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변영희 | 날짜 : 11-10-20 08:07 조회 : 1971 |
| | | 우리는 예정 시간보다 훨씬 늦게까지 연습을 진행했던 것 같다. 회원 대부분은 스물, 스물 하나, 둘 정도의 대학 재학생으로 남달리 성우나 탤런트 쪽에 끼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날은 천성적으로 고운 목소리를 타고난 성우, 당시 라디오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고〇〇을 만나는 중요한 일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연습생 전원이 함께 가서 기어이 그 분을 만나고서야 우리는 남산방송국을 빠져나왔다.
우리에게 연기를 지도해주고 연출뿐만 아니라 드라마 극본을 직접 써 주신 L 선생님을 좌우로 포위하고 희희낙락 회현동을 지나 명동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야! 너희들 조경희 씨 알지? 인사드려라.” 중앙극장에서 내려오는 길목에 다다랐을 때 극작가이신 L 선생님이 명령처럼 말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르는 채 곤색 투피스를 단정하게 입은 한 여인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L 선생님과 조경희 선생님은 반갑게 악수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때 조경희 선생님은 일행을 두서넛 거느리고 아마도 한일관에 점심식사를 하러 가시는 길인 듯했다. 당시만 해도 명동 한일관이라면 서울 시내 어디에서고 찾아오기 가장 쉬운 장소로서 그럭저럭 갈만 한 곳에 속했다.
나는 조경희 선생님이 왠지 구면처럼 익숙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것은 조경희 선생님의 수필집 <가깝고도 먼 세계><음치의 자장가> 등을 이미 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남자처럼 호탕한 기질이 엿보인 이유인지도 모른다. 난데없이 여류명사를 만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싶은 것이 우리 일행은 더 들뜨고 유쾌해져서 명동을 돌아 을지로 5가 근처의 냉면집으로 갔던 것 같다.
그리고 10여년이 훌쩍 흘러갔다. 나는 신록의 계절인 5월 초에 세 번째 아이를 낳고 산욕기의 끈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사는 동네 뒷산에는 아카시 꽃이 구름처럼 활짝 피어났다. 아카시 꽃의 매혹적인 향기가 산모의 외출을 부추긴 건 아니었을까? 몸조리 기간이었음에도 나는 큰 오라버니가 건네주는 전국주부백일장 접수증을 받아들고 잠시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시골에서 일부러 상경하였다는 큰 오라버니는 어려서부터 내 작문 솜씨를 인정해주었으며 아버지 다음으로 가장 유력한 후원자인 셈이었다. 그러나 ‘어지간해야 하루 벗을 한다’ 는 속담처럼 산모인 내 몸의 상태는 외출이 불가능했다. 오뉴월인데도 으슬으슬 한기가 나고 바튼 기침에 재채기가 심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에 나서기는 부적합했다. “나가보지 그래? 아기는 내가 월차내고 볼 테니까 걱정 말고” 남편은 산모 몸은 생각지도 않고 마치 이런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 등을 떠밀었다.
3시간여의 글 쓰는 시간이 너무나 지루했고 5월 햇살에도 나는 으스스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주어진 제목으로 되는대로 써가지고 제일 먼저 원고를 제출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가? 각 방송국 사람들이 경복궁을 배경으로 수상자 사진을 찍어갔고 내 얼굴이 조경희 선생님과 함께 TV 에 뜨는 일이 벌어졌다. 선물보따리와 상금을 품에 안고 집동네로 들어오니 골목 안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가 일제히 나를 향하여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동네 복덕방이랄 수 있는 구멍가게는 잔치집이나 다름없었다. 너나할 것 없이 우리 동네 경사 났다고 한참동안이나 난리 법석을 치렀다.
이튿날 아침 나는 KBS 로 갔다. 다른 사람들은 안 보이는데 조경희 선생님 혼자서 방송국 후문 입구에 서 계시다가 내가 다가서자 반색을 하시면서 내 손을 굳게 잡아주셨다. “당신 소설 써야 되겠어. 이제부터 소설 쓰라고” 내가 써낸 글을 보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눈 것 같았지만 나에게는 단지 이 한 마디만 쟁쟁하게 뇌리에 살아있다. 선생님의 사람 보는 안목이랄까, 혜안이랄까. 간단명료한 그 말 한 마디는 내 삶속에 언제나 메아리쳐 왔다. 그런 이유는 아니지만 나는 D 문화센타에서 숙제를 내주면 다른 사람들은 시나 수필을 써내는데 나는 유독 소설을 고집했다. 오 헨리, 안똔 체홉, 섬머셋 모옴, 뚜르게네브, 스탕달, 모파상 등의 해외 단편집을 새로 섭렵한 것도 조경희 선생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아이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주부촌뜨기가 생애 최초로 전국주부백일장에 나간 일, 그리고 당당한 수상과 동시에 TV에 출연한 것, 더하여 훌륭한 대선배이신 조경희 선생님을 가까이서 뵐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는 사실은 지금껏 삼삼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너는 소설을 써라” 고 하신 그 말 한 마디는 작품 창작에의 의욕을 부추기고 기름을 붓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큰 수술 후 몸과 마음이 공허하던 시절, 철쭉꽃 만개에서 시청 앞 은행나무가 노랗게 단풍들 때까지 거의 매일이다시피 무교동 사무실에 나간 일, [한국수필] 100호 기념호를 발간하고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하기까지 조경희 선생님 곁에서 열심히 봉사할 수 있었음을 감사드린다. 삼가 큰 어른이신 조경희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
| 장명옥 | 11-10-21 01:51 | | 참 행복하신 추억을 갖고 계시군요. 먼 곳에서 뒤늦게 축하드리면서 그 행복 나눠주심에 감사합니다. 어디에서 누구와 만나나 하는 것이 우연인가요 아니면 필연인가요? 혹시 소설집 있으시면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강건하시고, 건필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 |
| | 변영희 | 11-10-21 14:07 | | 가을이 깊어갑니다. 하루가 다르게 물드는 예쁜 단풍잎! 좌정 못 하고 서성이다가 신묘년이 저물어가고 있네요. 방금 전 미국에서 전화가. 미국에 사는 게 가끔 외롭다고 하는 학교 때 친구. 왜 그럴까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 |
| | 윤행원 | 11-10-22 11:48 | | 변영희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조경희 선생님과의 만남을 잘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조경희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 생각납니다. 2003년12월쯤입니다. 한국수필에 등단됐다는 통지를 받고 시청 뒤 사무실로 갔었습니다. 내가 사무실을 나올 때, 좁은 사무실 출입문 옆에서 돋보기로 책을 읽고 계셨는데 간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두 번이나 인사를 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뒤따라오신 이숙 선생님에게 지하 다실에서 그런 말을 하고 성질을 부렸습니다. 인사도 안 받는 이런 분위기는 싫다고 하면서 등단을 취소하겠다고 까탈을 부렸습니다. 당황한 이숙 선생님이 잠간 있으라 하고는 밖으로 나가시드니 brace 스킨료션을 사가지고 오셔서 알릴 테니 참으라고 해서 내가 더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하하하...
한참이 지난 후, 시청 앞 프라자 호텔 뷔페에서 네 사람이 식사를 하고 사무실로 올 때 조 이사장(理事長)님의 불편한 걸음걸이를 제가 부축하고 오는데, 갑자기 “그 때 성질이 났었다며...책 읽느라고 몰라서 그랬어...” | |
| | 변영희 | 11-10-23 12:21 | | 가을이란 계절 때문인가요? 아니면 본래가 센티멘탈 과잉인가요? '내 생애에 다시 한 번' 가볼 수가 있을까. 그립고 가슴 흐뭇한 이들과 다시 만날 수가 있을까' 라는 생각들이 매우 강렬하게 일상을 지배하고 있답니다. 혹 이 지구와 작별할 날이 임박한 것인지도 모르지만.ㅎㅎㅎ 선생님 그래서 더욱 힘겨워진 나날이군요.숙제를 단 시일에 해치우려니까 고단합니다. 언제나 활기찬 모습, 모범적인 인생을 사시는 선생님의 래방을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 |
| | 임병문 | 11-10-28 08:09 | | 이 가을,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시절따라 왔다가 시절처럼 잊혀간 그 많은 관계들, 그때는 갔어도 생각만은 이처럼 남아 이 가을, 우리의 가슴을 그리움으로 여울지게 하는 군요. 그 추억이 아련해옵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
| | 변영희 | 11-10-31 09:44 | | 선생님! 시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이상스럽게도 마음이 스산하기도 설레이기도 해 아침부터 외출을 서두르다 여기 왔습니다. 어쩐지 이리로 일단 들어와야 할 것만 같아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계절 건강하시기 빕니다. | |
| | 이진화 | 11-10-31 23:24 | | 변영희 선생님,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조경희 선생님이 다시금 그리워집니다. 벌써 11월입니다. 따뜻하고 평안한 나날 보내세요.^^ | |
| | 변영희 | 11-11-02 13:10 | | 지나놓고 보면 더 그립고 아쉬운 일들. 이 가을이 그런 것 같습니다. 찾아주셔서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 |
| | 임재문 | 11-11-15 19:56 | | 변영희 선생님 글을 읽으니 조경희 회장님 생각이 더 납니다. 조경희 회장님과 저는 더욱 더 각별한 사연이 많습니다. 수양 아들처럼 어려서 길렀다는 한화 김승연 회장님이 구속되었을때 제가 근무하는 직장에도 오셨으니까요. 면회하기 위해서지요. 또 그밖에 유명 인사들이 구속되어 조경희 회장님과 함께 마음 아파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다 흘러간 그 옛날이 되어서 역사속에 묻혀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
| | 변영희 | 11-11-17 08:43 | | 임재문 선생님 오랫만입니다. 여행가셨나? 아니면 건강인가? 그렇게 혼자 생각했습니다. 여전한 모습 반갑습니다. 늘 행복하세요. | |
| | 일만성철용 | 11-11-23 07:48 | | 저의 조경희 회장님의 기억은 나이 드신 어른과 달리 젊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우리 작가회 회의에 참가하시고도 별실에서 누워 계신 모습입니다. 변 작가의 타고 나신 문재를, 노력으로 글을 쓰는 ilman은 부러워 부러워 하고 있답니다. | |
| | 변영희 | 11-11-25 22:02 | | 댓글 올려 주시고 지금은 또 어느 곳을 답사, 여행, 개척하고 계시는지요? 대단한 에너지를 타고 나셨나 봅니다. 근사한 삶, 멋진 인생! 혹여 후생이 주어진다면 공부와 여행으로 살아야지 저는 일만 선생님을 보며 결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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