 오늘의 필연성, 당연성, 절대성의 입장에 서서 21세기를 바라보며, 되어 질 수밖에 없는 세계복음화 전도운동과 시스템 속에서 고찰하여 언약 성취의 응답을 결론으로 도출하고자 한다.
Ⅱ. 전도에 대한 고찰
전도는 하나님이 가장 중요시하는 일이요 최고 최대의 관심사요, 하나님의 목적이다. 이 때문에 말씀을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으며 교회를 허락하셨다. 모든 사건을 구원사역을 목적으로 운행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전도를 이해하면 너무나 쉬운 것이요, 새 힘을 얻은 것이요, 교회와 성도가 축복을 받는 것 이전에 축복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누리며 함께 하시는 증거를 전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가장 쉬운 것이 전도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가장 어려운 것이 전도이다. 전도는 하나님이 직접 성도를 통하여 하시는 일이다.
A. 전도의 정의
전도는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 속에 나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다. 이미 주님께서는 다 이루어 놓으시고 진행하신다. 마4:19에 나를 따라오면 내가 너희를 전도자로 만들겠다고 하셨으며, 마28:16~20에 가서 제자 삼으면 마28:20에 항상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이 이루어 졌고 또 이루어져 가고 있다.
전도에 대한 정의들을 제시한 사람들은 많이 있다. 그들 가운데 빌리 그래함(Billy Grahem)은 복음전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삼 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좋은 소식의 선포”라고 정의한다. 분명 이것이 전도에 대한 정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전도에 대한 정의는 현장에서 사실적으로 적용해야 될 현장성에서 다소간의 차이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에 대해 20세기 한국에서 시작된 ‘세계복음화 전도협회’에서 주장하는 전도는 다음과 같다. “현장에서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 지속적으로 말씀 운동을 펼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운동은 예수님께서 친히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지속하신 순수 복음운동이었고, 기도 모임이었습니다.”
이러한 전도에 대한 정의를 볼 때 전도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 - 곧 창세기3장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 떠나서 원죄와 사단에게 장악된 인류의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시는-을 전하는 것과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 지속적으로 말씀 운동, 기도 운동을 펼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라 하겠다.
분명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어떠한 것도 지니고 있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가 죄인이요, 이단의 괴수라고 죄명 부쳐진 죽은 예수를 부활하셨다고 믿는 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교회 건물도, 심지어는 그들을 옹호해줄 지혜로운 자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우리는 전도에 대하여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중 전도는 성직자들만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말씀을 전파하고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 성직자의 임무이긴 하지만, 일의 성격상 성직자들은 교회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불신자들과 접촉하는 것만큼 가까이 그들과 접촉하지 못한다. 이처럼 성직자들만의 전도가 아닌 이제는 모든 구원받은 후사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복음을 전파하여야 한다. 이것은 성직자들만이 아닌 구원받은 모든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다.
또 하나의 그릇된 생각은 “전도는 교회를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되어져 왔다. 이러한 생각은 때때로 교회로 하여금 마치 회사와 같은 경제의 원리를 낳게 되었다. 그러나 그 노력이 모두 허사로 돌아갔을 때, 교회는 마지못해 “전도가 하나의 사업이 될 바에는, 차라리 전도 운동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만일 전도가 그리스도께서 안에서 점화시켜 놓은 불을 자발적으로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며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B. 전도의 어원
구약성경에서는 “전도”라는 단어가 없고, 신약성경에서는 유앙겔리조 즉, “나는 기쁜 소식을 전한다.”와 케루소(“예고하다”: to herald), 그리고 디다스코(가르치다.), 말투스(증인, 순교자), 마데데스(제자) 등에서 나타난다.
1. έυαϒϒελιξω (유앙겔리조, euaggelizo)
“복음”, “기쁜 소식을 전한다.”(Good News)라는 뜻인데, 우리말로 복음(Gospel) 선전한다는 말이다.(막1:15) 복음전도자(Evangelist)란 말이 이 낱말에서 유래되었다.(막1:15, 행21:8) 복음전도자는 천국의 기쁜 소식을 퍼뜨리는 자이다.
2. κηρύσσω (케룻소, Kerusso)
“예고한다.”는 뜻이다. 옛날 임금의 법령을 알리기 위하여 이 곳 저 곳으로 돌아다니는 임금의 전령자를 묘사한 말이다.(마4:23)
3. διδἀσκω (디다스코, didasko)
“가르친다.”의 뜻이다. 예수님께서 복음, 진리를 회당 등지에서 가르치셨다는 말에서 온 것이다.(마9:35; 13:54)
4. μαρτυς (말투스, Martus)
“증인”이란 말이다. 증명 증언하는 자이다. “너희는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살아있는 신임자이다. 「내 신임자이다」 이 말에서 순교자(Martules)란 말을 찾게 된다.
5. μαθητης (마데테스, Mathetes)
제자(disciple)를 삼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사람을 인도하고 교육하고 훈련함을 뜻한다.
C. 전도의 개념
1. 전도는 우리를 통한 하나님의 일이다(고전1:21).
전도는 비(非)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좁은 의미에서의 개념과 새신자를 양육하여 일꾼으로 성장시키고 다시 그들을 삶의 현장으로 보내어 그곳에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전도는 우리를 통한 하나님의 일이다(고전1:21).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 전도를 간단하게 정의하면 “하나님의 나라 실현”이다.
전도를 간단하게 정의하면 “하나님의 나라 실현”이다.
전도란 구원받은 자를 사용하셔서 구원의 사역을 이루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역이다. 여기에 두 번 다시 오해가 있으면 안 된다. 전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구원받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는 절대적인 사역이다.
3. 원죄(하나님을 모르는 죄), 운명, 영적 문제에 해방되는 길인복음(그리스도)을 알려주는 것이 전도다.
첫째, 원죄(하나님을 모르는 죄)때문에 실제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없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문제 올 수밖에 없다. 원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복음(그리스도)이다.
둘째, 인간은 운명에 걸려있고, 빠져나올 길이 없다. 여기에서 완전히 빠져나오는 것이 복음이요, 그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전도이다.
셋째, 그러면서 영적 문제가 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해방 받는 것이 복음이요, 말해주는 것이 전도이다.
4. 하나님의 절대 주권 속에 구원 얻기로 작정된 자들이 믿는 시간표가 전도이다.
성경에서는 구원받은 자들을 하나님의 절대주권 속에서 부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구원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다고 했다.(빌3장, 골2:2-3)
고로 전도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즉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관하고 계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정하셨고 구원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섭리하고 계시며, 이런 사건, 저런 사건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의도대로, 구원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는 시간표가 있는데, 이 시간표를 전도라고 했다.
요한 칼빈도 성경을 보고 다섯 가지 단어로 표현했다.
창세기 3장사건 때문에 모든 인간은 망해버렸고(인간의 전적 타락), 하나님이 인간을 건져내려고 하였지만 인간이 구원받을 만한 조건이 없음으로(무조건적 구원),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사 건지기로 하셨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다 건지는 게 아니라(제한적 속죄), 예정된 사람이 있고,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건지기로 하신 작정이 또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데는 아무도 이 사역을 막을 사람이 없다.(불가항력적 은혜) 이것이 전도이다. 끝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절대로 망할 수 없다는 것이다.(성도의 궁극적 구원)
결론적으로 성경적 다락방 전도에서 말하는 전도의 개념(정의)은 “원죄(하나님을 떠난 죄), 운명, 영적문제에 빠져 있는 비(非)그리스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고, 양육하여 세상에 나아가 빛의 자녀로 사명을 감당하다가 영원한 구원을 얻는 목적을 위해, 신자를 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사역(일)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즉 창조, 예정(계획), 섭리(준비), 경륜(의도, 목적), 작정(시간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뜻한다.
Ⅲ. 신, 구약 성경속의 전도자 고찰
A. 구약의 전도자
구약성경에서는 여러 이방인들에 대한 피나는 전쟁과 멸절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이방인에 대한 자비나 축복에 대한 여지가 거의 없는 것 같이 보인다. 이와 같이 구약 성경에서는 전도에 대한 개념이 희미한 것같이 여겨진다. 오직 이스라엘이라는 한민족을 들어서 선민으로 세워 그들과 하나님은 계약 관계를 맺고 진행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한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를 모든 나라에 선전하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아래서 부름 받은 이스라엘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고 불순종과 불복종으로 선택의 목적에서 이탈하여 나갔다. 그러기에 구약에서는 전도의 의미는 상실되고 전도라는 목적에서도 전혀 위배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전도에 대하여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구약에 나타난 최초의 전도는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갔으나 그곳에서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을 때 이를 거절함으로 받은 모함으로 옥중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것이다. 요셉은 비록 죄인이 되어 옥중에 있을 지라도 그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셔서 자기를 구해 주실 분 아니라 불행을 만난 자에게 긍휼과 자비로 사랑을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란 것을 굳게 믿었다. 그러기에 그는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 자녀로서의 몸가짐과 마음의 자세로 경건함으로 본을 보인 것이다. 요셉의 전도 방법은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일단 바로 왕에게 부름을 받아 해몽을 통하여 인정을 받고서 그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실재성을 증거 하였다. 또한 아밋대의 아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도망갈 때 하나님의 격노로 배가 침몰 직전에 요나는 “나로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며 너희를 위하여 바다가 잔잔하리라” 고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은 만민이 믿어야 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이것 역시 요나가 입증한 전도라 수 있겠다. 요나서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전도적 관심을 제공하는 대표적인 본문으로 기억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단지 이스라엘의 폐쇠성에 대한 훈계이상일 수 없다는 주장을 보이고 있다. 이들 성경 본문들이 보편주의라는 차원보다는 더 높은 것을 관심한다고 보면 이사야나 요나는 그런 시각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구약에서 살필 수 있는 전도의 개념은 하나님의 논쟁거리로 남고 있음을 본다. 따라서 이러한 전도에 대한 논점은 더 나아가서 종말론과 연결지어 살펴진다. 그러나 종말론의 핵심이 좁은 의미의 전도라는 차원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행위를 기다리는 차원으로 집약하고 있다. 전도는 마리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생겨나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서 전도의 이해를 요약해 본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구원은 전 세계적인 구원 이였으며 종말론적 사실로서의 구원은 구약의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다만 기대될 뿐인데 이 종말론적 구원은 결국 메시야의 오심과 연결이 되어진다.
1. 전도사 요셉(창 37:5-9)
요셉은 야곱이 총애하던 아내인 라헬에게서 난 첫 아들이다. 그 이름은 ‘그(하나님)가 더하시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요셉의 출생은(B.C1915-1805) 아버지 야곱과 어머니 라헬의 기쁨이었으므로 모든 사랑을 독차지 했었다. 요셉은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사랑의 사람이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어도 같은 죄인을 돌보고 위로하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이러한 사랑의 모습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창39:21-23) 요셉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부모로부터 특별 대상이었던 것 때문에 네 명의 어머니와 10명의 형들로부터는 미움을 받아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사랑하셔서 고난 가운데서도 보호하시고 인도하셔서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돌보셨다. 이 처럼 요셉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것은 그가 고난 속에서도 결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난을 당할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지켰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을 전하고자 하는 요셉을 사랑하셨던 것이다. 요셉의 생애와 역사를 보면 흠 없는 삶과 의로운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처럼 요셉의 출생은 구속사의 계시를 담고 있다.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한 내용을 보면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 즉 해와 달과 열한별이 내게 절 하더이다 하니라. (창37:5-9) 요셉은 이 꿈 때문에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까지 가게 된다. 하지만 그 모든 역경과 어려움의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기에 형들의 시기에도 죽음이 찾아와도 노예 살이를 해도 감옥살이를 해도 요셉은 흔들리지 않았다. 요셉은 크게 성공해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교만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이 주신 비젼이 있었기에 흔들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요셉은 노예생활을 통해서 경제를 배웠으며 감옥에서 정치를 배웠다. 요셉은 자기의 위치가 비젼이 성취되는 자리임을 알았다. 하나님은 결국 요셉에게 세계선교의 비젼을 심어주셨던 것이다. 총리가 되어 기근이 왔을 때 각 나라의 해, 달, 별들이 와서 절했으며 형들이 와서 절을 했는데 요셉은 이들에게 ‘여호와’를 말했다.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실패자의 모습으로 노예로 끌려갔던 요셉을 하나님은 버려두지 않으셨다. 요셉은 어디를 가던, 무슨 일이 생기던, 그 현장 그 곳에서 꿈을 주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과 대화하며 그 꿈이 이루어질 날을 기다렸다. 그 결과는 바로의 꿈을 통해 이루어진다.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통해 전 세계, 민족, 지역, 가문, 가정 앞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었다. 언제나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전 세계에 알리고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린 멋진 전도자 요셉이었다.
2. 전도자 모세(출 3:10)
모세는 신명기 34: 10-12 “이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그를 애 굽 땅에 보내 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그의 이전에도 그의 이후에도 그와 같은 사람이 없었던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위대한 일군이었다. 40년 광야 훈련소 생활을 마친 모세는 출애굽기 3: 8,10의 모세와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의 도구가 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입증한다. 이러한 입증의 저변에는 모세 자신과 하나님과의 강한 일체의식, 즉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셨다는 분명한 소명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역을 위한 철저한 준비의 과정 속에 갖게 되는 하나님을 향한 소명의식은 하나님의 일군이 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제일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위한 중보의 사람으로서 충성했다. 민수기12: 13의 아론과 미리암의 경우에서처럼 죄를 지은 개인을 위한 간청이라든가, 출애굽기 32: 31,32와 민수기14: 13-19의 경우에서처럼 국가 전체를 위한 것이라든가, 민수기 1: 11-15나 16: 22의 경우처럼 국가의 또 다른 위기에 처할 때라든가 그는 중보자로서 언제나 긴급히 그리고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섰다. 조건 없는 그의 순수하고도 강력한 믿음의 기도는 놀랄만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즉각적인 응답들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모세는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성도를 큰 능력으로 구원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유일한 기도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사유하심을 간구하되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에 근거하여 기도했다. 또 기도의 목적을 인간의 영예나 유익을 추구하는데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신 이름을 드러내려는 데 두었던 점이다. 기도를 드리는 자세나 방법에 있어서도 자신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전적인 은혜에 의거하여 행하였다. 마지막으로 자신보다 남을, 자기만족보다는 이웃의 부족함을 진정으로 채워주려고 기도했다.
3. 전도자 사무엘(삼상 3:1-21)
사무엘은 사울이 즉위하기 전까지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통치자였으며, 선지자직과 제사장직을 겸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사무엘은 모세이래(신명기 18: 18)로 선지자 직을 최초로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기록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부여한 권위를 가지고 초기의 왕인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삼중직을 감당한 예는 사무엘 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다. 사무엘이 활동했던 시기는 사사시대와 왕정국가를 연결하는 시대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종교적, 윤리적으로 매우 타락한 상태에 있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상을 섬겼으며(사무엘상 7: 3),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였다(사사기 19장). 심지어는 대제사장의 아들들이 성막에서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였으며(사무엘상 2: 12-17), 회막 문에서 시중 든 여인들과 동침하기도 하였다(사무엘상 2: 22). 또한 사무엘상 3: 1에 의하면, 당시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보이지 않는 영적인 암흑기였다. 이러한 영적 타락으로 인하여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언약궤를 빼앗기는 수치를 당했다(사무엘상 4: 22).
이러한 시기에 사무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았다. 사무엘의 삶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신실하였다. 그의 사역이 마지막까지 변질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을 행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 을 살았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코람데오(coramdeo)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의 삶을 살았으며 그 구체적 실상이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의 삶으로 나타났다 (사무엘상 12: 23).
4. 전도자 다윗(삼상 16:13)
다윗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다. 그의 집권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 정점이다. 그는 이스라엘 왕들의 모델이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인 왕들의 의의 척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다가 큰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멸하지 아니하신 것도 다윗을 위함 때문이다. 그보다도 다윗의 역사적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앞으로 올 영원한 목자이신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이 된다는 사실에 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이라고 불리 우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호산나 다윗의 아들”이라고 찬양하였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맡길 수 있는 마음에 드는 목회자였다. 다윗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성전에 대한 사모함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을 종교적으로 묶었던 하나의 구심점은 법궤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 많은 혼란과 피폐 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국가적 상황을 바로 세우기 위해 다윗은 법궤를 정치적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자 결심했다. 법궤를 가져오는 것은 단순히 종교를 정비하고자 하는 운동을 전개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법궤를 옮겨오게 된 데는 다윗의 깊은 신앙심이 그 원동력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윗의 하나님을 애타게 사모했던 중심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애타게 찾는 중심으로 연결된 것이다. 또한 다윗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던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함에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목회적 자질이 잘 준비되었던 사람이었다. 다윗은 전쟁이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에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그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여 보고를 한 후에 하나님의 작전 명령에 따라서 전쟁을 수행하였다. 그 결과는 언제나 연전연승 이었다. 다윗은 심지어 원수 갚는 일까지도 하나님만을 의뢰하였다.
5. 전도자 엘리야(왕상 19:8-18)
엘리야는 갈멜산에서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누가 믿는 종교가 참 종교인지를 대결하여 제단에 불이 내려오게 한 엘리야가 믿는 하나님이 참 신임을 알렸고 바알 숭배 거짓선지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가뭄 중에 비가 올 것을 예언 했는데 바알선지자들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은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경고했을 때 호렙산 쪽으로 도망하며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였는데, 로뎀나무 아래서 천사가 가져다 준 음식을 먹고 힘을 얻는 엘리야는 40일을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가서 한 굴에 거하였다. 여호와의 임재 속에서 세미한 음성을 듣고 뉘우쳐 남은 사명을 다하기 위해 수리아왕과 이스라엘 왕에게 기름 붓는 일과 엘리야를 제자로 삼았다. 그리고 엘리사가 보는 중에 불 병거를 타고 회오리바람을 통해 하늘로 승천했다. 수년 후 예수님 때 모세와 함께 변화산에 나타남을 받았다. 엘리야는 북이스라엘 아합왕때의 선지자로서 당시 아합왕은 이방 땅 시돈의 왕녀 이세벨이라는 여인과 정략결혼을 하게 되면서 그녀의 영향을 받아 그녀가 섬기던 바알이라는 우상 신을 섬기게 된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거의 다 잡혀 죽임을 당하고 겨우 목숨을 건진 엘리야는 그릿시냇가에서 까마귀들이나 먹는 떡으로 연명하다가 때가 되어 하나님의 부름으로 다시 아합왕 앞에 선다. 온 백성이 다 모인 가운데에서 850명이라는 바알신의 사제들과 홀로 대결에 나선 엘리야, 그곳은 역사적인 장소 갈멜산 이었다.
결국 엘리야의 제물에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그로인해 바알의 사제들은 에스골 골짜기로 압송 백성들에게 전부 죽임을 당한다. 그로 인해 3년 넘어 안 오던 비가 내리는 이적을 보인다. 안타까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궁으로 향하던 그가 왕궁에서 들여오는 이세벨의 원한에 찬 소리를 전해 듣고는 낙심하여 광야 길로 향하게 되고 결국 엘리사에게 모든 것을 전해주고는 승천한다. 그는 영감을 가진 불같은 신앙인이었고 목숨을 걸고 왕에게 나아가 우상들의 사제들과 대결을 한 담대한 선지자였다.
6. 전도자 이사야(사 6:13)
이사야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의 뜻이다. 이사야의 회복 메시지가 가정된 지상 천년왕국 기간에 문자적으로 성취되리라 한다. 그렇지만 그런 천년왕국 사고는 그리스도께서나 사도들이 모두 선포했던 그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사고에 상충되는 것이며, 이미 그분의 나라는 성령님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 시대가 끝나고 임한 성취의 시대를 괄호시대로 무시하면서 주님이 재림 하신 후에 문자적인 천년 왕국 시대를 통해 구약이 성취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신약 교회를 하나님의 구원계획에서 절단시켜 버리는 비성경적 가정이라 보인다. 요컨대, 이사야의 회복 메시지는 지금 여기서 교회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모스인데, 라비의 전설에 의하면 유다 왕 아마샤의 형제이며, 따라서 이사야는 웃시야 왕의 조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전설은 이사야가 자유로이 왕궁에 출입했고, 왕들로부터 정중한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과, 아모스와 아마샤의 이름이 유사하다는 점에 기인한 생각일 것이다. 실제로는 이사야의 가계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이름 외에 아무 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이사야의 아내는 ‘여선지자’라고 불리 웠지만 이사야처럼 소명을 받은 여선지자였는지, 단지 ‘선지자의아내’였는지 분명치 않다. 장남은 스알야숩(남는 자는 돌아오리라, 사 7:3)이라고 하였다. 이 이름은 이사야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사 6:13)에 기초를 둔 것인데, 그의 예언의 상징이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될 것으로 선포된 이스라엘 회복 사건은 언제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 이스라엘의 회복은 바벨론에서의 70년 포로생활에서의 귀환으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지만, 그런 성취는 사실 이사야가 바라 본 그 찬란한 영광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했고, 더구나 스가랴 같이 귀환 이후 성전 재건을 독려하고 또 재건을 보았던 선지자까지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회복을 미래적 사건으로 조망하고 있다는 점은 바벨론에서의 귀환 정도로 이사야가 바라 본 이스라엘의 회복을 마무리 지을 수 없게 한다. 여기에 이사야가 선포한 회복 메시지의 영적 비밀이 놓인다. 비록 이사야가 그 당대의 유대인적 색채로 예언을 선포했지만, 그 궁극적 성취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에서 이루어질 것이었다. 특별히 주목을 끄는 것은 창세기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개괄하면서 남은 자의 원리, 선택된 자만 구원된다는 구원사의 원리를 제시하면서 가장 강력하게 강조하는 이방인의 영입과 유대인의 남은 자 구원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호세아서나 기타 구절들도 활용하지만, 사도 바울의 심정에서 이사야의 메시지만큼 크게 그의 생각을 움직인 것은 없었던 것 같아 보인다.
B. 신약의 전도자
1. 신약성경에 나타난 전도의 정의
a). 임마누엘
창세기 3장 15절, 출애굽기 3장 18절, 이사야 7장 14절의 주인공, 모든 문제 해결자 예수 그리스도께 오셨고, 하나님 만나는 길을 여신 참선지자, 죄와 저주를 완전히 해결하신 참 제사장,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신 참 왕이심을 믿고 증거하는 자에게 성령의 내주하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시는 진정한 임마누엘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이것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전도였다.
b). 구약의 그림자가 아니라 오신 메시야(그리스도)를 믿고 증거하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전도는 그림자 되시는 메시야(그리스도)를 기다리며 믿고 증거하는 것이지만 신약시대는 오신 메시야(그리스도)를 믿고 증거하는 것이다.
2. 신약성경에 나타난 전도의 이유
a). 이스라엘의 멸망
멸망을 모르는 것은 구원을 모르는 것과 같고, 구원을 모르는 것은 멸망을 모르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의 멸망이 그러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여 구원을 설명하였다.
첫째, 개인, 가정, 세상을 통해 알 수 있다. 창세기 3장 1-20절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개인의 멸망에 대한 것이며, 창세기 6장 1-20절에 나오는 노아와 방주에 대한 사건은 가정의 멸망에 대한 것이며, 창세기 11장 1-8절의 바벨탑의 사건은 세상의 멸망을 말하고 있다.
둘째, 애굽의 노예(출3:7-8)에 대한 사건이다. 창세기 3장의 영적 문제를 모르면 사단(바로)과 세상(애굽)에 포로가 된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3장 18절의 양의 피 언약을 회복했을 때 노예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셋째, 바벨론, 앗수르 나라의 포로(렘33:1-3, 사6:1-13) 사건이다. 창세기 3장의 영적 문제와 창세기 3장 15절 메시야 언약과 출애굽기 3장 18절의 언약을 잃어버리고 전하지 않으면 전쟁이 계속되고 완전히 멸망당하고 포로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넷째, 로마의 속국(행1:6-7) 사건이다. 창세기 3장 문제의 하나님을 떠난 사건과 해결책 창세기 3장 15절 여자의 후손, 메시야에 대한 언약과 출애굽기 3장 18절 피의 언약, 그리고 이사야 7장 14절 임마누엘의 언약을 놓치면 강대국에 속국이 되어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섯째, 후대의 저주(마27:25)에 대한 사건이다. 창세기 3장 문제와 해결책인 창세기 3장 15절, 출애굽기 3장 18절, 이사야 7장 14절, 마태복음 16장 16절의 언약의 놓치면 후대가 저주를 받고 실패함을 말하고 있다.
b). 해결책
이 땅에는 사람의 손을 초월한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하다.
구약에는 메시야,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즉 메시야(사7:14) 언약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오신 메시야(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 베드로의 고백처럼 인간의 모든 문제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 이것을 계속적으로 성경은 알리고 있다. 이것이 구약의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알리고 있는 사실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것을 놓치고 세상에 노예되고, 포로되고, 속국되어 살다가 멸망당하게 되는 것이다. 즉 영적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육신적인 노력으로 모든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려고 하다보니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창세기 3장의 인간의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 되는 죄문제, 저주문제, 사단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C. 모델 전도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이 땅에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세우는데 전 생을 투자하셨다.
로버트 콜만은 그의 저서에서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도록 몇 사람을 부르심으로 시작되었으며, 이것은 즉각 주님의 사역의 방향을 보여 주는 것이었으며, 주님의 관심은 대중에게 도달하기 위한 프로그램에 있었던 게 아니라, 그 대중이 따를 사람들에게 있었다.”고 말한다. 놀랍게 보일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사역은 행사를 마련하거나 심지어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기도 전에 이러한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방법이었음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계획의 우선적인 목표는, 자기가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신 후, 자신의 생애를 증거하고 사역을 계속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는 일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3년 공생애 기간에 너무나 쉬운 방법을 사용하였으므로, 놓치기 쉬운 방법이다. 즉, 부르신 후에 계속적으로 함께 지내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역방법의 정수로 “With Principle”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사역은 자기가 원하는 자를 불러서 함께하시고 또 전도도 하며, 엄청난 권세를 주시기 위해 그의 3년 반의 공생애를 다 보내셨다고 할 수 있다.
1. 예수님의 전도방법
예수님은 복음전파를 위해 몇 가지 다른 방법들을 사용하셨다. 그분은 한 가지 방법만 고집하지 않았고 환경에 따라 그의 방법과 접촉에 있어 다양하였다. 많은 경우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전도하셨다. 사실 레이튼 포드는 복음서에 개인적으로 면접한 기록을 35번으로 확인하였다. 이런 경우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말씀하셨다. 비록 그가 대중들에게 종종 사역했을지라도 예수님은 결코 개인적인 면을 잊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막달라 마리아에게, 십자가상의 강도에게, 그리고 우물가의 여인에게 말씀하신 때를 발견한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 속에 복음전도를 계획하고 계셨다. 그분은 잃은자를 도로 찾기 위해 오셨고 그 목적에서 빗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모든 인류를 용납하셨고, 구원의 대상으로서 그들을 다루셨다. 그분은‘쉬운 신안주의’에 빠지지 않으셨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복음전도에서 기도의 필요성과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전도의 다른 차원을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그가 할 수 있는 어디서나 언제든지 개인적으로 사람들에게 증거 하셨다. 그분은 모든 팔레스타인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셨다. 그분 구원의 길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셨고 그를 따르라고 도전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미래의 사역을 위해 훈련함으로 특별한 주의를 받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제자들을 증가시키셨다. 예수님은 ‘사람을 낚는 어부’(마 1:17)가 되라고 그의 제자들을 부르심으로 그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분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 하도록 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명령하심으로 지상 사역을 끝마치셨다(행 1:8).
예수님은 이러한 두 가지 말씀은 지상에서 그의 사역의 버팀목과 같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오셨고, 그분은 그의 제자들에게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하라고 명령하셨다.
a) 선택
주님의 계획은 분명하셨다. 태초부터 계획하시고 만민에게 전할 것과 영광의 날을 계획, 승리할 것을 계획하시고 한순간도 그의 목표를 잊으신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먼저 사람을 부르심으로 시작되었다(눅6:12-13). 제자들은 세상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예수님의 방법이었다. 예수님의 우선적인 목표는 예수님이 승천한 이후 예수님의 생애를 증거하고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는 일이였다.
b) 동거
예수님은 사람들을 부르신 후에 계속적으로 함께 지내셨다. 이것이 그의 훈련 프로그램의 정수였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동거한 것은 제자들을 사역자로 변화시키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제자교육을 위해 일주일에 한번 불러 모은 것이 아니라 함께 동거한 것이다. 예수님의 동거는 제자공동체가 발전할 방법을 보여준 것이다.
c) 모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배워야 할 일들을 몸소 실천하심으로 제자들에게 본을 보여 주셨다. 성경을 90회 이상 인용하심으로 성경의 권위를 보여 주시고, 기도의 본을 보여 주시고,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통하여 믿음으로 환경을 극복하는 법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격적 가치, 적절한 교훈, 학생이 가져야 할 지식, 세상에 대한 지식 등을 가르치고 가르친 그대로 살았다.
d) 순종
주님은 완전하신 분이시므로 그의 계획도 완전하다. 사람의 모든 것을 아시므로 우리에 대한 계획도 완전하시다. 우리를 부르실 때 완전한 승리를 예비하셨다. 부르실 때 완전한 계획을 수립하셨다. 구원받은 자를 위하여 내세까지 준비하셨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궁극 목표이다.
e) 위임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제자들을 ‘와보라’(4개월), ‘나를 따르라’(10개월), ‘나와 함께 있으라.’(20개월)의 교육 이후 ‘내 안에 거하라’(위임)는 위임의 단계에서 사역을 위해 세상에 보내졌다. 위임은 끝이 아니라 변화를 의미한다.
f) 분여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이시기 위해 오신 분이며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오신 분이다.(벧전3:18, 요14:6) 예수님이 서는 곳은 하나님이 관심 가진 곳이며, 예수님이 우시는 것은 하나님이 슬퍼하는 것이며 예수님이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다.
g) 점검
때가 되었을 때 예수님은 일련의 사역을 위하여 제자들을 훈련시키셨지만 그들이 모든 훈련과정을 마쳐 최종적인 위임을 하실 때까지는 철저하게 그들을 관리하셨음을 볼 수 있다. 주님은 제자들을 홀로 보내어 일하게 하신 후에 다시 모아서 그들이 경험한 사실들을 서로 이야기함으로 그 일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또 새로운 사실들을 가르쳤다.
h) 재생산
예수님의 제자들이 제자를 재생산 할 것을 기대하였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제자들의 인생 안에서 복사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제자 재생산의 필요성을 알려주었다. 지상명령은 제자들이 세상으로 나가 사람들을 자기와 같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즉 복음이 계속하여 전파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재생산하는 것뿐이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한사람 또는 한 무리를 주권적으로 직접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기본원칙은 훈련받은 사람들을 통하여 또 다른 사람을 부르시고 훈련시키는 것이다.
D. 모델 전도자(사도바울)
바울은 사도행전 11장 19-30절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만남을 통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안디옥 도시에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는 전도의 역사가 일어났고, 사도행전 16장 12-40절에 빌립보 자주 장사 루디아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그 가문까지 복음화 되었고, 빌립보 교회가 루디아의 집에서부터 출발되게 되었다. 또한 빌립보 감옥의 전도의 역사를 통해 간수가 회개하기도 하였다.
사도행전 18장 1-4절에서는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와의 만남을 통해 고린도 지역 복음화와 나아가 로마 복음화까지 하게 된다.
사도행전 13장 1-12절에서는 바보라는 섬에 총독 서기오에게 복음을 전했고, 사도행전 16장 11-18절에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인 빌립보 지방에서 귀신들린 무당을 건져내었다. 사도행전 19장 8-20절에서는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 말씀운동을 폄으로 종교와 마술, 점술에 빠진 에베소 지역에 교회를 세웠다.
바울의 전도운동은 대략 사도행전 13-15장에 기록된 제1차 선교여행, 사도행전 16-18:23절에 기록되어 있는 제2차 선교여행, 그리고 사도행전 18장 24~20장 6절에 기록되어 있는 제3차 선교여행을 들 수 있다. 또한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의 스페인 전도에 대해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로마서를 통해서 스페인까지 갔다 왔으리라고 보아진다.
지금까지 신구약 전도운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구약의 전도운동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만날 수 있는 언약을 주셨는데, 그 언약이 창세기 3:15절의 여인의 후손, 곧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메시야가 오시기까지 피의 언약을 지키라고 하셨다. 또한 이 언약을 붙잡을 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임마누엘로 나타나며, 그 메시야가 오시기까지 기다리며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구약의 전도운동은 족장시대, 출애굽과 가나안시대, 왕정시대, 포로시대 등으로 구분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신약의 전도운동은 구약에 증거된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증거하셨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완성자이시며,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오신 참인간이며, 참하나님이심을 증거하였고, 베드로는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부활하사 성령으로 역사하고 계시며,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 오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고, 사도바울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 지역에까지 선교하였던 인물이다.
Ⅳ. 교회사의 전도자 고찰
A. 초대교회 전도자
AD 325년 콘스탄틴 황제는 니케아 회의에 318명의 감독들을 소집했다. 그 감독들은 서쪽 스페인에서 동쪽 페르시아까지의 교회들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이었다. 어떻게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의 적은 무기들이 강력한 힘을 반영하는 니케아 회으로 까지 성장할 수 있었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 사도행전의 전도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기 교회의 전도를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사도행전의 전도명령(행1:8)은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지리적 개념에 서 있다.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땅 끝까지라는 순서를 강조한 것이라기보다 모든 지역이 전도의 동일한 대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전도의 동등한 대상으로 관계되어 진다. 사도행전의 핵심 구절은 1장 8절이며, 누가는 이 구절을 중심으로 해서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1-7장)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8-12장) 결국은 땅 끝까지 이르는 기독교의 전파 과정을 동심원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1장 8절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단어는 “권능”과 “증인”으로서, 이 두 단어는 이책 전체의 주제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권능”과 “증인”의 관계는 따로 떨어져서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되는 연쇄반응의관계인 것이다. 그 예로 누가는 1장 8절속에서 “권능을 받고” “증인 되리라”는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의 1장8절의 의도 속에는 “”성령이 함께 하시고 성령이 시키시는 사도들의 행동“을 암시적으로 주지시킴으로써 모든 되어지는 일들은 성령이 하시는 일임을 보여 주려고 하는데 있다.
18세기 요한 알브레히트 벵겔 같은 사람들은 ‘성령행전’이라는 제목을 붙일 것을 제안했다. 그는 누가의 두 번째 저술은 “사도들의 행전이라기보다는 성령의 행전을 기술하고 있다. 첫 번째 글이 예수 그리스도의 행전을 기술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고 썼다. 그러한 개념은 ‘성령행전’이라는 제목의 주석(1895년)을 발간한 아더 피어슨에 의해 널리 보급되었다. 누가의 기사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에 대한 약속, 성령의 은사, 성령을 부으심, 성령 세례, 성령 충만, 성령의 권능, 성령의 증거와 성령의 인도에 대한 언급이 도처에 나와 있다. 성령의 역사를 제쳐 놓으면 복음의 진보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성령이 없었더면 초기교회는 집안에서 나오지 못하는 겁을 빈약한 무리들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지만,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세계로 뻗어 나갔으며 그들의 힘이 증가하게 되었다.
2. 예루살렘 교회의 전도
예루살렘 교회는 최초의 교회이며 예수께서 직접 세우신 그 교회는 전도에 힘쓴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주저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했으며, 또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쉬지 않고 전도하였다. 예루살렘 교회에 있어서 전도는 모든 이들의 삶이었으며, 일상생활이었다. 그들은 특별한 전도훈련을 받은 적도 없었고, 또 누가 전도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다. 다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자 그들은 열심히 쉬지 않고 복음을 전파했다. 그 결과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셔서 한 날에 삼천 명이나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말씀을 듣는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이 전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를 따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마지막 말씀하신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라는 명령에 대하여는 아직도 그들에게 높은 담이 있었다. 스데반의 순교이후 원근 각지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며 이것이 곧 복음화의 확산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 원인이다. 빌립은 사마리아에 내려가 복음을 전하였고, 다른 일부는 가이사랴, 안디옥, 다메섹, 구브로섬 등 먼 이방지역에까지 전하였다.
비록, 예루살렘 교회가 복음을 열정적으로 하였지만, 이들의 전도는 제한적인 전도를 하였다. 즉,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에게만 전함으로써,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국한되고 이방인에게는 전해지지 않은 우를 범한 것이다. 이것은 곧 주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을 어기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사도행전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는데, 예루살렘 교회는 그렇게 하질 못했다. 여기에는 유대인의 선민의식과 함께 이방인에 대한 그들의 배타적이고 깊은 선입견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3. 안디옥 교회의 전도
안디옥 교회의 전도 방향은 사도바울의 전도 사역에 준하여 그 이야기를 진행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안디옥 교회의 전도의 큰 핵을 이룬 인물이 사도 바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안디옥 교회가 전도의 핵심지가 될 수 있었던 부분을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핍박의 산물로 세워진 최초의 이방교회로서 안디옥 교회는 복음전파를 위해 전력을 다하였고, 이방 선교의 요람이 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안디옥이야말로 전도를 위한 전략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
이 지역은 동쪽으로 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가 놓여 있고, 로마에서 안디옥까지는 육로로의 여행이 가능하며, 남쪽으로는 예루살렘과 아라비아까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육로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안디옥을 통과해야만 했다. 즉 안디옥은 교통의 요지였으며 예루살렘 교회와 친밀한 연락 간계를 맺을 수 있는 곳이었다.
안디옥 교회의 전도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 안디옥 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최초로 바울과 바나바를 전도자로 파송 하였다는 사실이다(행13:2-3). 이것은 곧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것이며 이 순응하는 교회를 하나님은 사용하셨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서 볼 때 교회의 여러 기능 즉 예배, 교육, 봉사, 교제, 전도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시급한 기능이 전도하는 기능임을 깨닫게 해 준다.
결국 사도행전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이방인을 향한 구체적인 전도활동은 안디옥 교회의 설립과 함께 시작되었고 안디옥 교회의 전도는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그 역동적인 시작이 되었고 바울과 실라를 통해 본격적인 활동이 일어난다.
B. 중세시대 전도자
AD 500년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주요 종교였지만, 많은 지역과 그 이전의 제국의 경제 내의 부족들은 비기독교로 남아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이전에 로마에 의 해 지배되었던 지역으로 이주해 온 게르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왕국들을 세우고 땅이든 재산이든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무력으로 손에 넣었다. 이러한 유입은 로마 제국의 봉괴를 촉진시켰지만 고라교회의 봉괴 원인이 되지는 않았다. 그 대신에 교회는 로마 정부의 붕괴에 의해 진공상태가 되었다. 로마 교황들과 다른 교회의 지도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이 부족들을 교회로 끌여들이는 행동을 취했다. 게다가 교회는 복유럽과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아직까지 제대로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많은 지역들을 개종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AD 1500년 까지 유럽은 완전히 기독교화가 되었다.
1. 전도자 어 거 스 틴(Sanctus Aurelius Augustinus, 354-430)
종교개혁을 낳은 자가 어거스틴 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내적으로 고찰하여 보면 종교개혁의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가 어거스틴에 의해 완벽하게 윤곽이 잡혔고 공식화되었기 때문이다. 펠라기우스는 원죄를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하였으며 어거스틴은 정통적인 교리에 입각하여 그 자신의 신학사상을 밝혔는데 곧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고 자유의지가 주어졌으나 아담이 그 자유의지를 악용하여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가 범한 죄의 결과는 전 인류에게 매인 것이다. 선을 상실하고 자유의지는 무의미하게 되었으며 모든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의 구제 능력이 없으며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가 도나튀스트(Donatist)와의 논쟁을 통하여 교회관이 형성되었는데 바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는 거룩한 것이며 교회의 공동성(Catfolicity)을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말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또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있을 수 없음으로 그것을 분열시키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간 사람이다. 그러므로 정통 가톨릭 밖으로 나간 교회는 정통 교회와 재 연합해야 한다. 사도적 교회가 순전한 교회라는 사상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이를 시정하여 주고 있으며 베드로 사도 개인과 그의 후계자와 연관시켜 그들에게만 특별한 권위가 부여되었다고 그의 후계자와 연관시켜 그들에게만 특별한 권위가 부여되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다만 베드로를 “교회의 인물, 혹은 좋은 목회자” 또는 “교회 일치의 대표자”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이 이어간 교회만이 순전한 교회(ture church)라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을 바로 잡아 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어거스틴 은총 교리는 교회의 권위를 높여 주게 되었고 그의 “그리스도의 몸”의 교회관은 교회 일치와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되어 이후 신학사상에 많은 영향력을 미친 것이다.
2. 전도자 피터 왈도(Peter Waldo)
피터 왈도(Peter Waldo)는 12세기 초에, 남부 프랑스 사람으로 매우 부유한 상인이었다. 그는 그의 부를 가난한 자들과 나누고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를 따르는 자들을 “왈도파” 또는 “리용의 가난한 자들”(poor men of Lyons)이라 불렀다. 왈도는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신약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했으며, 평신도 설교자들을 배출시켜 프랑스 북부와 라인강 유역에 전도하게 하였다. 많은 박해 속에서도 왈도파는 그들의 선교 사역을 계속하여 북부 스페인,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그리고 동부 독일로 전파하였다.
3. 전도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는 14세기경의 뛰어난 학자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여 복음전파의 사역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신약성경의 모형대로 둘씩 전도대를 조직해서 전도 여행을 실시했으며, 그의 제자들을 일컬어 “롤로즈(Lollards)”라 불렀다. 그들은 로마교 교황 정치교직제도의 비리들에 대항하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성경을 담대히 전파하였다. 위클리프는 “교회의 법은 오직 성경”뿐이며, 교회란 교황이나 추기경들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임을 가르쳤다. 그리고 교회의 확실하고 유일한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심을 담대히 증거 하였다. 라투렛은 이러한 위클리프의 제자들인 “롤로즈”가 영국 개신교 부흥의 원동력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4. 전도자 얀 후스(Jan Hus)
얀 후스(Jan Hus, 1373-1415)는 남부 보헤미아를 중심으로 당시의 교황제도에 반발하면서, 아울러 평신도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그는 존 위클리프의 예정구원설을 기반으로 성경를 그리스도교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인정할 것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입장을 보였으며, 교황 등 로마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다가 1411년 대립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교회로부터 파문당했으며,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415년 화형에 처해졌다.
그는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엄격한 중세교회를 상대로 개혁을 계속 주장하게 했다. 이러한 후스의 영향력은 후스의 처형 뒤 후스의 신학사상과 뜻을 이어받은 강력한 개신교 공동체인 보헤미안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전 유럽을 향해 퍼져 나갔다. 또한 17세기 유명한 평신도운동인 모라비안 선교운동에 많은 기여를 했다.
C. 종교개혁시대 전도자
중세 후기 동안 로마교회는 점점 더 부패되었다. 교황들 대부분이 여자들과 함께 살았고 사생아들의 아버지였다. 교회 사무관들은 교회 직분을 사고팔았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부유하게 되기 위해 높은 지위들을 찾았다. 많은 주교들이 교육이 부족했고 목양의 의무를 소홀히 했다. 무절제와 부도덕이 사제들 속에 성행했다. 일반 백성들은 압제와 두려운 강제 노역으로 비참하게 살았다. 여전히 이러한 암흑 시기에도 하나님은 몇몇의 촛대를 밝히셨다.
마르틴 루터가 로마 카톨릭 교회를 도전하기 오래 전에 종교개혁의 불씨를 점화하기 위해 준비했다고 한다. 중세기의 복음전도는 주로 세례를 받기 위해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세례는 교회로 개인을 데려오는 것이라고 가르쳤고 구원을 가져올 수 있는 것으로 가르쳤다. 사제들은 구원은 세례와 미사를 통해 오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때때로 교황들은 이런 희생을 원천징수 세를 요구하거나 또는 그러한 실행을 하도록 협박함으로 왕들과 왕국들을 두려워했다. 이러한 권력을 사용함으로 교황 그레고리 7세는 황제 헨리 4세로 하여금 교황에게 용서를 구하도록 3일간 눈에서 무릎 꿇고 있게 하였다.
교회 예배는 대단히 형식적이고 화려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성경의 권위는 매우 약화되었다. 많은 사제들이 간신히 글을 읽을 수 있었다. 백성들은 단지 라틴어로 사용된 성경 때문에 성경에 대해 잘 몰랐다. 라틴어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알았다.
1. 전도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마틴 루터(1483-1546)는 그의 저작물들『크리스천 귀족에게』, 『교회의 바벨론 유수』를 통해 “만인제사장론”을 강조했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확신하게 하자. 곧 우리 모두가 동일하게 제사장들이며, 말씀과 성례에 있어서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순수한 기독교를 재발견하려는 운동이었다. 오로지 성직자들만이 미사(The Mass)를 행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가 몸과 피를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 제물로 바칠 수 있었듯이 성직자들만이 죄 사함의 성례전으로서 인간의 죄를 사면해 줄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또 인간에게는 영원한 벌을 줄 수가 있었다. 루터는 이와 같은 과오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일어난 운동이 종교개혁이었다. 그는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인간적인 공로를 인정하였던 중세 천주교의 인간 중심적인 종교에 대항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이신득의(justication by faith)를 가르쳤고,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구속의 능력을 믿는 것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sola fide) 인간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충분하다고 하였다.
루터는 종교 개혁은 가톨릭교회의 교리 신학에 대한 개혁으로 인간 중심적 신학이 신 중심적인 신학으로 돌변하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즉 신 중심적 종교에 있어서 만물의 종국적인 결정자는 “하나님”이지만 인간 중심의 종교에 있어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선출하거나 선택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루터는 신학적인 복음주의 신앙을 확립한 실제적인 개혁자였다. 이 운동으로 계속 정치, 교육, 윤리, 철학, 문학 그 밖의 여러 지도적인 면에 철저한 변혁을 일으키게 하였고 후세 전 인류 사상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중세 교회의 타락상을 고발하고, 오직믿음, 오직성경, 오직은혜로 회복할 것을 주창하며 교회와 신앙의 개혁운동과 사회개혁에 불을 지핀 성직자였다.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모든 성도가 읽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교회음악에도 지대한 공헌을 끼쳤다.
2. 전도자 존 칼빈((John Calvin)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루터처럼 “만인제사장론”을 강조했지만 루터와는 다른 각도에서 그것을 주장했다. 칼빈이 루터처럼 만인 제사장론을 주장한 점은 같으나, 차이점은 칼빈이 루터보다 목회자의 중요성을 더 강조한 점이 다르다. 그리고 칼빈의 만인 제사장론은 루터의 주장보다 덜 조직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만인제상론을 강조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들로서 자신들을 하나님께 바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는 제사장들이다(계1:6; 벧전 2:9). 우리는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나아가 우리 자신과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바친다.”
칼빈은 종교개혁사상에 그가 강조한 것은 교회행정에 평신도를 참여시킨 것이다. 평신도가 교회행정에 참여한 것은 초대교회 때였는데, 그 후 1400년 동안 오직 성직자에 의해 다스려지다가 종교개혁의 물결에 의해서평신도도 참여케 되었다.
3. 전도자 쯔빙글리(Zwingli)
쯔빙글리(1484-1531) 스위스의 위대한 개혁자 울리히 쯔빙글리. 과격한 종교개혁자였던 그는 교황정치를 반대하고 민주적 교회정치의 길을 열었으며 개혁교회가 개신교회 한 교파로 출발하게 한다. 그는 교회상을 정립하고, 잘못된 금식관련 교회법과 성경에 기초하지 못한 교회의 독신제도를 지적한다. 그의 개혁은 실패로 비춰지나 그의 주장은 블링거와 칼빈으로 이어진다. 오직 성경에 근거한 교회개혁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1484년 1월 1일 스위스 토겐부르크(Toggenburg) 지방 빌트하우스(Wildhaus)에서 출생하였다. 1502년 바젤대학교에 입학하여 문학을 공부하면서, 인문주의적 교양을 쌓았으며, 인문학자 비텐바흐(Thomas Wyttenbach 1472~1526)를 추종하였다. 1506년 9월 16일 사제 서품을 받고 10년간 글라루스에 있는 교회의 신부로 있는 동안 세 차례나 종군목사로 종군하였다가 1515년 용병제도를 비판하며 군종 신부를 사임하였다. 이후 아인지델른(Einsiedeln)으로 옮겨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 1519년 취리히의 대성당의 설교자가 되어, 체계적인 성경강해를 하여 시민에게 많은 호응을 받았다.
D. 근세, 현대시대 전도자
일반적으로 근, 현대 교회사 시대를 17세기 이후로 분류하며 이 시대에는 인간의 사고주체가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변화하였으며, 개혁교회의 근본사상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인본주의적 사조는 기독교를 합리적인 종교로 인식시키려는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는 진정한 복음을 전파하고자 복음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1. 전도자 진젠돌프
진젠돌프(Nicholas Ludwig von Zinzendorf, 1700-1760)는 모라비안 선교운동의 지도자로 많은 평신도들을 선교에로 이끄는 큰 역할을 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 중에는 목수 데이비드 니츠만(1696-1772), 도공 요안 도버(1706-1766)등이 1732년에 덴마크의 인디언마을에 가서 평신도로서 선교 사역을 담당했다. 기록에 의하면 1732년부터 1760년까지 226명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그린랜드(1733), 버진 아일랜드(1737), 수리남(1735), 골드 코스트와 남아프리카(1737),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1740), 자메이카(1754), 안티구아(1756)등으로 파송 받았다. 이러한 선교 운동은 그 밖의 유럽 여러 지역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경건주의의 열기 아래 예전부터 수행해 오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선교적 열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 모라비안 선교 운동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에 선교단체들을 설립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영국에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선교적 소명에 큰 각성을 가져오게 했다. 윌리엄댄커(William Danker)는 이렇게 모라비안 선교운동을 평가했다. “모라비안 선교 운동이 세운 가장 주요한 공헌은 그들이 강조한, 곧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선교사들이며, 증거는 그들의 날마다의 직업을 통해서 증거되어져야 한다는 점에 있다.
2. 전도자 요한웨슬레
웨슬레는 런던에서 약 400리 되는 곳에 있는 엡 워드(Epworth)에서 1703년 6월 17일 영국 교회에서 소속된 사무엘 웨슬레와 경건한 청교도 파 부인 수산나(Susanna Annesley)사이에서 열다섯 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1세 때 유명한 런던의 Charter House School에서 6년간의 교육을 받은 후 영국 옥스퍼드에 있는 Christ Church College에 1720년에 입학하였고 그 후 15년을 대부분 옥스퍼드에서 학생으로 혹은 교수로 있었다. 1725년에 집사로 안수를 받았으며 3년 뒤에는 영국 감독 교회의 목사로 안수 받았다. 노쇠한 부친을 도와 2년 간 엡워드에서 5마일 떨어진 교회에서 목회하였고 1729년 옥스퍼드에 돌아와 성결클럽(Holy club)의 지도자로 이 클럽을 육성시켰다. 1735년 10월 14일에는 미국의 죠지아 주로 향하였다. 이는 북미인디언들에게 선교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2년 뒤인 1737년 12월 2일 무거운 마음으로 귀환하였고 1738년 올더스 케이트(Aldersgate)에서 체험한 후 설교자로 신학자로 전도와 저술로써 헌신하다가 1791년 3월 2일에 잠들었다.
그는 여섯 살 때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에 목사관이 불에 타서 구사일생으로 구출된 경험이 있었다. 그는 후에 이 일에 대하여 고백하기를 “타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조각(슥 3:2)" 이라고 생각하여 하나님께 일평생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
성경적 기독교를 실현하고자 하는 웨슬레의 갱신운동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은 “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비전을 가진 전도의 열정 속에서 나타난다. 웨슬레는 모든 영혼을 새롭게 함으로 교회를 새롭게 하고자 하여 열심히 전도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사람들을 깨우치며 신생(the new birth)하도록 힘썼다. 웨슬레는 말하기를 신생함으로 나타나는 “필연적인 열매”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하여는 전적인 순종이며 그 분의 뜻에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하여는 전적인 순종이며 그 분의 뜻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 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웨슬레 는 교회조직이나 제도를 하나님을 향한 중요한 의무를 수행하는 즉 전도하는 데 그 가치가 있다고 보았고 교회가 본질적인 전도 생활에 지장을 받게 될 때에는 이를 묵과하지 않았다. 그 예로 웨슬레 는 교회가 정한 교구 제도에 구애받지 않고 전도하였으며 노천 설교도 서슴치 않았고 평신도들을 동원하여 설교하게 되었다. 이런 것들이 당시 영국 교회의 제도와 법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나 웨슬레는 영혼을 구하는 귀한 기회를 포기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많은 사람들은 웨슬레는 열정주의자, 광신주의자, 또는 혁신주의자로 보았다. 그러나 웨슬레의 설교는 사람의 인격과 경험을 새롭게 하는 성령의 능력을 전하였다. 그의 설교들은 수많은 사람들은 심령에 찔림을 받아 죄를 회개하고 어떤 이들은 죄의식에 실신하고 졸도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로 인하여 도적이 회개하고 술주정뱅이가 금주 자가 되는 사회의 대변혁을 가져왔으며 침체된 교계에 각성을 일으켰고 교회의 갱신과 사회의 개혁을 일으킨 개혁 운동가였다.
3. 전도자 윌리엄 윌버포스
18세기에 뛰어난 평신도로서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는 영국 의회의원으로서 활발한 사회개혁운동에 이바지했으며, 특히 영국 의회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하는 법안을 제정케 하도록 만든 사람이었다. 에드윈 오르는 그를 평하기를 “위대한 노예해방론자”라 불렀다. 이러한 평신도의 사역들은 유럽의 여러 나라, 곧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등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라투렛은 이 시기의 평신도운동에 대하서 다음과 같이 증거 했다. “모든 곳에서 평신도의 열기가 가득했다. 이러한 특징은 개신교의 기본 정신인 ‘만인제사장론’이 주는 열매여야 하지만, 사실 그 진리는 한 동안 이론에만 묶여 있다가 이제 실제로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제 평신도들이 많은 활동들에 참여하고 잇는데, 곧 성경을 전달하여 주는 일, 주일학교에서의 봉사 활동 등에서 두드러졌다.” 선교 역사가 윌버트 노튼에 의하면, 스웨덴에서의 부흥운동은 모라비안 선교운동에 의해 일어났으며 이것을 헤른후티즘 운동이라 부르고, 이 운동 역시 평신도에 의해서 부흥운동이 번져 나간 것으로 주장했다. “경건주의 운동과 모라비안 선교운동의 불타오르는 선교적 열정은 19세기 스웨덴의 평신도 지도자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4. 미국의 복음운동
19세기는 미국 역사상 선교의 위대한 세기였다. “이제 유럽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말할 정도로, 당시 미국은 개신교 선교를 대표하는 나라였다. 이 시대에는 18세기에 일어난 ‘영적 대각성운동’의 영향으로 선교사역과 지역교회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일어난 시기였다. 특히 19세기 말경에 일어난 학생신앙운동(SVM: Student Volunteer Movement)은 존 윌더와 당시 YMCA 코엘 지부장이었던 존 모트 등의 노력으로 시작되어 당시 젊은이들에게 선교정신을 크게 불러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87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의 각성운동, 특히 1880년대 평신도 전도자 무디(Dwight L. Moody)의 부흥운동은 미국교회의 선교에 대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나아가 1880년부터 약 40년간은 해외 선교가 미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
미국에서 일어나 부흥운동으로는 첫 번째, 조나단 에드워드를 중심한 제1차 대각성 운동으로 주로 회중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두 번째는 찰스 피니를 중심한 제2차 부흥운동은 사회문화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세 번째는 드와이트 무디를 중심한 선교부흥운동이다. 무디는 미국의 19세기 마지막 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 복음전파와 외국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의 신앙운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해외선교에 열정을 품게 되었고, 특히 1886년 “이 세대의 세계를 복음화 하자.”(The Evangeli -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라는 주제 아래 열린 헬몬산 집회는 후에 해외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이 근대사에서의 교회운동은 개혁교회를 통하여 교단 밖에서 일어난 전도운동으로, 가정과 공단, 대학 등의 현장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5. 미국의 평신도 운동
1857년과 1858년 동안 뉴욕 시 사업가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기도부흥운동”은 대부분의 지역교회로 확산되어 갔으며, 한편으로 평신도들이 지역교회의 행정 조직에서 중요한 역할들을 맡게 되었다.
6. 평신도 여성들의 활약상
그들은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였으며, 또 다른 봉사 부분과 해외 선교 단체나 기구들에서 일하면서 선교 사역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9세기 동안에 영국의 감리교 교회들에서 처음으로 여집사 제도가 나타났으며, 아울러 YWCA운동도 1886년에 등장하여 조직적인 활동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7. 학생신앙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SVM)
학생신앙운동은 괄목할 만한 평신도 선교운동이었다. 무디(1837-1899)는 이 학생운동의 설립에 막대한 역할을 감당한 지도자였다. 1886년 여름 메사츄세츠 주에 있는 헤르몬산 연합 집회에서 무디는 설교를 통해 학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으며, 여기서 수많은 학생들이 선교 헌신을 하고 해외 선교사로 나갔다. 이들 중에 존 모트가 있었는데 그는 평신도로서 이 학생운동을 이끌면서 조직적으로 부흥케 만들었으며, YMCA의 지도자로서 평신도 운동을 활성화 하는데 지도력을 발휘했다. 이 학생운동의 표어는 “이 세대 안에 전 세계의 복음화”로 정하고, 2,000여 명이 넘는 남녀 학생들이 선교사로 전 세계 선교 현장으로 갔다.
8. 20세기의 평신도 운동
19세기 학생신앙운동은 1906년에 평신도선교운동협의회의 설립으로 나타났는데, 이 모임은 선교 현지에 나간 선교사들을 후원하고 경제적으로 돕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이들의 모임을 통해서 그리스도인 사업가들이 선교를 위해 기도하였는데, 3년이 안되어 이 조직은 북미에서만 3,500여개의 사무실을 갖고 활동하게 되었으며, 미 대륙의 75개시에 수만 명이 모이는 모임으로 발전했다. 라투렛은 이 평신도운동이 전 세계로 파급되어 영국, 독일, 스칸디나비아, 네덜란드, 남아프리카, 오스트리아, 뉴질랜드, 이집트 등으로 나간 것으로 주장했다. 20세기 중반부터 점차적으로 평신도의 사역의 중요성에 대한 각성이 강하게 기독교회들에서 일어났다. 데이비드 보쉬는 『변화하는 선교』에서 “안수받은 성직자 단독의 사역 개념이 이제는 전체 하나님의 백성들의 책임으로 변화된 것은, 곧 안수 받은 자만이 아니라 않은 사람들도 사역자로 여기게 된 점은 오늘 우리 교회에 있어서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이다.”라고 주장했다. 1989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계속된 제2차 로잔 세계복음화대회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 교회 모든 구성원들에게 전 세계 복음화 사역을 위해 부르셨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안수 받은 자와 마찬가지로 평신도 모두가 이 복음화 사역을 위하여 동원되어야 하고 훈련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선교 역사를 통해 본 평신도 전문인의 선교는 초대 교회에는 평신도가 모두 선교의 주체였으나, 콘스탄틴 칙령 이후 선교가 평신도들의 참여가 줄어들게 되었지만 시대마다 평신도들의 노력에 의해 종교 개혁과 20세기에 이르는 동안 선교의 주체가 다시금 평신도들로 돌아오게 되었다.
E. 다락방 운동의 전도자
1. 다락방 전도운동의 성경적 근거(행1:1-4)
다락방 전도운동은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을 중심으로 마가 요한의 다락방(Mark's Upper Room)에서 시작하신 순수 복음운동이었고, 기도모임이었다(행1:13-14). 이 운동은 바울에 의해 소아시아, 로마와 유럽 전역에 누룩처럼 번졌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제자들을 양육하여(행14:20-28) 지역 요원들로 확립했다. 이것이 초대교회 다락방의 원형이다.
2. 성경적 다락방 전도운동의 정의
초대교회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마28:18-20)을 받고, 주님이 분부(행1:8)하신대로 약속하신 성령의 세례를 받고자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쓰다가 오순절 날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임함으로 성령 충만함을 받게 되었다.(행2:1-13) 이로 말미암아 15개 나라 전도문이 열리고(행2:9-11),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됨을 깨닫게 되었다.(행2:14-40) 그 내용은 예수 이름으로 보내실 약속하신 성령의 충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 예수님의 주(主)와 그리스도 되심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받고 세례를 받은 제자가 3천명이나 되었으며(행2:41), 그들은 계속적으로 모여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며, 떡을 떼고,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 성전에 모이든지 집에 있든지 “약속하신 성령 충만”, “예수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예수그리스도의 주(主)와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말씀을 듣고, 가르치며 전적으로 기도하기를 힘썼다. 그 결과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구원받을 자를 더해 주셨다. 계속적인 전도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행2:42-47)
이것이 초대교회 마가다락방에서 하였던 기도운동, 전도운동, 성령운동, 말씀운동, 치유운동이었다.
그러므로 “다락방 운동은 사도행전 1장에 나타나 있는 마가 다락방에서 시작된 운동을 말한다. 이천년 전 마가 다락방에서 시작된 다락방 운동은 우리가 처해있는 삶의 현장에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는 줄 알고 전도운동을 펴기 위하여 모이는 기도와 성령운동을 말한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동안 배운 것과 그에게서 깨달은 것과 부활과 그 이후의 사실을 전하는 힘을 얻기 위한 마가 다락방의 120문도들로부터 시작된 기도운동을 말한다.
다락방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을 임마누엘을 통하여 누리는 시간표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심을 누리는 시간표가 바로 다락방이다. 이것은 의도적이거나 계획적이거나 상업적이거나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이고 순리적인 모임으로써 당연한 신앙고백(간증)과 전도의 현장이다."
3. 성경적 다락방 전도운동의 내용
a). 다락방 전도운동의 목적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성취된 언약을 붙든 자신이 먼저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로 인해 완전히 ‘질적으로 변화’(the qualitatively 고후5:17; 갈2:20; 행9:1-11)되고, 증인된 나를 통해 조용히 지역, 민족 그리고 세계가 복음화 되는 언약을 이루는 것이다(마28:18-20).
b). 다락방 전도운동의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과 “다른 이로서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니라(행4:12)”는 신앙고백이다.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창3:1-6) 죄 가운데 빠져(롬3:23) 사단에게 사로잡혀 있다(요8:44). 이것을 인간의 근본문제라고 하는데, 이것을 유일하게 해결(요14:6; 롬8:2; 요일3:8)하신 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묶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원한 해답을 주셨는데 그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예수는 그리스도” 즉, “예수가 우리 인생의모든 문제의 해답자, 혹은 해결자 되신다.”라고 신앙고백 하는 것이다.
c). 다락방 전도운동의 핵심내용
사도행전 1장 1-11절을 근거로 하고 있다.
(1) 전 세상과 구약에서 기다리던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예수’라는 말은 고유명사이며 본명이지만, ‘그리스도’라는 말은 그 분의 직임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으로 구약에서는 선지자, 제사장, 왕에게만 기름을 부었는데, 예수가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되는 참 선지자이며(요14:6), 죄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참 제사장이며, 세상과 사단을 이긴 참된 왕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께서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근본 문제는 세 가지이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창1:27)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음(창1:28)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고 길을 잃은 것이다(창3:1-6). 이런 인간에게 길을 안내해 주시는 분이 우리의 참 선지자이신 그리스도이시다(요14:16).
둘째,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빠져(롬3:23) 죽음에 이르게 된 것(롬6:23)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돌아가시므로 영적으로 이미 죽은 우리(엡2:1)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다(롬8:2). 이런 일을 하신 분이 참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이시다(히4:14-16).
셋째,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빠진 인간은 알게 모르게 사단의 종이 된다(요8:44; 엡2:2). 이렇게 사단의 종이 되어 있는 인간을 그 손에서 구출하시는 분은 예수 외에 전혀 없다. 이런 일을 하신 예수가 참 왕이신 그리스도이시다(마27:11).
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것을 구원 혹은 성령의 내주(요1:12, 요14:16-17, 고전3:16)라 한다. 이에 따라 구원과 평안의 증거가 실제로 나타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참제사장의 증거로 미신, 점, 죄, 지옥, 모든 악한 것에서 해방되는 증거가 나타나게 된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사단의 권세는 떠나고 예수 이름으로 이길 수 있는 왕적 권세가 주어진다.
초대교회 마가다락방에서는 이 사실을 증거했다. 따라서 다락방에서는 성경 66권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통해 조명하여 보고, 이 사실을 매순간 순간마다 증거한다.
(2)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지금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헬라어로 부활(resurrection)이라는 말은 영육의 부활을 의미하며, 그 말의 어원은‘다시’라는 말과 ‘일어선다.’라는 말의 합성어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는 사람은 지금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고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락방에서는 이 사실을 늘 강조하고 증거한다.
(3) 예수께서 성령으로 모든 성도 속에, 성도와 함께, 그리고 교회와 함께 역사하고 계시는 사실을 체험하고 증거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강조하신 내용은 성령을 받으라는 것이다(요20:22).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강조하셨다. 마지막승천하실 때도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성령)을 기다리라(행1:4)’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다락방에서는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성령이 모든 성도와 함께 내주, 인도, 역사하시고 지금도 교회를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증거한다.
(4) 예수께서는 세계복음화를 이루시는데 성령의 능력으로 증거를 주셔서 전도의 증인이 되게 하신다.(행1:8)
(5) 예수께서 말씀으로 우주를 다스리시며, 재림의 주(主)요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증거한다.(행1:11)
지금도 예수는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실 뿐만 아니라 전 우주를 말씀으로 통치하고 계시며, 전도자들과 함께 세계 복음화를 이루시고 계시며(막16:19-20), 모든 족속에게 복음이 다 전파될 때(마24:14) 이 땅을 심판하러 재림의 주로 다시 오실 것이다(살전4:16; 단7:13-14). 그러므로 다락방에서는 다시 오실 주님을 늘 증거한다.
Ⅲ. 전도자의 삶에 대한 고찰
A. 전도자의 기본(오늘의 전도, 말씀, 기도)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과 교회사에서 중요한 전도운동을 이끌어왔던 전도자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그들은 모두 하나님과 함께 하는 비밀을 가졌던 자들이다. 다시 말해 임마누엘의 축복을 날마다 확인하며 누렸던 사람들인 것이다.
전도자의 삶 7가지는 오늘의 전도, 오늘의 말씀, 오늘의 기도, 말씀운동, 인생 스토리, 달란트, 경제가 임마누엘의 축복을 누리는 전도자의 삶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오늘의 전도, 오늘의 말씀, 오늘의 기도, 이 세 가지가 매일 응답으로 와서 우리의 삶과 연결되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글을 통해 임마누엘의 축복을 날마다 확인하고 누리는 전도자의 삶의 기본인 오늘의 전도, 오늘의 말씀, 오늘의 기도를 중심으로 전도자의 7가지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1. 오늘의 전도(복음)
a) 복음과 전도는 같은 것
많은 사람들이 복음과 전도를 다르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현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과정 속에서 복음에 관하여 설문 조사를 해본 결과 "복음이란?" 질문에 답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답을 할 때에도 명확하게 답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다시 말해 신자들이 복음에 대하여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전도는 일이 되고 심지어 부담이 되어 버린 것이다. 복음과 전도의 관계를 동격으로 보아야 한다. 따로 보는 것에서부터 이미 문제는 시작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과 전도를 다르게 생각한다.
전도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복음에 관한 올바른 선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에 대한 정의를 짚어보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대하여 정의를 내렸지만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복음자체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정의하고 있다. 다시 말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b) 복음 누림
현대사회에 들어오면서 생각의 중요성이 부각되어지고 있다. 그래서 긍정의 힘, 마인트 컨트롤과 같이 생각에 관련된 수많은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있어서 생각은 그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가 발달할수록 개인이 생각을 하는데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게 변화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수많은 정보들이 개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일상생활에서 누린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님에 분명하다.
복음을 누린다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창세기 3장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신 그리스도를 개인의 매일의 생각 속에서 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믿음의 생각이 믿음의 고백인 말로 연결되어지고 이것이 의식과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생각 개혁에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2010년 목회대학원 메시지에서는 복음을 누리는 것에 대하여 설명 하고 있다. 복음에 대한 생각을 매일 한다면 이 생각은 나중에 나의 사고, 나의 의식을 거쳐서 내 영혼에까지 파고든다.
c) 말씀, 강단메시지를 누림
복음을 누리는 방법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확인하는 것이다. 또한 말씀을 통해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주시고자 하는 모든 힘이 말씀 속에 있으며, 이 말씀이 매주간 강단메시지를 통하여 선포되어지고 확인되어지게 되는 것이다. 말씀의 능력에 관하여, 행1:8은 욜2:28에 선지자를 통해서 이미 예언된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하실 일을 말씀부터 주신다. 말씀 먼저 주시고, 친히 성취하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레미야 33:1-3 말씀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명령하시는 장면으로부터 하나님의 역사 방법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시기 전에 주의 종 예레미야에게 임재 하셨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하실 일을 주의 종 예레미야에게 먼저 말씀하셨다. 셋째,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시기를 일을 행하시며, 그것을 지어 성취하시는 여호와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하실 일을 자기 백성에게 말씀을 통하여 미리 알려주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신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자가 오늘의 전도(복음)를 누리는 최고의 방법은 바로 말씀을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성경과 교회사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수많은 인물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고 말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오늘의 말씀
성경은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기독인들에 의해 읽어져 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다는 속성대로라면 전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차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이 있어야 할 터이나, 한국과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는 점차 감소되고 있으며, 교회는 타종교에 의해 점령되어져 가고 있고, 신자들은 사회적인 위치를 상실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결과는 말씀을 읽고 있으나, 실제적인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현장에서 '실패'라는 결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전도자가 오늘의 전도를 누리는데 있어서 오늘의 말씀과 오늘의 전도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신자들이 현장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오늘의 전도를 놓치고, 그 핵심인 오늘의 말씀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류광수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지 않기 때문에 재미가 없고, 그래서 성경은 안 읽어진다고 전하면서 전도를 깨닫는 날에 말씀이 깨달아진다'고 설명했다.
a) 말씀 받는 자세가 중요
마태복음 13장 1절에서 9절의 말씀을 살펴보면 네 밭의 비유가 나온다. 이에 관하여 류광수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말씀을 받으려고 하면 세 가지가 치유 되어야 한다. 그것은 어두워진 마음, 황폐해진 영혼, 교만해진 성품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가장 적절한 시간표에, 가장 적절한 말씀을 전해주는 것만이 우리가 할 일이다. 그 다음에 사람들에게 문제가 올 수밖에 없는데, 그 때에 정확한 답을 줘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사역을 하시다가 낙심하지 말 것은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좋은 땅. 이것은 사람들 가운데 길바닥 같은 마음도 있고, 돌밭 같은 마음도 있고, 가시밭 같은 마음도 있다. 좋은 땅에 떨어지면 몇 십 배, 몇 백 배, 몇 천 배 열매 맺는다."
말씀을 받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루고 있다. 누구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면 살지 못한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사역자의 능력으로 길가나 돌, 가시밭과 같은 마음을 옥토와 같이 바꿀 수는 없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개입과 시간표가 필요한데, 그 타이밍을 정확히 보고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심부름을 하는 자들이 사역자이다. 그래서 사역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 밖에 없는 것이다.
b) 말씀을 가지고 전도에 관한 모든 것을 찾기
오늘의 말씀은 결국 오늘의 전도를 누리는데 인도받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66권을 통해 전도에 관한 모든 것, 모든 사건과 만남 속에 일어나는 일을 전도적 관점에서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개인과 그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사과 만남들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인 전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개인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씀을 통해 모든 것 안에서 전도를 찾아낸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3. 오늘의 기도
오늘의 기도는 오늘 하나님께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기도를 누린다는 것은 오늘의 전도(복음)과 오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를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관관계 속에서 오늘의 기도에 대하여 살펴본다.
a) 근본적인 기도인 오늘의 기도
오늘의 전도(복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기도인 것이다. 류광수 목사는 유럽집회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매일 발견할 때, 그 시간에 흑암세력이 무너지는 굉장한 영적인 역사가 일어난다고 말씀을 전했다. 오늘의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날마다 발견하고,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어지면 흑암세력이 무너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역사 일 것이다. 근본적인 기도에 대하여 류목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노예로 간 요셉, 80년 동안 어려움을 놓고 방황하던 모세, 거의 죽음을 늘 달고 다니던 다윗, 위기를 만났을 때의 히스기야 왕, 실제로 포로되었을 때의 다니엘, 포로되기 전에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엘리야, 엘리사 이들은 어떻게 기도를 했느냐? 쉽게 말하면 가장 먼저 이런 근본적 기도가 시작되어야 된다.
다시 말해서 오늘의 기도는 오늘을 누리는 기도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오늘이라는 시간표를 누리면서 그 날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또한 그날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어질 때, 오늘의 전도인 임마누엘의 삶을 실제적으로 누리게 된다.
b) 문제를 극복하는 오늘의 기도
우리가 사실을 자세히 보면 문제를 통해 시험들 이유, 당황할 이유가 없다. 영안을 뜨고 현실세계를 보면 우리에게 닥쳐오는 문제는 당연히 올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실패하는 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체질을 갖고 있듯 인간의 잘못된 영적 체질이 실제적인 응답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도 있다. 이 모든 문제는 주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해결하셨기에 그 문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한다면 축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기도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영안이 어두워지기 때문에 드러난 현상만을 보게 되며 결국 그 이면의 것은 보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기도 하면서 사실을 정확히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에 집중하기 보다는 이 문제까지도 허락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오늘의 기도는 문제를 극복하는 기도인 것이다. 류광수 목사는 문제를 극복하는 기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오늘의 기도를 통해 성령의 인도를 받아가는 삶이되어지게 되면 문제가 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때부터 성령충만이라는 다른 힘을 얻게 되며, 이때 영력과 지력, 체력, 경제력, 인력이 따라오게 된다."
B. 전도자의 회복(말씀운동, 인생스토리, 전문성, 경제)
1. 말씀운동
오늘의 삶을 살아가는 전도자가 가는 현장에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고, 말씀이 뿌리 내려지는 것은 전도자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영향력이 현장에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이 사실적으로 현장에 성취되고 현장이 살아나게 되면 현장에는 전도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며, 죄의 권세 아래에 잡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상처 속에 있는 것은 당연한 사실인 것이다. 이 현장에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뿌리 내려질 때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이 현장에 선포되고 뿌리내리도록 교회가 역할을 해야 한다. 출애굽기3:16에서는 모든 장로들에게 양의 피를 바르는 언약을, 여호수아3:1-3에서는 모든 유사들에게 언약궤를 따라가라는 언약을, 사무엘상7:1-15에서는 미스바에서 모든 백성들을 모아놓고 말씀운동을, 열왕기하6:8-23에서는 도단성에서, 이사야40:27-30에서는 포로의 위기 속에서 말씀의 능력을 전달한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에서는 전도 제자들에게 이 언약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초대교회와 안디옥교회, 빌립보와 에베소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난 사건이다. 이 현장에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들어가면 운동으로 전해지게 된 것이다.
교회와 제자들에게 전달된 이 언약의 말씀이 개개인에게 붙잡아져야만 현장이 실제적으로 살아나게 된다. 이것이 지교회를 통해 현장을 살려낼 중직자 시대의 필연성인 것이다. 류목사는 개인이 붙잡아야할 말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나는 솔직히 복음에 관한 성경 30구절을 붙잡았다. 그것을 붙잡고 계속 기도하고 메시지 했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말씀이 그런 것이다. 이런 체험을 하게 해줘야 된다. 그리고 이 말씀에 집중할 때 빌립이 하는 말을 사마리아 백성들이 일심으로 듣고 전했다고 했다. 이렇게 역사가 일어났다. 여러분 교회에 안에 이렇게 말씀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교회 안에 큰 역사가 일어난다.
2. 인생 Story(메시지)
하나님께서는 전도자에게 평생 달려가야 할 길을 주셨다. 그것이 인생의 메시지 인 것이다. 세 가지 오늘의 삶을 살고 있는 전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 앞에서 설명이 되어지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전도자의 인생을 가지고 세상 살리는 작업을 하신다.
사도행전 20:24의 고백을 한 바울은 총리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기 인생의 메시지를 간증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이 메시지는 사도행전 9장에 다메섹의 제자인 아나니아로부터 하나님께 받은 평생의 길이었던 것이다. 류목사는 인생의 메시지를 발견하고 보는 것을 성령충만이라고 말했다.
전도자는 이 인생의 스토리를 제자에게 전달해야 한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달했듯이 전도자는 후대 전도제자들에게 인생의 메시지를 보게 해줘야 하는 것이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비밀리에 가서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었다. 그러면서 반드시 언약궤를 회복시킬 것과 성전을 바르게 세울 것을 당부했을 것이다. 그 메시지를 다윗이 잡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윗에게 어릴 때부터 은혜를 주신 것이다. 엘리야와 엘리사도 마찬가지이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메시지를 주었다. 그리고 엘리사는 그 메시지를 따라서 계속 렘넌트 운동을 한 것이다. 학개 선지자는 백성에게 "너희들을 돌아가서 전부 성전을 건축해라. 하나님께서 하신 여호와의 말씀이다. 그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열방이 진동하게 될 것이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전했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주었다. "내 아들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해라. 그리고 많은 증인 앞에 들은 그 증거를 충성된 자를 찾아서 위탁해라. 그리고 너는 군사다, 너는 경기하는 자다, 너는 농부다 이것만 기억하면 범사에 총명을 얻을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주었다.
3. 전문성(달란트)
전도자가 3가지 오늘을 누리게 될 때, 그의 전문성이 복음 운동에 쓰임 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자의 전문성은 전도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이 분야는 교회가 세계복음화를 위해 응답받아야 할 현장이기도 하다. 복음과 전도 속에서 개인의 전문성이 들어나게 될 때 전도자의 전문성이 복음운동에 쓰임 받게 될 것이다. "인생 공부가 전도 속에서 일어나게 하라.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나서 말씀을 조금 보고, 운동을 하려면 어렵다. 하루 이틀은 되지만 진짜 하려고 하면 아침형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게 안 되면 절대 인재가 안 된다. 건강관리가 중요한 이유는 육신 때문이 아니라 전부 전도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꼭 가르쳐야 하는 것이 스케줄 속에서 일어나는 전도운동이다. 이것이 인생 공부가 되어야 된다. 내가 하는 일, 업무, 공부가 되어야 된다. 전도 속에서 일어나야 된다. 업무 속에서 업무 공부가 되어야 된다. 인생 공부도 되고 업무 공부가 되어야 된다. 쉽게 말하면 내가 맡은 일에서 전도운동이 계속 일어나야 된다.
4. 일, 업,경제
이것은 세계복음화를 기도하면서 도전하는 모든 전도제자들이 받아야 할 응답인 것이다. 사도행전18:1-4의 사도바울은 자신의 장막 짓는 업을 통하여 세계복음화의 동역자인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만나는 복음운동의 응답을 확인하였다. 다시 말해 내가 하는 일과 복음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도자의 모든 인생이 복음운동과 관계가 있는 것이지만 그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개인의 업을 통한 복음 운동의 확산일 것이다. 류광수 목사는 업과 복음운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의 업이 복음 운동에 쓰임 받아야 된다. 반드시 우리가 모여서 포럼하고 제자훈련 할 때는 복음, 전도, 기도와 함께 이게 체크되어야 된다. 반드시 학생은 전도, 기도, 말씀과 공부가 연결되어야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앞으로 RUTC 안에는 수많은 생활 법인체들이 만들어져야 되고 앞으로 RUTC 안에는 많은 파라 문화 공동체들이 만들어져서 다 먹고 살도록 만들어줘야 된다. 그래야 내 생을 여기에 담는 것이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 정말로 내 생을 드리면 굉장한 답이 나와진다. 그 답이 바로 문화공동체이다. 이것을 만들어서 살아나게 만들어줘야 된다."
Ⅴ. 결 론
지금까지 성경적 전도의 개념과 신구약 성경의 전도운동,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전도사역과 천상사역, 그리고 교회사에 나타난 전도운동의 역사, 성경적 다락방 전도운동에 관한 고찰과 적용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성경적 전도의 개념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창세전부터 계획된 영혼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시간표요, 일이다.
그리고 신구약 성경의 전도운동은 구약은 이 땅의 모든 문제의 출발인 창세기 3장 문제에 대한 해답인 창세기 3:15의 언약을 붙잡고 하나님을 만나고 섬길 때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축복을 누리게 되며, 신약은 그 언약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오셔서 그리스도의 일을 이루셨다.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시다는 언약을 믿고 영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영원히 내주, 인도하시며, 지금도 성령으로 믿는 자들을 통해 전 세계에 복음을 증거하시고 마지막 때에 재림주로 이 땅을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지금도 주님이 성령으로 함께 동행하시고 어떤 어려움에도 보좌의 축복을 누리며 증거를 주셔서 증인으로 세계 복음화를 이루게 하신다.
초대교회 시대는 원색적인 복음이 가감 없이 증거 되었고, 성령의 역사와 말씀의 정확한 성취, 마태복음 28:16-20절의 예수님의 제자운동이 실제적으로 일어났고 엄청난 유대인과 로마의 핍박 속에서도 결국 A.D. 313년에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함으로서 전 유럽에 복음이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초대교회에 실제적인 산 증인들이 차츰 죽고 시대가 바뀜에 따라 교회는 성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교권과 인본주의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힘이 있는 중세시대가 도래하면서부터 차츰 교회는 초대교회가 가졌던 영적인 원색복음은 사라지고 의식과 형식, 그리고 교황의 교권 밖에 남지 않았다. 이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대교회에 전해주었던 복음은 사라지고 성경은 특권층의 것이 되었고, 결국 마틴 루터, 칼빈 등의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구호아래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런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다시 힘을 얻는 것 같았지만 참된 초대교회의 성경적 영적 원색 복음운동에는 부족함이 없지 않았다. 이런 상황 가운데 18세기 영국, 미국의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와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이 전해주었던 완전복음과 제자운동이 회복되기 보다는 영적 각성운동으로서 전도와 선교에 흘러갔다. 오히려 선교단체 중 네비게이토나 C.C.C 등의 선교단체들을 통해 제자운동이 일어남으로 전도와 선교에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교회와 무관한 전도운동으로 결국 그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초대교회가 일으켰던 성경적 전도운동, 즉 완전복음과 예수님의 제자운동이 21세기에 영적으로 황폐한 이 땅에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초대교회의 완전복음과 전도운동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다락방 전도운동이 일어났다.
임마누엘의 비밀을 가진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그는 밝히고 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비밀 속에 있는 전도자는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를 날마다 확인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시 말해 날마다 임마누엘의 축복 속에서 살아가는 전도자에게 하나님의 전도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전도자가 임마누엘의 축복을 누리면서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를 날마다 확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한 전도자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를 날마다 확인 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류광수 목사는 전도자의 삶 7가지-오늘의 전도, 오늘의 말씀, 오늘의 기도, 전도(말씀)운동, 인생 스토리(메시지), 달란트(전문성), 경제(업)-가 임마누엘의 축복을 누리는 전도자의 삶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오늘의 전도, 오늘의 말씀, 오늘의 기도, 이 세 가지를 Key라고 말하고 있다.
세계복음화가 되어지고 복음이 다음세대까지 전파되기 위해서는 전도자의 삶이 되고 스케줄 속에서, 모든 만남을 전도로 연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