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2024년 3월 27일 (수)
오백칠십다섯 번째 이야기
모든 사람이 용이 되려면
“천하에 부끄러운 일이란 명실이 일치하지 않은 게 제일 크다. 그렇지만 또한 명성이 먼저 있고 나중에 실질을 요구하는 것을 고명사의(顧名思義)라고 한다. 가령 영주(瀛洲, 제주도) 서쪽 고을의 청룡재라는 곳 또한 고명사의할 수 있는 경우이다. 무릇 이제 용이라는 것은 하늘을 날다가도 못에 잠기며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게 하며 건원의 기운을 체득하여 성인의 쓰임을 얻은 동물이다. 그런데 외진 마을의 말학에게 이름을 생각하고 실질을 요구하려고 한다면 난쟁이에게 천균의 무게를 들라고 하는 경우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용의 종잡을 수 없는 신령한 변화는 사람의 머리로 헤아릴 수 없을 것 같지만, 용이라고 말한 것은 양(陽)에 순수하다고 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람이 선에 순수하여 악이 없어지면 또한 사람 중의 용이지 않겠습니까. 순선무악(純善無惡)은 덕을 이룬 자의 일이니, 본디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공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집에 지내는 사람은 닭이 울 때 일어나 부지런히 선행을 하여 한 생각의 선이라도 곡식을 키우듯 하고 한 생각의 악이라도 덤불을 자르듯이 합니다. 독서할 때는 대의를 먼저 구하고 글을 지을 때는 이치에 합당함을 요체로 삼으며, 집에 들어가서는 부형을 섬기고 나와서는 어른을 섬기면서 사물을 응접하거나 먹고 쉬고 움직이고 가만히 지낼 때도 오로지 선(善)을 구하지 않음이 없어서 자기 마음에 부끄럽지 않기를 기약한다면, 악은 날로 사라지고 선은 날로 쌓여서 넉넉하게 순(舜) 임금의 무리가 될 수 있을 테고 비록 하루아침에 용이 되지 못하더라도 또한 용의 종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성현의 가르침을 그저 자기가 표절(標竊)할 바탕으로 삼고 시짓는 기예로 남들의 이목을 즐겁게 하는 데 힘쓰며 자잘한 18운(韻)의 과체시(科體詩)를 자기가 잘하는 일로 삼고 심신을 도외시(度外視)하여, 사람들과 하루 종일 지내면서 의리를 언급하지 않고 세속에서 좋아하는 것만 따라 유학의 교화가 미치지 않은 곳에서 편안히 지낸다면, 거기가 바로 미꾸라지와 두렁허리 같은 소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청룡(靑龍)이라는 편액(扁額)을 한번 본다면, 얼굴이 뜨끈하게 달아오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영엽(丁永燁)이 이 재(齋)에서 독서하는 자인데, 나를 찾아와 재의 기문을 써달라고 하였다. 대체로 재실의 편액은 언덕의 이름을 따르지만 삼가 용이라는 이름에 느낀 점이 있어 우선 이 말로 써서 부치노라.
“天下之恥, 莫大於名浮其實. 然亦有先有其名而後責其實者, 所謂顧名思義者是已. 若瀛洲西鄕之靑龍齋者, 亦可以顧名而思義者耶? 今夫龍之爲物, 飛潛天淵, 興雲降雨, 軆乾元之氣而得聖人之用者也, 而欲使窮鄕末學顧其名而責其實, 則不幾於强僬僥以千鈞之重哉?” 曰: “不然. 龍之靈變不測, 若未可以擬議, 然語其所以爲龍, 則不過曰純乎陽而已, 人能純乎善而無惡則不亦人中之龍乎? 純善無惡, 成德者之事也, 固非一朝一夕之功, 然使居是齋者, 雞鳴而起, 孜孜爲善, 一念之善, 培之如嘉穀, 一念之惡, 剪之如荊棘. 讀書則先求大義, 作文則要在理勝, 入而事父兄, 出而事長上, 以至於應事接物動靜食息之際, 莫不惟善之是求, 而期於不愧乎吾心, 則將見惡日祛而善日積, 優可以爲舜之徒矣, 縱不能一朝而成龍, 其亦可謂龍之種也. 苟其不出於此, 聖謨賢訓, 徒資吾之剽竊, 蟲雕蛩吟, 務悅人之耳目, 區區十八韻, 自以爲能事, 而置身心於度外, 羣居終日, 言不及義, 循世俗之好尙, 安遐風之僻陋, 則是乃鰌鱓蝦蟆之所萃, 試瞻靑龍之扁, 能不赧然而發赬哉?” 丁生永燁讀書於齋中者也, 謁余文以記其齋, 蓋曰齋之扁, 因岡號也, 然竊有感於龍之名, 聊爲此語以付之.
<양원유집(陽園遺集) 권9 청룡재기(靑龍齋記) 임진(壬辰)>
청룡의 해가 벌써 2달이나 지났다. 고래로 용은 하늘을 노닐며 구름을 몰고 다니는 신성한 동물이었다. 그래서 《주역》에서는 건천(乾天)을 대변하는 동물이며, 후대에는 천자와 그 권위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 문인들의 문집 속에서 용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대체로 풍수지리와 관련한 부분, 혹은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 제한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청룡(靑龍)이라는 단어를 자기 재실의 편액으로 내건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제주에 사는 정영엽(丁永燁)이라는 인물이다. 자칫하면 임금에 대한 불경죄에 저촉될 수 있는데도 과감하게 청룡재라고 내걸다니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이 기문을 지은 신기선(申箕善)은 1886년(고종23) 갑신정변의 동조자로 지목되어 전라도 여도(呂島)에 유배된다. 임진년(1892년, 고종29)은 그가 유배된 지 6년이 되는 해이다. 신기선은 임헌회(任憲晦)에게서 수학하며 우암 학맥을 이을 제자로 인정받을 만큼 학문이 고매하였다. 또 그가 유배갔던 여도는 제주도와 그렇게 멀지 않기 때문에 그에 대한 소문이 제주도까지 전해져 정영엽이 찾아왔으리라 추측된다.
기문은 두 사람 간의 문답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두에서 신기선은 재실 이름을 청룡이라고 지은 점에 대해 질책한다. 용이란 신묘막측한데다 성인의 쓰임을 얻은 동물이다. 네가 성인도 아니고, 촉망받는 기재도 아닌데 용이란 단어로 편액을 걸었으니, 이름에 비해 실질이 너무 부족하다고 말이다. 재실 편액을 다시 지으라는 말과 다름없다. 그런데 정영엽의 답이 걸출하다.
정영엽은 용이 변화무쌍한 것은 천도를 따르기 때문이고, 천도를 따르는 것은 양에 순수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양에 순수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정영엽은 순선무악(純善無惡)이라고 보았다. 즉 성인과 용의 공통점은 ‘순선’인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독서할 때는 대의를 구하고 글을 지을 때는 도리를 세우며, 어른과 부형을 섬기고 자나 깨나 내 마음에 부끄럽지 않게 선행을 하는 것이라고 꼽았다.
성현의 글을 많이 읽고 시문을 잘 짓고 과거시험에 합격한다 한들, 그것은 선행이 아니다. 공자도 효도하고 공손하고 행실을 삼가고 말을 성실하게 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고도 힘이 남으면 글을 배우라 하지 않았던가. 일상의 도를 실천하면서 불현듯 찾아오는 귀찮음과 불만, 조바심 등을 이겨나가는 것이 성인이 되고 용이 되는 지름길이다. 정영엽이 말한 청룡은 소설 속 영웅이나 권위있는 존재가 아니라 유학이 제시한 덕목을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사람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명명덕(明明德) 혹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한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다.
몇 달 전 전 세계 17개국을 대상으로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지 조사한 결과 한국만 유일하게 '물질적 행복(material well-being)'을 내세운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인지 요즘 책이나 인터넷을 보면 흙수저에서 자기 계발하여 몇백억 대 부자가 되는 2, 30대들이 너무 많아졌다. 또 그들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면서 강연하고 책을 낸다. 그런데 이를 자세하게 뜯어보면 결국 이들이 이야기하는 성공, 부의 재창출이란 흡사 프랜차이즈처럼 본사와 가맹점 관계와 다를 게 없다. 언젠가는 포화 상태에 이를 ‘성공을 파는 사업’인 것이다. 실제로도 자수성가를 광고하던 사람들이 얼마 못 가 패망하는 모습을 종종 보기도 한다.
책을 몇십 권 이상을 읽고 자신만의 성공 공식을 찾아 발전하는 모습은 화려해 보이지만, 그것은 앞에서 말한 성현의 글을 많이 읽고 시문을 잘 짓고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경우와 같다. 이런 방법은 도금한 용처럼 언젠가는 본색이 드러난다. 끝없이 솟아나는 덕의 샘을 내면에 갖추어야 진정한 용이 되어 타인의 비교에 걸리지 않고 누구에게든 친절하고 겸손하면서도 떳떳하고 자신감있게 삶을 살아 나갈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빈한(貧寒) 속에서도 버틸 항심(恒心)이 필요하지만, 또한 개인의 신념과 노력에만 내맡겨서도 안 된다. 시민들의 의식, 정부의 정책 등 다양한 제도적 장치가 있어야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
글쓴이 이승재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