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식 시인의 시집 『시인과 반야로차를 마시다』
약력
박남식
경남 창원 출생
한재寒齋 이목 李穆 선생의 차도 사상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음
2005년 시조 전문지 《시조세계》로 등단
시조집 『길잡이의 노래』, 명상 기행기 『나
비의 티베트 여행』, 『담마의 향기 따라』,
이목의 차도 사상 『기뻐서 茶를 노래하노라』
등 다수
현재 (사)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 화윤차례문화원 원장
yogasb@hanmail.net
시인의 말
살아오면서 늘 그리움처럼 가슴에 맴도는 말
너무 용쓰지 말고 되는대로 살거라
봄에는 누워있어도 차밭에서 만납시더.
내게도 고백하고 싶었던 진심 하나
무어든 일 등 하려 애쓴 적이 없었네
느림보 거북이처럼 뚜벅거리며 차만 축냈지.
2024년 여름
박남식
다산초당의 푸른 새벽
백련사 깃대봉이 푸른 새벽을 열 때
흰 고무신 다져 신고 초당길 서성이네
발걸음 멈출 때마다 밀려오는 선인의 숨결.
약천에 동동 뜬 가랑잎 걷어내고
마실 수 없다는 팻말 살짝 돌려놓고
죽음도 한 생生이라며 몇 모금 목을 축이네.
적요함도 샘에 녹아 들릴 듯 말 듯
무딘 귀를 열고 무언의 길 따라가면
낙엽이 한 잎 또한 잎 어깨 위에 내려앉네.
시인과 반야로차를 마시다
어김없는 계절도
그냥 오는 건 아니다
작은 잔 어루만지며
넓은 세상 품으라니
삼매로 한껏 부빈 차
당도할 줄 아셨을까.
환히 웃는 시인은
머리만 백발이다
깊은 곳 푸른 혈기
찻잔에 삭히니
맛이야 든 듯 만 듯이
향기마저 감췄다.
봉녕사 가는 길
나뭇잎이 대지로 멋지게 내리려면
푸른 기운 물 기운 모두 버려야 하리
바람을 친구 삼아야 꽃잎처럼 내리리.
사시사철 아름답지 않은 생도 없다더니
미련 없이 그 속으로 기어이 돌아간 너
그리움 문득 이는 날 봉녕사를 보러 가네.
화성 華城 에서 깜빡 잠들다
정자도 누각도 맨발로나 오른다
오래된 담길 따라 몇 사람이 지나갔나
해 질 녘 방화수류정이 동북각루 바라본다.
세월이 꽃을 찾아 버들잎과 노닐 때
난간에 기대 깜빡 잠든 그사이
몇이나 염탐했을까, 무상함이 점검한다.
광화문 2016 가을
샛노란 은행잎들 뛰어내리는 광화문
차가운 바람은 무연히 숨어들고
오래전 밀쳐두었던 기억 하나 튀어나온다.
너무 용쓰지 말고 되는대로 살라던
망자의 유언은 차라리 사치스럽다
가을은 왜 도심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나.
역류하는 역사는 붉은 피를 토하고
도무지 잠들 수 없이 숨 멎는 날에
장엄한 촛불 바다는 나를 삼켜버린다.
사랑스런 아가야 너도 하나 촛불이구나
너희가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자
타거라 마지막 심지까지 부끄러운 내 모든 것.
벗이여 주저 말고 촛불이 되어보자
그보다 더 진진한 일 우리에게 또 있을까
조국의 아름다운 불꽃 처절하게 피워보자.
해설
정화의 순간들이 뿌리내린 적공의 앙금
정용국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
적어도 70년 이상을 이 땅에서 살아온 지성인이라면 그 한사람이 태어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겪고 버텨낸 시간은 참으로 위대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것도 대단한 일이거니와 빈곤을 이겨내고 독재와 대립의 시대를 넘어 대한민국이 다수의 지표에서 세계 상위권의 지위를 이룩한 것은 세계 어느 나라도 이루어내지 못한 혁혁한 사실이며 자부해도 좋을 만한 위업인 것은 틀림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격동의 시간에 국가가 기획한 다양한 정책도 대단했지만 개개인들의 신념과 열정 그리고 희생 또한 엄청난 수준의 것이었다. 흔히 '라인강의 기적'을 이야기 한다지만 독일은 이미 2차대전을 일으키기 전부터 세계 제일의 공업국이었고 유럽의 중심 국가였기 때문에 스스로 전쟁을 자초한 실수로 물의를 일으켰을 뿐이다. 그러나 이에 견주어 본다면 식민지를 겨우 벗어나 살벌한 전쟁까지 치른 폐허에 세계 최빈국이라는 바닥에서 대한민국이 이루어낸 '한강의 기적'은 그야말로 진짜 기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추운 산악지대가 대부분이고 자원도 자랑할 것이 없는 한반도는 우리 국민을 강하고 열정적인 인간으로 이끌고 간 위대한 스승으로 인정해야 한다. 다시 한번 이 땅의 존엄에 대해 감사하며 새롭고 줄기찬 생존의 방식을 스스로 창출하여 실천해 낸 당사자로서 느끼는 만족감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박남식의 두 번째 시조집 원고를 받아 들고 대한민국과 한반도를 떠올린 것은 대단한 국민이라고 칭찬받는 우리들 중에서도 그가 쌓아 올린 생의 다양한 봉우리를 살펴보자니 가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백 년을 산다는 시대라고 해도 어느 한 분야에서 공적을 쌓기란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우선 한재 寒齋 이목李穆 선생의 차도 사상을 연구하여 성균관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학자다. 이것만으로도 힘든 일이지만 그는 대한요가회의 임원을 맡을 만큼 고수이며 자신이 창안한 각별한 요가를 전파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시조시인 박남식이 그 끝에 있다. 이 세 가지는 그저 커다란 줄기일 뿐이고 그가 창설한 화윤차례문화원은 차나무를 기르고 질 좋은 수제 차를 만들며 차를 즐기는 예법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은 궁행의 기록을 지니고 있다. 요가에서도 삼법요가라는 새 줄기를 만들어 이미 30년이 넘게 후학들을 기르고 있는 것은 지극한 열정이 아니고서는 다가설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보자면 다도와 요가로 정진한 맑고 아스라한 정수리에 그는 우리의 전통시인 시조를 받들어 모시고 있는 형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원고는 거의 차로 엮어진 다감한 소회와 명징한 생각들로 가득한데, 결국은 큰 줄기의 근간들이 통섭하며 상생의 가지를 새로 뻗은 드높은 사유의 결과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그 숫자로 볼 일이 아니어서 등단 11년 만에 첫 시조집이 나왔고 이제 다시 8년이 지나서 두 번째 결실을 맺고 있다. "살아오면서 늘 그리움처럼 가슴에 맴도는 말/ 너무 용쓰지 말고 되는대로 살거라/ 봄에는 누워있어도 차밭에서 만납시더.// 내게도 고백하고 싶었던 진심 하나/ 무어든 일 등 하려 애쓴 적이 없었네/ 느림보 거북이처럼 뚜벅거리며 차만 축냈지." 큰 소임을 수행하면서도 그의 행동이나 생각에는 서두르거나 재촉함이 없어 위에 쓴 '시인의 말처럼 한가롭고 번다하지 않게 살아간다. 이 또한 차와 명상과 요가가 어우러져 시조 작품에서도그 아우라Aura가 크게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