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21
7월14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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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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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6TKyXA-AVV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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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 성화(聖化)의 도구는 기쁨과 미소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작고 소박한 삶, 순수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총애하신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오 복음 11장 25~26절)
여기서 눈여겨보고 유념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라는 표현에서 이 사람들은 자칭 지혜롭다는 자들입니다. 사실 속은 텅텅 비어있으면서도 슬기로운 척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과장하고 살려하니 삶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철부지’는 그냥 철부지가 아니라 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지혜와 슬기로 충만한 철부지입니다. 인생의 진리를 터득한 철부지입니다. 삶 속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깨달은 철부지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철부지는 단순하고 솔직하며, 순박하고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권능과 선하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삶이 행복해지려면 너무 복잡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때로 철없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삶이 편안해지고 기쁨이 찾아옵니다.
기쁨은 고통을 치유하는 힘입니다. 기쁨은 슬픔에서 벗어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기쁘게 사는 것은 가장 좋은 복음 선포입니다. 기쁜 얼굴은 하느님의 은총을 드러내는 가장 탁월한 표지입니다.
작고 단순한 삶의 대가(大家)가 있습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입니다. 그녀의 평생에 걸친 소원은 작고 소박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내 성화(聖化)의 도구는 바로 기쁨과 미소입니다. 나는 내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에도 미소 지으며 감사드립니다. 많은 일들이 나를 억압할 때, 어렵고 불쾌한 일들이 내게 닥칠 때, 나는 조금도 슬픈 얼굴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어려움에 미소로써 답합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아주 단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단순함 안에는 하느님께서 거하셨습니다. 당시의 이교도 설교가들은 해박한 지식, 철학적 고찰에 근거한 현란한 설교를 시도했지만, 바오로 사도의 설교는 늘 직설적이었고 단순했습니다.
사람이 위대한 것은 그가 비록 병들고, 늙고, 가난하더라도 그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배경에는 다른 무엇에 앞서 단순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철부지들은 아직 영혼의 때가 묻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순수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깨끗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 그래서 이웃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느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더욱 뚜렷이 당신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이런 맑은 영혼의 철부지들은 세파에 찌든 영혼들보다 훨씬 쉽게 세상만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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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ZvIc_2Mv7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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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알려거든 순종해 보라>
오늘 복음은 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철부지이십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아십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철부지 자녀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아는 것이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위에서 내려다보아서는 잘 모릅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아야 합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변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래에서 보니 그 사람이 더 잘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오르기 전의 모습이지만 그 사람에게 순종해야 하는 철부지 같은 처지가 되면 그 사람의 보이지 않는 면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본성을 쉽게 드러냅니다. 그래서 사람을 알려면 철부지처럼 낮아질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 ‘의뢰인’(2019)은 칠곡 어린이 학대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분노와 슬픔이 가득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영화는 그나마 보는 이들에게 충격을 덜 주게 하려고 현실보다 많이 순화되어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새엄마는 아빠의 묵인하에 어린 남매를 학대합니다. 문제는 아이들이 그렇게 사정을 하는데도 경찰도, 복지센터도, 학교 선생님도 그냥 골치 아파질까 봐 모든 것을 묵인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 앞에서 그들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 사회 분위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그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되고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아이들 앞에서 발각되게 됩니다.
너무 솔직해서 진급하지 못하던 한 변호사만이 직장을 때려치우고 남은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칩니다. 처음엔 성공만을 바랐던 그였지만 아이들은 그의 마음을 알아보았습니다. 아이들의 시각으로 누가 착한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변호사는 아이들에게까지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유일하게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멀리서 들리는 한 음성에 순종할 수 있어서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있어야 사랑할 수 있는데 이해하려면 이렇게 누구에게나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낮아져야 합니다.
미국에서 한 아버지가 아들이 마약을 한다며 상담을 신청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매우 화가 나 있었습니다. 의사는 이 부자에게 역할극을 시켜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뭘 못 해줘서 그렇게까지 아이가 망가졌는지 답답해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주눅이 들어 있었습니다.
의사가 이제 역할을 바꿔보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아버지가 “내가 마약 중독자입니까?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사실, 이 아버지는 자신이 마약 중독자 아들의 역할을 하기를 꺼린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까 봐 두려워 그 역할을 맡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은 높이 있어서 자신이 보이지 않지만, 아들의 위치로 낮아지면 자신의 모습이 보이게 될까봐 그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성경에서는 아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도 몰랐고 그래서 아버지도 몰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철부지가 되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하느님보다 높은 위치에 있으니 하느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 어린이처럼 진정으로 순종해 본 적이 없어서 그분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철부지의 마음입니다. 순종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낮아져서 누군가에게 순종하게 될 때 그 사람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을 알고 싶거든 모든 사람에게 순종해 보십시오. 물론 죄가 되지 않는 한계 내에서.. 그러면 그 사람이 보일 것입니다. 교만하게 위에서 명령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고 이웃도 모르게 됩니다. 아는 것이 사랑이기에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알고 싶으면 철부지처럼 순종해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알고 싶거든 그렇게 해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사랑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순종하는 대상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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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25-27 :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25절) 이 말씀은 당신에 관한 신비를 지혜롭다는 이스라엘에게는 감추시고, 아직 철부지인 다른 민족들에게는 드러내신 아버지의 뜻에 대한 찬미이다. 우리도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지만,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도 외면을 당할 것이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란 말은 창조계 전체의 주님으로 하늘은 하늘에 있는 모든 것, 땅은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계시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들을 다 하시고도 아버지께서 그 일들을 하신 것으로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신다. 그럼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의 뜻이 하나임을 보여 주시며, 우리에게 좋은 것을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신다.
주님의 말씀에서 “철부지들”은 나이가 어려 철부지가 아니라, 죄와 사악함에서 거리가 먼 철부지라는 것이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이유가 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인지는 설명하지 않으신다. 다만 감사를 드리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져 물어서는 안 된다. 단지 그분의 뜻을 따리 실행하고 그분께 충성을 다하는 일만이 우리의 할 일이라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27절)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 다가간 사람들과 전에는 반항했으나 이제는 하느님을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을 맡기셨다는 뜻이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27절)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아는 점에 있어서 같은 본질이다.
같은 본질이 아니면 아들은 아버지를 알 수 없다. 그러기에 아들을 아는 사람은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알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넘겨주셨고, 이제 이 모든 것이 아들을 통해서만 드러나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신비를 통하여 아버지에게 있는 모든 것이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주님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잘 아시며, 아버지를 잘 아는 유일한 분인 만큼 아버지와 같은 본질이라는 것이 분명해 진다. 아버지의 모상이신 아들을 보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삼위일체 안에서만이 완전히 이해를 할 수 있다.
아버지만이 당신 본질의 열매인 당신의 아들을 아신다. 오직 아들만이 자신을 낳으신 아버지를 알아본다. 그리고 거룩하신 성령만이 하느님의 깊은 비밀들, 곧 아버지와 아들의 생각을 아신다.
하느님을 아는 우리는 그러기에 그분의 뜻을 알고 실천하여 참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 삶으로 하느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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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사제로서 다른 사제의 강론을 듣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강론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아야 하지만, 정작 가슴으로 듣지 못하기도 합니다. 제단에 올라 강론하려면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교리의 내용도 오랫동안 배워 왔고, 신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지금 무엇이 필요하고 중요한지를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기에, 좋은 말씀과 강론인데도 마음을 열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유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내가 해 봐서 다 알아!’, ‘왜 그 정도밖에 못해!’라며,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거나 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자신만이 옳다는 오만과 편견 속에 갇히게 됩니다.
인간은 하느님에 대하여 스스로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이해와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시며, 우리가 바라거나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어쩌면 그런 오만과 편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하느님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함과, 자신이 바라는 방식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방식이라는 편견으로 다른 이들의 처지와 생각을 헤아리지 않은 채 자신의 방식과 뜻만을 강요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그러하였고 빌라도가 그러하였으며 가끔씩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도 그러하였습니다.
편견과 선입관 없이 무엇인가를 판단하기란 어렵습니다. 아니 어쩌면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경험과 삶이 판단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알고자 한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철부지들처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먼저 많이 바라보고 들어야 합니다. 듣지도 보지도 않고서 판단하고 결정지으며 선택하는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많이 들으십시오.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바라보십시오. 그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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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26)
여기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자기가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칭하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힘 있고 높은 위치에 있는 기득권층 사람들, 교만한 위선자들을 뜻합니다. ‘철부지들’은 단순하고 순박하고 겸손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소외계층에 속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것’은 인간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라는 말씀은, 교만한 위선자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구원 의지와 계획을 감추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교만과 위선에 빠져서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라는 말씀은, 순박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여서 신앙인이 된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만 당신의 구원 의지와 계획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감사드리는 것은, 교만한 위선자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소외계층 사람들이 구원받게 된 것에 대해서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소외계층에 속해 있고, 가난하고 힘이 없어서 억압받고 차별당하고, 무시당하고, 천대받으면서 살고 있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런 일을 전혀 겪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에는 기득권층도 없고, 소외계층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로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섬기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교만한 위선자들도 회개하고,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에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지 않고, 이쪽 세상에서 권세를 부리면서 살았던 것처럼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면, 그 나라에 아예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라는 말씀은, 소외되는 사람 없이 모두가 구원받게 된 것을 감사드린다는 뜻입니다. 18장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아지려면,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낮은 곳으로 내려가거나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그런데 높은 위치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일은 각자 스스로 회개하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낮은 위치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일은 개인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고, 누군가가 끌어올려 주어야 합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올려 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인간 세상에는 자신의 학식, 학력, 재력, 권력 등을 내세우면서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그 ‘잘난 체’를 버려야 합니다.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학자도, 부자도, 권력가도 필요 없습니다.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로운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논객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1코린 1,20-21)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7-29) ‘잘난 체’를 버리는 일은, 하느님 나라의 문 앞에 간 뒤에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만 하느님 나라의 문 앞에까지 갈 수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이 말씀에서 ‘모든 것’이라는 말은, ‘모든 권한’을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하느님을 아는 능력과 권한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예수님께 넘겨주셨다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아버지를 온전히 아시고, 아버지만이 예수님을 온전히 아신다는 뜻이 됩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완전한 일치를 뜻하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알고 싶다면, 먼저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알다.’ 라는 말은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기를 원한다면 먼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는 말씀과 뜻이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유일한 구원의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참되고 유일하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만이 유일하고 참된 구원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기 혼자 연구하고, 수행하는 등의 방법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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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항해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위치를 아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망망대해에서 지금 내가 있는 곳을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원하는 목적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 원하는 목적지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등산로에서도 산의 지도가 표시된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림은 빨간 점으로 ‘현재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 있는 곳에서 원하는 곳까지의 거리와 시간을 알 수 있습니다. 지하철에서도 그렇습니다. 낯선 곳에서 내리면 방향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역에는 지역을 안내하는 지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빠짐없이 빨간 점으로 ‘현재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도 현재의 위치를 알아서 어렵지 않게 숙소를 찾았던 적이 있습니다. 1시간 30분 정도 가는 거리였습니다. 곳곳에 지도가 있었고, 현재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시가 있었습니다. 비록 숙소가 보이지 않았지만 지도를 보면서 방향을 잡을 수 있었고,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요즘 우리는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모세는 히브리인으로 태어났지만 이집트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히브리인에게는 이집트인으로 여겨졌고, 이집트인에게는 히브리인으로 여겨지는 경계인이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히브리인들과도 어울리지 못했고, 이집트에서도 적응하지 못하였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목적지를 잃어버린 난파선처럼 방황하였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오늘 모세는 하느님이 계신 호렙 산으로 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모세는 드디어 현재의 위치를 알았습니다. 바로 하느님 계신 거룩한 땅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것이다.” 모세는 가야할 목적지를 알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모세는 목적지에서 해야 할 일을 알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하셨고, 모세는 약속의 땅을 향해 길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2021년 7월 14일 인류는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놀라운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물질과 자본을 이용하여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이 하느님 나라일까요?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행복한가요?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과 연대하며 지내고 있나요?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미래를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을까요? 놀라운 과학과 기술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앞에 일상의 삶이 무너졌습니다. 인류의 욕심 때문에 많은 피조물들이 멸종하고 있습니다. 물과 공기는 오염되고 있고, 자연은 파괴되고 있습니다. 인류의 생태계 파괴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자연은 더 큰 재앙으로 인류에게 다가 올 것이라고 합니다. 인류가 추구하는 삶의 좌표를 수정하지 않으면 수많은 암초를 만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인류가 수정해야 할 좌표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교황님은 문헌 ‘복음의 기쁨, 찬미 받으소서, 모든 형제들’을 통해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말합니다. 개발과 발전 그리고 욕망과 소유는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이끌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연대와 협력 그리고 나눔과 헌신이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안내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반도체 산업이 발전해서 겨자씨보다 작은 공간에 전 세계의 모든 책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경제학자, 수학자, 과학자들은 머리로 해결하려고 하니 신앙의 신비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가슴으로, 믿음으로, 사랑으로 바라보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그분이 십자가를 지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모든 분자와 원자들은 우주와 지구의 시작 이후 소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단지 형태가 변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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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철부지 같은 단순한 마음으로!>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철부지들처럼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는 하느님을 뵙게 됩니다. 철부지들처럼 순박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모든 신뢰를 둘 때 우리는 하늘 사랑을 닮아갑니다. 앎을 넘어 마음으로 하느님과 사람들을 받아 들이고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를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 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철부지”란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철부지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네피오스 νήπιος인데 그 의미는 영어로an infant, little child 은유적으로는childish, untaught, unskilled등의 뜻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다”는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철부지는 지혜롭지 못하고 슬기롭지 못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루카 복음서에서는 일흔 두 제자의 파견 후 이 구절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 철부지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은 당시 사회의 지도층도 엘리트들도, 다시 말해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한 율법에 대해 해박하고 지도자의 역할을 했던 율법교사나 바리사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이들은 그저 어부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 당시 천시 받았던 여성들, 세리들, 병자들, 그리고 죄인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세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단순함, 나약함, 소외됨’ 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배우지 못한 이들은 어린이와 같이 나약하지만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때로는 믿음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다시금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주님 외에는 다른 곳에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많이 알고 배웠던 당시 지도자들은 오히려 그들의 지혜가 그들의 걸림돌이 되어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없애려고 했고, 나아가 하느님의 섭리는 지혜로운 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오히려 더 큰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느님의 구원의 섭리입니까!
그렇다면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이것을” 감추셨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아버지와 아들, 즉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한 구절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이것이”란,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파견하신 당신의 외아들이며, 그 외아들을 통해서 아버지 하느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의 지성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시험하려 하였지만, 철부지 같은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던 이들은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고 그 아드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복잡한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말씀을 통해 좀 더 단순한 마음, 순수하고 전적인 믿음을 배우라 하시는 듯합니다. 세속의 논리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살라고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나를 위해 너를 바꾸려 하지 말고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철부지 같이 어리석고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들, 늘 같은 죄를 짓는 고집불통 같은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부지 같은 우리에게 먼저 다가 오셔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가르쳐 주시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시고자 애쓰시는 주님의 자비의 마음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어린 아기의 어설픈 몸짓이 예쁘게만 보이는 부모의 마음처럼 그렇게 우리를 아끼고 사랑해 주시는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오늘도 단순한 마음으로 그분께 의탁하며 다시 힘차게 그분 나라를 향해 기쁜 마음으로 우리 함께 걸어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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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하늘나라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성실하게 노력하기보다는 허영에 들떠 살던 한 양봉업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필리핀을 가게 된 양봉업자는 이 나라가 여름이 길고 겨울이라고 해도 한국의 초여름 같은 날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곳에서 양봉을 하면 한국에서보다 최소한 세 배는 벌겠다고 계산을 한 그는 한국의 벌을 가지고 필리핀으로 다시 들어갔지요. 예상대로 따뜻한 날씨에 꽃이 피는 기간이 길었으므로 그는 갖가지 종류의 꿀을 채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첫 해에 많은 이득을 보게 된 그는 더 많은 돈을 투자해서 대규모로 양봉을 시작했는데 다음 해에는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일 년을 지낸 그의 벌들이 필리핀에는 겨울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겨울이 없는 나라에서 굳이 애써 꿀을 모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지요.
지혜로운 삶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노력할 생각은 하지 않고 허황되게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을 빗대어 나무라는 이야기지요. 말 그대로 잔머리를 굴리는 삶이 잘 될 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던 예수님께서 오늘 이렇게 기도하고 계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11,25)
사목자로 사목을 하다 보면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보다는 순수한 사람들이 하느님께 더 빨리 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특히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이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 갇혀 있으면 구제불능입니다. 그것처럼 변화되기 어려운 일도 없지요.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서 너무 잘 알았고 쉼 없이 연구하고 노력하여 구세주가 언제 어디에서 나실 것이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식으로만 알았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지요.
오히려 자기들을 비판하고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신 하느님을 신성모독죄?‘라는 죄목을 달아서 십자가에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불법으로 백성을 선동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처단을 했지요.
많이 안다는 자체가 오히려 무서운 악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잘 모르고 많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죄를 뉘우치며 용서를 청하고 믿음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그랬고 병자들이 그랬으며 심지어 회당장과 로마의 백인대장까지도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체험을 얻어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나날이 새로워지지 않고 과거의 자기 경험과 지식의 틀 안에 갇혀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지요.
저는 사람이 참 어리석은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시에 깨닫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새삼 숙고할 때가 있지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찾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경험을 쌓고 지식을 습득하며 수십 년을 살아가지요.
그런데 인고의 세월이 흐르고 그래서 이제는 어느 정도 알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만의 성을 쌓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 진리를 알려면 다시 내가 쌓은 그것을 깨부수는 일부터 해야 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쌓아온 자기의 지식과 경험을 깨부수지 않으면 옆에 계신 하느님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참 아이러니하지요?
그렇게 깨달으려고 노력하며 쌓아왔는데 그것을 다시 깨지 않으면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니 말입니다. 그래서 깨우친다는 것은 열심히 노력하고 이만큼 배웠으니 이제 다 되었다라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일일신(日日新)‘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매일 새로워지지 않으면 과거의 지식과 경험은 미래의 걸림돌이 될 뿐이지요. 그것은 예비신자 교리를 해도 그대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아주 열심히 따라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지요. 성경을 읽으라고 했더니 한 5개월 남짓한 기간에 신약성경을 열두 번이나 읽은 사람도 있습니다.
’평생 신앙 생활을 해 왔어도 한 번 읽을까 말까 한 사람이 태반인데 정말 그것이 가능할까?‘ 하며 믿지 못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열심히 따라 하면 가능한 일입니다.
그 사람이 바보여서 시키는 대로 한 것일까요? 아니지요. 그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싶은 열망에 어린아이처럼 그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한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우리 신자들과 함께 한 지난 5년 동안 하느님을 알게 해 주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언제나 심사숙고했습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신앙 생활이란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 쓰기>, <100권 신심서적 읽기>, <기도학교>, <사회복지시설 돕기> 등을 계획하고 실행했는데 하자는 대로 따라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대로 어린이처럼 순수하게 믿고 따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겸손해야 하지요.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내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남의 말에 귀 기울이고 내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과 이웃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함께 계신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고, 하느님을 체험하면 자유로워집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유를 얻게 되지요. 진리이신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바탕은 역시 순수하게 믿고 따르며 그 말씀을 성실하게 실천할 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11,25-26)하고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지요.
저 역시 여러분이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고 복된 말씀을 실천하는 하루 하루를 보내시기를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지식과 주장으로 채워져 있는 사람은 완고한 바리사이들처럼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처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순수하게 믿고 따르며 매일 매일 새롭게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과 이웃을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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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모세는 이집트인을 죽인 일이 탄로 나는 바람에 미디안으로 도망쳐 양치기가 됩니다. 한때 이집트 공주의 양아들로서 온갖 명예와 부귀를 누리던 모세의 심정은 어떠하였습니까? 더는 내려갈 수 없는 밑바닥에 다다른 것이지요.
이런 실패와 좌절은 모세에게 마음을 비우게 하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모세에게 손길을 내미십니다. 오늘 제1독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불타는 떨기 속에 나타나시어 모세에게 새로운 사명을 맡기시지요.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우리도 극심한 실패, 좌절을 이겨 내며 마음을 비울 때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누구나 자신이 가진 지식에 만족하다 보면, 스스로 자신이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만하게 됩니다. 그 결과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되고, 결국 주님마저 자기 스스로 판단하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오만함에 빠지게 되어, 결국 하느님마저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게 될 위험까지 있지요.
그러기에 겸손하고 순수해야만 하느님의 마음과 뜻을 바로 보게 됩니다. 아무런 사욕이나 이기심에 얽매이지 않은 철부지와도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그 뜻을 실천하려 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손길을 내미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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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교만과 겸손의 놀라운 차이점>
오스트리아가 낳은 음악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4살 때 건반지도를 받고 5살 때 이미 소곡(小曲)을 작곡했던 그가 아버지의 슬하에서는 아무 걱정 없이 작곡과 공연으로 온 유럽을 다닐 수 있었지만, 26세에 콘스탄체와 결혼한 후 가정을 꾸리는 데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따랐다.
많은 빚더미에 가정형편이 쪼들리게 되자 아내의 청을 받아들여 가정교습을 하기로 하였다.
모차르트의 명성에 걸맞게 많은 지원자들이 모여들었다. 모차르트는 모여든 문하생들을 두고 음악을 좀 아는 사람들과 음악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두 그룹으로 갈랐다.
그리고는 음악을 좀 안다는 사람들에게는 월 200 쉴링을, 전혀 모른다는 사람들에게는 월 100 쉴링을 교습비로 징수하였다. 200 쉴링을 내야하는 부모들이 항의하며 답변을 요구하자, 모차르트의 해명이 걸작이다. 음악을 좀 아는 사람을 가르치기가 모르는 사람보다 두 배나 어렵다는 것이었다.
오늘 복음은 찬양기도(25-26절)와 계시의 말씀(27절)으로 짜여 있는데, 이는 어록에서 따온 것이며 공관복음서에 수록된 유일한 예수님의 찬양기도이나 그 내용으로 미루어 감사기도라 해도 좋다.
다시말하면 어제복음에서 코라진, 베싸이다, 카파르나움을 두고 불행을 선언(11,20-24)하신 예수께서 오늘은 아버지께 올리는 기도의 형식으로 감사의 환호를 부르신다.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좀 안다고 뻐기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참으로 기쁘고 감사할 일이라는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불행선언을 맞은 대상인물과 오늘 감사환호의 대상인물을 비교해본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더 명확해진다.
코라진, 베싸이다, 카파르나움의 도시가 불행선언을 맞은 이유는 그곳에서 좀 안다고 뻐기고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백성의 지도자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거부하였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이란 바로 그들로부터 철저히 소외되고 죄인으로 취급받던 가난한 이들, 못 배운 이들, 마귀 들린 자들, 온갖 병자들, 세리들, 창녀들이다.
이들은 오히려 사람의 아들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을 찬미하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은 다 같다. 하느님 앞에 인간은 다 같은 조건인데, 왜 어떤 인간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어떤 인간은 하느님을 수용하는 것일까?
그 차이는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교만과 겸손의 차이다. 교만은 거부를 낳고, 겸손은 수용을 낳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고 겸손과 수용의 표상인‘철부지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계시에 대한 통찰은 철저하게 아들 예수께 맡겨져 있으며, 아들이 택한 이들에게 유보되어 있다.
다행한 일은 예수께서 택하신 철부지 어린아이들 같은 사람들이 계시에 대한 수용성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 가진 지식과 지혜는 철학을 통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그러나 그 신은 한낱 절대자일뿐, 이 분이 바로 구약의 야훼 하느님이시며, 신약의 예수님 안에 성령과 함께 살아 계신 하느님이심을 알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만이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려 주신다. 그래서 그분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 즉 스스로 사람이 되는 육화(肉化)의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누구든지 육화(肉化)되신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느님을 알 수 없다. 이제는 우리가 사람이 되신 예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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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으로 깊고 아름답습니다.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기도요, <뒷 장면>은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입니다. 오늘은 두 개의 절로 된 <앞 장면>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 장면>의 예수님의 감사기도는 마치 겟세마니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뜻”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니 기도가 수난의 길을 앞두고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마태 26,42)라는 순명과 의탁의 기도라면, 여기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라는 확신에 찬 감사와 찬미의 기도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단어는 “감추시고”와 “드러내 보이시고”와 “감사”라는 단어입니다. “감추시고”는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시고”는 하느님의 계시를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우주의 주권자로서 당신의 뜻을 자유롭게 ‘드러내 보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처럼, “감추시고”와 “드러내 보이시고” 라는 표현을 통해서, 영적 진리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배려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주권적인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드린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찬양을 나타내는 감격스런 고백’을 뜻한다고 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말합니다. 곧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의 뜻과 섭리에 대한, 완전한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감사의 이유를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그렇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은 결코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드러내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다.’ 해서, 모두가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라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고 일하셨음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일하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감사드리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1코린 5,18)라고 말씀하신 사도 바오로처럼 말입니다.
‘하늘나라의 장막에 머무는 길은 우리 안에 일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라.’(수도규칙 머리말 30)고 제시하신 성 베네딕도의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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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마태 11,25)
주님!
당신께서는 지혜롭다는 자에게서 감추시니, 믿음 안에 저를 가두소서!
철부지에게서 드러내시니, 신비 안에 저를 가두소서!
아버지의 뜻 안에 저를 가두시어, 신뢰하고 의탁하게 하게 하소서.
또한 감사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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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알고파>
마태오 11,25-27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알고파>
당신을 알고파
당신이 됩니다
당신이 되어야만
당신을 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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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동무’라고 말하면 아마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것만 같습니다. 남북으로 분단되고 대립해 있는 상태의 산물로 여겨지는 싸구리 정치이념에 따라, 남한(대한민국)에서는 ‘동무’라는 말이 금칙어 비슷하게 된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길을 가며 이런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어깨동무, 내 동무. 미나리 밭에 앉았다.” 분명히 많이 썼던 ‘동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조건 ‘친구’로 써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자동으로 부여되었습니다.
하지만 ‘동무’라는 말을 잘 보십시오. 얼마나 정겹고 따뜻한 말입니까? 이 말을 쓰지 않다 보니 이제는 더욱 어색하고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단어도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사용하지 않으면 이렇게 낯설게 됩니다.
어쩌면 주님도 그렇지 않을까요? 어떤 분은 나중에 할 일이 없을 정도로 여유가 생기면 그때 주님을 믿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때 과연 주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동안 주님을 부르지 않고, 주님을 만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중의 그 시간은 너무 낯설고 어색해서 믿기 힘들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많은 대화를 나눠야 낯설지 않은 친밀한 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혼자 모든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주님과 함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감사의 기도를 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아니면 아무거도 모르는 철부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말입니다. 아마 모두가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할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스스로 철부지라고 부르면서 자신을 낮추지 않는다면 진실로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을 지향하고 있었나요? 이 세상에서 완벽하다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을 지향하면서 교만 속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런 모습을 지향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앞에서는 가장 못난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모습으로, 가장 낮은 자세를 지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 의지하는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의 모습이 될 수 있으며, 가장 행복한 사람의 모습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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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너무나도 높으신 분>
스탠퍼드 대학교 시브 연구진은 실험을 하나 진행했습니다. 연구진은 한 헬스장에서 이제 막 운동을 시작하려는 회원 38명에게 에너지 음료를 마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음료가 2.89달러이며 근처 편의점에서 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중 절반(19명)에게는 할인가격인 0.89달러에 샀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음료를 마신 후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1시간 후, 연구진은 이 사람들을 다시 찾아 피로도를 물었습니다. 과연 어떤 사람들이 더 피곤을 느꼈을까요? 정답은 반값 음료수를 마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피로감을 더 느꼈을 뿐만 아니라, 운동 강도 또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낮추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도 있듯이, 비싼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을 갖는 것 같습니다. 비싼 음료를 마셔서 피로도 줄여주고, 운동 효과도 더 크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주님을 싸구려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주 높으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위해 스스로 낮추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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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철부지가 되어야>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내로라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최고였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이 들어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야말로 촌놈들, 상것들, 별 볼 일 없는 못난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순함이 있었고 부족하다고 인정하는 겸손이 있었기에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일찍이 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으뜸이요, 모르면서 아는 게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때 묻지 않은 철부지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철부지들의 특징은 의탁입니다. 철이 없고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보호자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함께야)
그들은 그야말로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을 미덥게 여기십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보호가 절실한 이들이고 우리는 하느님의 철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결코 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철부지는 어리광도 부리고, 떼도 씁니다. 그러다 품에 안깁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리키며 친숙해지는 것,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가장 깊이 만나는 것을‘안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고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태11,27)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그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 자세가 “어린이와 같이”(마르10,15) 단순한 마음으로 온전히 의탁하며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온전히 의지하고 맡길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정희성씨의 ‘교감’이라는 시입니다. “전깃줄 위에 새들이 앉아있다. 어린아이가 그를 보고서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 ‘내려와 위험해여’”. 그런 순수함이 사라진 시대이라서 더욱더 어린이의 마음이 간절해지나 봅니다. 순진무구함으로 하느님을 알고 전할 수 있는 은혜가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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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만남의 여정>
-참나의 실현, 참나의 발견-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 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1-2)
화답송 시편처럼 끊임없이 하느님을 찬미할 때 주님을 만납니다. 찬미의 사랑,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 찬미의 맛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저절로 회개와 겸손, 순수와 열정이 뒤따르고 참나의 실현에 참나의 발견입니다.
하늘에 별들을 다는 분들을 보셨습니까?
땅에 뜬 별들을 보았습니까?
주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얼마전 저는 하늘에 별들을 다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신선한 깨달음의 충격이었습니다. 바로 초록빛 잎사귀들 가득한 나뭇잎 사이 주렁주렁 달린 배열매들마다 사다리를 타고 흰봉지를 씌우는 자매들이 흡사 초록빛 하늘에 흰별들을 다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주님의 여전사들' 같은 자매들이 너무 존경스럽고 사랑스럽고 우러러 보여, "자매님들은 하늘에 별들을 달고 계시네요" 덕담도 드렸습니다. 자매들을 통해 주님을 만났습니다. 배나무들마다 흰별들 가득 단 하늘같은 배밭 사이 오솔길을 산책하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수도원 경내 곳곳에 요즘 끊임없이 이어 피어나는 능소화꽃, 백합꽃, 산나리꽃들도 흡사 하늘에 별들처럼 보입니다. 어제는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한 무궁화꽃들이 초록빛 하늘에 뜬 별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땅의 꽃처럼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별같은 꽃같은 삶이요,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을 통해 만나는 주님입니다. 어제 읽은 ‘여름 숲에서’ 란 시도 나눕니다.
-“여름 숲에 들면
누가 먼저 와 있는 듯 싶다
이 산에 터 잡고 살고 있는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
상수리나무 둥치에 영지가 피어났다
산까치 몇 마리가 푸르르 나른다
개암나무 개암 열매가 툭 떨어진다
이 산 구석구석을 경작하는
일구고 다독여 주는
가슴 넓고 손이 푸근한
진짜 주인이
이 산에
눌러 살고 있는 것 같다”-이건형
그대로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주님을 상징하는 시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이런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공동전례 기도를 통해 만나는 주님이요 일상에서 만나는 주님입니다. 비상한 신비가가 아니라 이런 평범한 신비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의 주님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자주 즐겨 되뇌이는 행복기도문 일부입니다. 오늘 말씀 주제도 주님과 은총의 만남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과의 만남이요, 모세와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철부지 순박한 제자들을 통해 주님을 만난 예수님의 감격에 벅찬 감사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원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를 만난 주님의 감사기도입니다. 회개한 마음 순수한 철부지 제자들에게 하늘 나라 신비를 드러내 보여 주시는 아버지께 드리는 예수님의 감사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만남을 통해 또 자신의 신원을, 소명을 새롭게 확인합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 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참으로 주님과의 만남은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의 눈을 열어줘야 만나는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을 만나야 진짜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하여 믿는 이들의 삶은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만날 때 참나의 실현이자 참나의 발견입니다. 즉 소명의 발견입니다. 비로소 내 삶의 존재이유를, 우연적 존재가 아닌 필연적 섭리의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와 겸손, 순수와 열정, 찬미와 감사가 자연스럽게 뒤따르며 참나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탈출기에서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면서 비로소 모세는 참나를 발견합니다. 소명받은 모세가 이제부터 진짜 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고독과 침묵의 광야에서 주님의 천사를 통해 주님을 만나는 모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날 자리는 일상의 평범한 광야입니다. 눈만 열리면 오늘 지금 여기가 불타는 떨기나무가 있는 주님을 만나는 장소가 됩니다.
“모세야, 모세야!”
“예, 여기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하느님은 모세를 부르십니다. 마음의 귀만 열리면 우리 하나하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모세’ 이름 대신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 불러 보며 자신의 성소를 새로이 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참나의, 소명의 발견이요 참 행복입니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주님을 만나는 오늘 지금 여기가 바로 거룩한 땅 성지입니다. 굳이 성지순례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세속에 오염된 나'라는 신을 벗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성지는 바로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이어지는 주님과 모세와의 대화가 감동적입니다.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리고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모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저절로 회개와 겸손이 뒤따릅니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부짓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 나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억누르는 모습도 보았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리라.”-
고통중인 이들의 울부짖음을, 신음을, 탄식을 들으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처럼 우리 또한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병자들을 돌봄은 본질적 봉사’라 하신 교황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문득 도축장에서 무수히 도살당하는 가축들의 비명소리가 생각납니다. 하루 5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되고 있다 합니다. 이 비명 소리들도 주님은 편치 않을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소명을 받는 모세요 비로소 존재감 충만한 삶을 살게 된 모세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모세와 주님과의 대화의 기도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면, 너희는 이 산 위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것이다.”-
저에게는 여기 불암산이 하느님의 산 호렙입니다. 아니 하느님의 산 호렙이 상징하는 바 여러분 삶의 자리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또 만나야 합니다. 모세의 이런 주님과 만남의 결정적 추억이 그를 참으로 겸손하게 했고 지칠줄 모르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였음을 봅니다. 한 두 번의 만남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만나는 주님입니다. 평생 주님과 만남의 광야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모세뿐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회개와 겸손, 순수와 열정, 찬미와 감사의 삶이요 참나의 실현이자 참나의 발견입니다. 내 소명의 발견이자 확인이요 참나의 진짜 행복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참나의 성소를 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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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의 선택 기준을 보여 주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이 대목의 병행구인 루카 복음을 보면, 파견 받았던 일흔두 제자가 돌아와서 선교 여행의 성과를 보고할 때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가득차 이 기도를 드리십니다. 제도적 신분이나 학식, 가문 등 세상 기준과는 거리가 먼 제자들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기뻐하고 감사하시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선하신 뜻"입니다. 그분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 다르지요. 영의 세계와 물질 세계는 추구하는 바가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아버지의 뜻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선택과 부르심, 소명에 대해 자기들의 잣대를 들이대며 이해하려 하지만, 그럴수록 자기 모순에 빠지고 번번이 헛다리를 짚게 되지요. 세상 눈에 부유하고 탁월하고 출중한 이라도 아버지 시각에서는 다른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세상에서 늘 환영받는 것도 아니고요.
제1독서는 모세의 부르심 대목입니다.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 3,10)
모세는 불에 타면서도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러 갔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당시 그는 미디안 땅에 몸 붙여 살면서 장인의 양 떼를 치는 처지였습니다.
우리도 잘 알다시피 모세는 도망자입니다. 공소시효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살인을 저지른 범법자 신세지요. 성장 시기를 이집트 공주의 아들로 지내면서 동족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충분히 수혈받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이집트인도 아닙니다. 혼인은 미디안 여인과 했고요. 그는 어느 편에서도 자기 소속을 주장하기 애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런 모세를 선택하십니다. 당시 거대 강국인 이집트의 파라오와 교섭을 할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로 그를 뽑으신 겁니다. 그런데 대표는 아무나 합니까? 롤러코스터 같이 출렁였던 자기 인생사를 내내 곱씹었을 모세로서는 두렵고 주저되는 게 당연하지요. 보잘것없는 한 인간으로서, 태초부터 계획하신 하느님의 섭리를 알 길이 없으니 그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그저 막연했을 겁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
하느님의 현존과 동반. 이것이 모세가 이스라엘을 대표해 나설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며, 모세의 소명을 뒷받침하는 표징이고 인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파라오 같은 타인이 그를 인정하기 이전에 본인 스스로부터 먼저 믿고 의탁해야 하는 진실입니다.
하느님의 선택 기준은 세상의 지혜나 슬기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신비에 대한 겸손과 하느님 주도권에 대한 겸허한 수용, 그리고 순수한 의탁으로 받아안고 그분과 함께 안개 속으로 들어가 걷다 보면 언젠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차츰 선명해리라고 믿을 뿐입니다. 나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욕망까지 내려놓을 때 각성과 통찰의 순간이 허락될 수도 있습니다. 이조차도 그분 마음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다행히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시려고 마음에 두신 사람들입니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이 의지 덕분에 죄인이고 부족한 우리가 아버지의 현존과 동행 속에서 나날이 새로워지고 성장합니다.
비록 세상 기준에 못 미치더라도 아버지의 선하신 뜻으로 그분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은총에 감사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철부지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아버지를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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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ncv2yQSFcPM&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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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마태 11, 25)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마음 깊은 곳에
들어가 그물을
던지시듯
우리들
마음 속을
헤아려주시는
주님이시다.
하늘 나라는
결코 철부지들을
소외시키지
않는다.
철부지들의
깨끗한 마음
순수한 마음을
아신다.
관계회복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시는
하느님
나라이다.
철부지들은
감추지 않고
꾸미지 않는다.
하늘 나라의
신비는
이와같은
철부지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독단과
독점으로
닫혀 있지
않기에
하늘 나라는
열려있다.
신앙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노는 기쁨이요
행복이다.
신앙의
걸림돌은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착각하는
우리의 자아이다.
하느님의 뜻은
철부지들까지
온전히
받아들이시는
신비이다.
평가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규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정한 신비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오신
신비이다.
작아짐의 신비
가난함의 신비
낮아짐의 신비
사랑의 신비이다.
철부지들의
자유와 행복은
거만하거나
교만하지 않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우리의 오늘을
기쁨과 신비로
이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다.
자식이
아버지를
따르듯
순순한
마음으로
오늘을
맞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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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마태 11, 26)
철부지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오히려
철부지를 통해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 됩니다.
철부지들도
귀하고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철부지에게서도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집니다.
철부지들과 언제나
함께 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 속에
살고 있음을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철부지가 우리의
마음을 닦아줍니다.
철부지의
어리석음으로
우리의
어리석음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서로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볼 수 있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작고도 단순한
삶의 기쁨을
철부지들에게
배우는 행복한 날
되십시오.
즐겁고 신나는
철부지의 새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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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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