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성경적 실천의 현장과 클레로스(223) – 사도들의 실천과 클레로스(202) – 갈라디아서 강론(13)
갈라디아서 강론(13) – 3장 10절 ~ 4장 31절까지 정독
아브라함 언약이 원 언약이고, 모세 율법은 과도기적 언약으로 주신 것이다.
율법의 행위들로부터 비롯된 자들은 모두 저주 아래에 있다고 사도 바울은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가 저주를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레미야 언약을 주시고, 메시아와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의 율법을 자원에서 실천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재창조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율법 안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의인은 신실함으로부터 비롯되어 살리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 안에서 율법을 오독하고, 조상들의 전통의 오류 같은 이런 온갖 오독과 오류들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써, 그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풀어주셨다는 것이다. 율법의 저주에 갇힌 우리를 풀어주셨다는 것을 서구 기독교는 율법을 안 지켜도 되는 것으로,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 것으로 오해해서 죄 사함의 은혜로 오해하고 있으나,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할 수 없는 정상적인 인간을 재창조해서 준행할 수 있는 자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풀어주시고 율법을 기쁘게 준행하는 길을 여셨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그 복이 이방인들에게까지 이루어지고, 우리들이 그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앞서 정하신 그리스도를 향한 언약을 430년 후에 온 율법이 무효로 만들어, 그 약속을 소멸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쩨다카와 미쉬파트를 행하는 내 백성을 세우시겠다는 아브라함 언약이 원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언약의 당사자가 아니며, 예수님이 오시고 성령이 강림하면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베풀어 주셨던 그 상속물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고 성령께서 오심으로써 우리가 실제로 그 상속물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상속물이란 상속자들의 하나 된 삶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행복한 삶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에게 원 언약을 주시고 430년 후에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다. 그렇다면 율법을 왜 주신 것인지를 19절부터 설명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모세의 율법은 과도기의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가두어 놓기 위해서 과도기적 언약으로 주신 것이며 아브라함 언약은 베일에 가려 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일방적인 계약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모세 율법이 아브라함 언약이나 예레미야 언약과 거스르는 내용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용상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가둬 놓고 절대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기능의 율법을 주신 것인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부터 비롯된 “그 약속”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신실하심을 보내시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감시를 받으며 장차 계시될 신실하심의 순간까지 갇혀 있었으며,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길잡이가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신실하심으로부터 비롯되어 의롭게 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의롭다 함을 얻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자원해서 준행하는 의인이 되는 것이다. 싸르크스 때문에 완벽한 의인은 될 수 없으나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이 성경적인 의인이다.
그리고 그 신실하심이 우리에게 왔으므로 이제 우리는 길잡이 아래에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율법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들은 모두 그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며, 성령 세례를 받은 그대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들은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 종이냐 자유인이냐, 남자냐 여자냐의 구분 없이 모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이것은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거나 노예 해방을 의미한다거나 존엄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대들은 아브라함의 씨이며, 새 언약의 백성들은 상속자로 정해진 것이다.
상속을 받은 자는 집안 모든 것의 주인이지만, 그가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없이 그 아버지가 정해 놓은 시기까지는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동안에는 이 세상 원리 아래서 종 노릇을 하였으나, (이 말은 모세 율법에 충실한 삶도 세상 원리에 종 노릇하는 삶이라는 고백이다)
그 때가 차자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보내셨고,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풀어주시고 우리들이 양자됨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과 이방인들 중에서 드디어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 클레로스의 구성원, 한 몸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고 아들이며, 아들이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상속자는 육체를 따라 태어난 여종의 자녀가 아니고, 자유인인 사라에게서 난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이다
그대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때에는 하나님이 아닌 헛된 신들을 섬겼으나, 지금은 그대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고, 더욱이 하나님에 의해 알도록 만들어졌건만, 어찌하여 무력하고 쓸모없는 세상 원리로 되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고 사도 바울은 탄식하고 있다. 이것은 유대인이 섬기던 하나님은 우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자 자기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가기 때문에 우상이었다는 것이다. 모세 율법도 세상 원리에 속해 있는 것이다.(모세 율법을 제례법과 시민법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각자 자기를 위해서 복을 받으려고 특정한 날들과 달과 절개들과 해들을 중시하니, 그대들을 위하여 애쓴 것이 허사가 될까 그대들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이방인 세계로 들어갔으니, 그대들도 나를 본받아 성숙한 클레로노모스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의 형제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의 실체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사도 바울을 돌로 친 갈라디아의 정상적인 유대인과 이방인과는 다르게(행14:19), 그대들은 진리를 전하려고 목숨까지 바치고자 하는 사도 바울을 멸시하지도 않고 내치지도 않고 오히려 마치 하나님의 천사처럼, 그리스도 예수처럼 받아주고, 사도 바울을 위해서 눈이라도 빼 줄 수 있을 정도로 성령은 받은 사람들로서 하나 됨을 향해 가는 복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냐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복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대들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이루어지는 동안, 이렇게 그대들을 위하여 마음이 찢어진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상속자는 약속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종인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태어났으나, 자유인인 사라에게서 난 이삭은 약속으로 말미암아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 두 여인은 두 언약으로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인데,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은 것은 세상 원리에 의해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삭은 약속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하갈과 모세의 율법과 현재의 이스라엘 유대인을 합쳐서 그들을 싸르크스와 세상 원리의 종살이를 하는 자들로 규정하고 있다.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과 모세 율법과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을 같은 포지션으로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이삭과 같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의 자녀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지금의 예루살렘과 같이 여종의 자녀가 아니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인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자유인인 여인의 자녀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 원리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과는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증언은 개인의 증언이 아니고 증인 집단의 증언인 것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연동흠 형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