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대통령의 정적으로 꼽히는 러시아 야권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의 '죽음의 순간'를 담은 다큐멘터리 '나발니'(감독:캐나다 출신의 다니엘 로어)가 12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열린 제 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다큐멘터리 '나발니'는 나발니가 지난 2020년 여름 기내에서 중독증세로 쓰러져 시베리아 지역 병원에서 응급 치료를 받은 뒤 급히 독일로 후송되고, 집중 치료를 받고 퇴원한 뒤 반푸틴 활동을 펼치다가 귀국한 2021년 1월까지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는 귀국 직전 독일에서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흑해 연안에 '초호화 비밀궁전'을 지었다는 의혹을 폭로하기도 했다. 그 장면과 나발니 부부의 인터뷰도 다큐에 담겼다.
다큐 '나발니'속의 나발니/유튜브 캡처
경제지 코메르산트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나발니는 독일에서 재활치료를 끝내고 모스크바로 귀국함과 동시에 공항에서 체포됐다. 이후 재판에서 총 9년형을 선고받고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약 230㎞ 떨어진 블라디미르 지역의 멜레호보 교도소에 수감돼 있다.
아들, 딸과 함께 시상식에 참석한 부인 율리야 나발나야는 이날 무대에 올라 “내 남편은 진실을 말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있다”며 “당신(나발니)과 우리나라(러시아)가 자유로워질 날을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아카데미상 시상식에 참가한 나발니 가족들. 아들과 부인 율리야, 딸/사진출처:SNS
다큐멘터리 '나발니', 다큐멘터리 부문 오스카상 수상/젠(dzen.ru) 노보스티 캡처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나발니'의 수상 소식에 대해 "작품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고 말하기 곤란하다"면서도 "할리우드 역시, 때때로 작품에서 정치적 요소를 꺼리지 않는다"며 평가절하했다. 공교롭게도 이번 아카데미상(오스카상) 후보에는 러시아 작품이 한편도 '노미네이트'되지(올라가지) 못했다. 이에 파벨 추크라이 감독은 러시아 오스카 위원회 위원장직을 사임하기도 했다.
다큐 영화 '나발니'는 미국의 HBO Max와 CNN Films에서 제작했다. 2022년 1월 25일 미국 선댄스 영화제에서 초연됐고, 지난달 19일 제 76회 영국아카데미상(BAFTA) 시상식에서 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
나발니는 변호사 출신 '블로거 인플루언스'로 반정부 활동을 시작했다. 2008년 러시아 대형 국영기업 여러 곳의 비리와 부패를 폭로하는 글을 올려 이름을 알렸고, 2011년 반부패재단을 세워 본격적으로 부패척결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반부패재단은 푸틴 대통령의 측근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의 비리와 정경유착 등을 폭로하며 권력의 눈밖에 났다. 2018년에는 야권의 지지를 얻어 대선에 도전했으나, 전과로 인한 피선거권 자격 논란 끝에 출마 자체가 좌절되기도 했다.
독극물 중독증세로 쓰러진 뒤 독일로 급히 후송되는 장면
의식을 되잦은 뒤 가족들과 함께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한 뒤 바로 연행되는 장면
법정에 출두한 나발니/사진출처:현지 언론, 개인 SNS
다큐 영화의 시작점인 '기내 독극물 중독 증세'로 생사의 고비를 오간 그는 작심이나 한 듯, 독일 재활치료 기간에 푸틴 대통령의 호화 궁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인터넷에 공개했고, 체포 위험에도 불구하고 2021년 2월 자진 귀국을 택했다. 러시아 법원은 그가 2014년 12월 선고받은 징역 3년 6월에 집행유예 5년 선고를 취소하고 실형을 살도록 판결했다. 프랑스 화장품 업체 '이브 로셰'의 러시아 지사 등으로부터 3천100만 루블(약 5억9천만 원)을 불법 취득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었다.
이후 그는 법정 모독 혐의 등으로 추가 기소돼 총 9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중이다. 지난해 가을부터 테러 선동및 나치 선전 등의 혐의로 또 다른 형사사건이 진행중이어서 추가 징역형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2000년대 초 푸틴 대통령의 강력한 야권 경쟁자로 등장했던 석유재벌겸 올리가르히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전 유코스 회장의 몰락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호드르코프스키는 2003년 조세포탈및 횡령 혐의로 체포된 뒤 10여년간의 수감생활을 거쳐, 푸틴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나 해외로 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