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제가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창세 49,18)
기술의 발달로 우리의 일상생활도 하루가 다르게 점점 편리해지고 있습니다. 간단한 스위치 하나로 멀리 떨어져 있는 장치들을
조종할 수 있고, 인간이 애써 운전하지 않아도 자동차 스스로 목적지까지 데려다줄 수 있는 자율 주행 자동차가 상용화를 준비하
고 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게다가 기계들이 일을 처리하는 속도도 엄청 빨라졌습니다. 수고는 줄이고 일 처리 속도는 늘이는 참
편리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늘 그렇듯이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기 마련,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의 이면에는 우리가
감수해야 할 것들이 따라옵니다. 예를 들면 예전에 없던 유형의 크고 작은 사고들이 생겨나고 늘 그런 위험을 안고 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빨리 처리하고 빨리 결과를 보고자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디면 답답하다고 불평합니다. 기달줄을 모르게 되어 버렸
습니다. 기계의 도움으로 시간이 단축되고, 그에 따라 여유가 더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점점 더 조급해집니다. 조급함, 기다릴 줄
모르는 것은 현대의 지병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기다림은 필수입니다.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땅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 55,9)는 말씀처럼 우리가 바라는
길이나 생각 위에 드높이 있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기다리는 사람이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드높이 있는 하느님의 길과 생각을 알 수 있을 때를 그리고 이루지는 때를 기다립니다. 좀 더 빨리 알고 좀 더 빨리 이루지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기다림의 시간은 무의미하게 버려지는 시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안기
때문입니다. 숨을 쉴 수 없는 압박과 같은 기장감이 아니라 반가운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간한 긴장감과 함께 그때를 맞이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준비시킵니다. 자기를 성찰하기도 하고 새로운 결심을 하기도 하면서 그때를 기다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다림은 변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시간인 셈입니다.
이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간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매년 맞이하는 시기지만 의례적으로 맞이하는 성탄이 아니라, 건강한 긴장감과 함께 기다리는 동안 마음 속 구유, 생활 속 구유를 만들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2천 년 전에 구유에 누우셨던 차갑고 딱딱한 구유가 아니라 따뜻하고 편안하게 누우실 수 있는 구유를 만들어 봅시다. 그 구유에 아기 예수님을 모시는 날 더없는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야 이루어질
그때가 오게 됩니다.
가톨릭 금빛 신문 제64호
박상용 사도요한 신부
본지 주간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대구 수성성당 교우
이철용 베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