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손은 평장사 김태서의 아들로 태어나
성품이 온화하고 관대하며 지혜와 용기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대담(大膽)하면서 지략(智略)이 있었다.
1231(고종 18)년
정주(靜州 : 현 평안북도 의주군) 분도장군(分道將軍)이 되었을 때
몽고군이 고려를 침략(侵略)했다.
몽고군이 압록강을 건너 개전 40여일 만에
함신진, 용주, 철주 등 요충지를 공략하고 정주성에 이르자
김경손은 결사대 12명을 이끌고
성문을 나가 분전 격퇴(擊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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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년 9월 3일 몽고의 대병력이 귀주성으로 밀어닥치자
김경손은 기습으로 전열을 교란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결사대와 함께 성밖으로 나아가
선두에 있던 적장을 쏘아 넘어뜨린 것을 시작으로
4∼5차례에 걸쳐 적진을 타격하자
몽고군 진영에 혼란(混亂)이 일어났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성내의 고려군이 일제히 성밖으로 달려나와 공격하자
몽고군은 그 기세를 당하지 못하고 퇴각(退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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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以後)에도 서북지방의 군사적 요충지인
귀주성(貴州省)을 포기(抛棄)할 수 없었던 몽고군은
4개월에 걸쳐 끊임없이 공격해 왔으나
김경손과 고려군은 불굴의 항쟁으로 몽고군의 공략을 분쇄했다.
70에 가까운 몽고의 한 장수가
"내가 소년시절부터 수십 년 간 전투에 참전했지만
이처럼 맹공을 받고도 무너지지 않은 경우는 본적이 없다."
라고 감탄했을 만큼 고려군은 용맹(勇猛)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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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손은 몽고군을 물리친 전공으로
대장군(大將軍)으로 승진(升進)하였으며,
1237년(고종 24) 전라도지휘사로 있을 때
이연년(李延年)의 난을 진압하고 그 공으로 추밀원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1249년 장군의 명망이 점점 높아지는 것을 꺼린
실권자 최항(崔沆)의 시기를 받아 백령도로 유배(流配)당하였고,
2년 후인 1251년, 최항이
정적(正嫡)을 제거(除去)할 때 함께 억울한 죽임을 당하자
사람들이 모두
분통(憤痛)하고 애석(哀惜)하게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