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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애니메이션 백과 - 한국의 애니메이션
hanjy9713
2023.09.10. 16:48조회 7
한국의 애니메이션
요약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1950년대에 CF로 시작해 1960년대부터 뛰어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을 선보였다. 그러나 창작 애니메이션의 산업적 토대를 닦지 못하고 외국 애니메이션의 하청 기지 역할에 머물렀다. 88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창작 애니메이션 제작이 활성화되면서, 2000년대 들어 예술성과 상업성의 조화를 모색하는 작품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 한국 최초의 애니메이션을 꿈꿨던 <개꿈>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을 본격적으로 제작하고 상영한 시기는 1950년대 이후이다. 그러나 이미 일제강점기에 국내외 애니메이션에 대한 기사가 일간지에 실렸던 기록이 남아있다. 1928년에 ≪동아일보≫ 등 주요 일간지는 미국 디즈니사가 만든 <증기선 윌리(Steamboat Willie)>에 대해 보도하며, 캐릭터가 소리를 내는 최초의 토키 만화, 즉 유성 애니메이션의 등장을 알렸다.
1936년에는 ≪조선일보≫에 “조선의 토키 만화 <개꿈>의 초등장”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최초의 애니메이션이 제작 중임을 알리는 기사가 등장했다. 김용운, 임석기 등이 청림촬영소를 설립해 <개꿈> 제작에 골몰하고 있으며, 약 3분 분량인 400피트 가량이 완료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작품의 완성 여부나 상영 등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한국에서 이미 1930년대 중반에 자생적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이 시도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1936년 11월 25일 자 ≪조선일보≫에서 <개꿈>의 제작을 알리는 기사
■ 한국 최초의 애니메이션 <ob 시날코>와 애니메이션의 맹아
한국 최초의 애니메이션은 현 KBS의 전신인 HLKZ-TV에서 1956년에 방영한 <ob 시날코> 음료 광고이다. 당시 방송국 미술 담당인 문달부가 제작한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본은 유실되었지만 스토리보드가 남아 있어 작품의 면모를 추정해 볼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애니메이션인 <ob 시날코>
이 밖에도 엄도식의 <활명수>, 신동헌의 <진로소주>, 넬슨 신의 <아로나민> 등 다양한 CF 애니메이션이 50년대 후반부터 잇따라 선보였다. 특히 신동헌이 1960년에 제작한 <진로소주> CF는 CM송과 더불어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신동헌이 제작한 CF 애니메이션, <진로소주>
비슷한 시기에 국가 기관인 공보처 산하의 국립영화제작소에서도 애니메이션의 파급력에 주목하게 된다. 1961년, 국립영화제작소의 한성학·박영일·정도빈은 5분가량의 실험작 <개미와 베짱이>를 공동 제작했다. CF 애니메이션이 아닌 순수 애니메이션으로는 한국 최초의 작품으로, 이솝우화를 소재로 한 35mm 컬러 애니메이션이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CF 애니메이션과 국립영화제작소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통해 제작 경험을 쌓은 신동헌, 넬슨 신, 박영일 등의 제작 인력은 이후 한국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과 TV용 애니메이션 산업에서 중추를 담당하게 된다.
■ 한국 최초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과 각종 ‘최초’의 시대
1957년, 디즈니사의 <피터팬(Peter Pan)>이 애니메이션으로는 최초로 국내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이후 외국의 주요 애니메이션이 극장과 TV를 통해 소개되어 큰 인기를 끌면서, 영화 제작 및 수입업자들은 애니메이션의 상업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한편, 박정희 정권은 1962년 ‘영화법’을 제정해 영화사를 통폐합하고 검열을 대폭 강화했다. 영화 종사자들은 창작의 자유가 위축되자, 일반 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검열이 느슨한 애니메이션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1967년, “한국 최초의 총천연색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이 탄생했다. <홍길동>은 신동우가 ≪소년 조선일보≫에 연재 중이던 만화 <풍운아 홍길동>을 형인 신동헌 감독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것이었다.
<홍길동>의 신문광고 문구에 따르면, 당시 국내 영화 제작비의 10배 규모인 5400만 원이 투입되었고 12만 5300장의 그림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광고의 속성상 다소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기록적인 제작비와 인력이 투입되었음은 분명하다. <홍길동>은 신동우의 원작을 독창적인 캐릭터 디자인과 시나리오로 되살리고, 이를 선녹음·후작화 방식의 풀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구현해 기술적 완성도를 높였다.
한국 최초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
<홍길동>은 약 3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당시로서는 놀라운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제작사인 세기상사가 신동헌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에게 흥행 수익을 제대로 배분하지 않고 차기작에 대한 재투자는 외면한 채 상업적 이익에만 집착하자, 신동헌 감독은 세기상사와 결별하게 된다.
이후, 신동헌 감독은 대동영화제작소를 통해 <홍길동>의 외전 격에 해당하는 <호피와 차돌바위>를 만들지만, 또다시 제작사와 금전적 갈등을 겪은 끝에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을 중단하게 된다. <홍길동>은 한동안 유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일본에 수출된 판본이 극적으로 발견되면서, 개봉 후 41년 만인 2008년에 대중에게 다시 공개되었다.
<홍길동>과 같은 해인 1967년 개봉한 <흥부와 놀부>는 스톱모션 기법으로 제작된 한국 최초의 장편 인형 애니메이션이다. 일본에서 유학을 한 강태웅 감독이 만든 작품으로 한국적인 캐릭터 디자인과 섬세한 연출, <판소리>를 활용한 배경음악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손오공>은 세기상사가 신동헌 감독과 결별한 이후, 국립영화제작소 출신의 박영일 감독을 영입해 1968년 제작한 작품이다.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으로는 처음으로 시네마스코프 형식을 채택했다. 같은 해에 개봉한 <황금철인>은 한국 최초의 SF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1970년대 후반에 <로보트 태권V>를 성공시킨 김청기 감독이 제작진으로 참여했다.
이와 같이 여러 새로운 시도에도, 한국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은 <홍길동>의 성공을 재현하지 못한 채, 1972년 <괴수 대전쟁>의 실패를 끝으로 한동안 제작이 중단되었다. 1960년대 말 KBS, TBC 등 TV 방송국에서 수입 애니메이션이 본격적으로 방영되기 시작했고, 1970년대에 들어 TV 보급이 보편화되면서, 굳이 애니메이션을 보기 위해 극장에 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애니메이션이 싹을 틔우는 시기에 제작자들이 상업적 수익에만 집착한 나머지 애니메이션 창작자에 대한 보상과 재투자를 게을리 한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제작사와 감독의 갈등, 열악한 제작 여건은 작품의 완성도를 하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는 흥행 부진과 애니메이션 제작 기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게 되었다.
■ 하청 애니메이션 산업의 호황
1968년 TBC(동양방송)에서 전파를 탄 <황금박쥐>는 한국에서 최초로 방영된 애니메이션 시리즈물이다. 일본 도에이(東映) 영화사의 자회사인 제일동영(第一東映)과 TBC 동화부의 합작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스토리와 캐릭터 디자인과 같은 핵심적인 기획은 일본 측에서 담당했고, TBC의 동화부는 동화(動畫), 채색 등 단순 반복적 하청 작업에 머물렀다. 비슷한 시기에 김의환·김태환 형제가 설립한 개미프로덕션은 1967년 미국 MGM사로부터 채색 작업을 하청받기 시작했다.
한국의 애니메이션 하청 인력은 꼼꼼하고 성실한 일처리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70년대 들어 미국과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자, 한국의 하청 산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국내 제작사들이 경제적 논리로 창작 애니메이션의 자체 제작을 꺼렸던 데다가 수출 위주의 경제 발전을 꾀했던 국가 시책이 맞물리면서, 하청 애니메이션은 한때 한국 영상물 수출의 대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한국 애니메이션은 창작 애니메이션의 기획력 결핍과 핵심 기술의 축적 부족이라는 고질병을 앓게 된다.
■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 태권 브이’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재기
한국 애니메이션의 침체기를 깨며 1976년 개봉한 <로보트 태권V>는 서울에서만 20여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기록적인 흥행 성적을 거둔다. 태권V는 무기 대신 태권도로 적을 물리치는 로봇인데, 태권도가 나오는 장면에서 실제 인물의 동작을 바탕으로 사실적인 움직임을 구현하는 ‘로토스코핑(Rotoscoping)’ 기법이 사용되었다.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로 시작되는 주제가는 한국 최초의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ST)으로, 어린이들이 상영관에서 입을 모아 따라 부르는 진풍경을 만들며 크게 사랑받았다.
디지털 복원되어 2007년 재개봉한 <로보트 태권V>
<로보트 태권V>의 김청기 감독은 이후 <로보트 태권V 2 우주작전>(1976), <로보트 태권V 3 수중특공대>(1977), <무적의 용사 황금날개 1·2·3>(1978)을 연달아 만들었다. <로보트 태권V>의 흥행 몰이는 이후 극장용 애니메이션에서 SF 장르가 대세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어린이가 애니메이션의 주요 관객층으로 부상하면서 영화, 음반, TV에서도 아동물이 유행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편, <로보트 태권V>의 캐릭터 디자인이 일본 애니메이션인 <마징가 Z(マジンガ- Z)>(1972)와 지나치게 비슷한 것으로 밝혀져 표절 논란이 일기도 했다.
애니메이션이 아동문화로 정착되면서,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꾸준히 제작되었다. 임정규 감독의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1977)와 <별나라 삼총사>(1979)가 큰 인기를 끌었고, 박승철 감독은 소파 방정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독특한 액션 시대물 <77단의 비밀>(1978)을 선보였다.
그러나 한국 애니메이션의 호황은 제작사의 난립으로 이어져 기획력 부족, 상업적 한탕주의를 드러내며 1978년 이후 작품의 질적 저하가 뚜렷이 나타났다. 특히 일본과 미국의 창작물에 대한 표절과 도용은 심각한 수준이었는데, <기동전사 건담(機動戰士ガンダム)>(1979)의 캐릭터 설정을 베낀 <우주 흑기사>(1979), 영화 <이티(E.T.)>(1982)를 모방한 <ufo를 타고 온 외계인>(1984)이 그 단적인 예이다. 이러한 표절 문제는 경제적 논리에 따른 하청 위주의 산업 구조, 1980년 신군부의 등장 이후 검열 강화로 인한 창작물 제작 기피 현상과도 맞물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감독의 <이티>
<ufo를 타고 온 외계인>
■ 반공 애니메이션과 스포츠 애니메이션
유신 정권과 신군부에 의해 반공 이데올로기가 국가 시책으로 강조되면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반공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었다. 김청기 감독의 1978년작, <똘이 장군: 제3땅굴편>은 한국 최초의 반공 애니메이션으로, 숲속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똘이가 늑대, 돼지 등으로 묘사된 공산당을 무찌른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발견된 제3땅굴을 소재로 삼아 흥행에 크게 성공하자, 이듬해에 <간첩 잡는 똘이 장군>이 속편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1982년 개봉된 김형필, 김현동 감독의 <해돌이 대모험>은 나름의 사전 조사와 고증을 통해 북한의 실상에 사실적으로 접근한 작품이며, 1986년작인 이학빈 감독의 <각시탈>은 만화가 허영만의 인기 원작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것이다.
한국 최초의 반공 애니메이션, <똘이 장군: 제3땅굴편>
1980년대에 들어 신군부는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돌리고자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 섹스(Sex)를 활용하는 이른바 3S정책을 펼쳤다. 이에 따라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해 큰 관심을 끌면서 스포츠를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이 다수 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이상무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독고탁 시리즈’는 박시옥 감독의 <태양을 향해 던져라>(1983), 홍상만 감독의 <내 이름은 독고탁>(1984), 문성덕 감독의 <독고탁: 다시 찾은 마운드>(1985)로 이어지며 인기를 끌었다.
■ TV용 애니메이션 제작의 활성화
1980년대 후반, 한국은 그동안 하청으로 쌓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TV용 애니메이션의 자체 제작에 나선다. 이전까지 대부분의 방송사는 애니메이션이 다른 방송 프로그램에 비해 서너 배의 제작 비용이 드는 반면 시청률은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외국 애니메이션을 수입해 방영하는 데에 머물렀다. 게다가 1980년대에 들어 컬러 TV와 비디오가 보급되면서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제작 역시 주춤해진 상태였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활로는 88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열렸다. 올림픽을 앞두고 방송계의 자존심과 국가적 정체성이 화두로 부각되면서 한국 애니메이션을 방영해야 한다는 요구가 터져 나온 것이다. 그 결과, 한국 최초의 TV용 창작 애니메이션 <떠돌이 까치>가 1987년 5월 5일 KBS에서 어린이날 특집으로 방영된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 애니메이션 제작 초기부터 TV용 애니메이션을 선보인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홍길동> 이후 무려 20년이 지나서야 TV용 애니메이션이 출현한 셈이다.
<떠돌이 까치>는 이현세의 인기 만화가 원작으로,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사 도에이동화(東映動畵)에서 경험을 쌓은 조봉남이 프로듀서를 맡았다. 같은 해 5월 19일에는 <달려라 호돌이>가 MBC에서 첫 전파를 탔다. 올림픽 마스코트인 호돌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캠페인성 시리즈물로 주말에 10분씩 고정 프로그램으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TV용 시리즈 애니메이션은 <달려라 하니>로 봐야 할 것이다. <달려라 하니>는 KBS에서 13편의 시리즈물로 기획·제작되어 1989년 봄철 프로그램 개편부터 주 1회 고정 편성되었다. ≪보물섬≫에 연재된 이진주의 만화가 원작으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하니가 꿋꿋하게 육상 선수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담았다. 이 작품은 개성 강한 캐릭터와 탄탄한 서사 구조를 선보이며 1980년대 한국 애니메이션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 최초의 TV용 시리즈 애니메이션 <달려라 하니>의 원작 만화
한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시청자의 호응이 쏟아지자 KBS와 MBC는 <동화나라 ABC>(1987), <아기공룡 둘리>(1987), <머털도사>(1989), <영심이>(1990) 등의 애니메이션을 경쟁적으로 제작, 방영했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에 제작된 TV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만화나 동화를 원작으로 한 것이었다. 이는 캐릭터와 시나리오 창작에 대한 부담을 덜고, 원작의 인지도를 통해 시청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한 전략이었다. 한편, 1990년 KBS는 처음으로 창작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공모해 당선작인 <햇살나무>와 <지구는 초록색>을 제작, 방영하기도 했다.
■ 문화 산업으로서의 애니메이션
1991년, 디즈니사의 애니메이션 <인어공주>가 서울 기준으로 43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화제를 모았다. 이후 <미녀와 야수>(1992), <알라딘>(1993)이 줄줄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생겼다. 애니메이션은 아동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탄탄한 스토리와 세련된 연출로 성인 관객 역시 즐길 수 있는 콘텐츠임이 부각된 것이다. 게다가 1993년, 미국 직배사인 UIP를 통해 개봉한 <쥬라기 공원>이 현대 자동차 150만 대 판매량과 맞먹는 수익을 거두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문화 산업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 한껏 고조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1995년 ‘영상산업진흥기본법’을 제정하고, 향후 10여 년간 애니메이션 분야에 연간 100억 원을 지원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같은 해에 만화 전문 채널인 투니버스가 개국했고, 1996년에는 대학에 애니메이션 관련 학과가 10여 개로 늘어났다. 이와 같이 애니메이션을 둘러싼 사회적·문화적·경제적 환경에 일대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1990년대 중반부터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재등장하게 된다.
1994년, 한국 최초의 성인용 극장 장편 애니메이션 <블루시걸>이 개봉했다. 컴퓨터 그래픽의 활용과 인기 영화배우들의 목소리 연기로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결과적으로 50만 명이 넘는 관객 동원에 성공했으며, 서울 정도 600년 기념 타임캡슐에 수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엉성한 스토리와 조악한 완성도로 인해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모진 혹평을 받으면서, 관객들에게 한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희망을 접게 만드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성인용 극장 장편 애니메이션 <블루시걸>
일본의 제작진이 대거 참여했던 <돌아온 영웅 홍길동>(1995)은 한국 원조 애니메이션의 부활이라는 취지가 무색하게 왜색 논란에 휘말렸다. 인기 만화가 이현세가 제작, 감독한 <아마겟돈>(1996)은 거액의 제작비가 투입되었음에도 셀과 컴퓨터 그래픽의 부조화, 산만한 스토리 구성으로 인해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외면당했다.
이밖에도 <난중일기>(1997), <전사 라이안>(1997), <철인사천왕>(1999) 등이 연이어 흥행에 참패했다. 하청 중심이던 제작사들이 자체 기획력과 제작 역량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뛰어들었지만, 미국이나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접하며 눈이 높아진 관객을 만족시키지 못한 결과였다.
이 와중에도 김수정 원작의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1996)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에 걸맞은 스토리와 연출로, 비평과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한국 애니메이션의 희망을 이어갔다. 한국과 대만의 합작 애니메이션인 <또또와 유령 친구들>(1998)은 특수 효과에 기대지 않고 전통 애니메이션 방식으로 탄탄한 스토리를 살려 국내외의 호평을 이끌어냈다. 1990년대 중반에 제작이 주춤했던 TV용 애니메이션은 이후 <영혼기병 라젠카>(1997), <녹색 전차 해모수>(1997), <검정 고무신>(1999), <하얀 마음 백구>(2000) 등이 꾸준히 제작되며 주목을 받았다.
1990년대 중반, 한국 애니메이션의 희망을 이어간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 창작 애니메이션의 약진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은 하청 중심에서 창작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을 거친다. 기존의 하청 제작이 한국보다 인건비가 싼 동남아로 넘어가면서 애니메이션 업계로서는 다른 수익 모델을 찾을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또한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가 문화관광부와 지자체 산하에 각종 문화 예술 관련 기관을 만들어 애니메이션 지원 사업을 구체화하면서, 창작 애니메이션에 호의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2002년, 이성강 감독은 <마리 이야기>로 프랑스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화제의 중심에 섰다. <마리 이야기>는 스토리텔링보다는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어 독특하면서도 뛰어난 영상미를 선보였다. 인물에는 2D, 배경에는 2D와 3D를 같이 사용해 입체적 공간감과 파스텔톤의 따뜻한 색감을 동시에 살렸다.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영상을 선보인 <마리 이야기>
성백엽 감독은 정채봉의 동화를 원작으로 한 <오세암>(2002)에서 한국적 서정을 섬세한 영상에 담아내며 <마리 이야기>에 이어 2004년 프랑스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흥행에는 실패하면서 한국 애니메이션계에 예술성과 대중성의 조화라는 숙제를 남겼다.
김문생 감독의 <원더풀 데이즈>(2003)는 당시 한국 애니메이션 사상 최대 제작비인 126억 원과 제작 기간 7년이 투입된 SF 애니메이션이다. 기존의 2D, 3D 방식에 실사 미니어처 촬영을 더한 기술적 실험을 통해 깊이 있는 공간감과 환상적인 영상미를 구현했다. 그러나 조악한 스토리텔링과 평면적인 캐릭터 연출로 혹평을 받으면서 흥행과 비평에서 참패했다.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기대주로 주목받으며 정부와 민간의 자본이 대거 투입된 프로젝트였던 만큼, <원더풀 데이즈>의 실패는 이후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에 대한 투자를 위축시키는 악영향을 끼쳤다.
TV용 애니메이션 중에서는 <뽀롱뽀롱 뽀로로>가 2003년부터 EBS에서 방영되면서 ‘뽀통령’, ‘뽀느님’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어린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주)아이코닉스, 오콘, SK 브로드밴드, EBS가 공동 제작했으며, 북한의 삼천리총회사도 부분적으로 제작에 참여해 화제가 되었다.
눈 쌓인 숲속 마을에 사는 꼬마 펭귄 뽀로로와 동물 친구들의 좌충우돌 모험을 다룬 애니메이션으로, 2013년에는 뽀로로 탄생 10주년을 기념해 <뽀로로 슈퍼썰매 대모험>이 극장판으로 개봉되기도 했다. <뽀롱뽀롱 뽀로로>는 130여 개국에 수출되었으며 출판, 교육용 콘텐츠, 완구, DVD 시장에서도 큰 수익을 거두었다. 이후 <변신자동차 또봇>(2010), <로보카 폴리>(2011), <라바>(2011) 등이 잇달아 성공을 거두며 한국은 아동용 애니메이션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뽀로로 탄생 10주년 기념 극장판, <뽀로로 극장판 슈퍼썰매 대모험>
■ 애니메이션 방송 총량제와 해외 공동 제작 확산
2004년, 방송사의 과도한 시청률 경쟁을 억제하고 국내 창작 애니메이션의 저변을 확대한다는 취지로 ‘TV용 애니메이션 방송총량제’에 대한 ‘방송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2005년부터 지상파 방송 3사는 전체 방송시간의 1%, 기타 방송사는 1.5%, 교육방송은 0.3%를 국내 창작 애니메이션 방영에 할애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TV용 애니메이션이 안정적으로 방영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면서 창작 애니메이션의 제작량이 증가하고, 국내 애니메이션 산업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제작사들은 국내 자본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해외 공동 제작에 나서게 된다.
<아이언키드>(2006)는 미국과 스페인의 공동투자를 유치하고, <빼꼼>(2006)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투자를 받는 등, 한국 애니메이션은 공동 제작을 통해 해외 배급망과 판로를 확보하고자 했다. <장금이의 꿈>(2007)은 MBC의 인기드라마 <대장금>(2003)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으로, 일본과 대만 등에 수출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 애니메이션의 다양화와 독립 제작사의 선전
2000년대 들어 한국의 애니메이션들이 국내외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데 이어, 주제와 내용 측면에서 새로운 시도가 계속 이어졌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 제작한 <별별 이야기>(2005)는 인권 문제를 주제로 삼아 여섯 편의 단편을 엮은 옴니버스 애니메이션으로, 관객과 평단의 호응을 끌어냈다. 조범진 감독은 성인용 SF 코미디인 <아치와 씨팍>(2006)을 통해 차별화한 유머 코드를 선보였다.
이후 한국 애니메이션은 기존의 메이저 제작사가 아닌 독립 제작사나 독립 감독의 작품이 선전하는 양상을 보인다. 오성윤 감독의 <마당을 나온 암탉>(2011)은 애니메이션 독립 제작사인 오돌또기가 영화 제작사인 명필름과 공동 제작한 작품이다. 영화사의 기획, 배급, 마케팅 노하우가 애니메이션 제작과 성공적으로 접목된 사례라 할 수 있다.
100만 부가 넘게 팔린 황선미의 동화가 원작으로, 자유를 찾아 양계장을 뛰쳐나온 암탉 잎싹의 도전과 사랑을 섬세한 2D 영상에 담아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한국 애니메이션 사상 최초로 22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 역대 개봉 애니메이션 흥행 순위 9위에 올랐다.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22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마당을 나온 암탉>
<마당을 나온 암탉>이 가족 영화 시장을 확장했다면,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2011)은 ‘잔혹 스릴러’를 표방하며 성인 관객층을 겨냥한 독립 애니메이션이다. 이 밖에도 안재훈, 한혜진이 감독한 <소중한 날의 꿈>(2011), 이대희 감독의〈파닥파닥>(2012), 장형윤 감독의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2014) 등 독립 제작 방식의 작품들이 높은 완성도로 꾸준히 주목을 받았다.
참고문헌 및 사이트
노승관·양경미. 2010.『한국 애니메이션 결정적 순간들』. 쿠북.
한창완. 1998. 『애니메이션 영상미학』. 한울.
황선길. 1998. 『애니메이션 영화사』. 범우사.
허인욱. 2002. 『한국애니메이션영화사』. 서울: (주)신한미디어.
한국콘텐츠진흥원. 2012.『2012 애니메이션 산업백서』.
한국콘텐츠진흥원. 2014.『2014 상반기 애니메이션 산업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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