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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23편
올라가는 노래(4)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본 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120-134) 중 그 네 번째 노래이다.
신자는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때로는 박해와 고난이 극심하여 슬픔에 잠기기도 한다. 신자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성전"을 향해서 올라간다.
1.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1-2)
신자는 세상에 살면서 성도들과 더불어 교제와 나눔과 예배를 즐긴다. 그러나 때로는 교제와 나눔과 예배가 모두 끊어져 버리는 때가 있다.
요셉과 욥과 다윗이 그와 같은 형편에 처했었다.
리차드 범브란트는 14년동안 감방에서 극심한 박해와 고문을 당했다. 그와 같은 때에도 성도들은 "성전"으로 올라가며 (땅의 성전으로 가는 길이 막힐 때 하늘의 성전을 바라보며)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한다.
느헤미아도 성전이 훼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고난 중에서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신 주만 바라보는 것은 고독하고 외로운 일이지만 또한 자기만이 누릴 수 있는 위로와 평안을 소유하는 길이다.
"종의 눈이, 여종의 눈이, 우리 눈이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나에게 있는 모든 눈이 눈을 들어 하늘의 주님만을 바라볼 때 성도들은 하늘의 위로와 평안을 누린다.
2. "주여 긍휼히 여기소서" (3-4)
극심한 고난과 슬픔 중에서 "성전"을 향해 올라가며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자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끼리에 엘레이손) 이다.
여기서 시인은 "주여 긍휼히 여기소서" 를 세 번 번복했다. 성도에게 영원히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라는 기도는 가장 핵심적인 바른 기도이다.
여기서 시인은 자기와 자기 민족이 당하는 수난을 장황하게 늘어 놓지 않고 그저 "심한 멸시를 당하는" 자기와 자기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기 를 간구했다.
가해자에 대한 미움이나 정죄를 나타내지도 않았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나 불평을 늘어 놓지도 않았다.
그저 솔직하게 자기의 죄를 인정하며 단순하게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했다.
눅18장에 나오는 세리가 성전에 올라와서 기도한 것처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주께 향하고, 하나님을 바라며, 기다리나이다."
여기 기도자의 자세는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세이다.
곧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비천한 자리에서 (종의 심리로)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리는 자세였다. 신앙은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고 겸손히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고통의 심연에서
시편 123:1~4, 124:1~8
시편 130편을 같이 교독하실까요?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 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
오늘 본문 123편과 124편, 그리고 조금 전에 우리가 교독한 시편 130편은 그 내용이 비슷합니다. 이 시인은 성전에 올라가며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어려운 사정을 고하고 있습니다. 그 어려운 형편이 무엇인지 본문에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아니했지만 ‘깊은 곳’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그저 단순히 ‘깊은 곳’이라고만 표현했으나 이 낱말은 시와 노래에서, 혹은 철학과 여러 종교에서 볼 수 있는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이 ‘깊은 데’는 ‘심연’이란 영적 의미가 있는데 여기에도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깊은 데’는 ‘얕은 데’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높은 데’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깊다는 뜻도 있고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큰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진리의 빛이나 고통의 흑암이 모두 깊은 곳입니다. 심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성도들이 당하는 고통을 깊은 곳, 심연이라고 표현한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진리의 빛과 고통의 흑암은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거의가 인간생활의 ‘깊은 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데 빠져서 헤어나기 어려울 때 하나님이 그리워지고 하나님을 전폭으로 의지하게 되고, 중심에서부터 하나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사람이 평안할 때는 모르지만 삶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옛 글에도 ‘임사호천(臨死呼天)’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통해서 이 시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그의 전 생애를 지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영혼이 깊은 데 빠지게 되니 결사적으로 기도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가 경험하는 깊은 곳은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은총의 깊은 곳’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는 사람에게는 어려운 문제가 오히려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쇠가 용광로 속에 들어가 녹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를 바로 이용하면 유용한 기구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읽은 시편에서 귀한 교훈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1. 우리의 처한 형편이 어떠하든지, 비록 최악의 경우라고 할지라도 오히려 하나님께 부르짖어 아뢸 수 있는 것은 성도의 특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에 나타나는 위대한 인물들이 모두가 때때로 고통의 깊은 곳에서 주님께 부르짖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어떻게 할 수 없는 깊은 불행 속에 빠지곤 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거의 절망의 깊은 곳에 이르게 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의 깊은 곳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수 있고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가장 좋은 기회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레미야 3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그에게 임하시니라 가라사대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눈물의 선지자, 애국의 예언자 예레미야는 매국노라는 누명을 쓰고 시위대 뜰에 갇힌 몸이 되었을 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가장 큰 특권은 이 고통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응답이 약속된 기도요, 그보다도 크고 은밀한 비밀을 볼 수 있는 특권이 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중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의 깊은 곳에 빠지신 분이 계십니까? 앞이 캄캄하고 거의 희망이 없어 보입니까? 이 고통의 심연에서 낙심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부르짖읍시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했는데 여러분에게도 전에 미처 생각도 못했던 놀라운 비밀을 발견하시는 감격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고통을 생각할 때마다 구약의 욥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욥은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바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었고 그렇게 순전하며,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 이 세상에 다시 없다고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자랑할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매우 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그렇게 많던 재산이 하루아침에 다 없어지게 되고 훌륭한 자녀 10남매가 다 죽게 되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게다가 욥 자신의 몸에 창질이 생겨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욥의 아내마저 너무 안타까워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롭게 살아 보려 했지만 이런 어려움을 당하니 “그런 하나님 아예 저주하고 죽어 버리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끝내 하나님께 부르짖고 믿음을 지켰더니 나중에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이와 같은 놀라운 신앙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귀로 듣는 신앙에서 눈으로 뵙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므로 시편 50편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했습니다. 환난의 깊은 어두움은 누구에게나 임합니다. 여기에는 빈부나 귀천의 구별이 없고, 유무식의 차별이 없으며,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임합니다. 혹은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국가와 민족적으로 임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고통과 환난의 날에 원망하고 낙심하며 자포자기하고 방황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환난의 날에 원망하거나, 낙심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아니합니다. 반항하지 아니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사도 바울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에게 있어서 환난은 파괴적이요 절망적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인내와 연단과 소망의 기회가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시인이 어려운 자리에 빠졌을 때 어떻게 했나요? 기도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종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종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란다는 것은 상전이나 주모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그러면서도 간절히 바라는 모습을 말합니다.
123편 3절, 4절을 보세요. “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평안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심령에 넘치나이다” 평안한 사람들은 환난 중에 있는 사람들의 형편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조소합니다. 교만한 자들은 환난 중에 있는 사람을 멸시합니다. 이 고통이 또한 큽니다. 우리는 이 시인이 당한 어려움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가운데 있으면서도 이 시인은 기도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에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진실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그들이 겪은 환난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출애굽기 3장 7절에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가게 되었습니다. 포로생활의 고된 역사 속에서 저희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할 때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저희의 죄를 용서해 주셨고, 저희가 고통 속에서 부르짖을 때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셨습니다.
한 나라나 민족뿐만이 아닙니다. 개인도 그렇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 왕 산헤립에게 침입을 당했습니다. 그때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드렸더니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셔서 그 나라를 건져 주셨습니다. 히스기야 왕 자신이 중병에 걸려 신음하게 되고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그는 담 벽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눈물을 보셔서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간신들의 모함으로 사자 굴에 던짐을 받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이래 사자 굴에 던짐 받은 사람 치고 살아 남아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생명을 내걸고 기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그 깊은 사자굴 속에서도 사자의 그 무서운 발톱과 이빨 사이에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습니까? 그 죄목은 다름아니라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을 열어 놓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드린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무슨 도장이 찍혔어요? 기도하는 사람을 잡아서 사자 굴에 집어넣으라는 조서에 도장을 찍은 것입니다.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사자 굴에 넣고서야 간신들의 흉계인 것을 알고 이튿날 새벽 사자 굴로 찾아가서 슬피 소리지르며 굴 안에다 말했습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하시기에 능하셨느냐”
그런데 천만 뜻밖에 으레 죽었을 것으로 알았던 다니엘의 음성이 들려 나옵니다.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 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들을 보내어서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도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생명의 위기, 절망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은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의를 위해 사시려고 애쓰시다가 그 때문에 고난 당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계속 기도하세요. 사자의 날카로운 이빨이 상치 못하도록 여러분을 구원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구약 요나서 2장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니느웨로 가지 아니하고 그와 반대쪽인 다시스로 도망하던 하나님의 사람 요나가 그만 풍랑을 만나게 되고 제비뽑기에 걸려 깊은 바다에 던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명령을 어기고 도망하던 요나를 물에 빠져 죽게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큰 물고기를 마련해 두셨다가 요나를 삼키게 하심으로 그가 물고기 뱃속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요나는 암흑 속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받은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룃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은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다윗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편 40편 1-2절에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오늘 본문 시편 124편을 보세요. 이 시인의 형편을 보세요.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그때에 저희의 노가 우리를 대하여 맹렬하여 우리를 산 채로 삼켰을 것이며 그때에 물이 우리를 엄몰하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잠갔을 것이라 할 것이며”
“우리를 저희 이에 주어 씹기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우리 혼이 새가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남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사람들이 치려는 데서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산 채로 삼켜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물이 엄몰하고 영혼이 잠겼을 것이며, 저희의 날카로운 이빨에 씹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도우셨습니까? 우리의 도우시는 이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곤경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되시므로 하나님께 기도드리면 됩니다.
2. 이 시인은 깊은 고통 속에서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봅니다.
시편 130편을 보세요.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1.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불러 아뢰니
주여 나의 간구를 들어주심 바라고
보좌 앞에 나가니 은혜 내려 줍소서
2. 주가 죄를 살피면 주가 능히 서리까
오직 주만 모든 죄 용서하여 주시니
주님 앞에 떨면서 용서하심 빕니다
3.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고 바라듯
나의 영혼 주님만 간절하게 바라네
이스라엘 백성아 주를 바랄지어다
4. 이스라엘 백성아 주만 믿고 바라라
주의 깊은 은총에 우리 구원 있으니
변함없는 주님만 믿고 기다릴지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도, 비록 그것이 비참한 경우라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불러 아뢰어야 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사람은 누구나 큰 고통과 고난 중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지 몰라서 당황하거나 불안해하고 절망적인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엄청난 절망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매달리며 울부짖을 수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만 부여된 특권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고아가 아닙니다. 어려울 때 찾을 아버지, 그 가운데서 우리를 건지실 수 있는 능력의 손을 가지신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의무이며 권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평안의 응답이 올 것을 확신하면서 하나님께 간구를 계속합니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부족을 절감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아뢰어야 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우리의 죄악이 용납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들을 정당화하거나 죄가 없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죄악은 분명하고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엄격한 정의로 우리를 대하신다면 우리는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정에 대해서 추궁하신다면 하나님을 거역한 굉장히 크고 나쁜 죄를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계속 추궁만 하신다면 우리는 은총의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며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와 용서를 찬양해야 합니다. 그가 죄악을 드러내셨다면 우리는 이미 파멸되었을 사람들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끝까지 참으십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서 우리가 소멸되지 않은 것은 그의 자비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비에 우리를 맡겨야 하며 우리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을 알고 사유하심은 오직 주님께만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뉘우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올 때,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요한 1서 1장 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6, 7절에는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손 삼사대까지 보응하리라”
여러분,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조금이라도 돌이키는 것을 보시면 용서하시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께서 인간을 담대하게 하거나 주제넘게 두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를 경외하게 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이고 하나님을 대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통해서 예배를 받으시며 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만을 희망해야 합니다. 절대로 우리 자신의 환상이나 공상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에 바라는 것이지 우리의 공로에 대한 보답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했습니까?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인과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기다리는 심령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