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방탕과 유희의 역사 베르사이유궁전 3】
이야기의 시작은 루이 14세와 푸케(Nicolas Fouguet, 1615-1680)로부터 시작된다.
푸케는 지금으로 따지면 재무부 국세청장이었고 본인의 재력을 과시할 성을 지었는데 또한 여기에 그의 예술적인 자질이 추가된다.
1656년 르 브랭(Le Brun)은 실내장식을 맡았고 르 보(Le Vau)는 건축을,
르 노트르(Le Notre)는 정원을 맡아 Veau(보)지역에 푸케의 부탁으로 보 르 비콩트 성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5년후 공사가 끝나고 1661년 8월 17일, 젊은 루이 14세(1638-1715)와 귀족들을 초대하여 향연을 벌였는데 이 때 보 르 비콩트 정원에서는 음악에 맞추어 1200여 개의 분수대 물이 품어 오르고, 정원을 흐르는 운하에서 뱃놀이도 벌어졌으며 화려한 무도회도 펼쳐졌다.
그리고 유흥의 절정은 몰리에르와 그의 극단이 공연한 야외 극장에서 였다.
이날 저녁, 몰리에르(Moliere, 1622-1673)는 프랑스 문학사에도 기록이 남을 “LesFcheux” 라는 코미디물을 처음으로 푸케의 성에서 선보였다.
하지만 이 연회로 푸케는 루이 14세의 노여움을 사고 말았다.
푸케의 성은 루이 14세가 본 가장 아름다운 성이었으며, 게다가 자신의 궁전에서 벌이는 향연들 보다 더 화려하고 훌륭한 축제를 펼쳐 보였다.
루이 14세는 이를 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절대왕정의 시작을 이끈 태양왕 루이 14세 에게 자신보다 화려함을 뽐내려는 신하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상한 루이 14세는 결국, 푸케를 체포하도록 명령을 내리며, 그로부터 19일 후, 푸케는 루이 14세의 근위기(Mousquetaire) 3총사로 유명한 달타냥에 의해 결국 체포되고 만다.
3년에 걸친 재판 끝에 푸케는 추방령이 선고되며, 루이 14세는 마음을 바꾸어 그를 감옥에 투옥케 했고 푸케는 체포와 더불어 전 재산이 몰수 되었다.
그리고 루이 14세는 보 르 비콩트 성을 탄생시킨 주역들, 르 브랭, 르 보, 르 노트르를 소환, 푸케의 성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궁전을 짓도록 명령을 내렸다.
루이 14세의 명령 후, 루이 르 보가 1661년에서 1665년까지 르메르시에가 세운 기본건물을 증축하였다.
공사 기간 중 루이 14세는 공사현장 순찰을 자신의 주요일과로 삼을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그 뒤 1676년부터 1688년 사이에 아르두엥 망사르(Jules Hardouin Mansart)가 대 확장공사를 실시하여 남북으로 계속되는 거대한 익부를 건축하였는데, 원래 서쪽 테라스였던 부분을 "거울의 방"으로 만들어놓은 것이 이 증축 때였다. 마지막 증축은 1756년에서 1764년 사이에 가브리엘이 맡았는데, 북쪽 끝부분에 오페라극장(궁정극장)을 세우는 것이 목표였다. 원래 이 지역은 늪지대였으나 이를 메우고 집터를 잡았으며, 정원의 분수를 위해 강물의 물줄기까지 돌려놓을 정도로 인력과 자본을 쏟아 부은 건물이기도 하다.
앙시앙 레짐 시대, 베르사유 궁전의 건축 이후 역할을 한마디로 ‘방탕과 유희’의 연회장이었다. 베르사유 정원을 사냥터로 쓰기 시작했던 루이13세 시절부터 시작된 ‘방탕’은 루이 14세에 들어 절정에 달했다. 당시 지배계급이 믿는 단 하나의 종교는 “과인은 즐길 따름”이라든가 “내 뒤에야 어떻게 되건 내 알 바 아니다”란 생각이었다. 루이 14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애첩(들라발리에르, 몽테스팡, 퐁탕주, 맹트농 등)을 두고 궁전에서 유희를 즐겼다.
하지만 이는 약과로 루이 15세는 베르사이유 궁전 내에 어린 소녀들로 꽉 찬 유곽까지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에두아르트 푹스는 ‘풍속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베르사이유 궁 안에는 어린 소녀들이 있는 큰 유곽이 있으며 그곳에서 궁중보고서, 즉 공식적으로 루이 15세가 그날 그날의 통음난무에 이름을 붙이는 국왕의 ‘쾌락의 메뉴’가 조달되었다.
국왕이 즐기는 음식은 이른바 ‘영계’이기 때문에 유명한 녹원(鹿苑)의 거주자는 거의 소녀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한편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황제였던 루이 16세 시절에는 베르사이유 궁전의 안주인인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가 루이 가문의 명성에 버금가는 사치와 방탕의 화신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녀는 왕비 자리에 앉은 첫 해에 장식품과 장신구류를 사기 위해 30만 프랑이라는 목돈을 빌렸는가 하면, 1776년에 파리의 보석상 뵈머의 가게에서 한쌍의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몇 천명의 노동자 가족이 1년 동안 편히 살 수 있을 만한 액수를 주고 사들였다. 베르사유 궁전은 이런 궁전 주인들의 방탕의 장소가 되는 곳이었다.
1789년 7월 14일. 당시 파리 시민들은 내일의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심각한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면서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에는 ‘방탕의 시대’를 걷어내고, ‘민중의 시대’를 열고자 하는 프랑스 민중들의 열망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루이 16세의 7월 14일 일기에는 ‘별일 없음’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민중들의 고통과 핍박에 무관심하고, 지배계급의 사치와 향락에는 관대했음을 뜻한다.
심지어 혁명 발발 이후에도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매일 연회를 하면서 국고를 탕진했다고 한다.
결국 분노한 파리 시민(여성)들이 ‘빵을 달라!’며 파리에서 베르사유까지 행진했다.
‘파리가 행진해 온다’는 소식에 당황한 나머지, 루이 16세는 그때까지 미루고 있던 인권선언에 대한 최종적 재가를 황급히 결정해서 그 회답을 국회로 보내, ‘분노한 파리 여성들’을 달래보려 했다.
그러나 파리 여성과 군중들의 태도는 완강했으며, 결국 ‘왕과 왕비, 그 가족들’을 파리의 튈르리 궁으로 데려오게 된다. 절대군주로서의 자격을 실질적으로 박탈하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행해진 방탕의 역사는 그렇게 종결된다.
1783년 미국독립혁명 후의 조약, 1871년 독일제국의 선언,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평화조약체결이 거울의 방에서 행해지는 등 국제적 행사 무대가 되었다.
프랑스혁명으로 가구·장식품 등이 많이 없어졌으나 궁전 중앙부, 예배당, 극장 등을 제외한 주요부분은 오늘날 역사미술관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프랑스식 정원의 걸작인 정원에는 루이 14세의 방에서 서쪽으로 뻗은 기본 축을 중심으로 꽃밭과 울타리, 분수 등이 있어 주위의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기본 축을 따라 라톤의 분수, 아폴론의 분수, 십자 모양의 대운하 등을 배치하였다. 대운하 북쪽 끝에는 이탈리아식 이궁(離宮)인 그랑트리아농(1687년)과 프티트리아농(18세기)이 루이왕조의 장려함과 섬세한 양식으로 세워져 있다.
1979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고 현재는 프랑스 관광의 중심지로 막대한 재정수입을 정부에게 안겨준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