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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6. 그리스도인으로서 희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희망은 열망 때문에 용감하게 바라고, 열망은 희망에 의해 겸손한 바람으로 변화”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지난 편지에서 어려운 이 시기에 저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희망할 수 있도록 안내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어떻게 구체적으로 희망하며 살아가야 할지 다시 여쭙지 않을 수 없네요. 가끔은 희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기도 하거든요.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분은 ‘자녀가 건강하기를’, ‘집값이 오르기를’, ‘경제적으로 조금만 여유 있기를’하는 희망을 합니다. 건강하기를 바라고 경제적인 안녕을 바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우리 인간의 소망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인지 그런 바람들이 습관처럼 일상의 기도로 자주 하게 되고요. 그러나 바라는 대로 안 될 때도 참 많습니다. 그럴 때면 실망을 넘어 절망도 하고요.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희망하면서 기도하고 또 했는데 그 어떤 응답을 듣지 못할 때, 하느님이 어디 계시느냐며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짜 희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인의 지혜를 얻고 싶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보고 싶은 김 수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어떻게 희망하며 살아야 하는지, 진짜 무엇이 희망인지를 물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희망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또 했는데, 바람대로 되지 않을 때 절망하게 된다고요. 그런데 과연 그 바람이 진짜 희망이었을까요?
희망에는 닮은 듯 다른 이란성 쌍둥이가 있거든요. 바로 열망이란 것이에요. 희망과 열망은 다르지만 늘 함께 다녀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열망(aspiration)한다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 성취되기를 기대하는 것이고요. 희망(hope)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도움에 의탁하며 믿는 마음이지요.
열망은 새로운 일을 기획할 때 기대감이 솟구쳐 올라요.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아침기도를 하면서 살짝 설레기도 하고요.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지리라 기대도 해요. 그러나 하룻밤을 자고 난 후, 이러한 수많은 열망이 하나둘 무너져요. 이것도 저것도 원하는 대로 잘되지 않는 거예요. 바라고 또 바라지만 결국 현실은 이를 허용해 주지 않았다는 원망과 분노가 올라오기도 하고요. 어쩌면 어떤 사람의 열망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시들어 사라질 수도 있어요. 그리고 사라진 열망으로 인해 마음속 작은 틈 사이에서 실망과 좌절, 그리고 분노의 기운이 올라오기도 해요.
왜 그럴까요? 열망, 그것은 누구의 것인지요? 온전히 ‘나’의 것이에요. 내 능력과 힘으로 뭔가를 이루려는 갈망에서 온 것이죠. 그래서 고요함이 무너지고 불안해져요.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서 자신을 질책하기도 하고요. 열망은 온전히 내가 주인이기에 잘 안되면 내 탓이라는 자책과 네 탓이라는 원망 사이를 오가면서 우울감에 빠지기도 해요.
그러나 희망은 달라요. 흔히 옛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괴나리봇짐 하나만 달랑 메고 용감하게 수천, 수만 리를 걷고 또 걸어서 목적지에 이르는데요. 대단한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닌데 수많은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며 헤쳐나가요.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수많은 사람과의 관계의 끈을 놓지 않고 그들과 시선을 맞추며 도움을 얻어내요. 절망의 순간에도요. 특히 놀라운 초월적인 신의 손길로 결국 희망을 완성해나가지요.
희망은 누군가의 ‘도움’에 신뢰하는 것이며, 이는 하느님의 은총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래서 어둠의 터널에서도 희망은 유효해요.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희망의 너머에는 늘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화로울 수 있어요. 비록 당장 원하는 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아도요.
그렇다고 열망 없는 희망만으로 충분할까요? 아니요. 열망 없이 희망만 하려는 사람은 겁쟁이고 무책임할 수 있어요. 또한, 희망 없이 열망하는 사람은 성급하고 무례하며 교만할 수 있고요. 자신의 힘에 기대는 열망은 행동의 에너지이며 활력이에요. 그러므로 열망이 없는 희망은 가다가 지치면 주어진 현실을 잊고 책임을 회피해요. 반면에 희망 없이 열망하는 사람은 뜻대로 안 될 때 쉽게 분노와 울분의 나락에 빠져들기도 하고요.
열망해야 자신을 믿고 행동하며, 희망을 할 때 이웃과 세상을 만나면서 하느님의 은총에 기대게 되지요. 희망은 열망 때문에 용감하게 바라고, 열망은 희망에 의하여 겸손한 바람으로 변화되는 거지요.
힘든 시기를 살아가는 김 수녀와 독자 여러분, 그럼에도 희망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희망은 희망하는 사람의 것이니까요. 기억할 것은 희망의 형제인 열망도 꼭 챙기면서요.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7. 험담이나 가십도 죄가 되나요?
비방, 자신과 듣는 사람의 영적 생명 죽이는 ‘죄’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성인께서도 아시죠?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저희에겐 분신 같은 스마트폰이 있다는 것을요. 전철이나 버스를 탈 때는 물론 길을 걸을 때도 뚫어지라 봅니다. 무엇을 보느냐고요? 어떤 조사에 의하면 주로 메신저와 뉴스 그리고 웹서핑과 SNS가 주된 활동이라고 합니다. 최근 우리 한국이 ‘갈등 공화국’이란 말이 나오는데요. 이렇게 갈등을 방조하고 부추기는 데는 넘치는 가십성 보도와 이를 빠르게 퍼 나르면서 확대 재생산하는 온라인 공간, 그리고 여기에 빠져 사는 우리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요. 악의적인 가십일수록 더 잘 퍼지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참 좋은 사람이더라’ 보다는 ‘참 나쁜 사람이더라’라는 정보가 훨씬 더 자극적이니깐요. 우리의 뇌는 부정적인 판단과 험담에 더 빠르게 집중하게 되고요. 그래서 쉽게 뒷말을 하게 되나 봅니다. 성인의 시대에도 험담이나 가십이란 것이 있었을까요? 가십도 죄가 될까요? 교황님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하셨는데요. 뒷말도 죄가 된다는 것일까요? 궁금합니다.
말 넘치는 세상, 사소함 속에도 진중함이 묻어나는 말, 가벼운 듯 따뜻한 그래서 웃게 해주는 그런 말이 그리운 오늘, 성인께 김 수녀가 일곱 번째 편지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김 수녀가 살아가는 세상은 내가 살던 세상과는 정말 많이 다르긴 하네요. 하지만 내가 살던 세상에서도 냉혹한 비판과 비난이 난무했어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위선이며 미친 짓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대는 사람, 그리고 할 일이 없어서 성당 주변이나 빙빙 돌고 있다며 뒷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사람들에게 인정을 못 받으니 봉사활동이나 하면서 인정받으려고 애쓴다며 비아냥대기도 하고요. 물론 지금의 세상은 디지털기기사용으로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더 빠르고 더 쉽게 자극적으로 확산되니 내가 살던 시대와는 비교하기 어렵겠네요.
가십이나 뒷담화가 죄냐고요? 가십을 시작할 때 누구나 가볍게 서로의 정보 교류를 위해 하겠지요. 서로 친교를 나누기도 하고 재미도 있고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모든 죄는 그렇게 시작되는 거 같아요. 여럿이 모여 남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성급하게 판단하고 험담도 하면서 자기만족에 빠지게 되지요. 특정 인물을 불신하고 경멸하는 말을 하면서 스스로 높아지려는 유혹도 생기겠지요.
가십의 사촌격인 비방이란 것이 있어요. 이는 바이러스와 같아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병들게 하지요. 그로 인해 누군가의 명예를 부당하게 훼손한다면 그것은 죄라고 생각해요. 남의 물건을 훔친 사람을 도둑이라 하지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귀중한 자산은 바로 명예(honor)입니다. 명예 하면 어떤 높은 직위를 연상하겠지만, 사람이라면 마땅히 누리고 받아야 할 인격적인 존엄이나 품위이지요. 그래서 법에도 명예훼손이란 죄가 있다고 생각해요. 타인의 명예를 훔친 죄이지요.
우리 인간에게는 세 종류의 소중한 생명이 있는데요. 영적 생명과 육적 생명 그리고 사회적 생명입니다. 죄는 영적인 생명을 소멸시키고 죽음은 육적 생명을 앗아가지만, 비방은 바로 사회적인 생명을 죽이지요. 가십은 누군가에게 모욕적일 수 있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나누면서 나도 모르게 험담과 비방으로 흘러가게 해요. ‘하더라’ 하면서 같이 동조하고 죄의식 없이 가십의 덫에 걸려 그 자체를 즐기기도 하고요.
가십이나 뒷말 자체를 무어라 단죄하긴 어렵겠지요. 직장동료들이나 친구들이 함께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상호작용하고 친교를 나눌 수 있겠지요. 그러다가 가십의 사촌인 비방으로 간다면 그것은 심각한 죄라고 말할 수 있어요. 게다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라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험담을 늘어놓는 행위도 조심해야겠어요. 남들이 다 아는 것이라면서 늘어놓는 이런 험담은 질이 안 좋은 비방입니다. 이는 말하는 자신과 그것을 듣는 사람의 영적 생명을 죽이는 것이고 동시에 비방당하는 사람의 사회적 생명을 죽이게 되니까요. 결국 세 사람이 죽는 것이지요. 칭찬하는 것처럼 하면서 비꼬거나 농담하는 것도 사악한 행동이에요. ‘아, 그 사람 참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하다가 교활하게 말을 바꾸고 가볍게 농담하듯 비아냥거리는데 이는 잔인한 비방입니다.
만약 비방을 없앨 수만 있다면 아마도 이 세상의 불의와 죄악의 많은 부분도 사라지리라 믿어요. 가십의 늪에 빠지는 것을 조심하세요. 우리를 험담과 비방으로 끌어들이니깐요.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8. 험담이나 비방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면
“대화할 땐 진실하고 따뜻하게 사실만을 말하세요”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한 주간 내내 성인의 말씀이 저의 마음속을 떠나지 않고 뇌리 속에 남아 있었어요. 이 세상의 불의와 죄악이 대부분 험담과 비방에서 비롯된다는 것. 가만히 돌아보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고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대부분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해성사를 준비할 때면 단골 레퍼토리처럼 떠오르는 것도 역시 말로 짓는 죄였습니다. 화나고 억울하고 슬프고 서럽고 그래서 그 누군가의 흉을 찾아내어 보태고 붙이면서 북받치고 꼬인 감정을 풀어내려 했지요. 하지만 그 순간은 시원하게 털어버린 것 같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죄책감과 자괴감으로 우울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요. 궁금합니다. 이 세상엔 정말 남 이야기 절대 안 하면서 말로 죄짓지 않는 사람 있을까요? 사실 남의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는 성녀 같은 사람이 제 주변에 있습니다. 대단하다고 느꼈지만 그런데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어요. 이상하죠? 자기에게 엄격한 성인 같은 그 사람의 얼굴은 빛이 나기보다 어두워 보였거든요. 그에게 무척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도 절대로 그 사람에 대해 불평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때론 차라리 욕이라도 하라고 말하고 싶기도 했어요. 이유가 뭘까요? 정말 험담이나 비방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인의 지혜를 구하는 김 수녀가 여덟 번째 편지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말’은 선물이며 생명의 도구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악이 되고 생명을 죽이는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말로 죄를 짓고 말로 상처를 입기도 해요. 물론 이 시대만의 이야기도 아니고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말을 하는 우리의 혀는 자칫 뱀의 혀가 될 수 있다고 했지요. 뱀의 혀는 둘로 나누어져 있거든요. 그래서 험담을 할 때마다 듣는 사람의 귀에 독을 넣어주게 돼요. 또 다른 혀는 물론 비방당하는 사람의 명예에 독을 넣게 되겠지요.
어떻게 해야 험담을 안 하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마법 같은 해결책은 없지만 우선 자신이 하는 말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렇다고 할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좋다고 말하지는 마세요. 생각해보면 그것도 유혹입니다. 그냥 좋다고 하면 나도 좋은 사람인 거 같거든요. 김 수녀가 만난 성녀 같은 그 사람, 절대 험담하지 않고 긍정적인 말만 하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척하기 때문 아닐까요?
어떤 사람은 남에 대한 흉을 보는 자신이 정직하다고 말하거나, 또 어떤 이는 허영에 빠진 사람에게 트렌디하다면서 부추기거나 둘 다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루머에 집착해 험담하거나 반면에 그 루머를 듣고도 모른척하거나, 혹은 좋은 것만 말해도 모두 다 사실과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 똑같다고 봐요.
누군가에게 타인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들었을 때 먼저 판단하기보다 그 말이 과연 사실인지를 알아보면 어떨까요? 혹시 사실이 아니라면 그 사람을 위해 해명도 해줄 수 있고요. 물론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겠지만요.
거짓은 거짓이고 악은 악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다만, 다른 사람의 잘못을 말해줄 때는 정말 많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지요. 타인의 흉이나 험담을 하지 않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바로 당사자에게 그 잘못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험담이나 비방을 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는 하느님의 자비는 무한하기에 누구나 용서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지녔으면 해요. 둘째는 마치 수술칼로 힘줄과 신경을 분리하는 외과 의사처럼 가능한 정확하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그 행동 자체만을 이야기합시다. 사실에 티끌만큼이라도 보태거나 빼서도 안 되겠지요. 그때에는 결코 어제의 일로 현재의 행위를 단정하거나 과거를 추측해서도 안 되고 미래도 상상하지 않았으면 해요. 셋째는 그 사람을 용서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만약 급하게 판단하려 하거나 용서하는 마음이 없다면 차라리 침묵을 지키고 기다리는 것이 좋겠지요.
마지막으로 노파심에 한마디 더 할게요. 때론 ‘말로 죄를 지을 바에야 차라리 할 말만 할게요’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 또한 유혹입니다. 험담을 멈추는 것이 어려우니 아예 안 하겠다는 극단적인 태도는 피했으면 해요. 사실 현인들이 ‘말은 가능한 한 적게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무익하고 해로운 말을 줄이라는 뜻이지요. 말의 양보다는 질이 중요합니다.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은 해야겠지요. 다만 대화를 할 때엔 진실하고 따뜻하게 말해주고, 단순하게 사실만을 말하는 연습을 꾸준히 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9. 성인께서도 ‘유혹’을 받으신 적이 있나요?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늘 깨어 기도하세요”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한동안 불볕더위와 기록적인 폭우로 슬픈 소식이 많이 들렸습니다. 다행히 집중호우는 지나고 가끔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과 따스한 햇볕으로 치유받는 느낌입니다. 그런데요. 그것도 잠시 왠지 모를 불안감으로 혼란스러울 때가 있답니다. 더 무서운 전염병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물가는 계속 오를 것이고,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도 언제 또 어떻게 덮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까요? 마음이 불안할수록 유혹이 찾아온다죠. 불평불만이 생기고 우울과 슬픔에 빠지게 합니다.
사실 지난 편지에 성인께서 하신 말씀에서 ‘유혹’이란 단어가 마음에 꽂혔습니다. 유혹하면 뇌물이나 마약 혹은 성적이고 원초적인 그릇된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해 멀게만 느껴졌었지요. 그런데 가만히 멈춰 돌아보면 유혹이 아닌 것이 없는 것 같네요. 어쩌면 유혹인지도 모르고 그저 익숙하게 바라보고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나 요즘처럼 마음이 불안하고 공허할 때 아담과 하와처럼 달콤한 사과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성인께서는 ‘유혹’을 받으신 적이 있나요? 유혹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작은 유혹에도 깨어 살고 싶은 김 수녀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여러 가지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군요. 이런 고달픈 현실에서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마음의 불안 자체는 유혹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마음속 긴장과 두려움은 유혹을 생기게 하는 원인은 될 수 있어요. 유혹은 저를 포함해서 누구나 언제든지 느낄 수는 있어요. 아주 자연스러운 거라고 말하고 싶어요. 어떤 사람은 유혹을 느끼는 그 감정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는데요. 느낌과 감정은 아무런 죄가 없답니다. 그런데요. 구별할 필요는 있어요. 유혹을 느끼는 것과 그 느낀 유혹에 동의하여 선택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요.
살다 보면 유혹은 다양한 형태로 다가오지요. 때론 아주 위험한 맹수와 같이 무섭게 공격하는 것도 있어요. 그럴 때 우린 방어적 경계태세를 갖추고 파괴적인 공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지요. 역설적일지 모르나 엄청나게 큰 유혹은 쉽게 빠지지는 않아요. 그만큼 우리도 방어태세를 철저하게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하루살이처럼 성가시고 귀찮게 찾아오는 작은 유혹이 있어요. 이런 유혹은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 하나로 쫓아버리기도 하고 때론 입속으로 들어가도 모를 정도로 의식하지 못해요.
가끔은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진짜 죽음까지 바라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를 향한 분노로 인해 험담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는 더 쉽겠지요. 또한, 어떤 사람을 간음하고 싶은 욕구가 올라올 때가 있겠지만, 이 또한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아요. 그러나 은밀하게 만나 호의를 베풀고 정담을 나누기는 더 수월하겠지요. 결혼생활을 하면서 불륜을 저지르지는 않아도 작은 말로 상처를 주는 일은 종종 일어나기도 하고요. 그리고 어떤 사람의 물건이 무척 탐나고 갖고 싶다고 하여 훔치려고 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나보다 많은 것을 가진 그 사람을 질투하고 시샘할 수는 있겠지요.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하기는 어렵죠. 그러나 일상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이간질하거나 슬쩍 거짓을 끼워 넣는 유혹에는 빠질 수 있겠죠. 평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고 욕할 순 없어도 외면하고 모른 척할 수도 있겠고요.
신심 생활이나 영성 생활을 하는데 장애물은 어쩌다 만나는 맹수가 아니라 수시로 찾아오는 하루살이 같은 유혹입니다. 눈앞에 아른거려 뺨이나 코에 앉아 성가시게 하는 작은 유혹은 우리의 영혼을 분산시켜 신심 생활을 방해한답니다. 자칫 작고 사소한 유혹들을 알아채지 못하고 허용하게 되면 일상이 되고 습관으로 스며들어 인격과 삶의 방식에도 문제가 되겠지요.
유혹에 대처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소한 유혹을 멀리하려고 일일이 대응하거나 불필요한 싸움을 하지는 마세요. 단 한 가지, 사랑을 실천하세요. 사랑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구체적으로 나누고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유혹을 퇴치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온갖 유혹에 저항하는 가장 좋은 명약이 있어요. 바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유혹이 밀려들 때 가장 안전한 피난처이니까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분명 내 힘으로 이겨 낼 수 없는 유혹이 찾아올 때가 있는데요. 그렇기에 늘 깨어 기도하는 연습을 매일 규칙적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11. 온유의 덕을 살려면
“주님께 의지하며 자신에게 먼저 온유하세요”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마음이 차분해지기도 하면서 동시에 쓸쓸해지는 가을입니다. 자칫 우울해질 수도 있지만, 적정 온도의 우울감은 오히려 고요함을 유지하게 해주나 봅니다. 마음의 양식을 쌓기에 참 좋은 9월에 받는 성인의 편지는 영혼단련을 위해 뭔가 막 해보고 싶어집니다.
성인께서 지난 편지에 사랑을 하려면 애덕을 실천하라 하셨어요.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자신에게 부족한 내적인 작은 덕들(little virtues) 중 하나만 구체적으로 시작해보라고요. 사실 제가 성인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유는 저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덕을 성인께서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격도 급하고 표현도 직설적이라서 부드럽고 온화한 사람이 참 부럽습니다. 물론 어떤 이는 타고나게 부드러운 성격과 친절한 태도를 지녔지요. 성인께서는 타고난 것이 아닌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서 온유의 꽃을 피우셨습니다. 그렇기에 저 자신에게도 희망을 봅니다.
온유의 덕을 쌓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노력하다 보면 정말로 부드럽고 온화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온유의 덕을 살고 싶은 김 수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점점 짧아져 가는 그래서 더 보석 같은 가을, 마음의 일을 하면서 영혼의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온유의 덕을 쌓고 싶다고요? 그렇다면 무엇보다 김 수녀 자신에게 먼저 온유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어떻게요? 자신이 부족하고 안 되는 것이 있을 때 자책하고 비난하지 마세요. 그러니깐 자신을 혹독하게 다루지 않았으면 해요. 자칫 가파르고 높은 오르막길에서 열심히 오르다가 용기를 잃고 포기할 수도 있어요. 자신의 불완전함에 너그러워지세요.
때론 잘해야 한다는 어떤 당위성으로 자신의 잘못에 화를 내고 또 이 화낸 것에 대하여 짜증 내고 짜증 낸 것에 대해 또 짜증을 낼 때가 있어요. 마치 평정심을 잃은 재판관처럼 재판할 때 죄에 대한 신중한 식별이 아닌 분노감정에 휩싸여 자신을 과시하는 잘못된 판결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자녀가 잘못할 때 화를 내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부드럽고 다정하게 하는 훈육이 훨씬 더 유익하지요.
자신에게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격정에 사로잡히기보다 자신에게 연민을 가지고 부드럽게 조용히 타이르세요. 화를 내고 요란스럽게 하는 반성보다는 더 깊은 성찰을 이뤄낸답니다. 가끔은 괴팍하게 굴거나 급한 성격에 화를 낼 수도 있어요.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친절하게 말해요. “내 불쌍한 마음아, 그렇게 결심을 했는데도 피할 수 없었구나. 그래도 용기를 내자. 다시 일어나서 이 구렁에서 빠져나가자. 주님께서 도와주실 거야.”
두 번째는 온유하려면 무엇보다 자신을 믿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결심을 해요. 필요한 덕을 간절히 구하면서요. 무엇보다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계심을 믿어요. 그런데도 결심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고 마음이 현란할 때는 성경 말씀을 소리 내어 외쳐보세요. “내 영혼아, 어찌하여 녹아내리며 내 안에서 신음하느냐? 하느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을.”(시편 42,6)
하느님 앞에 나 자신을 낮추면 나의 불완전함이 놀랍고 새로운 것도 아니에요. 설사 나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요. 어쩌면 덕행을 쌓는 여정에서 불완전함은 좋은 징조일 수도 있어요. 반면에 완전한 것 같은 상태를 경계할 필요도 있고요. 태어나면서부터 부드러운 성격을 지녀 많은 이들로부터 칭찬을 받는다고 해서 완덕에 이른 것은 아닐 테니까요. 그러니 조용히 자신의 마음에 용기를 북돋아 주세요. 그리고 결심한 덕행의 길로 다시 발을 내딛어요.
세 번째로 온유하려면 겸손을 친구로 삼으세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겸손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온유는 이웃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게 해요. 참된 겸손과 온유의 덕을 지닌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시를 당해도 아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아요. 특히 그 어떤 일에도 분노를 터뜨리지 않았으면 해요.
누군가의 잘못을 단호하게 바로잡아야 할 때에도 온유하고 차분하게 대하세요. 성난 코끼리를 달래는 데는 어린 양보다 더 좋은 것이 없어요. 총알에 의한 관통을 막는 데에는 방탄복보다 더 나은 것이 없고요. 아무리 이치에 맞는 바른말이라도 화를 내어 말을 하면 그 말은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요.
임금이 평화로운 마음으로 나라를 순방하면 백성은 이를 영광으로 알고 기뻐하지만 무장한 군대들을 이끌고 돌아다니면 비록 그 목적이 안녕과 질서를 위한 것이라도 백성은 달가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군대로 말미암은 폐해까지 겪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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