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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장 12~19절/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
1. 예수님이 변하셨다.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언제나 그랬지만 제자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당혹스럽게 한 것은 예수님의 태도가 변했다고 느낀 일일 것입니다.A. 숨으시던 예수님(마 12:19; 16:20; 막 5:43; 9:9; 요 6:15; 7:4,6)무엇이 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늘 자신의 매시야 되심에 대해서 조심해오셨습니다. 드러나지 않게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투거나 큰 소리로 자신을 알리지 않으셨습니다(마 12:19). 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매시야)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도록 명령하셨습니다(마 16:20).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주시고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막 5:43).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화된 영광을 목격한 세 제자에게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까지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막 9:9).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고 표적을 경험한 군중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지만 그때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여 혼자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요 6:15).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제자들은 답답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가지 않느냐? 올라가서 자신을 알려야 하지 않느냐고 예수님께 말씀했을 때, 예수님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일축하셨습니다(요 7:4,6). 제자들이나 주변의 사람들이 볼 때 이것은 얼마나 답답한 태도였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변하셨습니다.B. 자신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요 12:7~8, 눅 19:39~40).마리아가 저녁 식탁에서 예수님의 발에 비싼 향유를 부을 때에도 예수님은 마치 당연히 받을 것을 받으시는 것처럼 다 받으셨습니다(요 12:7~8).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이여”(13절) 라고 환호하는 소리를 다 받아들이십니다. 분개한 한 바리새인이 이들의 환호를 멈추게 하라고 하자,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하고 대답하셨습니다(눅 19:39~40). 전에 보여주신 예수님의 태도와는 너무나 다른 태도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 뿐 아니라 지금 돌아가고 있는 모든 정황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 속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음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백성들이 명백하게 메시야라고 선언하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찬송하는 것을 사양하지 않고 다 받으십니다.C. 말이 아니라 나귀, 나귀의 어린 새끼그런데 오늘 본문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께서 말이 아니라 나귀 그것도 어린 나귀,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는 것은 정말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나귀는 어른이 나귀를 탈 때 자기 무릎을 굽히지 않으면 발이 땅에 끌릴 만큼 나귀가 작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귀 중에도 어린 나귀를 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이 가르쳐주는 대로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이미 두 제자를 보내어 준비하게 하신 일이었습니다(마 21:1~3; 막 11:1~6; 눅 19:29~35).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수많은 예루살렘 순례자들이 환영했습니다.2. 백성들의 환영백성들의 환영은 예수님의 탄생 때를 제외하고는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받으신 유일한 환영이고 공적인 메시야 선포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기사는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A. 종려나무 가지(13)첫째는 종려나무 가지인데, 백성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면서 손에 들고 흔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기쁨의 상징이고 명절 특히 초막절에 그들의 기쁨을 표현하는 도구였습니다(레23:40). 그러나 종려나무 가지가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아주 민족주의적 상징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멸망당한 후에, 페르시아 그리고 알렉산더의 헬라제국에 의해서 정복을 당한 민족으로 존재해오던 이스라엘이 주전 167년 헬라제국의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 의해서 성전 모독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전 안에 제우스 신전을 세우고 제단에 돼지를 바치는 사건,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소위 마카비 일가의 저항운동으로 이어지게 되고, 그 지도자인 맛다디아스의 아들인 영웅 유다 마카비우스가 주전 164년에는 성전을 시리아인들의 손에서 되찾아 성전 제사를 회복하고 성전을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 일을 기념해서 생긴 유대인의 절기가 수전절 즉 하누카입니다. 유다 마카비우스가 죽고 그의 형제인 시몬 마카비우스는 주전 141년에 예루살렘에서 시리아 군대를 몰아내고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게 됩니다. 이때 사람들이 이 영웅과 그의 승리를 기념하려고 퍼레이드를 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는데, 이때로부터 종려나무 가지는 군사적 승리의 상징이 되었고 이스라엘 민족의 특별한 민족적 상징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것은 바로 그때의 감격을 회복하고자 하는 예수님을 향한 백성들의 기대를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시몬 마카비우스처럼 로마를 몰아내고 우리를 구원해달라는 기대입니다.B. 호산나 찬송하리로다(13)그들의 이런 기대는 그들의 외침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3절) 라고 말했습니다.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이들의 찬송은 유대인들에게 잘 알려진 시편에서 나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절기마다 특별히 초막절 매일 아침마다 부르곤 하던 일련의 시편을 할렐(hallel)이라고 합니다. 시편 113~118편이 그것인데, 지금 이들은 시편 118:25~26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기에 덧붙여 예수님을 향해서 ‘이스라엘의 왕이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C. 나사로 사건 증인들의 증거(17)어떻게 이토록 많은 인파가 모여들어 예수님을 환영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정확하게 얼마나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서 예수님을 찬송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주후 64~65년 사이의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들의 수가 2백 7십만 명이라는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을 참조하면 이때에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의 수는 적어도 2백만 명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성경은 ‘큰 무리’가 모여 예수님을 맞았다고 기록합니다(1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인근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신 사건이었습니다. 그 현장에서 일어난 일을 목격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증거를 했다고 17절은 전합니다. 그 결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은 메시아다’라고 확신할 수 있었을 터이고 예수님을 환영하였을 것입니다(18). 결국 나사로 사건 역시 예수님의 치밀한 시간(때) 계산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임을 보여줍니다.3. 눈물 어린 입성(눅 19:41)겉으로 보면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의 화려한 입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듯이 예수님은 지금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유월절이 이르기 전에 해마다 수많은 어린 양들이 죽기 위해서 떼를 지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예수님께서 이 승리의 입성을 하실 때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수많은 양떼들이 예수님과 함께 했을 것이라고 썼는데 그것은 매우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예수님이야말로 유월절 어린 양이시기에 이 두 그림이 오버랩 되는 것은 매우 회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마리아만이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을 감지하였고 제자들에게 조차 그 일은 숨겨져 있었습니다. 결국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의 기록은 예수님께서 성 가까이에서 우셨다고 전합니다.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눅19:41~44).” 제자들에게 이 일은 너무나 당황스러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찬양하는 군중들의 외침은 너무나도 무지한,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기를 구하는 외침인 것을 예수님은 읽고 계십니다. 마리아를 제외하면 아무도 예수님이 하실 일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 예루살렘 입성은 눈물어린 입성인 것입니다.4. 예언을 성취하시는 그리스도다시 그리스도께 우리의 시선을 모아봅시다. 그분은 어린 나귀를 타고 계십니다. 발이 땅에 끌리지 않기 위해서 발을 살짝 들고 있어야 할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말이 아닌 나귀를 타고 오십니까? 성경은 이것이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라고 썼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언의 성취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사 성령을 보내어주신 후에야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을 하신 사건은 전적으로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군중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사건입니다.A. 야곱의 예언(창 49:10~11)본문 15절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말하고 있지만, 그전에 우리가 간단하게라도 살펴야 할 또 다른 구약 예언이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노년에 자식들 특별히 유다를 향해서 했던 예언입니다. “(10)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창 49:10~11).”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은 이 지파가 예수님 오실 때까지 보존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사실 다른 모든 지파들이 다 섞여버리고 흩어졌지만, 오늘날 유대인이라고 불리는 이 유다 지파는 예수님 오시는 날까지 그 혈통을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너의 왕이 새끼를 타고 오신다.’는 표현은 바로 메시야의 오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분이 오시면 백성이 그분께 복종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메시아 예언은 실제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성취되기 시작합니다.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데, 아름다운 포도나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킵니다(요 15:1).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라는 말씀도 그리스도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실 것을 암시합니다. 이미 너무나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입술을 통해서 예언하신대로 그 일을 신실하게 이루어가십니다.B. 스가랴의 예언(슥 9:9)또 하나 오늘 본문이 직접 인용하고 있는 예언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스가랴 선지자는 왕이 어떻게 임하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나귀를 타고 오실 것입니다. 실제로 본문 15절이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는데, “크게 기뻐할지어다”가 의도적으로 “두려워 말라”로 바뀌어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그 예언에 대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이스라엘이 왕을 거부하는 동안에는 기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유월절 어린양이 죽어서 그들의 죄가 다 벗겨져야만 그들은 비로소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주목할 만하게는 “겸손하여서”란 단어도 생략되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중심의도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이 말은 생략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성경의 성취를 위함이며,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5. 나귀를 타신 왕과 백마 타고 오실 왕(계 19:11)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것은 근본적으로 모세의 율법 조항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신 17:1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말을 두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말은 군사력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도 전쟁과 정복을 상징하는 말을 탈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 말씀대로 가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왕들은 말을 탔습니다. 그러나 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나귀를 타신 것은 율법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었고 자기 백성을 위하여 율법의 의를 이루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비록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영광의 왕이셨지만, 이 모습이 부인할 수 없게 보여주는 것은 그 영광의 왕의 은혜로우신 겸손하심입니다. 영광의 왕께서 힘찬 말들이 끄는 황금 병거가 아닌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 나귀의 장식물은 제자들이 그 위에 깔아준 겉옷이 전부였습니다. 그 나귀는 왕의 소유가 아니라 빌린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 놀랄만한 사실은 예루살렘을 지키는 로마의 수비대가 이 광경을 보고 반란이나 소요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예수님을 환영한 인파가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귀를 타신 왕이 당신의 왕국이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님을 드러내고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듯이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기에, 군사력과 정치력으로 당신 자신을 무력시위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분명하게 예수님이 오실 두 번째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계 19:11).” 그때에 예수님은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정복자로서 오십니다. 그리고 공의로 심판하고 싸우기 위하여 오십니다. 전에는 비하와 수치를 입고 오셨지만 장차 권능과 위엄의 옷을 입고 오실 것입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지만, 장차 영광의 보좌에 앉아 다스리실 것입니다(마 25:31). 악한 죄인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장차 절대 주권의 홀을 휘두르실 것입니다. 처음에 나귀를 타고 오셨지만, 나중에는 영광과 영예로 왕관을 쓰고 백마를 타고 오실 것입니다.6.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왕(13,19)예수님을 환영하는 백성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환호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는 것을 피하신 것과 달리 여기서 이 모든 찬송을 당연하게 받으십니다. 그들의 왕으로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들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화려한 왕의 입성을 바라보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착잡했습니다. 그들은 절망적인 어조로 이렇게 말합니다. “볼찌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요 12:19)!”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어도 백성들이 저렇게 예수님을 좇으니 어떻게 하겠느냐는 자조적 한탄입니다. 그들은 ‘온 세상’이 예수님을 좇는다고 과장해서 말하지만, 이것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을 통해서 진리를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와 같이 부지중에 진실을 말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스라엘만의 왕이 아니라, 온 세상의 구주가 되시는 것을 이들이 말한 셈입니다.7. “우리는 나귀를 타신 왕을 섬긴다!”슬픈 사실은 이렇게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환호했던 바로 그들이 며칠이 지나고 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의 기대가 충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의 부추김에 의해서 예수에게 속았다는 환멸을 경험하게 되는 이 군중은 예수님에게서 돌아서게 됩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나귀를 타신 왕이 아니었다는 것이 명백해진 것입니다. 그들은 힘찬 말들이 이끄는 황금 병거를 몰고 오는 왕을 원했습니다. 한 순간, 나사로를 살렸다는 그 뉴스를 듣고 흥분해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호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한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불렀던 그 찬송과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불렀던 그 선언을 통하여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분이 누구신지를 증거한 셈입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들의 죄는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된 것입니다. 아무도 그가 누구였는지 몰랐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우리는 이스라엘의 왕일 뿐 아니라, 만왕의 왕, 온 세상의 구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은 나귀를 타신 왕입니다. 나귀를 타신 왕은 여러분의 기대에 맞는 분입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왕이라고 부르고 선언하지만, 여전히 자기의 의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오는 것은 아닙니까? 나귀를 타신 왕은 자기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이렇게 명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막 8:34; 눅 9:23).”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나귀를 타신 왕을 섬기지 않는다면, 마지막 날 여러분은 백마를 타고 오시는 왕의 영접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요한복음의 남은 장들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거듭 말씀드렸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주제입니다. 이 사실을 배우지 못한 자는 예수님을 환호했던 예루살렘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그들이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십자가가 무한 영광임을 배웁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승리를 이루어내셨습니다. 우리의 왕은 나귀를 타신 왕이십니다. 그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영광은 이 세상의 영광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 왕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을 좇아가는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헛된 영광을 바라보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수치일 뿐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들을 영접하시려고 예수님은 어느 날 백마를 타신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그날이 우리의 소망임을 기억하십시오.
첫댓글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모든 의로운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잠 8:16).