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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로 올라간 야곱의 가정
창 35: 1-8
삶을 살다보면, 열심히 살아보려고 무진장 애를 쓰지만 일이 이상하게 꼬일 때가 있습니다.
문제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기나긴 날들이 있습니다.
마치 수렁에 빠진 사람처럼 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싶으면 사업에 문제가 생기고, 사업이 어느 정도 굴러간다고 싶으면 종업원들이 문제를 일으켜 힘들게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무수한 인물 중에 야곱만큼 악착같이 산 사람이 없습니다.
요즘 말로 한다면 야곱은 ‘악발이’입니다.
그런데 그의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요.
평안한 날이 없어요.
오늘 우리가 취급하려고 하는 사건은 그 중의 하나입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모든 문제는 벧엘로 올라가라는 신호이고, 벧엘은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라는 것입니다.(함께 따라하자)
1. 야곱이 당한 어려움은?
야곱이 세겜성에 이르러 그곳에서 장막을 치고 정착을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곳에서 큰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야곱이 만난 위기는 이렇습니다.
창 34장에 나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바깥출입을 했다가 그 땅 추장의 눈에 들었습니다.
디나가 얼마나 예뻤는지 그 추장은 디나에 대한 연모가 지나쳐 그만 강제로 욕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디나의 오라비들이 들에서 이 얘기를 듣고 화가 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희들이 우리 누이 디나를 욕보였어! 어디 두고 보자!’
그래서 형제들이 꾀를 냈습니다.
“너희가 우리의 누이 디나를 가지려면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할례 받지 않은 족속과 혼사를 맺을 수 없다.”
세겜의 아들들이 할례를 받고 삼 일째 되는 날, 고통이 가장 심하여 움직일 수조차 없는 그날에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가지고 뛰어들어 그 모든 남자들을 죽였습니다.
디나의 강간사건을 순리대로 신앙으로 풀어야 하는데 ‘욱’ 치미는 감정으로 복수를 해놨으니까 이게 될 일입니까?
복수는 복수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입니다.
그 본토 사람들이 이런 일을 당하고 “이 웬 뜨내기들이 남의 땅에 와서 행패를 부려! 싹 쓸어버리자!” 이렇게 나온 거예요.
기껏해야 야곱의 숫자는 한 가족에 불과합니다.
우선 숫자적으로 열세입니다.
야곱가족이 몰살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야곱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만난을 겪었습니다.
형 에서로부터 쫓겨보기도 했고,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해보기도 했고, 이런 저런 시련을 다 겪어 보았지만 전 가족이 몰살당할 위기는 당해보지 않았습니다.
정말 처음입니다!
야곱은 아찔했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근심이 태산 같습니다.
창 34:30을 보세요! 야곱의 심경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 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야곱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벧엘로 올라가자!”
객관적으로 볼 때 전혀 해결책이 되지 않을 듯한 결심을 했습니다.
창 35:3절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갑니다.
‘벧엘’이란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집’을 말합니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더 쉬운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전인 교회로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교회에 나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읽는 우리 모두가 마음 속 깊이 새겨야할 말씀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른 곳을 두리번거리지 말고, 머리 싸매고 누워있지 말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야곱은 두 마디로 그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3절)
야곱은 염치없는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은 한결 같이 이런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①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환난을 당하면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겠어요?
그때 하나님은 모른 체하시는 분이 아니라, 들어도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분이 아니라 ‘내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언젠가 곽선희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소개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삶이 너무 힘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 심호흡을 하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라고 세 번만 불러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②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 말씀보다 더 좋은 말씀이 어디 있겠어요?
Wesley 목사형제의 기념비에는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라는 말과 함께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얼마나 좋은지를 나타내줍니다.
낮에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구름기둥을 준비하시기 때문입니다.
밤에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불기둥을 준비하시기 때문입니다.
가는 길에 바다가 있어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길을 내시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준비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실 물이 없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바위를 깨뜨려 물을 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이렇게 좋습니다.
3. 그 결과로 받은 축복은?
야곱이 벧엘로 올라간 결과로 받은 축복은 무엇입니까?
우리도 하나님께 나아왔을 때 이런 축복을 기대합니다.
1) 평안히 길을 갔습니다.
5절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누가 사람들을 두렵게 하여 야곱의 아들들이 평안히 길을 갔다고 했습니까?
하나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봐주시는 데 누가 감히 시비를 걸겠습니까?
2) 참된 예배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7절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하나님은 기어이 야곱을 예배자로 부르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야곱 스토리의 중심 주제입니다.
지금까지 야곱과 관련된 크고 작은 일들은 사실 부차적인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라는 한 인간이 그 무엇보다도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원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찾으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요4:23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바로 예배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돈 많은 사람도 아니고, 인격 높은 사람도 아니고, 권력 있는 사람도 아니고, 인물 잘난 사람도 아니고.......
참되게 예배하는 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우리를 참 예배자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미국 캘빈 신학교의 로저 그린웨이(Roger S. Greenway)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선교는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예배가 궁극적인 목표이다. 선교는 예배가 없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수많은 회심자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그들의 얼굴을 숙이게 되면 선교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됩니다.
선교는 한시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축복은 언제나 예배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와 땅의 기름진 축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참 예배자가 되십시오.
이런 은혜는 언제나 예배를 통하여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배를 양보하지 마십시오.
예배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3) 이름을 바꿔 불러주셨습니다.
10절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이름을 바꿔 불러주셨습니다.
‘붙잡는다.’라는 뜻의 야곱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꿔 불러주셨습니다.
우리의 이름도 바꿔졌습니다.
우리의 옛 이름은 죄인, 사탄의 종, 마귀의 자녀였습니다.
그래서 이름대로 죄를 범하고, 사탄의 종노릇하다가 멸망 받는 것이 우리의 정해진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우리의 이름을 바꿔주셨습니다.
우리의 새 이름은 의인,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신부,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이 이름 속에는 우리를 향한 현재의 축복과 미래의 축복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러주시면 우리의 현재와 미래는 그렇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모든 문제는 벧엘로 올라가라는 신호이고, 벧엘은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입니다.
야곱은 문제를 만나 벧엘로 올라갔고, 벧엘에서 문제를 풀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문제는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신호입니다.
문제를 만나거든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꼭 그렇게 하십시오.
그 때 문제는 엄청난 축복으로 변하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라
창 35: 1-8
폴란드에 유명한 전설이 있습니다. 폴란드의 ‘크라코우’라고 하는 지방에 ‘시
몬’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시몬은 밤마다 생생한 꿈을 꾸게 됩
니다. 그 꿈의 내용은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있는 다리 밑에 보물이 숨겨져 있으니
가서 파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날 반복해서 꿈을 꾸게 되니 시몬은 견딜 수가 없
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살던 마을을 떠나 먼 여행에 오르게 됩니다. 긴 여행 끝에
시몬은 프라하에 있는 다리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리에 경비병이 서서 지키
고 있는 것입니다. 테러범이 다리를 폭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시몬은 그
경비병에서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고 다리 밑을 파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경비병은 어이없어 하며 웃습니다. 그리고는 시몬에게 “나도 밤마다 생생한
꿈을 꿉니다.”라고 말합니다.
시몬이 무슨 꿈이냐고 묻자 경비병은 “크라코우라고
하는 지방에 가면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부엌 밑에 큰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꿈을 날마다 꾼다오. 그렇지만 나는 크라코우로 가질 않는데 당신은 그 꿈 때
문에 이곳에 오셨소?”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시몬은 “정말 그렇습니까?”라
고 놀랬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크라코우 마을로 돌아와서 자기 집 부엌 밑을 팠습니
다. 그런데 진짜 보물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 보물로 잘 살았다는 전설입니다. 이
로 인해 생긴 속담이 “보물은 크라코우에 있고 그 지식은 프라하에서 얻는다.”입니
다.
야곱의 행복은 벧엘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집 벧엘에서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
하고 그 자리에 정착하고 살았더라면 야곱은 평생 행복하게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벧엘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야곱이 깨닫게 되기까지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20년은 밧단 아람 외삼촌 집 하란에서 깨닫게 되었고 나머지 10년
은 숙곳과 세겜에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10년의 세월을 세겜에서 보내면서 하나님께 완전히 순정하지 못하고 불완전
한 순종을 하면서 엄청난 위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인생길에서 인생의 최저점
(最低坫)을 지나게 된 것입니다. 외동딸 디나는 겁탈을 당했고 열 한 아들들은 거짓말
을 하고 세겜의 남자들을 다 죽이는 피 흘리는 복수를 감행했습니다. 야곱은 영적인
지도력을 상실했고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4장에서 최악의 영적인 슬럼
프를 맞게 된 야곱은 그러나 35장에 이르러 슬럼프 탈출 작전을 통해 다시 지도력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에도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은혜를 받고 성령 충만을 받고
기쁨을 누리게 되지만 살다보면 영적인 슬럼프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멀리 계
신 것 같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도 줄게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해도 감동이 없는 상태
가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 35장에서 야곱이 어떻게 영적인 슬럼프
를 탈출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도 무더위의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나 다시 하나님
을 찾고, 은혜 받고, 성령 충만하게 되는 경험을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
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1:1로 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
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
라.”(창35:1) 야곱은 영적인 슬럼프, 영적인 최저점에서 일대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
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아! 내게 네
게 축복의 근원이 되라고 했더니 너는 도리어 세겜 사람들에게 저주의 근원이 되었구
나. 내가 너를 잘못 택하였구나. 이제 내가 너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택해야겠다”라
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야곱이 인생의 최저점에서 “주여, 이제 내가 다시 벧엘
로 가야 되겠나이다”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오랫동안 기다리시던 탕자의 아버지와 같
은 심정을 가지고 야곱을 기쁨으로 맞아주셨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이상한 존재입니다. 자기의 하는 모든 일이 번창하고 잘 되면 하나님
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최저점에 내려가 하는 일이 잘 안
되고 삶에 고통이 임하게 되면 그 때서야 비로소 주의 말씀을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인 슬럼프에 빠졌을 때 우왕좌왕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조용히 일대일의 시간을 가지시고 하나님의 여러분의 영혼에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들
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전혀 새로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30년 전에 에
서의 무서운 낯을 피해서 밧단 아람으로 도망하던 중에 벧엘에서 잠을 자게 되었을때
하늘의 문이 열리고 사닥다리가 내려오더니 사닥다리 꼭대기에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
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잠에서 깨어 이곳에 돌로 기둥을 세우
고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서원을 했습니다. 창세기 28장 20절부터 22절까지를 보면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
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하면
서 하나님께 세 가지 서원을 합니다. 첫째,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
요’, 둘째,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셋째, ‘하나님께
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는 것입
니다. 이것은 대단히 계산적이고 미성숙한 서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
게 축복하시면 내가 하나님께 이렇게 드리겠습니다.’라는 식의 계산적인 서원인 것입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서원을 기억하시고 야곱이 영적인 위기를 당하
게 되니까 그 서원을 행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에 빠지게 되면 세상과의 관계를 차단하고 오로지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
간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휴대전화, 집 전화, TV 다 끄시고 “하나
님, 내 영혼에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여 주옵소서.”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할 때 하나
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영혼에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때로는 귀에 들리
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말씀하실 수도 있고, 때로는 영혼에 말씀하시는 조용한 소리
를 들으실 수도 있고, 때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성령충만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10년 전에 했던 서원을 갚을 때가 되
었구나.” 또는 “너는 이것이 죄악이 되어 지금 영적인 침체를 겪게 되었으니 죄악
을 회개하라”, “이제 너는 내게 네게 준 소명을 이룰 때가 되었으니 이 일을 수행하
라”라는 말씀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영적인 슬럼프가 꼭 나쁜 것은 아닙니
다. 영적인 슬럼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 되는 줄로 믿으시기
를 바랍니다.
2. 우상을 제거해야 한다.
둘째로 영적인 침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상을 제거해야’ 합니다. 야곱의 집안만
큼 하나님의 특별한 대우를 받은 집안이 또 어디 있습니까? 할아버지가 아브라함이
고, 아버지가 이삭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
나님’이라고 불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집안에 특별한 대우를 하
시고 큰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까? 집안에 우상
이 참 많습니다. 라헬도 그 아비의 우상 드라빔을 훔쳐 왔습니다. 나머지 가족들도 각
자의 우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지금까지 가족들에게 우상을 치우라
고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야곱은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려야하는데 바로 우상
이 걸리는 것입니다. 우상을 가지고서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으므로 우상을 치우라
고 가족들에게 비로소 명령을 합니다. 우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른 우상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명한 인도의 간디 수상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간디 수상을 ‘간디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 어떤 부모가
자기 아이를 데리고 간디 선생을 찾아 왔습니다. 이 아이는 하루 종일 사탕만 먹고 밥
을 먹지 않고 있었습니다. 부모가 너무 걱정이 되어 간디 선생에게 찾아온 것이었습니
다. 그러자 간디 선생은 보름 후에 다시 오라고 합니다. 보름 후에 다시 오니 간디 선
생이 아이더러 “애야, 사탕 그만 먹어라.” 그리고는 그만 가보라고 합니다. 기가 막
힌 부모가 간디 선생에게 묻습니다. “아니, 간디 선생님, 그 말씀을 하시려면 보름
전에 하시지 왜 이제야 하십니까?” 그러니 간디 선생이 “그 때는 제가 입에 사탕을
물고 있었거든요. 제가 먹고 있는데 어떻게 아이더러 먹지 말라고 할 수 있겠습니
까?”라고 대답했다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이제 야곱은 자기 입의 사탕을 제거하기 시작합니다. 가족들에게 세 가지 명령을 합
니다. 첫째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을 버려라!”, 둘째로 “너희 자신을 정결
케 하라!”, 셋째로 “너희 의복을 바꾸라!” 하나님께서 야곱과 야곱의 가족들에게
안과 밖을 모두 깨끗하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
지 못할 때는 가족들에게 권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
께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기로 결심을 하니까 “우상 숭배를 다 버리고, 우상을 제거
하라!”고 담대하게 명령을 할 수 있게 되고, 영적인 지도력을 회복하게 된 것입니
다.
대만이나 일본 등 우리의 주변 국가들은 이방신상을 섬기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
다. 제가 언젠가 이들 나라를 여행을 할 때 아침에 물건을 판매하지 않는 경우를 보았
습니다. 이방신상을 섬기는 의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우리 한국 사회를 보
면 이방신상은 많이 제거가 된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우
리가 살아가면서 신상을 가지고 다니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
하게 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우상입니다. 직업에서 성공하기 위해 교회
에 출석하지 않으신 분이 있다면 그분은 직업이 우상입니다. 마찬가지로 놀러가기 위
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출세를 위해서, 인기를 위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분들도
우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우선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우상인 것입
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장 21절에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
서 멀리하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상을 품고 있는 한 하나님의 축복
과 은혜는 절대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암세포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제거하
는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런 우상을 야곱은 다 거두어 세겜의 상수리
나무에 완전히 파묻어 버리고 벧엘로 올라간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가 있는 사람은
‘내 삶 가운데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우상은 없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3.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셋째로 침체를 벗어나는 비결은 ‘과거에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
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 기억하고 감사하게 되면 다시 새로운 힘
과 용기가 솟아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런 교육의 방법을 쓰
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7월 15일부터 일주일동안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는 절
기를 지킵니다. 장막절은 무성한 가지(종려나무가지, 시내 버들 등)를 이용해 엉성한
초막을 짓고 그 속에서 일주일동안 사는 것입니다. 좋은 집을 버리고 이 곳에서 사는
이유는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생할 때 베풀어 주신 은혜
를 잊지 말라’라는 의미에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들에게 초막절을
꼭 지키라고 말씀하셨건만 이 말씀에 순종한 왕은 솔로몬 왕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
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후에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70년 동안을 살게 되었습니
다. 그리고 돌아와 비로소 초막절을 지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창세기 35장에서 가장 크게 느껴지는 분위기는 ‘야곱이 과거에 하나님께서 부어주
신 은혜를 기억했다’는 것입니다. 2절과 3절을 봅시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
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지금 야곱은 하나님의 응답과,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새롭게 기억
하고 있는 것입니다.
4. 현재 베푸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신뢰하라.
넷째로 ‘현재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내가 잘 하면 복
주시고 내가 잘못하면 때리시는 하나님이시다’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 여러분을 때리시면 벌써 지옥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이 저지른 죄
악에 대해 지금 징계를 내리신다면 이곳에 앉아 계실 분들은 한 분도 없으실 것입니
다. 하나님은 우리를 벌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다만 바른 길로 가게끔 권
징하시는 것입니다. 이 때도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기 위해서 권징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될 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벧엘에 단을 쌓
는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야곱아! 나는 엘샤다이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다른 것 하나 없이 나만 소유하고 있으면 모든 것에서 충분하게 될 것이다.”
‘엘샤다이’라는 말은 ‘All sufficient God(모든 것이 충분한 하나님)’이라는 뜻입
니다. 하나님은 또한 “네게서 왕들이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가나안 땅은 너
와 네 후손에게 영영히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니까 이
제 야곱은 인생의 모든 슬픔을 다 감당하며 나가게 됩니다.
창세기 35장은 야곱의 인생 가운데 가장 슬픈 장입니다. 야곱은 창세기 35장에서 어
머니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를 잃습니다. 유모를 잃고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이름
을 ‘알론바굿(the oak of weeping, 통곡의 상수리나무)’이라 짓습니다. 무엇보다
큰 슬픔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은 것입니다. 라헬이 아이를 낳다 죽습니다. 그 아
이의 이름을 ‘베노니(the son of my trouble, 내 고통의 아들)’라 짓고자 했으나 야
곱은 ‘베냐민(the son of my right hand, 내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짓습니다. 게다
가 또 슬픈 일은 장자 르우벤이 자신의 첩 빌하와 통간을 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
서 야곱은 르우벤의 장자권을 박탈해 버립니다. 그리고 늙은 아비 이삭이 나이 180세
가 되어 소천하게 되고 야곱과 에서가 아비 이삭을 묻게 됩니다. 성경 어느 장도 창세
기 35장처럼 슬픈 일이 한꺼번에 닥치는 장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런 슬
픔 중에서도 낙담하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가 나를 축복하셨다
내 후손을 축복하시고, 내 후손들 중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나올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땅을 영영히 나와 내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으니 내가 이런 슬픔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능히 감당할 수가 있다”하면서 이긴 줄로 믿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야곱이 벧엘에 단을 쌓았다고 해
서 야곱의 인생 가운데 어려운 일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의 은혜로 이 어려움을 능히 감당하며 나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겪어야 될
일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도 하고, 고통을 당하기도 하는 슬픔을 겪습니
다. 그러나 이런 슬픔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사랑해 주시고, 하나님이 용기와 능력을
주시면 우리는 능히 감당하며 나갈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를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를 대신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사랑
을 믿고 침체에서 벗어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빛의 근원에서 멀어지면 어두워집니다. 이런 영적인 어두움의 현상 가운데 하나가 영
적으로 침체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으면 조용히 하나님
과 일대일의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마음속에 있는 우상을 깨끗이 제거하
시고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시고 지금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신뢰하며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벧엘의 하나님, 엘 벧엘이 크라코우의 보물입니다. 벧엘은 야곱이 축복을 누리는 최
상의 장소입니다. 벧엘의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인간에게 참된 행
복입니다.
야곱의 가정 예배와 축복
창 35: 1-8
오늘 본문은 야곱 가정의 비극과 회복의 역사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딸 디나가 세겜성을 구경 나갔다가 그 성의 추장 아들에게 겁탈을 당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성을 기습해서 성안의 모든 남자들을 죽여 복수를 했습니다. 주변 다른 모든 부족들은 야곱의 집에 대해 위협을 느끼고 단결했습니다. 야곱도 위기를 느꼈습니다. 애곱은 온 가족을 데리고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가정제단을 쌓았습니다. 야곱의 가정예배는 다음 몇 가지 놀라운 축복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첫째, 야곱의 집이 ‘하나님의 집’이 된다.
‘벧엘’이란 바로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으로 하여금 벧엘에서 가정예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면 그 집은 벧엘이 되지만 가정예배가 없는 집은 길갈의 집 즉 '사람의 집'이 됩니다.
창 35:15은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했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행하는 자리입니다. 이것은 예배의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6:8-9의 말씀을 보면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계명)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둘째, 야곱의 가정예배는 우상을 청소하는 은혜를 받는다
창 35:2,4을 봅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했습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었습니다. 우상숭배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상을 따라 임합니다.
오늘날 가정의 삶을 봅니다. 가족들이 집 안에만 들어오면 TV 앞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극장 같이 되었습니다. 집에 와서 잠만 자고 갑니다. 밥만 먹고 갑니다. 가정이 여관이나 식당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가정이 부부지간에 색스나 하는 곳 정도입니다. 참된 가정의 의미를 다하지 못합니다. 가정에 사탄의 역사만 가득합니다.
가정예배는 그 모든 우상을 청소해 냅니다. 온 가족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을 모시게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우리의 눈을 고정하게 만듭니다.가정에 예배가 있으면 하나님이 거하는 곳이 됩니다. 가정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기관이 되면 가정이 삽니다 복됩니다. 성도 여러분의 집이 가정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집이 됩시다.
또한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예배는 예수님의 보혈의 은총을 우리의 몸과 맘을 씻는 기회입니다. 특히 의복을 바꾼다는 것은 죄를 정결케 하되 적극적으로 더러운 삶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삶을 옷처럼 갈아입는다는 뜻입니다. 모든 예배가 그러하듯이 가정예배는 가족들에게 육욕적인 생활을 벗어버리게 하고 신령한 삶을 살 수 있는 지혜와 꿈과 능력을 채워 줍니다.
셋째, 야곱의 가정예배는 평화와 안정을 이룹니다.
창 35:5은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했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성을 구경 나갔다가 그 성의 추장 아들에게 겁탈을 당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성을 기습해서 성안의 모든 남자들을 죽여 복수를 했습니다. 주변 다른 모든 부족들이 연합하여 야곱의 집을 치려했습니다. 야곱의 가문은 큰 위협에 직면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 드렸더니 하나님이 역사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근 부족들의 마음을 꺽으셨습니다. 예배는 가족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는 길입니다.
넷째, 야곱의 가정예배는 축복을 이룹니다,
(창 35: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창 35:10)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창 35:11)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창 35: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창 35:13)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벧엘에서 단을 쌓은 야곱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셨습니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바꾸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얻고, 자손이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 축복이 천대에 까지 이르릅니다. 가정예배 가운데 임마누엘의 은혜를 체험하고 누리게 하셨습니다. 가정예배의 놀라운 유익이 임합니다.
사회의 모든 문제는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행복한 사회를 만들려면 먼저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온 가족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가정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가정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가정예배는 놀라운 축복이 보상됩니다.
성경:요 2:1-11 영적 축제와 단합의 가정예배
1. 가정예배는 영적 각성과 축제의 장이다.
그러므로 가정이 할 수 있는 중심적인 영적 사역 가운데 하나는 영적 각성과 축제를 개발하는 것이다. 사라 쉔크(Sara Shenk)는 이런 방식으로 정의한다: "축제는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경축하는 것이다. 축제는 서로가 간직할 시간을 갖는 것이다. 축제는 벌린 팔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조물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Sara Shenk, Why not Celebrate![Intercourse, Pa.: Good Books, 1987], 3).
예수님은 가정을 축제의 장으로 삼으셨다. 예배는 삶의 최고의 축제 행사이다.
* 예수님은 이제 막 결혼한 부부들과 가쁨을 나누셨고, 포도주가 모자랐을 때 포도주를 제공하셨다(요2:1-11).
* 예수님은 바리새인, 세리, 친구과 앞으로 제자 될 사람들의 가정에서 함께 식사하셨다(눅7:36, 10:38, 19:7, 마 9:10).
*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환대하셔서 그들을 팔에 안으시고 사랑으로 축복 하셨다(막10:16).
*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죽자 슬픔에 잠긴 마르다와 마리아를 찾아가 위로하셨다(요11:17-37).
* 한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절기에 줄곧 참여하셔서 제자들이 함께 유월절을 축하하도록 특별한 지도를 해주셨다(마 26:18).
* 함께 모인 다락방은 후에 있었던 성만찬 축제의 기초가 되었다(눅22:19, 고전11:24-25).
예수님 사역의 많은 부분이 가정 안에서 가정 사역과 관련 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 가정의 축제를 연출 하신 분입니다.
축제는 의례(儀禮)와 놀이, 연회, 금식 그리고 기쁨과 슬픔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반복행위를 바탕으로 한다. 합리주의와 물질만능주의, 그리고 문화적 장벽은 축하하는 능력을 무한히 감소시켜왔다. 합리주의는 삶에서 나타나는 놀라움과 신비, 그리고 상상력의 옷을 벗기는 경향을 초래했다. 합리주의는 그 근본적 핵심에 있어서 만상(萬象)을 분석되고 지배되고 비극적으로 이용당하는 목적물로 대상화(對象化)한다. 물질주의의 비극적인 파생물은 우리들 인간이 너무나도 많은 것을 축적한 결과 엄청난 양적 시간을 우리가 지닌 소유물을 돌보고 관리하고 즐기는데 소비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탐식적인 경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축제(celebration)와 감사(gratitude)를 위한 잠재력을 감소시킨다.
위대한 가정 축제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문화적 장애물들로부터 우리들을 구출하시고 또한 의미 있는 가정 생활을 가르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축제는 삶의 곤경에서 도피하거나 일시적으로 그 곤경을 경감시키려는 행위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축제는 실제를 강화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초월하여 극적으로 하나님과 연결시켜준다. 넬슨(Gertrude Nelson)은, "모든 훌륭한 예식(Ceremony)은 우리로 하여금 바로 당면한 문제를 현실적으로 직면하여 느끼게 해주고, 삶의 실제가 지닌 어둡고 밝은 양면, 기쁨과 공포 또는 고통을 충분히 표현하도록 해준다"라고 말함으로써 이 개념을 재강조한다(Gertrude Nelson, To Dance with God [Mahwah, N.J.:Paulist, 1986], 41.). 삶의 어두운 시절 가운데서도 예배와 기도는 우리들의 초점을 하나님께로 되돌릴 수 있다.
2. 가정예배는 소속감의 창조, 강화 그리고 보강한다.
가정예배는 가정의 정체성과 가정에 대한 소속감을 창조하고 강화시켜주므로 또 다른 보강(補强)결과를 가져다준다(Arlen Roy가 쓴 "Use Family Rituals to Strengthen Church Families and Congregations," Action Information [Alban Institute] 17:6 [Nov./Dec. 1991] : 6-9를 참조하라). 세상은 간혹 잔인하고 정당하지 못할 수도 있어서 우리를 찢어발기려 한다. 그러나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에 의해 감동 받는 가정은 수용과 긍정의 필요한 메시지를 서로 나눌 수 있다. 생일축하, 결혼기념일, 장례, 특별한 사건들과 업적치하, 크리스마스, 부활절 그리고 여타의 기독교 절기일들과 같은 가정의례(Family Rituals)는 하나님과 우리가 맺는 관계와 또한 인간 서로간의 관계를 강화시켜준다. 실제적 표현과 예배행위는 가정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별 문제되지는 않는다. 주요 원리는 가족 구성원들 개개인이 자기들은 세상에서 결코 외로운 존재가 아니며, 필요할 때 도움을 받고, 감사할 때 기쁨을 발견하기 위해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3. 가정예배는 부모들의 모범에 기초한다.
초기 유대 가정들처럼 청교도들(The Puritans)은 가정이 미치는 엄청난 영향의 중대성을 인식하였다. 그들은 가정을 기도 드리고 예배하고 하나님께 초점을 두는 작은 소교회로 인식했다.
옛일을 기억하라
창 35: 1-8
하나님께 인정받고 축복받도록 신앙 생활을 잘 하려면 지난 일을 잊어버리기도 잘 해야 하지만 한편 옛날 일을 기억하고 생각하기도 잘해야 합니다.
신명기 32장 7절에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신명기에는 "옛날을 기억하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라. 부요해서 잘살게 되거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하라" 하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바로 하고 하나님께 축복받는 생활을 하려면 옛날을 잘 기억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창세기 35장에 보면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서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서 단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벧엘이 어떤 곳입니까? 죽이려고 덤벼드는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다가 돌베개 베고 잠자던 고난의 장소요, 거기서 하늘문이 열리고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던 곳이요, 하나님이 나타나셨던 곳입니다. 그 벧엘에 올라가서 제단을 쌓으며 옛날의 감격을 되새기며 옛날을 생각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는 것은,<1. 고난 받던 때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35장 3절에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고 하면서 옛날 고생하던 때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은혜 베푸시던 때를 기억했습니다. 또 하나님도 그 고생하던 때를 기억하기 원하셨습니다. 지금 야 곱은 많은 처자식들과 많은 재산을 벌어서 부자가 된 때였으므로 옛날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형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 돌베개 베고 잠자던 때를 다 잊어버릴 뿐 아니라 신앙도 많이 해이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을 받던 옛날을 회상케 하기 위해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때 생각 못한다는 속담대로 사람이 편안하고 잘 살면 옛날의 고생하던 때를 쉽게 잊어버리게 됩니다.
오늘은 6·25 제56돌을 맞이 했는데 그 처참했던 6·25가 점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고 있으며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남아가고 있습니다.
이전쟁으로 300만명의 살상자가 발생했고 남한의 85,000명의 요인이 납치디었으며 30만명의 행방불명자가 생겼고 2,122개 의 교회가 파괴되었으며 535명의 목회자가 학살 당했습니다,그 뿐 아니라 30만명의 과부와10만명의 고아가 이 전쟁으로 발생 하였습니다,
전쟁은 이렇게 승자도 패자도 없이 끝난후에는 피폐한 전흔만 남겼습니다, 이것이 56년전의 우리의 역사이자 6,25의 비극인 것입니다,
기성세대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고 젊은이들은 전혀 그 때의 비참하고 처절했던 때를 알지 못하고 잔인무도한 공산당의 만행을 잊어버리고 그들도 우리와 같은 얼굴을 가지고 우리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인데 그렇게까지야 나쁘랴. 무조건 통합해서 통일하고 봐야 될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것이 얼마나 소름이 끼치도록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6·25의 비참했던 사실과 공산당의 잔인무도한 만행을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는 줄 압니다. 신명기에도 "옛날을 기억하고 자녀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손들에게 옛날 애굽땅에서 종살이 할 때의 고생과 광야 생활의 40년을 부지런히 가르 쳐서 기억하게 했습니다.
지상낙원이라고 할만큼 부요하게 잘사는 덴마크에서는 청년들이 호화스런 파티에 들어갈 때 반드시 옛날 선조들이 고생할 때 먹던 까만 호밀빵을 한쪽씩 먼저 쓴 물과 함께 먹고 나서야 들어가 파티를 즐긴다고 합니다. 참으로 잘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옛날의 고생과 불행을 잊지 않고 기억할 때 그런 불행이 다시 오지 않는 것입니다. 6·25의 불행을 늘 기억할 때 또 다시 6·25와 같은 비극이 오지 않 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젊은이 학생들이 6·25를 점점 잊어버리고 있을 뿐 아니라 귀찮게 여기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부모들이 가르쳐야 합니다 미국은 편안하고 잘살게 되니까 청소년, 고등학생 95%가 마리화나를 피운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등학생들도 쉬는 시간이면 운동장에 나와서 저희들끼리 키스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 학생들이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정말 못봐주겠다고 합니다. 또 한 15-16세 학생들이 갱단을 조직한 수가 뉴욕에만도 몇만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 학생들한테 그의 부모들이 조국에서 고생을 하다가 이곳에 와서 돈을 많이 벌어 큰 꿈을 심어 주려고 하면, 꿈이 무슨 소용있느냐고 말대꾸하면서 적당히 먹고 마시고 즐기면 되지 않느냐고 하더랍니다. 미국에 데려와서 오히려 사람을 버려놨다고 합니다(철저히 교육시키는 가정은 안그렇겠지 만).
<2. 하나님을 만나던 때를 기억하라.>
"형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35:1)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28장 에 보면 야곱이 피난가다가 돌베개 베고 잠자다가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난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때의 감격을 잊어버리고 해이해져 감으로 벧엘로 올라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삭개오가 가끔 말없이 집을 나가곤 해서 그의 아내가 뒤를 밟아 보니까 전에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던 것을 생각하고 그 나무에 물을 주고 그 나무를 어루만지며 눈물을 글썽이곤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기도하고 하늘문이 열리며 환상을 보던 그 때를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1년에 한번 강원도 철원에 있는 대한수도원찾습니다, 처음으로 성령받고 은사받던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해마다 그 날이 되면 그 기도원에 가서 자리도 그 자리에 앉아 며칠씩 기도하곤 합니다. 여러분은 처음 은혜받고 감격스러웠던 때를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때의 열심과 첫사랑을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계시록 2장 4절 5절에서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 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잘못된 죄인지 모릅니다.
이사야 1장 3절에서 4절에 보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어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 갔도다"고 하나님이 탄식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은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사도 바울은 늘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고 살기 때문에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고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감격했던 그 때를 늘 잊지 말고 삽시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3. 축복 받던 때를 기억하라.>
야곱이 지금 이만큼 번창하고 잘살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임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서 축복 받던 벧엘로 올라가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잊어버리면 우쭐대고 교만해 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늘 살기를 원한다면 매일매일 순간 순간 하나님의 축복임을 기억하고 명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 5절에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음식을 먹어도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옷을 입어도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자동차를 타도 지금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태워 주고 날라다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낼 때 늘 감사와 감격이 넘치고 교만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은 대왕이 되고 명성이 높아져도 늘 자기는 이새의 말째아들이요, 양치는 목동이요, 비천하고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였음을 늘 기억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늘 기억하면서 살기로 원하셨기 때문에 사무엘하 7장 8절 이하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고 했습니다.
7장 18절에 "다윗 왕은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하고 감격스러워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서 유명해지거나 부자가 되거나 높은 사람이 되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고 겸손해야 됩니다.그런데 다윗왕도 잠깐 마귀 시험에 빠져 교만했다가 하나님이 괘씸히 보신 적이 있습니다.
역대상 21장 1절 이하에 보면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세어보고 군대의 수가 많은 것을 자랑하고 교만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21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 일을 괘씸히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잊어버리고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8장 12절에서 14절에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데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 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8장 17절에서 18절에 "두렵건데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 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기차 안에서의 일이었습니다. 기차 안에는 백인과 흑인 노예들이 타고 있었는데 흑인 노예가 말을 안듣는다고 갑자기 백인이 칼을 집어들고 찌르려고 하자 같이 타고 가던 선교사 한분이 재빨리 손으로 막아서 위기를 모면케 해 주었습니다. 선교사의 손은 피가 철철 흐르게 되었고 많이 다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사는 그 백인에게 오히려 노예의 값을 치뤄 주고 그 노예를 자유롭게 해 주 었습니다. 그랬더니 노예는 너무 고마워서 선교사한테 평생동안 선교사의 종노릇을 하겠다고 간청해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같이 지내다가 노예가 조금 생활이 편해지니까 가끔 선교사님의 말을 안듣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 선교사는 자기 다친 손을 쩍 펴 보이면 과거의 일 을 기억해서 누그러지곤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과거의 고난받던 때와 하나님 만난 때를 그리고 축복받던 때를 기억하여 교만하여지지 말고 겸비한 마음을 가지고 믿음생활 잘 할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